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의 한 토요일였다. 한국에서온 신일교회 합창단과 바뚜아지 벧엘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헌금 순서가 끝난 후 결혼식을 했다. 신랑 마론 형제 내가 가르쳤던 벧엘신학교 5회 졸업생이다. 빈탄섬의 호텔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 영어도 잘하는 친구였다. 신부가 누구일까 궁금하여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고 있는데 신부가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하여 데리고 입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거의 끌다시피하여 제일 앞자리에 앉힌다.
실리똥아 목사는 주례를 시작하면서, 이 결혼은 자신이 격려해서 이루어진 결혼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를 했었다는 설명을 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서약을 하고, 선물교환을 하고, 결혼서명을 한다. 그런데 앉고 설 때마다 옆에서 부축을 한다. 마지막에 신부가 인사를 하는데 나이가 40이 넘어 보인다. "신랑은 겨우 26살인데! 더구나 팔은 거의 마비되고 한쪽 발만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저 형제가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닌가?" 모두가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인사를 마치자 신랑이 나와 영어와 인도네시아로 인사를 하며 간증을 한다. "저의 결혼은 누구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의 선택입니다. 몇 사람이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 저의 신부를 처음 보았는데, 그 때 마음에 닿았습니다. 저의 마음을 얘기했을 때 신부도 놀라며 거절을 했습니다. 얼마간의 기도시간을 갖고 결정을 한 것입니다. 저도 제 아내처럼 평생을 전도자로 살겠습니다....!" 어려운 결단이었음에 틀림없다. 결혼하면 부인이 일어나고, 목욕하고, 밥 먹고, 외출하는 등의 모든 행동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도 평생을..... 누가 즐거이 하겠는가? 그의 간증이 끝나자,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힘껏 박수를 보낸다.
마론, 그는 여성적인 남성이다. 미장원에서 호텔에서 일해 서비스에 능하다. 그러니 잘 부축할 것도 같다. 그는 예수님 영접하기 전에는 동성 연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결혼은 남과 여로서 성적인 결합이라기 보다는 동역자로서의 결합인듯이 보인다. 그 것이 가능할까? 어쨌든 내가 참석한 결혼식 중 가장 생각을 많이 하게한 결혼식이었다.
도와주어서 기쁜 사람들
벧엘신학교 강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내려오니, 부부가 쇼파에 앉아있다. 여자는 찬양을 가르쳤던 여 선생였고, 남자는 벧엘교회에서 많이 본 집사처럼 느껴졌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근황을 물었다. 둘이 결혼을 했고, 까빌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한다. "까빌지역에 교회를 개척?" 좋은 소식이었다. 그 곳에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물어 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파와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까빌 지역으로 향했다.
타이완 공장 뒤편으로 접어드니, 부킷마을이 나타나고, 골목 골목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니 나무로 지은 사택이 나타나고 그 옆에 예배당이 보였다. 벽돌은 다 올라갔고, 지붕을 올려야 될 형편이었다. 제법 튼튼하게 보였다. 벽돌도 더 튼튼하다. "이 벽돌 어디서 구입했나요?"
"저희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직접? 어떻게?" 교회 언덕을 넘어가면 바닷가가 있는데 모래를 글로박에 담어, 밀고 와서, 시멘트를 섞어 직접 찍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덕을 깍아 교회터를 마련하고, 기초를 놓고, 벽돌을 직접 쌓았다는 것이다.
마나룰씨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고, 리아주에 소명을 느껴 바탐섬에 와 알파오메가 벧엘교회에서 부 교역자로 일하다, 부인과 2년전에 결혼하여, 딴중 우반에 파송될 예정이었으나, 그 곳에는 교회가 이미 있는 지역이라, 거부를 하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개척을 위해 기도하다가 우연히 부킷마을로 들어오게 되어, 산에서 나뭇잎을 엮어 움막을 짓고,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혼 후의 신혼을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움막에서 보낸 것이다.
