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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략)
법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겁니다.
집착을 제거하는 마음도 바로 사띠를 써서..
알아차려서 지혜를 내도록 하는 것이 사띠라고 하죠.
그렇게
바른 행을 배우게 하도록 하는 것을 수행,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보는 힘이 좋고 능숙한 알아차림일 때라야 지혜가 일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체험할 때마다 그걸 다 아는 게 아니고 법의 조사에 의해
그 가치를 알고 이해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띠는
대상을 갖다가 법으로 회향시키는 기능(힘/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띠의 가치이고 지혜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아신.떼자니아 사야도의 ‘사띠의 가치’라는 글을 카페에
올려진 것을 읽어보겠습니다.
“한번 알 때마다 알 때마다 모하(Moha/치심)를 없앤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 한 줄만 갖고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알 때마다 알지 못하는 모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법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알 때마다 알 때마다 알지 못하는 모하가
점차 더 많이 알아졌을 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이
알아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알아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든지.. 몸을 알아차리든지..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지혜가 생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계속 알고자하는 마음을 가져다주면서
지혜로서 일을 더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바르지 않거나 견해가 바르지 않는 것을
자꾸 고쳐나가고 바꿔가는 것을 변환, 전환..회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서
그렇게 되는 것이며 不善을 덜 짓고 善行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주 작은 善일지라도 지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사띠와 지혜로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괴롭지 않게 할 줄 알도록 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바로 모하를 지혜로 바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띠빳따나, 위빠사나가 그런 일을 합니다.
한번 알 때마다 알 때마다 모하가 없어진다는 것은
바로 지혜(이해/정견)로 바꿔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게 붓다라는 것입니다.
사띠(알아차림)가 붓다지 다른 게 붓다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앙굴리마라 같은 악인도 부처님 말씀을
잘 알아듣고 감화를 받아서 아라한이 되지 않았습니까?
바로 사띠(알아차림/지혜)가 그렇습니다.
사띠와 지혜가 그렇게 바꾸는 것입니다.
악인을 아라한으로 바꿔냈습니다.
그러나
모하일 땐 앙굴리마라 같은 사람도 있고..
개나 고양이 같은 축생들의 마음이 다 모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 담마를 알아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으니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일지라도 모하로서 죽게 되면
축생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원인/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띠의 효과나 가치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애기 사띠부터 차츰차츰 하나하나 알아차림 하면서..
즉
들어오는 대로 알아지는 대로..
한꺼번에..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면서
사띠가 이어지고.. 알아차림의 가속도가 나고.. 아는 마음을 알고..
지켜보는 마음을 알면서 나중에 지혜가 지혜를 대상으로 할 때
수행의 가치나 힘, 이익, 유익함, 크나큰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서 일을 할 때 법이 일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으로서 일함, 앎이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더 이상 모하로서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無明에서 明으로 바뀌었다는 것 아닙니까?
무지의 마음을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 아라한의 마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바뀌면
부처님과 같은 마음으로 바뀌게 되면 더 이상 惡(不善)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惡이 나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앙굴리마라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으며
참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불선을 짓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지혜가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마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모릅니다.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도 모르고..
원인/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 또 짓고 또 짓고..
축생들의 마음에다가 부처님의 법을 들려주어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善業을 짓고 쌓을 기회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담마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법으로서.. 체험으로서..
또는 보고 들을 수가 있어서 불선의 마음을 선의 마음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겁니다. 앎의 지혜로 채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띠입니다.
여기 스님들한테 한번 물어보시죠.
왜 스님이 되었는가를.. 이 자리엔 두 분의 스님이 계시는데
그 스님들께서 왜 스님이 되셨는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지금 법문하는 그대로입니다.
몸과 마음에 대한
자연적인 성품(빠라맛타)을 이해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고
괴로우면 괴롭지 않게 하는 지혜를 써 먹기 위해서..
그리고
늘 바른 마음가짐으로 대상과 앎이 항상 함께 하면서
앎을 대상으로 앎으로서 작용하고 일함으로서 번뇌를 허용하지 않고..
평생 후회하지 않도록 그 수행법을 배우고 이해하면서
특히 법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스님이 되었으며 머리를
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스님이란
그저 부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오롯히 걸어가면서
법에 전념함을 알고 거기에서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할 것입니다.
수행하는 스님(수행승)들은
항상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계속 마음보는 일을 합니다.
늘 마음이 일을 합니다.
대상과 마음의 이치를 지속적으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대상과 마음의 관계를 계속 조사하고 이해하고..
이해하고 또 조사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상으로
아는 것만 계속 알아져갈 뿐입니다.
아는 것에 있어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게 지혜의 성질이기도 합니다.
알아차림에 알면 알수록 그런 성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부처님이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좀 더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처럼 살고 싶어서
더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마음이 깨끗해지고..
