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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화를 존중하고 사랑했던 일본인과 미국인들!
1. 남대문 철거를 막은 재경 거류민단장 나카이 기타로
일본에서 도시계획을 하면서 성과 성문을 허물었는데 조선총독부도 한양도성을 철거하기 시작했으니
도로 확장을 위해 숭례문(남대문) 을 허물려고 했는데... 1905년에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포차 왕래에 지장을 주는등 교통에 방해되는 “남대문을 대포” 로 부수려고 하자 한성
신보 사장이자 재경 일본 거류민단장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반대하면서 철거를 면하게 됩니다.
“남대문은 자체로도 보존가치가 있으며 또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역사유적이니 아깝지
아니한가” 라고 청원 했는데... 나카이 기타로는 조슈번 출신인 하세가와 사령관 및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와 친분이 두터웠기에 감히 저런 주장을 할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에 조선을 방문할 때 지나가는 길에 숭례문이 있었으니 같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나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처럼 조슈번 출신이니
1916년에 대를 이어 2대 조선총독에 임명됐는데, 조슈번 요시다 쇼인이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세운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출신으로 동학농민봉기때 서울을 점령한 오시마 요시마사
가 있으니..... 일본 총리 아베 신조도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오시마 요시마사는 "외고조부" 가 됩니다.
조슈 출신은 메이지유신의 첫 출발 다카스키 신사쿠, 메이지유신 3걸 기도 다카요시 외에 조선공사이자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청일전쟁 1군 사령관이자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 을사늑약 때 총리이자
태프트~기쓰라 밀약의 당사자 가쓰라 다로,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에 다나카 기이치,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조등 일본 총리 8명을 배출했습니다.
그후 조선총독부가 도로를 확장할 때도 숭례문(남대문)은 나카이 기타로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
처럼 비뚜름히 길을 내서 살아 남았으며, 동대문 역시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역사유적" 이라는 이유로 살았는데 1933년에 조선총독부는“남대문을 보물 1호”,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하니 대한민국은 1962년 남대문을 국보1호, 동대문을 보물1호로 명칭만 바꿉니다.
일제는 일본인들이 대거 거주할 용산 신도시를 계획하면서 서울에 큰 도로를 내는데 낭인
출신으로 한성신보 초대사장을 지냈던 아다치 겐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조선” 에
조선인 동화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역사적으로 배일자료를 공급하는 기념물
이니 제거해 민심을 통일하고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지만 1915년에
돈의문(서대문) 등 6개 성문은 철거되고.... 숭례문(남대문)등 두 문은 살아남은 것 입니다.
일제가 경복궁 내의 300채 전각을 허물고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후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했으며
1948년 부터 대한민국 중앙청으로 사용되다가 1996년 김영삼 대통령때 철거하는 중에 놀라운 “벽화”
가 발견되었으니... 대한민국 국무회의가 열리던 홀의 천장에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자나미신과
이자나기신의 벽화 그림” 이라! 두 신이 굽어 살피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무회의가 수십년 동안 열렸다는?
중앙청 벽화 그림 얘기가 나왔으니 동아일보에 유원모 기자가 쓴 “옛 총독부박물관 ‘비천상’
모티브는 고구려 벽화”라는 글이 떠오르는데....“조선총독부가 경복궁내 동궁전을 헐고
지은 박물관의 ‘비천상’ 은 104년전 일본 신예미술가 2명이 고구려 벽화에 감동받아
공동 창작했으니...... 여인이 새 깃이 달린 화관을 쓰고 푸른빛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다”
“미술사적 가치를 알아본 백찬규와 이상수, 한경순은 친일 유산이라는 곱지않은 시선을 무릅쓰고 길이
9.8m, 폭 6.35m 에 이르는 벽화를 떼어내어 보존하는 공법을 처음 시도해 근대미술의 태동기 역사
를 증언하는 작품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근대기 미술 유산 보존의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2. 광화문 파괴를 막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철거를 면하고 살아남은 또 다른 경우로는 "광화문" 이 있으니...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우느라 경복궁의 전각 수백채를 허물면서 경복궁의 정문으로,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다가 1425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 이라고 바꾸었으며
임금이 행차하는 문인지라 천정에는 주작(朱雀) 을 그려 넣은 광화문을 허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1927년 조선총독부는 광화문을 없애지 않고 해체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는데, 6·25전쟁때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지만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으니
이후에 먹고 살만해지자... 2006년에 광화문 복원 및 이전공사를 다시 시작해 2010년에 준공됩니다.