마침 나에게 바탐한인교회 여 전도회에서 헌신예배를 드린다며 설교를 부탁하길래, 여 전도회장에게 부킷마을 교회를 소개하고, 헌신예배 때 건축헌금을 할 것을 제안했다. 흔쾌히 승낙해 회장단들과 방문을 하여, 그 전도사 부부와 같이 기도를 하고, 건축중이 예배당 앞에서 사진을 찍어, 헌신 예배시에 소개를 하며, 헌금을 했다. 지붕을 올릴 금액이 헌금되었다. 기쁨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마나룰 전도사 부부는 그런 사람들이다.
서류를 되찾을 수 있을까?
안식년을 떠나기 전, 뚜나스 바루 학교를 돕던 사라기 부인이 안 하던 일을 저질렀다. 초등학교 학년초에 받은 입학금 및 수업료를 시누랏 교장에게 달래서 학생들 체육복을 산다며 많은 돈을 가져간 것이다. 교장이 그 녀의 집을 방문하며, 돈을 요구해도, 핑계를 대거나, 만나주지를 않고 피해 다녔다. 내가 전화를 해서 만나기로 해 놓고, 그 시간에 전화를 해,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했다며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 녀는 교육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였고, 그 힘으로 뚜나스 바루 초등학교 허가를 내는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들을 지침을 주기도하며, 학교를 돕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토리타 정부에서 일하는 남편이 노름을 좋아했고, 끝내는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다. 그래서 빚이 있어 돈을 빌려달라는 것을 학교 돈은 빌려 줄 수가 없다고 거절을 했었다. 그래서 비상 수단을 쓴 것일까?
안식년에서 돌아오니 그녀는 바탐섬에서 증발했다것이다. 누군가가 그 녀를 고발해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녀의 집을 가보니 그 녀의 식구들은 있는데, 그 녀는 없었다. 말에 의하면 고향으로 갔다는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수속하던 중학교 땅을 오토리타 정부에서 몇가지 서류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서류를 그 녀가 갖고 있는데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중학교 건축허가를 받아야하는데 묶인 것이다.
밤에도 잠이 오지를 않았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주님께 아뢰었다. 몇 주간의 고민 끝에 오토리타 정부에 직접 찾아가는데 갑자기 루벤씨가 생각나 그 집으로 차를 돌렸다. 만나서 상의를 했다. 그랬더니 "걱정마십시오. 저의 사촌 동생이 오토리타정부에 부청장으로 진급했습니다. 더구나 그 비서가 삼부섬교회에 장로입니다. 틀림없이 해결될 것입니다..."
정부 청사에 도착해 부청장실로 갔다. 그 비서인 탄티옥 장로가 반갑게 맞는다. 전화로 미리 연락을 하고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내가 임마누엘교회와 링까섬 건축하는데 도왔고, 대형 발전기를 기증했다는 사실도 들었다며 만나서 반갑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걱정말라며, 그 담당자가 자신의 친 동생이라며, 전화를 하니, 곧 서류를 갖고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정부에 들어간 서류 돌려주지 않는데, 나에게 모든 서류를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나머지 두가지 서류 수속을 하는데도 도와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누가 누구에게 변상을?
뚜나스 바루 중학교 건축을 위해 여 전도회와 남 선교회가 여러 차례에 걸쳐 선교 바자회를 열어 헌금을 모아놨는데, 건축이 시작되지 않는다고 유재정 목사와 손중철 목사를 통해 두 세차례에 걸쳐 재촉을 받았다. 그럴만도 하다. 2000년도에 계획을 세우면서 다음 해에 건축을 한다는 것이 2003년이 되었으니....
