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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유공(柳公) 묘갈명
고(故) 처사 유귀삼(柳貴三) 도경 보(道卿甫)는 나와 척분(戚分)이 있다. 누차 찾아와 일찍이 그 선인의 묘표(墓表)를 지어 달라고 청하고 돌아갔는데 그 후에 그 형 병사공(兵使公)과 서로 연이어 운명하고 말았다. 병사공의 아들 만추(萬樞)가 도경이 지은 가장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며 말하기를, “숙부가 선인의 사업과 행적을 찬록(撰錄)하고 장차 몸소 비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려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갑자기 작고하고 말았습니다.
임종할 적에 그 초고를 불초에게 주면서 가져다 올리게 하였습니다.” 하고, 또 유의(遺意)를 전달하였다. 내가 노쇠함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니, 만추가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말하기를, “숙부의 상기(祥朞)가 다가오는데 만약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영연(靈筵)에 복명(復命)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내가 임종할 적의 부탁을 슬피 여겨 끝내 저버리기 어려웠고, 또 그 가장의 글이 질실(質實)하여 서술할 만하였다. 이에 드디어 대략 아래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공은 휘는 덕삼(德三), 자는 공달(公達)이니, 진주 유씨(晉州柳氏)이다. 시조 정(挺)은 고려의 상장군(上將軍)이다. 대대로 높은 관직이 이어졌다. 고조 휘 수(洙)는 성균관 진사였고, 증조 휘 수동(秀董)은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응성(應星)은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부친 휘 광문(光門)은 참판에 추증되었고, 모친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찰방(察訪) 증 참판 유(維)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임신년(壬申年, 1632, 인조 10) 10월 22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문예(文藝)가 일찍 이루어졌으나 오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한데 봉양할 길이 없었으므로 29세에 비로소 붓을 던지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혔다.
공은 장신으로 풍채가 좋았고 근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남행(南行)으로 선전(宣傳)에 천망(薦望)되어 재주를 시험하자 무예와 서강(書講)에서 모두 일등을 하니, 병판 김공 좌명(金公佐明)이 칭찬해 마지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복을 벗은 뒤 을사년(乙巳年, 1665, 현종 6)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67, 현종 8)에 선전관 겸 비변랑(宣傳官兼備邊郞)을 거쳐 기유년(己酉年, 1669, 현종 10)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승진하였다. 마침 동료가 조반(朝班)에서 실언을 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공으로 오인하여 파직하였으나 공은 스스로 해명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총융사(摠戎使) 서공 필원(徐公必遠)의 종사관이 되었다.
신해년(辛亥年, 1671, 현종 12)에 큰 기근과 전염병으로 아내와 2남 2녀를 잃었는데 서공의 후한 부의 덕분에 상을 치를 수 있었다. 서공이 졸하자 공이 글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그 글을 본 이들이 모두들 찬탄하였다. 가을에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에 배수되었고, 겨울에 해남 현감(海南縣監)에 제수되었다. 관대하게 정사를 펼치니 아전과 백성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673, 현종 14)에 상사(上司)의 뜻을 거역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1) 여름에 형조 좌랑에 배수되었다. 소송 문서를 능숙하게 처리하여 지체함이 없었다. 겨울에 승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발탁되어 훈련원 부정(訓鍊院副正)에 초배(超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상인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승진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676, 숙종 2)에 겸내승(兼內乘)이 되었고, 정사년(丁巳年, 1677, 숙종 3)에 선천 부사(宣川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정재(定齋) 박군 태보(朴君泰輔)가 마침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박군은 평소에 준결(峻潔)하여 남과 정의를 나누지 않았는데 공과는 어진 태수라고 일컬으며 서로 더불어 수창하였으니, 지금 《정재집(定齋集)》에 박군이 공에게 화답한 시가 많이 실려 있다.
무오년(戊午年, 1678, 숙종 4)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두 아우와 조석으로 묘소에서 곡하였다.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 봄에 복을 벗자 수어 별장(守禦別將)이 되었다. 가을에 고부 군수(古阜郡守)에 제수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 9)에 큰 기근이 들자 공이 공명고신(空名告身)을 얻어 이를 판 곡식으로 백성을 진휼하였는데 마침내 마음대로 백급(白給)했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혹시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쌀을 내어 관아로 보내 그 수량을 채웠으므로 파직되지 않았다.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에 임기가 차서 돌아왔다. 을축년(乙丑年, 1685, 숙종 11)에 끝내 그 당시의 일 때문에 용인(龍仁)에 도배(徒配)되었으며,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 풀려나 돌아왔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어영 별장(御營別將)을 거쳐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승진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논척(論斥)하는 대신이 있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위 별장(禁衛別將)을 거쳐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제수되었다. 신미년(辛未年, 1691, 숙종 17)에 임기가 차서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옮겼다. 계유년(癸酉年, 1693, 숙종 19)에 내직으로 들어와 당상 선전관(堂上宣傳官)이 되었다.