서영아 논설위원은 동아일보 횡설수설란에 “야나기와 광화문” 이란 글을 올렸으니...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한국 이름 ‘류종열’ 이라고도 불리는 민예 연구가로
일본의 인물사전에는 ‘민예 운동을 일으킨 사상가, 미학자, 종교철학자’ 라고
돼 있다. 20대 이던 1916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해서는 조선 문화에 바로 매료됐다. ”
“백성들이 집에서 쓰던 오래된 밥상이나 막그릇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고 평생 조선의 공예품과 고미술품을 수집했다. 1919년 3·1운동을
일본이 탄압하자.... “반항하는 그들 보다 한층 어리석은건 압박하는 우리들”
이라고 간 크게도 공개 비판 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아픔을 함께 하고 대변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첫 문화 사업으로 1920년 5월 4일 서양 음악회를 열었으니 야나기의
부인 성악가 가네코의 독창회였다. 장안의 화제를 모은 음악회에는 1,300여명이
몰렸고 이듬해에도 여러차례 열렸다. 2005년 장남 무네미치 일본 민예관장이 어머니
의 기록을 모은 다큐멘터리 영화인 ‘가네코’ 를 보내와 이듬해 일민미술관에서 상영했다.“
“야나기는 1922년 8월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게재한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 의 육필 원고가 발굴됐다. 사전 검열로 신문에 실리지 못한 부분이
포함돼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했다.”
“ 그는 “일본이 조선에 합병돼 에도(江戶) 성이 헐린다면 일본인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 이라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라고 고발했다. 일본과 조선 양국에서 발표된 이 기고문은
큰 반향을 일으켜 광화문은 부수지 않고 1926년에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져 보존됐다.“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 도시샤 대학에는 윤동주 시비와 정지용 시비가 서 있는데, 이 대학 교수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유종열)는 일본의 민예 연구가로 도쿄 민예관을 설립한 사람이니 광화문 철거
반대운동에 나섰거니와, 1924년에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 도자기 전람회와 이조 미술전람회를
열기도 했으며 저서로 '조선과 예술’, ‘종교와 그 진리’, ‘신에 대하여’, ‘차(茶)와 미(美)’ 등이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도자기 수집에도 열심이었는데 우리 美(미)의 특징을 '비애의
미' 라고 했으며...... '조선의 공예를 조선사람 보다 더 사랑' 했다는 일본인으로
조선예술의 위대함을 극찬하면서 총독부가 석굴암 보수공사를 하려고 했을 때
'섣부른 보수 공사가 비극' 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심각하게 경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상이 현명하지도 않고 깊이도 없고 또한 따뜻함도
없다는걸 지적했으며, 고분을 파헤쳐 옛 예술품을 모은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통해 사랑
을 실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고 탄식했습니다. 하기사 이토 히로부미가 저렇게해서 얻은
고려청자를 고종황제에게 선물하니 고종은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어디서 구했는가?” 라고 말했다니?
승리하는건 그들의 아름다움이지 우리 칼이 아니다. 일본의 사상을 심으려고 했지만 마음을 살리려고 하지
않았다. 금전이나 정치로는 마음을 서로 맞닿을 수 없다. 이웃간에 영원한 평화를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깨끗이 하는 길밖에 없다. 조선예술은 정이 낳은 아름다움이다. 중국처럼 힘으로
밀어 붙이지 않고 일본의 칼처럼 예리하지도 않으니... 속으로 가라앉은 '곡선의 미'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민예운동을 시작한 배경에는“조선 백자”에 대한 이해가 있었으니
아사카와 다쿠미의 영향으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형인 아사카와
노리타카가 일본에 소개해 야나기가 접했기 때문이라는데, 그가 조선 백자를
수집해 설립한 “조선민족미술관 소장품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 으로 계승 됐습니다.
또 조선에서는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 유의 그림을 俗畵(속화) 라고 했는데 이는 유학자
인 조선 고위층들의 천시하는 마음이 담긴 비하적인 표현이니.... 야네기 무네요시
는 조선의 풍속화를 일컬었던 俗畵(속화) 라는 이름 대신에 "民畵(민화)" 라고
작명하여 처음으로 불렀으니 오늘날에도 이 용어가 한국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3. 조선 소반(밥상)의 미적 아름다움을 발견한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 백자의 미적 아름다움을 찬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하며 “조선
의 민둥산 산림녹화” 에 힘썼으니, 2년 걸리던 한국 잣나무 묘종을 그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으로 단축할수 있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맞는 수종을 고르고 식목을 거듭하여 자연상태
흙의 힘을 이용하는 '노천매장법' 방식으로 조선 오엽송 종자를 싹 틔우는 방법도 개발 합니다.