건축허가 없이 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중국인, 바탁인, 자바인이 각기 하청 견적을 제출했다. 중국인의 견적이 제일 비쌌고, 바탁인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성의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자바 사람인 빡데씨를 택했다. 그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거의 평생을 건축업에 종사했다 한다. 무슬림였는데, 2년전에 바뚜아지에 교회를 짓게 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한다. 그는 거의 보수를 받지않고, 자재까지 헌물하며 예배당을 지었다. 그가 나를 그 교회 목회자에게 소개해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잡초를 베게 했다. 대지 경계를 나타내는 기둥이 나타나고, 줄을 이어보니 연못들이 26개 가운데 21외에 많은 바나나 나무와 식물들이 있었다. 주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요구하는변상액이 2천6백만 루피아였다. 땅값이 2천만 루피아인데... 배보다 배꼽이 컸다. 우리 땅에서 농사를 지었으니 돈을 우리가 받아야하는데....? 거꾸로 돈을 요구하는데 그것도 한 건 잡았다는 심보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들이 한 사람을 제외하곤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열이 났다. 벌떡 일어나 설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여러 분들의 요청에 의해 여러 분들의 자녀들을 위해 설립이 되었습니다. 여러 분들의 자녀를 위해 중학교를 지을려고 합니다. 그 돈은 여러 분들과 같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됩니다. 저는 선교사로서 그 헌금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도록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여러 분에게 돈을 주면 여러 분들은 혜택을 누리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혜택이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금액을 요구하면, 여러분은 기쁠 수 있지만, 저희들에게는 실망을 줍니다. 여러 분이 양보해 현실적인 가격을 요구하면 저희들도 기쁘고, 주님도 축복을 할 것입니다. 또한 법적으로는 저희가 정부에 땅을 샀으니, 정부가 여러 분에게 보상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정에 의해 변상을 하는만큼, 여러 분들도 한발짜국 양보를 바랍니다......"
그러니 한 풀 꺽여 변상액을 낮추리 시작했다. 하지만 서로가 요구하는 액수가 틀려 결론이 쉽게 나지를 않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접촉을 하기로 하고 모임을 끝냈다. 겸연쩍어 하는 그들에게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는 며칠동안 개인적으로 접촉해, 연못과 식물들을 확인하고 시가대로 변상을 해 주었다. 카톨릭 신자인 시나가씨만은 고집불통였으나 그 집으로 찾아가 다른 사람들의 영수증을 보여주자 그도 서명을 했다.
어린이 신문, WATI
5월2일 금요일였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를 보고 있는데 철문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샬롬!" 문을 열어보니, 전혀 찾아오지 않았던 형제였다. 쇼파에 앉으면서 "아직도 나를 기억하나요?"며 질문을 한다. 낯이 익은데.... "저는 바솜신학교에서 선교사님에게 공부를 한적이...." "오...야 질문을 많이 하던 분이구만...!"
안부를 묻은 후 신문을 보이면서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한다. '에클레시아' 월간 기독교 신문에서 영업담당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린이 선교를 하고 있으니, 어린이를 위한 지면 4 페이지를 담당하는 것이다. 단지 조건은 500부를 소화해 달라는 것이다. 이슬람교에 의해 위축된 인도네시아에서 그것도 바탐섬에는 기독교 신문이 나왔다는 것이 신비였다. 그래서 많은 질문을 던졌다. 2시간이 넘는 대화속에 내린 결론은 어린이 기독교 신문을 내는 것이었다. "아마도 인도네시아에서 최초의 기독교 신문이 되지 않을까?"
먼저 새 직원을 찾어야 했다. 은혜선교회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다 오전에는 복음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하고 있던 사역들도 벅차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문제로 사임을 했던 Robby 를 다시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새로 장만했다. 신문 제작에는 많은 사진이 들어가기에 CD로 구어 신문사로 가져가 인쇄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펜티움 4에, 하드를 40기가로, 메모리를 640메가로, CD롬을 CD Writer로 확장해 CPU를 주문했고, 신문제작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심었다.
8 페이지를 4000부, 월간으로 발행하기로 하고, 담당할 분야를 나누었다. 로비는 기사담당, 아나는 찬양, 율동, 동화, 공작등을 담당하고, 카스만은 기독교교육, 간증 그리고 나는 드라마, 레크레이션등을 담당했다. 그리고 길상목사에게 논설을, 김영숙선교사와 이근수 선교사에게는 고문으로 협조하도록 했다.
3주간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중간에 한 주가 기말 시험이라 아나와 로비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자료를 찾고, 편집 작업을 해야 했다. 로비에게 디지털 녹음기 작동법, 디지털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해 사진으로 문서로 불러 편집하는 법 등을 가르쳤다. 그는 회사에 다닐 때 워드와 엑셀을 다룬 적이 있어 빨리 터득을 했다. 아나와 로비는 영어로 된 여러 자료들을 잘 번역해냈다. 그리하여 예정했던 5월24일 토요일에 자료를 CD로 구어낼 수 있었다.
