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은 만유인력, 미적분법의 발견, 빛의 분해, 운동의 세가지 법칙 발견, 반사망원경의 발명등 다른 과학자가 일생을 걸고 하나도 이루지 못할 업적을 수도 없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뉴턴 대문에 영국의 과학은 100년이나 퇴보해다. 그는 자기와 대립되거나 자신을 비판하는 인물은 모두 왕립학회에서 말살시켰다. 뉴턴의 역학, 수학, 천문학 등 과학의 모든 업적과 학문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터부로 여겨졌다. 뉴턴은 유클리드 이해의 전통에 따라서 <프린키피아>를 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서술해다. 그러나 당시는 라이프니츠가 개발한 변수분리형 방식이 훨씬 편리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왕립학회에서는 뉴턴의 방법의 어렵다는 비판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뉴턴이후 수학을 많이 사용하는 운동학(해석역학)은 모두 대륙으로 발전의 중심이 옮겨졌다.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수학자나 물리학자에 의해 이 분야가 발전되었다. 라그랑주, 오일러, 푸아송 등의 강체 역학이나 푸에리의 열역학 등은 모두 뉴턴 역학의 내용이나 표현의 불완전함을 극복한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뉴턴을 비판하면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던 영국의 학계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뉴턴의 어둡고 냉혹한 성격과 왕립학회 회장이라는 영향력 때문에 영국의 해석역학, 수학은 대륙에 비해서 100년이나 뒤떨어지고 말았다. 뉴턴이 죽은 후에 그의 업적으로 한때 세계 최고였던 운동 역학의 선두 자리를 영국이 다시 차지하는 일은 없었다. 이 죄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