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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콘스탄틴 황제와 유대-기독교 논쟁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역시 324년 C.E.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다. 첫 기독교 황제인 그는 팔레스틴에 정치적,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새 황제는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역할을 제한하였으며,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약을 받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기독교의 순례자들이 소위 [성지](Terra Sancta)를 방문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틴에 인구 통계학적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신학적 논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이제 그 논쟁은 신학적 논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쟁점이 되었으며, 신학적 해결 보다는 정치적 해결 쪽으로 기울어 졌기 때문이다. 이제 산헤드린과 회당의 활동은 로마 기독교 법률의 통제하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등 이러한 변화는 4-5세기에 이르러 점차 심화되어 갔다.
팔레스틴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통치 방식도 산헤드린을 중심으로 한 유대 자치기구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팔레스틴을 세 구역-제1구역(Palestina Prima)은 가아사랴를 수도로 한 유다-사마리아 및 아두메, 베레아 지역으로, 제2 구역(Palestina Secunda)은 갈릴리와 데가폴리스 및 골란으로, 제3 지역(Palestina Tertia)은 페트라를 수도로 한 네겝 지역-으로 각각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러한 통치 정책은 각 지역의 유대인의 활동을 분리 시킴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며 갈루스(Gallus)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351년C.E. 지포리에서 일어났다. 이 반란은 갈릴리와 룻다에까지 퍼져 나갔으나 예루살렘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 반란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기 보다는 갈루스의 부도적한 통치 행위에 대한 거부 행위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세력 하에서 363년 C.E.봄, 콘스탄틴 황제의 조카인 율리안황제(Julian,361-363년 C.E.)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계획은 당시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공격이었다. 70년 C.E.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교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부터 떨어져 나간 증거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성전이 파괴된 채로 남아 있는 한 더 이상 유대교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이 때에 로마의 황제 율리안은 예루살렘에 유대인을 위한 성전 재건을 명령하였으며, 그 공사는 즉각 착공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천재 지변(지진)에 의해 즉각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율리안 황제는 그로부터 수 주일 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율리안 황제의 성전 재건의 목적은 기독교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것이었으나, 이 정책의 실패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교가 하나님에게로부터 버림받았음을 확증하는 사건이었다.
율리안 황제의 정책과 성전 재건 실패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커서 이사건 이 후 로마의 정책을 놓고 벌이는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경쟁과 논쟁이 산발적으로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사건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합법성(legitimacy) 문제를 결정 지을만한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이 후 데오도시우스 1세, 호노리우스, 아르카디우스, 데오도시우스 2세등으로 이어지는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기독교 교회를 제국내의 유일한 세력으로 확대시켜 나갔으며, 그 이외의 '이단'(heretics)들을 제거해 나갔다. 유대인 및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교리는 이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와 업적.
1.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최초의 기독교의 황제로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고 교회에 많은 공헌을 하여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타뉴브강 남쪽의 나이슨스에서 클로러스(Clonus) 콘스탄티누스 1세인 아버지와 성 헬레나 (S. T. Helena)인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틴 쿠르스는 헬레나와 결혼하여 콘스탄틴 1세를 낳은 후 헬레나와 이혼하고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주후 305년까지 데오클레시안 황제의 통치하에 기독교가 국가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로마는 기독교를 탄압하는데 전 병력을 투입하였다. AD 305년 데오 클레시안 황제가 권좌에 물러나게 될 때에 그 후계자 4인이 물망에 올라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 중에 경쟁자가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승리를 주었음을 확신하고 그 후에 그리스도인으로 공공연하게 활동했다. 유명한 역사가 유세비어스는 그가 황제에게 직접들은 말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 정오 조금 지나서 태양 위에 빛의 십자가와 그 위에 쓰여진 이것으로 이기리라는 글자를 보았는데 이것은 지난밤에 자신이 본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정오에 본 것은 자신 혼자 뿐 아니라 전 병사가 다 보게 되어 그 사기로 이 싸움을 승리하였다. ”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국교를 기독교로 선포하고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동방 교회가 황제의 관할 하에 있음과 서방 교회 감독의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의도에서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옮기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10번째 성자로 추앙을 받았고 그의 어머니와 함께 AD 312년 5월 21일에 성자제를 드렸다.