청정해지고.. 견해가 밝아지기 때문에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이
줄어들고 없어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할 줄 아는 지혜나 능숙한 알아차림이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근심이 일어나면 그 근심을 어떻게 할 줄 아는 지혜가
근심이 무엇이라는 것을 능숙하게 이해하여 해결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알고 알고..
아느냐 아느냐.. 왜 그렇게 알아야만 한다고 하겠습니까?
그 성질/성품에 대하여.. 빠라맛타에 대하여
알아야(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는 것(이해의 앎)이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두려움, 고통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 법으로 바꿔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이해)는 무엇을 대상으로 합니까?
법(앎/이해)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법을 나게 하고..
또 그 법을 대상으로 하여 계속적으로 법을 나게 하고
이해는 더 깊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공간적이라는 말이 이 뜻이기도 합니다
법이 일함..
법이 일을 하기 때문에.. 법이 일하는 자리에
어떻게 낄레사가 들어올 수 있단 말입니까?
허용이 안 되는 겁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법이 새록새록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낄레사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이지요.
틈이 없어요. 그게 순간순간.. 찰라찰라이니깐요.
마음이 괴롭지 않는 것은 물론 평온과 자유와 고요 속에서
계속해서 이해의 앎이 일어나기 때문에 앎(지혜)이 법인 것입니다.
앎(지혜)이 법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법이 일하는 것입니다.
법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더 알고 싶고.. 더 알고 싶고..
아는 것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안하고도 못 베깁니다.
결코 안하고는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 있어서
하나의 삶이자 인생의 동반자라고 여기면 됩니다.
지혜가 스스로 일하기 때문에
수행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는 것이 무슨 타의나 타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말도 되겠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제 할 일을 하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지혜롭게 계속 되어갈 뿐입니다.
상카라(sankhara/행)..
12연기에서 보면 두 번째 行이라는 상카라가 있습니다.
그것에 ‘되게끔 충동질하는 성질’이 들어있습니다.
지혜가 일할 때에는
지혜로서 일을 안하고는 못 배기는 행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 지혜의 행으로서.. 앎이 일어나는 힘으로서..
그래서 모든 것은 앎으로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멸도의 길.. 위빠사나 아는 지혜의 길.. 중도의 길입니다.
부처님 수행법은 깨달음으로 가는 오직 유일한 길 맞습니다.
팔정도행이기 때문입니다.
사성제를 이해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사띠와 지혜가 하는 일.. 진정한 부처님 수행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
_(2015년 12월 크리스마스&송년 특별집중수행/경주마하보디선원 담마홀/녹취공덕:수카빠알리)_
첫댓글 고맙습니다
올려주신 법문 잘 음미했습니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역시 들을 때와는 많이 다릅니다.
읽을 수록 감칠 맛이 있습니다,
입에 착착 달라 붙는 게~~ㅎㅎ
덕분에 오늘도 담마와 함께
평온한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_()_
저 또한 녹취한 글귀를 교정하고
정리하면서 스님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사야도의 음성법문은 음성법문이고..
글 법문은 글대로 달리 또 다른 맛이
있더라구요.
전 후자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거기에서
법의 이해가 더 많이 되는 편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사야도 법문자료는
꼭 챙기는 버릇까지 생겼답니다.~~^^*
눈으로 정보의 대부분을 취한다는게 이런것이군요~~들을땐 내용이 전부 들어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글로 올려 주시니깐 돌에 새긴 듯이 울림이 강하네요..한 말씀 한 말씀이 그대로 이치와,방법를 말씀해 주셔서 깊이 새겨 집니다...
사두 사두 사두..()()()..
워드공덕 수까빨리님..수고하셨읍니다.감사합니다.
네~ 그렇답니다.
~ ~
스님의 댓글에서도 힘을 많이 받곤 합니다.
(~사두사두사두~)
개인 일정과 선원 일정상 마지막 회향법문까지 못올릴 것 같아서
어제밤 늦게까지 컴작업을 하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몸이 편치 않네여~
앞으론 컴작업도 못할까봐욤~~ㅠㅠ
"그것이
바로 고집멸도의 길.. 위빠사나 아는 지혜의 길.. 중도의 길입니다.
부처님 수행법은 깨달음으로 가는 오직 유일한 길 맞습니다.
팔정도행이기 때문입니다..."
사두사두사두~~~!!!
청정님의 댓글은 언제나 힘이 되어주곤 합니다.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더욱 지혜가 증장되시길 바랍니다.
사두사두사두~~^^*
@Dhammacitta
감사드립니다 스님 _()()()_
늦었지만, 새해 더욱 더 건강 하시기를
바른 수행, 바른 지혜의 길로 위없이
아끌어 주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