야나기에게 조선백자와 미를 알게 해준 다쿠미는 조선의 공예를 좋아해 형 노리타카에게
조선의 도자기 파편을 구해 보내주는 한편 자신은 조선의 소반(밥상)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는데.... 2012년 아사카와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일본 영화 “백자의 사람 : 조선의 흙이 되다 ( 道〜白磁の人)” 가 개봉 됐습니다.
에미야 다카유키의 소설“백자의 사람”이 원작인데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라고 적혀있으니..... “한복을 입었고 한국말” 을 했으며
한국의 산을 푸르게 하는데 헌신했고 한국 백자와 공예품을 사랑하고 수집 했습니다.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의 공예에 눈 뜬 것도 아사카와 형제 덕분이었으니.....
1916년 형 아사카와가 야나기에게 조선의 청화백자를 선물했고 이를 계기로 야나기
는 한국 공예에 빠져들었다는데, 아사카와 형제와 야나기는 조선의 도자기와 목공예품,
금속공예품 등을 모아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세웠으니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입니다.
영화에서 아사카와 다쿠미는“백자 같은 사람”이라 불린건 백자를 수집 연구했기 때문인데 하지만
백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소반(小盤)으로 그는 소반을 수집 조사 연구했고
그 결과를 담아 1929년‘조선의 소반(朝鮮の膳)’ 이란 책을 냈으니 국내 최초의 소반 연구서 입니다.
‘지금 하지않으면 소반이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한국의 소반을 한국인 보다 더
사랑했던 그였으니, ‘조선의 소반은 순박한 아름다움에 단정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상생활
에 친숙하게 봉사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아취를 더해가니’그때까지 소반은 평범한 일상용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사카와 다쿠미는 거기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냈으니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소반을 감상
하며 미적으로 감동하기 시작했는데... 밥상 같은 일상 용품이 미술품으로 바뀐 것으로 요즘
우리가 오늘날 소반을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아사카와 다쿠미 덕분이 아닐수 없습니다.
1931년 서울에서 식목행사를 준비하다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국식으로 장례“ 를 치렀고,
”한국 사람들이 앞다퉈 그의 상여“ 를 멨는데 서울 망우 역사문화공원(옛 망우묘지공원) 에 가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무덤이 있고 무덤 앞엔 항아리 모양의 돌 조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형이 조선백자를 모티브로 삼아 조각한 것이라는데 묘비엔 이렇게 써
있습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4. 목화와 소금의 아버지 와카마쓰 우사부로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다쿠미를 생각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목화와
소금 의 아버지인 와카마쓰 우사부로 인데...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
하고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1896년에 조선에 발령이 나서 경성에 근무하다가
미국 뉴욕 근무와 중국 항주 영사를 거쳐서 1901년에는 “목포 영사” 로 부임합니다.
우리나라는 비단과 삼베에 마와 가죽으로만 옷을 짓던 시절인 고려말에 축복이라고
할수 있는 “목화” 가 들어왔으니..... “문익점” 이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 씨앗을
붓통에 숨겨 들여온걸 재래면 이라고 하는데, 섬유가 짧아 방직원료로는 부적합한
데 비해 미국에서 개량된“육지면”은 섬유가 가늘고 길며 강하고 질겨 광택이 있습니다.
미국의 우수한 육지면은 1904년 목포 일본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가 정유재란때 이순신 장군
이 머물며 병선을 건조해 노량해전을 준비했던 섬 목포“고하도” 에서 그 407년 후에 들어와
목화를 시험 재배 한 것이 효시이니... 고하도는 국내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된 발상지” 입니다.
목포 영사 와카마쓰 는 1903년 1년간 목포 고하도 기후조건 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맑음 264일, 구름 60일, 비 36일, 눈 6일로 육지면의 파종 부터 수확까지
기간인 5월 ∼10월 까지 목포 지방의 정오에 평균 기온이 21.7℃ 로 조사 되었습니다.
면화 성장기인 7월은 27.8℃, 8월은 30.6℃, 9월은 29.4℃ 로 높아 최적의 조건을 갖춘지라
와카마쓰는 기후· 토질 등 생육환경 면에서 고하도가 목화 재배의 적지 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본 농무성으로 부터 미국종 면 종자 13종을 교부 받아 목포에 살던
266세대 1,045명의 일본인 중에서 “야마자키 도사부로” 에게 위탁해 시험 재배를 합니다.