2. 콘스탄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S.T Helena 255-330)
그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하여 AD 274년에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다. 그러나 코스탄틴 1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헬레나를 버리고 멕시미안의 이붓 딸인 데오도라와 AD 293년에 재혼하였다.
그 후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어머니를 황태후로 봉직시켰다. 헬레나는 열성적인 신앙이어서 로마인 전도에 힘썼고 국고를 풀어 빈민을 구제하고 이재민을 전적으로 도왔다. 그러던 중 AD 326년에 콘스탄틴 1세의 둘째 부인인 파우스타의 음모로 장남 크리스포가 죽게 되자 슬픔에 잠겨 80세의 고령으로 성지순레를 떠난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 승천한 갈바리산,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성전을 건축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갇힌 자를 해방하고 순례자들을 도와주며 예수의 여종으로 겸손히 기도생활에 힘쓰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려고 힘썼다. 그리고 팔레스틴에서 죽었고 그의 사신(死身)은 콘스탄티노플에 안치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골고다에서 예배당을 지을 때에 세개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분별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병든 세 사람을 각 십자가 앞에 지나게 하였는데 한 십자가에 앞에서 병이 고쳐지게 되었다.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정하고 기념하였다. 황제는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를 귀부인이란 칭호를 부치고 그녀가 난 곳을 헬레나성이라고 개명했다.
3. 콘스탄틴 황제의 정책 변화
그리스도 교회가 법적으로 공인된 것이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국민들에게 종은 결과를 가지게 했다. 기독교의 정신을 콘스탄틴 황제와 그리고 그의 직속 신하들이 실시했던 법령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교직자들을 외부적 감독이라 칭했고 궁중에서 설교하도록 하였다. 특히 유명한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같은 인물을 궁중으로 들여세우고 이단자들을 단절하고 교회 일치에 박차를 가했다.
축첩 제도를 엄벌했고 이혼 제도를 제한했고 죄인의 이마에 화인 치는 것을 금했다. 이 중에 관목할 만한 것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십자가형 폐지.
십자가형의 처형 제도는 로마인들이 제의된 처형 제도이다. 이 처형은 가장 가혹한 제도로서 페르시아인들에게 유래되었다고 한다. 로마인들을 이 제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이 제도를 야만인들의 제도라 하여 인정하기 싫어하는 제도이다.
십자가형은 선고가 떨어지면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반사(半死)상태에 이르도록 피를 보기까지 매질을 가한다. 매질하는 이유는 형틀에서 빨리 죽게 하기 위함이며 또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매질이 끝나면 죄수 자신이 형틀을 형장까지 짊어지고 가야 한다. 자신이 지지 않으려면 역시 매질을 가한다. 이유는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론에서이다. 형장에 도착하면 대다수의 죄수들은 못질을 하지 않고 줄로 묶는다. 못질하는 죄수는 드물다. 못을 밖는 죄수는 발바닥 아래 나무토막을 밖아 고인다. 왜냐하면 못자국이 찢어져 몸이 떨어져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형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십자가 형틀은 인류를 구속하신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콘스탄틴 황제는 군대의 기치를 십자가로 삼았다. 그리고 그 십자가형을 폐지했다. 그 수치스런 십자가가 콘스타틴 황제로 인하여 로마에 영광의 십자가로 나타나게 되었으니 당연히 금지되어야 했다.
2) 유아 살해 금지
로마에 있어서 가부장 제도가 있었다.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아이는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아버지에게 주어졌기에 아이를 죽여도 법률에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아를 질식시켜 죽이거나 밖에 버리기도 했다. 이 버려진 아이들을 주어다가 기러 노예로 파는 직업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정신을 인식시켜 이 살해 제도를 폐지시켰다.
3) 노예제도 수정.
기독교가 사회를 지배하기 전에는 로마 인구 절반이 노예였다. 이들은 법적으로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주인의 재산에 불과 함으로 주인의 마음대로 팔리고 죽어 가고 했다.
초기 로마 시대에 특이한 사건이 있었다. 노예가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때 법에 의하여 그에 속한 노예 300명을 남녀 노소, 유죄, 무죄를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노예들은 이마에 화인을 찍었다. 그러기에 어디를 가든지 숨을 수가 없었다.
