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대
암각화(金丈臺 岩刻畵)
경주
동국대 동편에 나즈막한 야산이 남북으로 놓여있다. 남북길이 약 0.5km,
동서 약 0.3km이며 북쪽 봉우리의 높이가 90m, 남쪽 봉우리가 70m정도의
구릉성 산지이다. 그러나 산의 이름은 정해진 것이 없고 언젠가 이곳에
세워져 형산강(兄山江)의 지류인 서천(西川)과 북천(北川)의 합류지점인
청소(淸沼)주변의 멋들어진 자연경관과 더불어 경주지방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을 금장대(金丈臺·金丈臺)라는 정자의 이름이 산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금장대가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주변의 역사는 아주 오랜 시간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94년 3월에 이곳 남단(南壇)에 병풍처럼 놓여있는 수직의
암벽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밝혀줄 암각화와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등 유물 몇 점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예기청소(藝技淸沼)와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예기청소에
대한 명칭은 몇 갈래의 전설이 공존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제20대 자비왕대에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宴會)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 둘째
조선시대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예기(藝技)인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라는 설, 섯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이후에 와전(訛傳)되어,
매년 한명씩 어린아이(애기)들이 빠져 죽는데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되었다는
설, 넷째 신라시대 귀족의 딸인 예기 또는 애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에 친구들과 같이 금장대에서 소나무에 매어 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아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부터 이 강물에는 물놀이나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나 예기청소라 불렸다는 설 등이다.
그러나 그 어느 이야기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구릉지일대는 도굴로 인하여 파괴된 통일신라시대 석실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어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면 이 지역일대의 역사적 성격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발견된 암각화 서북쪽의 조선시대 민묘(民墓)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초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 곳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금장사지(金丈寺址) 또는
금장대(金丈臺)로 추정되는 건물터로 확인이 되고 있다.
금장대에서의
절터의 존재는 '금장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왔으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다가 1980년 금장대에서 사리공양석상(舍利供養石像)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사리공양석상은
둥근 돌기둥에 사리를 공양하는 장면을 새긴 것으로, 중앙에는 사리용기를
배치하고 좌우에는 각각 다섯분의 보살상이 사리용기를 향해서 합장을
하고 있다. 또한 사리잔을 중심으로 양면에는 부처님 공양법회(供養法會)때
행하는 고대의 무악(舞樂)으로 유명한 가릉빈가(迦陵頻伽)의 춤을 표현하고
있다. 윗면에는 꽃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사리공양석상의 출현은
금장대에 통일신라(8세기경)의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사찰의 법등이
끊어진 이후에 그곳의 초석과 터를 이용하여 정자를 건립한 후 금장대라
이름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1994년
3월 20일에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유적조사팀에 의해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암각화란 제작 당시의 부족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제반 사항들을
해결하고자 신에게 기원하고 주술을 걸기 위해 제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공간인 성역(聖域)에다 새긴 그림이다. 따라서 조각된 그림들은 신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그들의 집단적 의사표시를 표현한 언어이자 문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금장대의 역사를 삼국시대로부터 선사시대로
올려놓는 의미있는 발견이었다. 특히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미루어
볼 때 암각화는 청동기시대 집단의 제정일치 사회를 보여주는 제장(祭場)으로
주목받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당시의 발견은 포항 흥해읍 칠포리
곤륜산의 암각화와 영천 보성리 암각화, 고령 양전동과 안화리 암각화·울산시의
천전리 및 반구대 암각화 등이 서로 상호 관련성을 깊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의 점이지대(漸移地帶)에 위치하고 있는 경주지역에서
그 동안 암각화의 발견이 없음에 매우 당혹해하던 분위기였으므로 더욱
값진 것이었다. 금장대 암각화는 이어서 1995년 2월에 발견된 내남면
상신리의 암각화와 더불어 경북지역의 암각화 제작집단의 이동경로 및
제집단의 상관성을 어느정도 밝혀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암각화는 금장대
남쪽의 수직 암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림이 새겨진 암면은 남향하고
있으며, 모두 6개의 면으로 꺽여져 층단을 이루고 있다. 좌우 1·2·3면에는
집중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나 4·5·6면은 사람얼굴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다수 확인될 뿐이다. 이들 암면(岩面)은 모두 수직면을 이루고
있는데 암각화를 새기기 위하여 다듬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전체의 길이는
약 9m이며, 높이는 약 1.6m 정도이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암각화는 모두
31개로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종류는 90개문양으로 다양한 편이다.
가장 큰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고령 양전리식의 깃털이 조각된 인면암각화(人面岩刻畵)이다.
동국대 김길웅교수는 이를 전투에 참가한 병사(兵士)의 형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장명수는 깃털이 있는 고깔무늬는 주술사(呪術師), 방패문은
병사(兵士), 깃털이 없는 고깔문양은 무사(武士)등으로 세분한 다음,
인면(人面)이라고 하는 것은 청동기시대의 잦은 전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방패문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외에도 금장대에서
확인되는 암각화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중국에서와 같이
종족보존을 위해 아이 갖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조각한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의 발자국, 수렵을 나가기 전에 동물들이 잘잡히기를 기원하면서
조각한 꽃 모양의 동물들 발자국 등이 보인다. 특히 꽃 모양의 조각은
울산 천전리·안동 수곡리 유적 등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는 문양이다.
또한 남성은 인물상속에서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키고, 여성의 경우는 생식기만을 조각하는 것이
당시의 조각기법이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다산(多産)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생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금장대에서는
동물상 옆에 사지를 벌리고 있는 남성상과 여성의 생식기인 여근(女根)과
대곡리 암각화에서 확인되는 탈문양, 산과 동물, 네 사람이 탄 배 모양의
문양도 보인다. 특히 배에 사람이 타고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대곡리와 천천리에서 확인이 되고 있는데, 이들은 동북아시아지역인
앙가라강·레나강유역과 자바이칼지역·아무릅우수리강지역
등에서 발견되는 공통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모습은 청동기시대의 어로활동과
수로를 이용한 교통수단 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혹자는 이를 영일만으로부터 형산강을 통해 배를 이용하여 경주지역으로
침입해 오는 해양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발견자의 보고에
의하면, 제작시기는 대체로 내용 및 형식문제 그리고 제작기법 등으로
미루어 청동기 중기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즉, 물상암각화(物像岩刻畵)에서
기하학문양(幾何學文樣) 암각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제작기법으로는 쪼아파기와 쪼고 갈아파기의 절충형식이 동시에 확인되고
있어 청동기 중기 이후부터 말기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보아
암각화가 청동기시대 지배자들의 집단통치를 위한 상징적 소유물이었다면,
금장대 암각화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금장대의 경우 상징화된 다수의 문양이 새겨진 암각화의 전면에는 펼쳐진
공간이 너무 협소한 관계로 몇 명만이 설 수 있다. 그러나 금장대는
경주평야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다. 이 점은 금장대 암각화가
제작될 당시에 경주지역의 부족집단은 제사장급(祭祀長級)의 특정인
몇 명만이 이 곳으로 와 천신(天神)이 강림하는 제의(祭儀)와 자신들의
신성성(神聖性)을 강조하면서 부족민(部族民)들을 통치하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이 지역에는 교량이 없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부족민들이
의도적으로 뗏목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하천을 건너서 쉽게 접근하지
않은 이상은 접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간다. 아울러
금장대의 전체적 구조가 비록 북쪽의 학수봉(鶴首峯)으로부터 이어지고는
있으나, 석장고개에 와서는 거의 단절되는 듯하여 별봉(別峯)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아래에는 깊고 푸른 물이 흐르고 있어 더욱 신성함이
엿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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