또 와카마쓰 는 솥에다 바닷물을 부어넣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끓여서 만드는 조선 재래
의 소금으로, 이순신 장군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 굽기도 했던 “자염(煮鹽)” 이
너무 비싼걸 보고는, 고하도 등 목포 인근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만든 “천일염” 을 대량
보급하니 목포는 “삼백(목화, 소금, 쌀)의 도시” 가 되어 일제 시대 3대항 6대도시가 됩니다.
와카마쓰 우사부로는 목포에서 원산과 평양을 거쳐 1910년 한일합병 조약 후 조선총독부“부산 부윤”
이 되어 1919년까지 근무하였는데... 목화와 소금이야 개인 취향으로 보급했겠지만, 부산 부윤이
되고는 일본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의 관문이자 대륙 진출의 시작점인 부산항 개발에 힘을 쏟았습니다.
부산은 산이 바다로 빠지는지라 해안가에 평지가 부족하니 항만 개발에 집중해 1902부터 1909년
까지 실시된 “북항 매축”공사를 토대로 한 부산항 개발사업을 마무리 지었으며, 또한 1909년
시작된 영도 영선산 착평공사를 1912년에 마무리하여 1911년 완공된 압록강 철교와 함께
일본에서 출발하여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이어지는 해륙 연결 교통망을 완성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부산항의 물자 및 인력 수송 능력을 높이기 위해 부산진 매축과 함께 제1 부두와 제2 부두 를
완성하였으며 이어서 조선와사 전기주식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여 부산 시내에 “전기와 가스”
를 보급하였고 바로 이 전기를 이용해 부산 도심에 “괘도를 개설해 전차”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5. 백방으로 뛰어 윤동주 시비를 세운 곤타니 노부코
야나기 무네요시 柳宗悅 (유종열)가 교수로 재직한 교토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시비가 있는데 2017년
10월 28일 교토 남부 우지시(宇治市) 우지강변에 윤동주 시비가 또 세워졌으니, 윤동주와 도시샤
대학 학생들이 사진을 찍었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인도교 천게빈교(天ケ瀕橋)를 지나 백홍교
다리 앞에 “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등 6천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윤동주 시비”를 세운 것입니다.
교토 도시샤 대학에 재학중이던 윤동주는 귀국 전인 1943년에 학우들과 함께 교토 남부에 있는
우지강을 찾아 다리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며칠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죽었으니....
마지막 사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우지강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생겼으니“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곤타니 노부코(紺谷延子) 사무국장등 입니다.
노부코씨는 2002년 부터 윤동주의 시를 읽고 꽃을 우지강에 던지는“추모행사” 를 열어왔고.....
2009년에는 6,358명의 서명을 받아 교토부(府) 지사에게 제출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고
비를 세울 곳을 찾아 동분서주하다가.... 2016년 우지시 시즈가와(志津川)구에서 용지제공을
결정했는데, 구청장은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 라며 기념비 건립을 받아들이니
시인의 탄생 100주년인 2017년 10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우지강변에 세워졌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던 “곤타니 노부코” (紺谷延子)씨는 윤 시인을 만난후 인생이 바뀌었으니 매년 윤시인
추모 행사를 열었고 2005년 기념비 건립을 위한 시민단체를 조직해 발이 부르터지도록 쫓아
다녔는데,‘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에는 한국과 일본의 화강암에다가 양국 언어로 시
‘새로운 길’을 새겼으며 시인을 상징하는 돌기둥이 그 위에서 양국을 연결하는 디자인 이라고 합니다.
6. 가미카제로 희생된 조선인 위령비를 세운 구로다 후쿠미
윤동주 시비를 말하다 보니 또 다른 비석을 세운“구로다 후쿠미”씨가 떠오르는데, 그녀는
일본여성임에도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며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생각나니... 그녀는
일본이 아무리 노력해도 못 따라가는 한국 문화가 세가지 있으니“불교, 유교, 한방” 으로
이 세가지를 갖춘게 대구라며 한일 교류는 여행 만큼 좋은게 없다고 말했던게 기억납니다.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대구 관광사진전에서 옥색 저고리에 청록색 치마를 입은
지한파 여배우로 서울 망우묘지에 묻힌 아사카와 다쿠미 처럼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다” 는 구로다 후쿠미 (黑田福美) 씨 인데, 34년 동안
일본에서 한국 알리기에 앞장서 왔으며 한국에 무려 300번 이상 다녀왔다고 합니다.