복음신학교 2학년 생들을 데리고 링까섬에 사역을 하러 26일에 도착해 집회를 하고 다음 날 아침에 인형극을 하는데 김동찬 선교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손중철 목사님이 꼭 보고 가야한다해서 학생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예정보다는 조금 일찍 배를 타고 바탐섬으로 돌아왔다. 안목사님도 같이 와있었다. 셋이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우리 집에 가서 사역 얘기를 하다가 신문 발간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랬더니 손목사님이 그 인쇄비를 주는 것이 아닌가! 자료가 준비가 되니 자금까지....! 주님은 늘 정확한데, 왜 내 믿음 한쪽 구석에서 걱정을 했을까?
바탐포스 신문사에서 일하는 그래픽 편집인을 찾았다. 찾던 사람이 연결되지 않아, 날짜가 지연되자 초조해졌다. 과연 예정했던 1일에 나올 수가 있을까? 새 편집인 우쪽을 28일에야 연결되었다. 그래서 바로 layout에 들어갔다. 4시간이 되어 모든 작업을 마치고, 신문사 인쇄소로 갔다. 가격을 결정하고 CD를 넘겨주었다. 다음 날 인쇄가 되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와, 예정보다 빨리!"
다음 날 아침, 로비가 전화를 했다. 새벽에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페이지 설정이 너무 커서 인쇄를 못했으니, 우쪽을 찾아 수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핸드폰으로 계속연결하는데 연결이 안되어, 그의 사무실, 숙소를 찾아 다녔다. 31일에야 연결되어 수정을 하여 밤에 인쇄 작업에 들어갔다. 6월 1일 아침에 어린이 기독교 신문 창간호, 'WATI'가 탄생을 했다. WATI는 인도네시아에서 흔한 여자 이름인 동시에 Warta Anak Tuhan Indonesia(인도네시아 주님의 자녀 소식)의 약자다.
설레는 마음으로 읽어보니 부족한 점들이 많이 보인다. 안타깝다. 평가회를 KFC에서 했다. 다음 호를 위한 수정 작업을 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주님께 감사를 하며, 기도를 모은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될 수 있을까?"
Camp PKK III
작년에 안식년을 가는 바람에 켐프가 이루어지질 못했다. 재정적으로나 프로그램 진행면에서 아나와 카스만이 하기는 능력부족이었다. 그래서 이제야 3번째 캠프를 맞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진행할려니 두가지가 문제가 되었다. 우선적으로 한국에서 오는 단기 선교팀이 없어 현지인들만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아나를 제외하고는 로비와 카스만 모두가 켐프 경험이 없어 과연 얼마나 감당을 해낼까? 내가 앞장서서 지휘와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 만큼 고생을 각오해야하니 내 몸이 얼마나 감당을 할찌 부담도 되었다.
둘째는 마땅한 장소가 없는 것이었다. 1회때 했던 마리나 시티의 캠프장소가 직원들 숙소를 바뀌었고, 2회때 했던 세이 농사는 더 낚고 폐허화 되었고 게다가 우물물이 바닷물이 섞여져버려 목욕할 물이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고 호텔급을 빌리자니 재정이 문제가 되었다.
여러 곳을 답사를 했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스탶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거의 포기를 하는 쪽으로 방향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서 시골의 초등학교를 빌려 캠프를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래서 회의를 하고 있는 복음신학교 건물로 초청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스쳐 제안을 했더니 고개를 갸우뜽하며 동의를 한다.
사아스로 인해 휴교가 되어 방학이 3주밖에 되지를 않아 방학이 끝나는 주인 7월17-18일로 날짜로 정하고, 주제를 "한 걸음 앞으로!"로 정하고, 6조로 나누어, 각조의 구약의 성경인물을 이름으로 선정하고 각 조의 교사를 선정했다. 6명의 교사를 훈련했다. 주요 강사로는 대학생 선교회의 간사인 짜뚤로 결정했다. 회비는 10,000루피아, 캠프셔츠는 10,000루피아에 원하는 사람만 구입하도록 했다.