노예의 공급원은 탈취 노예, 가내 출산 노예, 포로 노예등으로 구별하였고 노예 경매장에서 공공연하게 경매되었다. 일반적으로 동방 노예(애급, 헬라, 수리아, 유대)가 서방 노예(게르만, 갈리아, 사르대니아, 브르타니아)보다 값이 더 비싸게 팔렸다. 초기 노예의 수는 1 : 5이며 로마의 시민에게는 1대 3 꼴이었다. 가구당 노예 수는 가이샤家에 20,000 여명 있었고 중, 하 계층家에는 8명에 이르기까지 각양 각색이었다.
이 노예제도도 기독교 정신이 확산되면서 줄어들게 되었다. 공화 정치 시대에는 엄청난 노예해방이 있었다. 뒤이어 자유인과 노예들의 결혼으로 1세기 말엽에는 노예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1세기 말엽에는 노예와 자유인의 혼혈을 금하기 위하여 어떤 노예 소유자라도 죽을 때에 100명 이상 해방하지 못하게 법률화했다.
4) 검술시합 폐지
로마의 검술은 이름이 높다. 원형 경기장이 그 시합 장소로 일반인들에게 자유로이 공개되었다. 관중도 많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의 쾌락을 돋우기 위하여 사람을 죽게 했다. 시합에서 패한 사람의 심장이나 신장, 간장은 신에게 바치기도 했다. 콘스탄틴 황제가 이 검술 시합폐지 법률을 새로운 수도 콘스탄틴노플에서 시행하였다. 그 법률이 선포된 후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합 자체는 AD 404년까지 계속 되었다.
3. 콘스탄틴 황제의 종교적 업적.
1) 밀라노 칙령(교회의 자유와 기독교 공인 선언)
AD 313년에 갈레리우스오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린 칙령이다. 밀라노 칙령의 발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공인(公認)한 사건은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자 A.D. 303~ A.D. 304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혈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勅令)을 발표하였으며, 갈레리우스(Galerius)도 A.D. 311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公認)하였다. 그러나 이들 정책은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각 지역의 총독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A.D.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와 리키니우스(Licinius)가 함께 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우선, 그리스도교든 다른 종교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제의(祭儀)에 참여할 자유를 지닌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 마땅히 종교의 자유를 지닌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교회나 그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하고,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반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리키니우스(Licinius)는 313년 6월 비티니아(Bithynia) 지역의 총독들에게 공식 서한의 형태로 밀라노 칙령의 내용을 전달하여 그리스도교 박해의 중지와 교회 재산의 반환을 명령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밀라노 칙령의 내용은 이 서한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통치 말기에 다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보호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장려에 나서 그것을 제국의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도교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재정과 조세, 법률의 특권을 주었으며, 각 지역의 총독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포교(布敎)를 방해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이동 예배당을 설치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지원 아래 안티오크(Antioch),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등의 지역에서 교회들이 성장하였으며,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이처럼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공인(公認)한 데 그치지 않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보호되고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2) 교회 복원.
이 당시 교회당은 궁전과 같은 형태로 지어졌으며 명칭도 바실리카(Bacilicas)라고 불러졌다. 제롬은 베드로 성당을 말하기를 “ 바실리키는 국가의 재정으로 세워졌다. 지붕은 금으로 기둥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되었다. 한 때는 불에 던지웠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제본이 되었다.”고 말했다. 교회 건물의 형식이 궁중 형식으로 내려오다가 콘스탄티누스 2대에 이르러 비로소 교회의 상징적인 형식의 조각들이 나타나 변하게 되었다.
3) 공적 희생제 금지.
로마인들은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기도와 서원이 수반되는 제사였다. 이 제사를 위하여 제물이 필요했는데 돼지가 흔한 제물이었고 중요한 제사를 드릴 때에는 양이나 소가 추가되었다.
이 모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사로 드려지는 제물은 인간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명의 기본적인 요소인 심장, 간장, 신장이 가끔 제물로 드려지게 되었다. 이 제사가 로마인들의 원래의 전통적인 제도는 아니었다. 이방 종교의 사상에서 유래되었다. 이 사상이 격투기 경기의 원인이 되었다. 이 제사를 콘스탄틴 황제가 금지시켰다.