“한국은 내 숙명” 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과거에 사회적 논란 한가운데에 선 적이있었으니,
2008년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으로 숨진“탁경현씨의 위령비” 건립을 추진
할 때 인데, 좌절을 겪은 후에 ‘꿈의 전후’ 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으니..... 역사
스페셜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며 그녀를 조명한 영화가 일본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녀를 조명한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주선으로 “탁경현씨의 고향에 추모비” 가 세워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이 뭐가 자랑이냐고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여
끝내 준공식이 치뤄지지는 못했는데“순수한 마음으로 위령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민감한 일인 걸 알기에 신중하게 추진했지만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라고 말합니다.
구로다 씨는 1991년 꿈속에서 낯선 조선 청년을 만났으니“조선인인데 일본인 이름으로 죽은
것이 유감” 이라고 말하더라나요? 수소문 끝에 그 청년이 1945년 5월 출격했다가
오키나와 해상에서 숨진 탁씨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는데.... 탁 씨가 출격 전날 단골 식당
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큰 목소리로 "아리랑" 을 슬프게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구로다 씨는 탁씨의 고향인 경남 사천에 위령비를 세우겠다고 마음먹고 시장의 협조를 받아
부지를 확보했으며 처음 한국 여론도 긍정적 이었다는데... 하지만 막판에 시민단체가
“친일파 위령비는 안 된다” 라고 반발해 당일 행사가 취소됐으며 비석도 철거 됐다고 합니다.
구로다 씨는 “탁 씨도 자신의 조국이 일본이고 일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것이 분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갈 장소” 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
이라고 해명했으며.... 이듬해 경기 용인 법륜사로 옮겨 비석을 세웠으나 3년후
지상파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논란이 됐으니 결국 “비석을 뽑아 눕혀야” 했습니다.
이후 구로다씨는 매년 중양절(重陽節) 인 음력 9월 9일 “법륜사” 를 찾고 있다는데....
구로다씨는 지방 촬영을 가면 조선인이 강제징용 등으로 희생된 장소를
찾아 “조약돌” 을 주워 온다는데 법륜사에 가져가 함께 위령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7. 고아 위해 헌신했던 선한 일본인 다우치 지즈코
다우치 지즈코는 1919년 7살 때 조선총독부 목포부청 하급 관리로 부임하는 아버지
를 따라 목포로 이사를 와서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중.... 여학교 시절 은사의 소개로 “공생원” 이라는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으며 1938년 공생원 원장이던 윤치호와 결혼합니다.
윤치호는 190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목포의 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부랑아 일곱명을 집에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28년 공생원을 설립했으니 개인이 설립한
전남지역 최초 아동복지시설로 고아가 늘면서“거지 대장”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해졌으니 일본인
자원봉사자 다우치 지즈코와의 결혼은 거지 대장과 일본인 여성의 결혼으로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윤치호는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두터운 인사로 6.25때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친일파로 인민재판 에
회부되었으나 목포 시민들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으니, 그 대신 인민군은 그에게 인민위원장직을
맡겼고 목포가 수복된 뒤에는 국군에게 체포되었지만 목포 시민들의 구명운동 덕에 석방될 수
있었다는데, 얼마후 고아들에게 먹일 식량을 구하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4남매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주위 권고, 일본에 홀로사는 어머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지즈코
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기다리며 공생원” 을 지켰다는데, 양친이 있는 일반 가정에서도 하루
세 끼가 여의치 않던 시절, 고아원 운영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6.25 전쟁 후 궁핍하던 시절, 헌신적으로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원 원장으로 눈물겨운 분투를 하며
고생하던 다우치 지즈코는 1968년 폐암으로 죽자, 장례식은 목포 시민장으로 치러졌고 3만명
의 시민이 운집해 죽음을 애도했는데 광복 직후에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인민군 치하에서
는 친일파라는 이유로, 수복 이후에는 부역자 라는 이유로 그녀와 남편은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목포 시민들이 나서서 그녀의 가족을 지켰다는 것과 무려 3만명
의 시민들이 그녀를 기리기 위해 모였다는 것으로 볼 때, 그와 윤치호는 국적과
사상을 떠나.... 주변 한국인들로 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즈코에게는 윤학자라는 한국 이름이 있으니 그녀는 1960년대에 일본을 방문할 기회
가 몇번 있었는데 언제나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고 하며, 그러나 세상을 뜨기 한달
전 장남인 윤기에게 “우메보시가 다베타이(매실장아찌가 먹고 싶어)” 라는 말을
힘겹게 뱉은 후부터는 일본말만 썼다고 하며 그녀는 자녀들을 일본 호적에 올렸습니다.