윤대(輪臺)에 입시하여 진계(進啓)하기를, “신이 전라 좌수사와 경상 좌병사를 맡고 있을 때에 각 읍의 속오군(束伍軍)을 순행하며 점고해 보니 매우 부실하였습니다. 속오는 곧 적을 방어하는 데에 가장 긴요하니 정밀하게 가려 충정(充定)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조금 튼실한 장정은 수월한 역(役)에 투속(投屬)하고 다만 노쇠하고 빌어먹는 부류들뿐이니, 군오(軍伍)의 허술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수월한 역에 투속한 자들을 모두 태거(汰去)해 내어 속오군에 충정한 다음, 만일 영장(營將)이 각 고을을 순력(巡歷)할 때에 역이 고르지 않은 읍이 많을 경우 즉시 계문(啓聞)하여 논죄(論罪)한다면 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고 채택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전에 수사(水使)를 맡았을 때에 송도(松島)에 불이 난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충주(忠州)에 도배되었으며, 겨울에 용서를 받았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다시 어영 별장이 되었고, 을해년(乙亥年, 1695, 숙종 21)에 통진 부사(通津府使)에 제수되었다.
산성(山城)을 보수하는 데 공이 있었다는 내용으로 진무사(鎭撫使)가 계문하여 가선대부로 특진하였다. 공이 재임한 몇 년 동안 연이어 흉년이 들었는데 녹봉을 내어 백성들을 살리고, 귀의하는 곤궁한 종족들도 또한 모두 구제하였다. 항상 관아의 가솔들에게 명하여 모두 죽을 먹게 하고는 말하기를, “이와 같은 흉년에 집에 있었다면 이 죽도 잇기가 어려웠을 것이니, 이 또한 과분하다.” 하였다.
고쳐야 할 읍의 규정과 제거해야 할 읍의 폐단을 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고치고 제거하니, 백성들이 편안히 여겼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에 임기가 찼는데 진휼하는 일을 마치지 못했다고 하여 5개월 동안 잉임(仍任)하였다. 안렴사(按廉使)가 진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얽어 넣어 의금부에서 심리를 받았다.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으나 금오(金吾 의금부)의 관리가 전결(田結)이 차이가 난다고 핑계 대는 바람에 끝내 도배되었으며, 이듬해에 용서받고 돌아왔다. 이후로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려는 마음이 없었다. 연이어 어영 별장, 수어 중군(守禦中軍), 회령 부사(會寧府使), 훈국 마병 별장(訓局馬兵別將)이 되었으나 나가기도 하고 사양하기도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에 막내아들 만추(萬樞), 공의 아우의 아들 만증(萬增)과 만중(萬重), 그리고 외손 이성천(李聖天)이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누대에 덕을 쌓은 결과와 공이 인을 행한 소치이다.” 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한미한 가문에 복이 지나치다고 두려워하였다.
그해 5월에 병에 걸려 오래도록 고생하였는데 병을 무릅쓰고 시사(時祀)를 행하는 바람에 병이 위독해지더니 6월 28일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부고가 조정에 보고되자 상이 치부(致賻)와 치제(致祭)를 예법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양주(楊州) 모향(某鄕)의 을향(乙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천성이 관후(寬厚)하여 남을 정성으로 대하였고 꾸밈과 모남이 없었다. 벼슬을 맡고 일을 담당할 적에는 공정함을 스스로 지켰다. 매양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벼슬한 이후로 크고 작은 제수와 배수가 모두 뜻하지 않게 이른 것이지 인연과 간청으로 얻은 것은 있지 않았다.” 하였다.
또 성격이 소탈하여 사물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음식과 의복은 있으나 없으나 개의치 않았고, 상자나 붓과 벼루와 같은 도구도 자기의 물건이라 하여 손수 자물쇠로 채워 사적으로 간직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그 천성이 그러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누차 거진(巨鎭)을 맡았으나 집에 남은 재물이 없었고 형제가 같은 집에 살면서 조석으로 항상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늘 편안한 모습이었다.