준비로는 프로그램을 정하여, 분담하고, 준비를 해나갔다. 카스만은 현수막 2개와 목욕과 잠자리를 위한 시설 당담을, 로비는 식수와 음식, 교통 담당을 아나는 교재준비와 캠프셔츠 준비, 행정, 순서진행을 맡겼다. 나는 캠프 소책자를 발간하고, 켐프화이어 준비를 맡고, 모든 준비를 체크했다.
신학교의 마당을 정리를 해야했다.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튀어나온 돌들을 햄머로 부쉬고, 모래를 깔았다. 자란 풀들을 짧게 깍고, 휴지를 모아 태웠다. 5개의 드럼통을 빌려와 4개의 화장실에 두 개씩의 드럼통을 드려놓았다. 각 화장실마다 양동이와 손 닦는 그릇을 집어 놓았다. 지대가 높아 낮에 물이 나오지를 않아 밤에 잠을 설치며 물을 받았다. 강당을 비롯해 모든 교실들을 청소했다. 돗자리를 30여개 빌려 왔다.
인원이 예상보다는 40여명이 더 등록을 해 우선 명찰부터 더 사와야 했다. 식사주문도 더 했다. 그러니 두 번이나 식사가 예정보다 30분 늦게 도착되었다. 지난 캠프에는 캠프셔츠를 공짜로 주었는데 왜 판매하냐고 불평이 들어왔다. 220명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집회를 하니 그야말로 공나물 시루다. 잠자리도 남자는 강당에서, 여자는 두 교실에 나누어 자는데 그야말로 피난민 같았다. 밤 1시에 엄마를 부르며, 집으로 가겠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잠 안자고 소근대는 아이들, 모기와의 사투, 크게 방귀를 뀌어 배꼽잡는 아이들, 그런가하면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을 해버려 할 수 없이 예정보다 1시간 앞당겨 5시에 아침 경건회를 해야 했다. 그리고는 예정에 없던 체조후에 달리기를 놓어,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햐했다.
복잡함속에서도 프로그램을 활기있게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3년동안 어린이 사역을 하며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던 경험들이 있기에 능숙하게 진행했다. 통역이 필요없으니 더 많은 내용을 나눌 수 있었으며, 더 문화에 맞는 내용들이 전달되었다. 새로운 노래와 율동, 조별 공부와 활동, 게임, 조별 퀴즈대회, 조별장기자랑등은 조원들을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강사인 짜뚤은 아이들을 배꼽잡게 만들며,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 바닷가에 행해진 지난 번의 캠프보다 분위기는 떨어지는 것과 한국 스탶들이 나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을 제외하곤 결코 뒤 떨어지지 않았다.
피곤하지만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뿌듯함이 몰려온다. 마지막을 사진촬영을 하고 모두가 악수를 나눈 후 돌아갔다. 남아서 청소하는 사람들은 스탶들 밖에 없다. 조별 교사들마저도 돕지않고 가버렸다. 로비가 말한다. "이것이 인도네시아 문화입니다." 월급받는 스텦들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신학생들인 조별교사들에게 강사비를 주었는데도... 봉사를 하고 댓가를 기대하는 문화가 교회에도?