무남독녀였던 그녀는 자녀들이 친정인 다우치가를 잇기 바랐었기 때문이니 한국의 고아
들을 위해 헌신했고 그녀 자신은 마치 한국인인 듯 살았지만, 일본을 사랑하는 일본인
이었으니, 그녀는 한국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곤경에 처한 고아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우화가 있으니 얼핏 착하게 살라는 얘기인 줄로 아는 사람도 많지만
우화의 청중이 유대인이었고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증오하고 경멸하던
민족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청중에게는 그래서 보편적 인류애를 상기
시키는 그 우화가 더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이니 다우치 지즈코의 얘기인 것도 같습니다.
8. “한국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를 쓴 미국인 존 코벨
미국 동양미술학자로 1941년 백인 최초 일본학 박사 존 카터 코벨과 아들 앨런 카터 코벨 박사 모자는
1978~86년에 한일고대사, 한국 미술, 불교, 도자기등 1,400편의 칼럼과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부여기마족과 왜’‘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서’등 5권의 저작을 통해 한국
고대사 중 가야 유물에 주목했으니, 부여족 가야는 4세기에 바다를 건너가 왜를 제압했다고 말합니다.
존 코벨은 일본 미술사를 공부하며 일본문화와 미술에 16권의 저작이 있으니 ‘대덕사의 선(禪), ‘일본 선
정원 연구’‘잇큐(一休)선사 연구(선 미술)’등이 꼽히는데 일본 미술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 대부분은 한국 땅을 가리키고 있으니 이후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라와 교토의 구다라(백제)관음과 불상, 법륭사 건축물과 회화, 아스카 불교 중에 20%
이상은 한국에서 왔거나 관련되었으며 95% 이상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대사의 진실을 이야기 하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일본에서는 은폐하고
한국에서 조차 학자들이 진실을 밝히고 가르치는 일에 ‘겁을 먹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코벨은 “4세기경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등 그녀의 주장은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게다가 그녀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습니다.
해서 코벨은 잊혀졌는데 1999년 김유경씨가 번역해서 출간된‘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
에서 신라 불교 까지’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으로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 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 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습니다.
코벨은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 학자들을 동원했으니 미국의 그리피스,
페놀로사, 게리 레저드 등이 코벨 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고, 일본인
학자 중에도 동경대학교 교수 에가미 나미오, 기다 사다기지 등이 한반도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으며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 최태영의 연구 결과가 소개됩니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으며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전혀 없었으며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
까지 오래 살고 싶다” 라고 소망했다니 이 책의 출간으로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게 됐습니다.
일본은 712년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 편찬을 통해 천황(일왕)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
임을 내세웠는데,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하며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고, 스사노오노 미코도
(素尊) 는 신라인인데.....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 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코벨 모자는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났을 때도 국내 어느 학자보다 더 열정적으로
역사왜곡을 파헤치고 비판했으며,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주장해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에가미 나미오 처럼, 기마민족인 부여족의 가야인이 일본에 식민지 미나마(任那)
를 세웠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시대를 가야를 포함해 4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 증거로는 말과 유물 및 유적, 그리고 일본 나라현 이소노가미(石上) 신궁의 칠지도(七支刀) 등으로
칠지도(七支刀)는 무속적인 형태의 칼인데, 칼등에 서기 369년에 해당하는 연대가 있으며 아울러
금으로 한문이 새겨진 칠지도는 실제적인 일본 정벌을 입증해 주는 유물이라고 코벨 박사는 지적합니다.
369년 왜(일본)에는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으며 백제에서도 최고의 지식인만이 당시 동아시아의
유일한 문자이던 한문을 읽고 썼으니, 칠지도(七支刀)는 신공(神功=진구왕후) 이라는 이름의 부여
왕녀가 이끌었던 기마민족이 369년 한국에서 건너가 일본을 정복했음을 확증시키는 자료라고 했습니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동경대 교수는 1948년에 고고학적 연구를 근거로 일본은 4세기 초 가야의
진왕(辰王)이 이끌고 온 기마민족의 후예에 의해 구주가 정복된 다음 4세기 말에 오진왕의
인솔 하에 기내(畿內) 지역으로 진출해 야마토 조정이 건설됐다고 주장했으며,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개리 레저드 교수 또한 346년에 선비족에 의해 멸망된 부여의 전사들 일부가 만주로 부터
한강을 거쳐 가야(任那)를 지나 일본 구주로, 그리고 야마토(大和) 지방으로 이주해 왔다고 말합니다.