4) 교회당 지원과 교회 재정지원
또 박해 시에 몰수했던 교회 재산도 모두 반환하여 교회에 돌려주었다. 처음에는 드물게 시행되었으나 점차 확산되어 교회에 대한 재정 후원의 일원으로 되어 자유롭게 되었다. 도시에 있는 신전은 거의 교회로 환원되었으나 외딴 농촌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이들을 향하여 이방 교도들이라 창하게 되었고 이 이방 종교란 말이 이교도란 말로 불려지게 되었다.
5) 성직의 특권 부여
성직자에게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법률 제정 뿐 아니라 법률과 관습의 적용까지 부여하였다. 교회의 쟁투는 성직자의 판결에 그대로 인정하였다.
교회의 대회의 결의는 국가의 법률에 적용시켰고 국가는 교회의 법에 불가침 하게 하였고 사죄와 감형은 성직자에게 부여하여 주었다. 성직자들은 일반인들이 행해야 하는 공공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도 되었고 모든 면세 혜택을 받았다. 행정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게 했으며 성직자에 대한 고발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6) 주일 제정.
주일은 콘스탄틴 황제 이전에는 교인들에 한하여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 황제 통치하에 일주일 가운데 맨 처음 날을 안식일(예배일)로 정하고 로마 전역에 제도화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에게까지 지켜지게 되었다. 특히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 외에 법정 개최를 금했고 군사 훈련도 금했다. 그러나 공무 집행은 시행하였으나 점차 성스러운 날로 인식되어 점차적으로 자연히 지켜지게 되었다.
초대 교인들은 안식일이란 말 대신 주일이라 했다. 로마인들은 일요일을 원래 그들의 섬기는 태양신(바알신)의 날 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일 을 인식했고 성령 강림일 , 교회 탄생일을 기념하여 지켰다. 또 의의 태양신 그리스도의 날이라 칭하기도 했다.(계1:10, 요1 :1-3, 행2:1-2, 행20:7, 고전16:2) 등을 근거하였다.
태양신의 날은 주일로 정했지만 요일은 바벨론 신화와 그리스 신화로 근거한 요일을 그대로 사용했다. 지금도 그 요일을 세계가 사용하고 있다.
당시는 청동설을 믿었다. 지구를 중심해서 천체가 회전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지구에서 가까운 7개의 성운이 24시간마다 교대해가면서 지구를 다스린다고 믿었다. 오늘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은 바로 신격화된 위성들이 빛을 비추는 날를 의미하였다.
7) 새수도 건설.
기독교가 법적으로 로마 국교로 공인되고 나서 황제의 권위를 높이려는 뜻에서 새 수도를 건설하려 했다. 이 천도(遷都) 사건은 국가적인 면에서나 기독교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 왔다.
콘스탄틴 황제는 생각하기를 로마는 유상 숭배로 만연해서 사원과 우상들이 많아 구 종교에 대한 강한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외세의 침입에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초기 로마 시대에 크게는 한 차례 적들로부터 침입을 받았고 적게는 여러 차례 황제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황제는 악습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수도를 삼아 기독교적인 영향에서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새 수도 위치를 물색하는 중 헬라의 도시인 비잔티움을 선정했다. 이 비잔티움은 천년여 동안이나 발전을 거듭해 온 도시이며 유럽과 아시아가 서로 접한 도시로서 지형적으로 볼 때에 전형적으로 형성된 요세지이며 2500년간 동안 외부의 침입을 받은 일이 없는 도시이다. 새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약 40만여명의 고토인을 사역시켜 건설을 완설하고 아름을 콘스탄틴노플이라 개명하고 AD 330년에 낙성하여 천도식을 거행했다.
이 도시가 세워진 후에 황제와 주교외 나란히 이웃에 살았다. 교회는 지극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나 황제의 권력 하에 간섭과 통제를 받기도 했다. 황제의 권력은 막강했다. 시민들은 대체로 순종을 잘하는 기질의 사람들이었다. 유명한 설교가인 요한 크리스소스톰이 교회 독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국가에 예속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우상을 섬기는 사원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물론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그 가운데 가장 마지막 세워진 교회가 산타쏘피아(성스러운 지혜)교회이다. 그런데 화제로 손실되었으나 후에 유스티노 황제 때에 더 웅장하게 복원했다.