죠니 빠데데
그는 부유한 가정에 9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옷감 장사로 시작해 옷 공장, 농장, 병원, 대학교, 호텔, 여행사등을 소유한 수마트라섬의 가장 부자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수카르노 대통령이 "자수성가 장관"이라는 명예 훈장을 수여했을까. 죠니는 많은 것을 가졌기에 누리면서 살다보니 어린시절은 버릇없이 자랐고, 학창 시절엔 축구 선수로, 청년 시절엔 친구들 사이에 보스로서 군림하는 삶을 살았고, 돈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았다. 교회는 부모를 따라 나갔으나, 언제나 삶의 초점은 세상에 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간청을 하는 바람에 여 의사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여자, 술, 마약, 도박을 하는 세상적인 삶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바탁족의 풍습에 따른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주 재산권이 그에게 넘어왔다. 그의 방탕함 속에 하나님의 경고가 3번이나 그에게 다가왔다. 태국의 파타야에서 수영하다 죽을뻔 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했으나 어깨 뼈만 부러졌다. 세 번째는 IMF의 여파로 호텔 경영이 어려웠을 때 그의 모든 형제들이 팔자고 압력을 놓으며, 재판이 붙었는데 대 법원에서 극적인 승소를 하자 그의 형제들이 깡패들을 사주해 5군데나 칼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재빠른 응급처치로 살아나게 되었었다. 많은 것을 가졌기에 평안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2001년 중반부부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까닭없이 시름시름 앓으며, 화장실을 하루에 20번 이상 오고 가야했다. 싱가폴까지 가서 정밀검사를 받게되었다. 담당 의사가 암이 될 가능성을 언급하자, 비로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 어떻게 회개하나를 물었다. 목사님을 만나 기독교 기초과정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진정한 회개는 사람들과의 화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다. 부인도 진실된 그의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서게 되었다. 그리고는 두 자녀들과 함께 주님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만나는 목사님들에게 자신이 회개한 것을 기쁨으로 알렸다. 그때에 어떤 목사님이 "당신을 찌른 형제들과 화해하라!"는 충고를 했다. "나를 찌른 형제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고? 더구나 여자 형제들에게 까지? 바탁 풍습이 아닌데!!!" 부정을 할수록 성령의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찌른 형제들을 일일이 찾아가 용서를 구하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는 모두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 예배를 드리며, 간증을 했다. 모두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재산 분쟁으로 10여년간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9 형제들이 하나가 되었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망나니였던 죠니의 간증을 통해, 많은 것을 가졌기에 분쟁하며, 교만하며, 평안이 없었던 형제들 모두가 화평을 찾게된 것이다.
목회자 세미나
목회자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선교의 부담감이었다.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들을 양성하고 있었지만, 목회자들을 교육하는데는 전적인 헌신이 없었다. 그 이유는 초청한 모든 목회자들에게 숙소와 식사 그리고는 돌아갈 차비를 제공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GP선교회의 김영숙 선교사가 2년에 한 번씩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섬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2003년 8월 중순경이었다. 메단시에 부흥회를 인도하러간 실리똥아 목사가 전화를 했다. 메단시에 매달 목회자 세미나가 열리는데 강사로 올 수 있냐는 것이다. 기쁨으로 수락을 했다. 9월초에 메단시로가 하룻밤을 지낸 후 다시 비행기로 니아스섬으로 갔다. 니아스 종족 목회자들이 200여명 모였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통한 교훈," "세계선교의 현황과 그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4시간 강의를 하며,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다. 10월초에는 메단시에서 시볼가 목회자들 80여명, 11월 초에는 만달링 목회자들 100여명, 12월 초에는 아쩨주의 목회자들 120여명에게 강의를 했다. 1월에는 새해 명절이라 쉬고 2월부터 다시 시작된다.
실리똥아 목사와 목회자 교육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아쉬움을 나누었었다. 그런데 그 재정적인 아쉬움이 현지인 죠니 빠데데씨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었기에 감사함이 더욱 컸다. 그가 숙식등 모든 경비를 부담한다. 그는 호텔, 체육관, 여행사, 병원등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며, 선교회까지 조직해 전문성있게 섬기고 있는 것이다. 세미나가 열리는 밤에는 체육관이나 운동장에서 전도집회, 부흥회를 연다. 뿐만 아니라 실리똥아 목사와 함께 북수마트라의 각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간증 및 전도집회를 한다. 물질과 몸 그리고 시간을 드리는 전적인 헌신을 하고 있다. 올해까지 집회를 연다는 그의 계획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주님이 오실 때까지로 연장되었다. 주님이 계속 문을 여시길...
목회자 세미나에 강사로 단상에 설 때마다 느껴지는 고백. "부족한 내가 이 자리에 섯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모든 일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남을 느끼게 됩니다. 늘 건강하시구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랑합니다. (률이네 가족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