한 아우가 일찍 죽었는데 아우의 3남 1녀를 보살피고 길러 혼기를 놓치지 않고 혼인시키니 이웃과 친구들이 모두들 탄복하였다. 공은《맹자(孟子)》및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시를 읽기를 좋아하였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농담이나 천한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항상 고요하고 조용하여 안색이 화평하고 언어가 진실하였기 때문에 공에 대해 일컫는 사람들은 친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선인(善人)’이라고 하였으며, 공이 맡아 다스렸던 곤읍(閫邑)에서는 군민(軍民)을 막론하고 모두들 ‘어진 장수’, ‘어진 수령’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의 실제 덕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의 전 부인은 사인 이희립(李希立)의 따님이다. 1녀 1남을 낳았으니, 딸은 진사 이희정(李喜鼎)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만표(萬杓)이다. 후 부인은 사인 나상소(羅尙素)의 따님이다.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만추로 생원이며, 딸은 김성원(金聲遠)과 이수태(李壽泰)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어리다.
이희정은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성천(聖天)으로 진사이고, 다음은 성대(聖大)이다. 만표는 1녀를 낳았으니, 이중술(李重述)에게 출가하였다. 만추는 2녀를 낳았고, 김성원은 1남 3녀를 낳았고, 이수태는 1남을 낳았고, 이성천은 1녀 1남을 낳았다.
내외 손자와 증손이 18명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생각건대 유공은 / 嗟惟柳公
행적은 무장이요 마음은 유자이니 / 跡武心儒
집안에서나 관아에서나 / 于家于官
한 마음 변치 않았네 / 一心不渝
아우의 말을 / 令弟之言
남이 어찌 흠잡겠는가 / 人豈間然
비문을 구하여 드러내니 / 求以顯之
아들이 효도하여 빛내었네 / 子孝而文
동그랗게 솟은 묘소에 / 宰如之丘
법식에 맞는 비석 있도다 / 有石如式
내가 그 명을 짓노니 / 我爲其銘
후인들은 힘쓸지어다 / 後人是勖
ⓒ 한국고전번역원 | 공근식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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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故處士柳貴三道卿甫與余有戚分屢來訪, 嘗請其先墓表記而去。 其後, 與其兄兵使公相繼殞歿。 兵使公之子萬樞以道卿所撰家狀來見曰: “叔父撰錄先人事行, 將躬請碑文, 不幸暴卒。 臨亡, 以其草付不肖, 使之持納, 且達遺意。” 余以衰老固辭。 萬樞去而復來曰: “叔父祥朞將近, 若終未蒙許, 則無以反命於靈筵。” 其言甚切。 余悲其臨死之託, 有難終孤, 且其狀文質實可述, 遂略加序次, 而係以銘。
公諱德三, 字公達, 晉州柳氏也。 始祖挺, 高麗上將軍, 世襲簪纓。 高祖諱洙, 成均進士: 曾祖諱秀董, 贈參判: 祖諱應星, 壽爵嘉善: 考諱光門, 贈參判。 妣河東鄭氏, 察訪、贈參判維之女。