8) 니케야 회의 (기독교 기본 교리 확립)
니케이야는 도시의 이름이다. 이 이름의 뜻은 승리라는 뜻을 가진다. 옛날 니케마카스란 사람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친한 이름이다. 지금은 황폐하여 이스니크라고 부르는 토이기 인의 촌락으로 있다. 니케이야 회의는 정통 신앙 교리를 제정한 세계 최초의 종교회의이다. 이 회의에서 기독교와 비슷하지만 기독교가 아니 이단의 싸움이 있었던 사건인데 이 사건은 기독교의 한 분기점을 이루는 신학 사건이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가 왕성하여 학문적으로 문학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그 가운데 이방 철학 사상들이 함유하여 기독교 신앙에 스며들면서 문제의 신학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우리 신앙에 가장 중심 신앙인 삼위일체론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니케이야 회의는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여지게 되고 이 때에 제정한 신앙 신조가 정통으로 전수되어 내려온 지금의 개신교 신앙고백(사도신경)이다.
이 당시 명성 있는 한 신학자 아리우스(Areeus)란 신학자가 있었다. 아리우스는 ㅂ작식한 신학자이며 변론에 능한 사람이며 열성적인 금욕주의적 사람으로 많은 사람이 따랐다.
- 아리우스의 주장 -
[그리스도께서는 자존하신 분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낳았다. 처음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창조되어진 분이다. 아버지는 시작이 없지만 아들은 시작이 있는 분이다.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없는 가운데서 있게 되었다. 그의 본분은 세계를 창조의 중계자로서 그가 진정한 하나님은 아니다. 그가 아들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이며 도덕이며 인간의 영혼을 가지지 아니하였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부인했고 그리스도는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창조물로 인정했다. 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했다.
이 당시 전통 신학자로서 유명한 사람이 알랙산더였다. 알랙산더는 사도들로 부터 계승받은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데 반하여 아리우스는 이에 대항하고 나섰다.
아리우스의 신학이 전통교회의 신학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콘슨탄틴 황제는 교회의 분열을 염려하여 스페인의 코로도바 감독에게 사자 호시우스에게 칙서를 보내어 조정하려 힘썼으나 수습되지 아니했다. 콘스탄틴 황제는 세계 종교화를 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각처에 있는 모든 감독들에게 안내장을 보내어 각 교회 장로 2명과 수행원 3명을 오도록 했고 모든 경비는 황실에서 지출하게 했다. 그 모임의 장소가 바로 니케이야였고 이 니케이야 회의가 역사적인 회의로 모여지게 되었다. 이 당시 모인 회원 318명이었다 서 로마 교회에서는 10여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이유는 멀기도 했지만 헬라어가 통용되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 회의에 로마 교회 감독은 너무 늙은 노인이라서 참석하지 못했다. 톡히 박해 직후이기에 박해 때에 오른 눈을 뽑힌 감독 헬라크레인의 [파티맨]과 두 팔을 단 쇠로 지져서 불구가 된 가이샤랴에 [바울]도 참석했고 그밖에 많은 고행 지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장에 모인 자들 중에 유명한 역사가인 유세비어스를 중심하여 니케이야, 칼케톤, 에베소, 감독들이 아리우스파에 속한다. 알랙산더 학파에는 [알랙산더]를 중심하여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와 그리고 알랙산더의 수행원인 집사 [아다나시우스]등 소수의 정통파가 알랙산더파에 속했다. 이 니케이야 회의에서 유명해진 신학자가 있으니 감독이 사람이 아닌 집사 아다나시우스이다. 아다나시우스는 알랙산더의 수행원이며 집사로 성경 교훈에 능한 사람이며 고문학과 교부의 글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역사가인 유세비어스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가 회의장에 입장한다는 신호와 함께 모두 일어나서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는 주옥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부드러운 행동과 표정으로 미리 준비된 황금 의자 앞에 오자 걸음을 멈추고 감독들에게 인사를 받은 후 앉자 모든 회원도 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바른 편에 가이샤랴의 감독 유세비어스의 짧은 환영사가 있는 후 황제가 개회의 선언을 내리고 통역자가 있어 헬라어로 통역했다.