홍원탁의 “백제와 대화 일본의 기원” 외에 고 최인호씨는 소설 제4의제국 (3국+가야)에서도 일본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의 족적을 빌려 김해 대성동 13호 고분의 주인공이 일본 10대왕(천황) 인 스진(숭신 崇神
미마키)이라고 말하는데, 에가미씨는 그때까지 일본에 고대왕국이 자생했다는 기존 학설에 도전해 일본은
신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고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온 기마민족이“일본 ”을 세웠다고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야마토(大和)는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천황(일왕)의 궁궐과 수도가 있었던 나라(奈良) 분지를 말하는 것
으로 황실의 직할구역인 기내 畿內 (大和, 山城, 河內, 和泉, 攝津) 5국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부여의 전사는 아예 빼고 백제 인이 일본을 정복하고 야마토 정부를 건설했다
고 수정된 기마민족설을 주장하나 야마토는 가야인이 세운 것이지 백제인이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쿠이현 최남단인 쓰루가 敦賀(돈하) 에는 고대에 호쿠리쿠(북륙) 지방을 수호하던 신사
인 게히진구 氣比神宮(기비신궁) 가 있는데.... 이 항구 도시는 한반도와 인연이 깊으니,
존 코벨의 '한국문화 탐구' 에 보면 1천 6백년 전에 쓰루가에 상륙한 한국인의
자취와 신공왕후(신라인) 와 '용감한 큰 곰 다케치우치노 쓰고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케치우치노 쓰고네 (武內宿 무내숙) 는‘용감한 큰 곰’(712년에 편찬된 고사기를 영역한 도널드 필립
은 무내숙미를 용감한 늙은 곰으로 해석했으며, 그리피스는 다께치우치로 썼다.) 이란 의미로
이름에 내포된 고마, 혹은 곰 이란 말은 조상이 부여 ~ 고구려 사람 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코벨은 일본 3대신사 아마테라스여신의 이세 신궁과 한국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해 스사노오
를 모시는 이즈모 신사에 나라현 텐리시의 이소노가미(石上)신사를 들면서, 부여왕족(백제)
혈통의 여걸 왕녀 신공(神功)이 이끈 일단의 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와 점령후 선진
문명과 기술을 전파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신공을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거꾸로 기술했다고 말합니다.
그외 미국인 최초로 한국사(그리고 일본사를) 를 쓴 그리피스도 1880년대에 후쿠이현 남부
쓰루가에 오게 되었는데... 그리피스가 쓴 책의 앞부분에는 어떻게 해서 바다 너머 들리는
명랑한 종소리를 알게 됐으며 그곳에 애초 부터 있던 두 개의 무속 사당이 신공왕후
와 그 휘하의 장군 다케우치노 쓰고네를 받드는 신토 신사 로 바뀌었는지가 쓰여져 있습니다.
9. 한국 독립을 지지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헐버트는 1863년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미들베리 대학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의 증손녀였는데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 부부,
벙커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
에 들어왔으나 한국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실망하였고 1891년 12월에 귀국합니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9월에 재입국하여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
했으니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 입니다.
조선에 대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정치, 외교에 관심을 가지는중 고종의 신임을 얻어 최측근 자리에서
보좌, 자문하며 미국등 서방 강대국들과 외교에 힘썼으니 한국의 자주 독립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1905년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승만을 파견해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려한 시도와 1907
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이 유명하니 3인의 헤이그 특사에 뒤이어 '제4의 특사' 로 불립니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 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했으니...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는데,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맙니다.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으니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훈장을 받게 되어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습니다.
한글 학회에서는 한힌샘, 주시경을 위시한 국문학자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사람
들이 하는 말을 듣고 3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하게
정리해 1889년에는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쓰니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
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으니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 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
하는 글을 서재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습니다.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
했는데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한달여에 가까운 여행은
역시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에게는 너무 무리였는지 한국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죽은 것입니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으니,
헐버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1999년에 와서야 헐버트 기념 사업회 집행 위원장 정용호가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에 청원한 끝에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넣었습니다.
사실 그가 죽기 전 한국에 온 이유는 고종황제의 내탕금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데,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로 폐위된 고종 황제는 헐버트에게 상하이 독일 은행에 숨겨두었던 내탕금
으로 독립 운동에 투자할 예정이었고, 출국이 자유로웠던 헐버트에게 찾아달라고 밀명을 내렸습니다.