公以崇禎壬申十月二十二日生。 少好讀書, 文藝夙成, 而久未成名。 家貧親老, 無以爲養, 年二十九, 始投筆習弓馬。 公身長美風儀, 膂力過人, 以南行宣傳官薦試才, 武藝、書講俱第一。 兵判金公佐明稱之不已。 遭內艱, 服闋, 登乙巳科。 丁未, 由宣傳官兼備邊郞。 己酉, 陞都摠都事。 適同僚失言於朝斑, 臺官誤認公劾罷, 公不自辯。 俄爲摠戎使徐公必遠從事。 辛亥, 大饑疫, 公喪室及二子二女, 賴徐公厚賻, 得以治喪。 及徐公卒, 公爲文以祭之。 見其文者, 莫不歎賞。 秋, 拜軍器判官。 冬, 除海南縣監, 寬恕爲政, 吏民誠服。 癸丑, 忤上司罷歸。 乙卯夏, 拜刑曹佐郞, 詞訟文簿, 練達無滯。 冬, 擢不次, 超訓鍊副正, 旋陞堂上、兼司僕將。 丙辰, 兼內乘。 丁巳, 除宣川府使, 時定齋朴君泰輔適謫於其地。 朴君平生峻潔, 不與人款洽, 而獨稱公爲賢太守, 相與酬唱。 今《定齋集》多有和公之詩。 戊午, 遭外艱, 三年廬墓下, 與二弟朝夕哭墓。 辛酉春, 服闋, 爲守禦別將。 秋, 除古阜郡守。 癸亥, 大饑, 公得空名告身, 販穀賑民, 竟以擅便白給當罷。 民聞之, 出米輸官, 惟恐或後, 準厥數, 得不罷。 甲子, 秩滿歸。 乙丑, 終以其時事徒配龍仁。 丙寅赦還。 己巳, 由御營別將, 除濟州牧使, 大臣有斥以驟, 辭不赴。 旋由禁衛別將, 除全羅左水使。 辛未, 秩滿, 移慶尙左兵使。 癸酉, 入爲堂上宣傳官, 輪臺入侍, 進啓曰: “臣待罪湖、嶺兩閫時, 巡點各邑束伍軍, 甚不實。 凡束伍乃禦敵之最緊者, 不可不精擇充定。 而稍實壯丁則皆投屬於歇役, 只是癃殘丐乞之類, 軍伍虛疎, 莫此爲甚。 臣意以爲‘歇役投屬者, 盡汰出充定, 若營將巡歷時, 多有不齊之邑, 隨卽啓聞論罪’, 則庶有其效矣。” 上嘉納, 命採施之。 以前任水使時有松島失火, 徒配忠州, 冬蒙宥。 甲戌, 復爲御營別將。 乙亥, 除通津府使, 以山城修補有效, 鎭撫使啓聞, 特陞嘉善。 公在任數歲, 連値大無, 捐俸以活民, 窮族之來歸者, 亦皆救濟。 常令衙眷皆喫粥曰: “如此凶歲, 在家則此粥亦難繼, 是亦過分也。” 邑規之當改者、邑弊之當祛者, 無不至誠爲之, 民便之。 戊寅, 苽滿, 以賑事未畢, 仍任五朔, 爲廉使所搆就理。 事無實, 金吾官諉以田結差錯, 終至徒配。 翌年宥還。 自是以後, 不復有仕進意。 連爲御營別將、守禦中軍、會寧府使、訓局馬兵別將, 或行或辭。
壬午, 季子萬樞、弟子萬增・萬重、外孫李聖天俱中司馬。 人以爲累世積德及公行仁之致, 公猶以寒門福過爲懼。 其年五月, 得病久苦, 强疾行時祀, 添劇, 至六月二十八日, 遂不起。 訃聞, 命致賻、致祭如禮。 葬于楊州某鄕向乙之原。
公天性寬厚, 待人以誠, 無表襮畦畛。 至於當官莅事, 公正自守, 每自言: “吾自仕宦以來, 大小除拜皆是倘來, 未有夤緣干請而得者。” 又疎坦, 不以事物經心。 飮食、衣服, 任其有無, 至於箱篋、筆硯之具, 無一箇私藏, 稱爲自己物而手自封鎖者, 此其性然也。 是以屢典巨鎭, 家無餘財, 兄弟同室, 朝夕常不繼, 而處之晏如也。 一弟早歿, 撫養其三子一女, 婚嫁不失時。 隣里親舊莫不歆歎焉。 公好讀《孟子》書及韓、杜詩。 群居未嘗詼諧褻語, 常靜默從容, 顔貌和平, 言語眞實。 故人之稱公者, 無論親疎, 皆曰善人; 所經閫邑, 無論軍民, 皆曰仁將、仁守。 蓋公之實德如此。
公前娶士人李希立女, 生一女一男: 女李喜鼎, 進士。 男萬杓。 後娶士人羅尙素女, 生一男三女: 男卽萬樞, 生員。 女金聲遠、李壽泰, 季幼。 李喜鼎生二男: 長聖天, 進士: 次聖大。 萬杓生一女李重述。 萬樞生二女。 金聲遠生一男三女。 李壽泰生一男。 李聖天
生一女一男。 內外孫曾十八人。 銘曰:
嗟惟柳公! 跡武心儒。 于家于官, 一心不渝。 令弟之言, 人豈間然? 求以顯之, 子孝而文。 宰如之丘, 有石如式。 我爲其銘, 後人是勖。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