먼저 아라우스와 유세비어스의 18명의 감독들이 기초한 신조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 초안이 얼마 안되어 부결되었다. 다음으로 가이샤랴 감독 유세이어스와 알랙산더가 초안한 신조가 제출되었다. 아리우스는 동의하지 않았다. 동의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변술이 좋은 아리우스는 계속적인 논리를 펴 끝없는 논쟁이 계속 되었다. 이 때에 이를 지켜보던 아다나시우스가 일어나 아리우스와 토론하게 되었다.
그 토론 중에 유명한 말이 있다. 호모 우시아(Homoo usia=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냐. ?)란 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동질론이다. 이 말에 논쟁은 집중되었다. 호모란 말은 동(同)이란 말이며 우시아는 질(質)이란 말이다.
아다나시우스는 이렇게 논리를 폈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 아니냐. ?
@.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질이 아니면 사도들의 말이 거짓말이냐. ?
@. 사도들의 말이 거짓말이면 성경은 거짓 책이냐.?
아다나시우스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인간과 결합시키려면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며 안 된다. 인간을 화목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질인 로고스는 성육신 하셔야 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셨지만 하나님과 동질 즉 하나님이시다.” 라는 논리로 성경의 뜻을 절절히 제시하면서 그 유명한 변설가인 아리우스의 말문을 막았다. 달변가인 아리우스는 아다나시우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했다.
다른 모든 감독들도 이 진리를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리우스의 변술이 너무 유창하고 논리적이기에 반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아다나시우스의 변론이 터지자 경탄하면서 기뻐했다. 이리하여 아다나시우스의 이론으로 논쟁이 종결되어지고 토론을 거듭한 결과 알렉산더의 신조 초안이 수정이 가해지고 토의가 종결지어지고 의장이 일어나 신앙고백으로 그 귀한 신조가 신앙고백으로 낭독되고 회장으로 시작하여 모든 회원들이 이 신조에 기명했다. 가이샤라에 유세비우스는 하루 여류를 청하여 검토하고 기명했다.
그러나 아리우스와 니코메니아와 유세비어스와 이집트의 감독인 데오나스와 세쿤더스는 기명하지 아니했다. 이들은 이단자로 규명 지어지고 직분이 박탈되고 아리우스와 같이 길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이 것이 이단자에 대하여 최초의 법적인 처벌을 내린 실례이다.
그 후 니케이야 회의는 교회정치와 규칙 20조항을 결정하고 모든 의사를 마치고 7월 29일이 황제의 20년 즉위 기념이었으므로 황제는 회원 전원을 황실로 초청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고별 인사를 하고 폐회했다.
- 니케이야 회의에서 결정한 신조 -
①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것의 조물주이신 하
나님을 믿는다.
②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한 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그 하나님의 아들 이신 그리스
도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의 질(質)로부터 탄생하신 독 생자 하나님으로 빛으로
부터 나온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 그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에 있는 만물이 만들어졌다.
③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강림하시어 육신이 되시고 사람이 되시
고 고난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시고 하늘로 오르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④ 우리는 성령은 믿는다.
⑤ 그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든가 혹은 나시기 전에 계시지 아니하였다던 가 그는 없
는데서 있게 되었다든가 혹은 하나님과 질이 다르다든가 확은 지음 받았다든가 혹은 변
하기 위하여 옮겨갔다고 하는 자를 공동 교회는 저주를 받 을 자로 인정한다.
6. 콘스탄티누스의 죽음
콘스탄틴 황제는 AD 337년에 65세의 나이로 죽게 되었다. 그는 세례를 미루어 오다가 중병에 처해 있을 때에 황제의 옷을 벗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후 흰 옷을 입고 오순절 날에 죽었고 콘스탄틴노플에 장사되었다.
콘스탄틴 황제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세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하여 주었다. 장자의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둘째는 콘스타너스, 셋째는 콘스탄스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형인 콘스탄티누스를 죽이고 두 형제가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 후 10년 되는 해 둘째 콘스탄티누스가 자객에 의하여 암살되고 결국 셋째 아들이 모든 영토를 다스리게 됨으로 다시 통일 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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