헐버트는 상해로 가서 내탕금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미 고종의 내탕금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일제가
가짜 증명서와 차용증으로 고종의 내탕금을 털어간 상태였으며, 설사 남아있었다고
하더라도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겪은 초인플레이션 문제 등으로 휴지 조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의 비자금 관련 서류는 현재 국립 정부 문서보관서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0. 조선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언더우드 목사 4대
언더우드는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의학공부를 한후 1884년 7월 멀에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었지만, 갑신정변으로 사회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머물러야 했는데, 일본에 머무는 동안 조선기독교인으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한 이수정(李樹廷)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선에서의 개신교 선교를 준비합니다.
1885년 4월 5일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입국했으나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으며,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하였고 그후 성서 번역위원회
초대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에다가 한국 기독교 교육회 회장 등을 역임합니다.
한편 예수교학당(경신중고등학교), 서울 구세학당,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를 설립
하였으며 교회 연합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일을 했는데 1887년에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첫 장로교 교회
인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고 1900년도 초에 개신교 양평동교회를 설립합니다.
북한 지역에 전도여행을 3차례나 하였으며 피어선기념성경학원(평택대학교)에서 1912년
부터 4년간 교장을 역임했고 1887년에 아펜젤러와 함께 마가 복음서의 한글판을
번역·출간하였으며 뛰어난 복음주의 설교가이기도 했으니 기독교 사상에 연재 되는
원두우 설교 집에 따르면 예의 부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알기 쉽게 적었습니다.
원두우(언더우드)는 일제에 의해 반일 인사로 여겨질 만큼 한국 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
였으니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라고 연설
하기도 했으며 친일 성향의 선교사 및 일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 죽었고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 되었습니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서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은 1980년
에 광주 민중항쟁을 해외에 알려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습니다.
11. 조선 여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 목사
헨리 아펜젤러는 188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근대사학인 배재학당(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을 세운 설립자이며, 구한말 한반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업적을 남겼고 아들 도지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딸 엘리스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을 발전시키는데
큰 업적을 남겼는데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으로 입국해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으며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을 모아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
데, 이것이 바로 고종 황제가 이름과 현판을 하사한 최초의 서양식 학교, 배재학당 입니다.
한국에 성서 번역부가 생기자 언더우드·게일 등과 함께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 보라달로마인셔
등 성서의 국역에 참여하였으며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일본배인 구마가와마루와 같은 회사소속인 기소가와마루가 어청도
서북방 3해리 지역에서 충돌해 구마가와마루가 침몰하면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합니다.
시신을 건지지 못한지라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지
는 가묘이며 아들인 H. D. 아펜젤러(亞扁薛羅2世 )도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2. 반크가 발표한 외국인 독립운동가 14명 엽서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50년이 넘도록 국제사회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부르고 있는데 대해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가.... 1999년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 가 설립되어 동해 표기 캠페인을 벌이니
그제서야 뒤늦게 합류하는데.... 그 반크가 외국인 독립 영웅 12명을 선정해 엽서로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1.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일본) (한국명 박문자) -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일제 감옥에서 서거
2. 독립운동가 두군혜(중국) (두쥔훼이) - 독립운동가 김성숙과 함께 한국과 중국 항일운동에 공동참여
3. 독립운동가 루이 마랭(프랑스) - 파리에서 ‘한국친우회’ 창립, 한국독립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 제안
4. 독립운동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미국) - 3.1운동 최초 외신 보도, 유언에 따라 한국에 안장
5. 독립운동가 윌리엄 알더만 린튼(미국) (한국명 인돈) - 군산 3.1운동 지도, 미국 사회 3.1운동 알림
6. 독립운동가 장개석 -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공식 확인 , 한국광복군 창설지원, 독립운동자금 지원
7. 독립운동가 저보성(중국) (주푸청) -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의 피난 도움
8.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영국) - 사업체 이륭양행을 통해 임시정부 교통사무국 활동 지원
9.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미국), -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피난 도움
10. 독립운동가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캐나다) - 언론인으로 보도와 저술 통해 한국 독립운동 알림
11. 독립운동가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미국) - 필라델피아에 ‘한국친우회’ 조직 미국에 한국독립 호소
12. 독립운동가 호머 베절릴 헐버트(미국) - 미국 워싱턴 밀사 활동, 헤이그 특사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