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부처님오신 날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거룩한 삼보에 귀의하옵니다.
엊그제 비에 얼룩진 상처로 그리워하던 태양빛은
어느새 지겨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환경에 순응하여 조화를 이루어 행복을 느끼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자기 수양을 하며
일상생활이 그대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되도록 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
모두 열반의 안온한 삶의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불자의 막중한 임무이자 목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헌데 막상 이를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현대처럼 다양한 문화 속에서 다양한 취미를 가진 이들을
어떻게 이끌어 만족시키느냐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대일 수행과 포교의 방법입니다.
이것은 이미 부처님께서 실행하셨던 방법이고
여전히 가능성 있어 보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자 스스로의
확고한 자기 갖춤과 적극적 동참의식이 요청됩니다.
재가불자란 사부대중 가운데 우바새와 우바이를 말하는데
부처님과 같은 종족이면서 재가제자인 마하남이
부처님께 “어떤 것을 우바새 라고 합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세속에 살고 있으면서 청정히 닦고 익히고
깨끗하게 머물러 남자의 모양을 원만히 이루고
‘나는 지금부터 목숨을 마칠 때 까지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뀌의하며 스님들께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사오니
저를 증명하여 알아 주소서’ 라고 말하는 이를
‘우바새’ 라고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믿음을 원만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여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근본으로 삼아 견고하게 움직이지 않아서
어떤 사문 바라문 하늘 악마 범과 그 밖의 다른 세간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어야 합니다.
둘째, 계를 원만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우바새는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 음주를 여의고
그것을 즐겨 행하지 않습니다.
셋째, 들음을 원만히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지니고 들은 것을 잘 기억해서 쌓아두는 것이니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으며 의미도 좋으며
순일하게 원만 청정하여 범행이 청정한
부처님의 말씀을 다 갖추는 것입니다.
넷째, 평등을 원만히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색하고 더러운 번뇌에 얽히고 즐거이 재물을 버려
평등이 보시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지혜를 원만히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혜를 원만히 갖추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 그대로를 알고,
이것이 괴로움을 발생하는 원인임을 알고ㅡ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그대로를 알고 ,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재가불자는 늘 이와 같이 삼보를 공경하고 오계를 지키며
부지런히 설법을 많이 듣고 기억하며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사제를 알아 지혜를 닦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가자나 출가자나 별 차이가 없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출가제자는 수행에만 전념하고 재가제자는
일상생활을 겸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러면 재가불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우선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방편으로 써 깨끗한 계를 원만히 갖추며
보시를 닦아 익혀야 합니다. 일심으로 바른 법을 듣고 받아야 하고
그 깊고 묘한 뜻을 잘 관찰해야 하며 그 법에 수순할 줄 알아야
모든 우바새의 일을 원만히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모두를 자신 뿐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우바이의 해야 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바새는 바른 믿음을 원만하게 갖추고
그것을 다른 사람도 건립하게 하며
제자신도 깨끗한 계를 가지고
또 깨끗한 계를 다른 사람에게도 건립하게 하며
제 자신도 보시를 행하고
다른 사람도 보시를 행하게 한다.
제 자신도 절에 나아가 모든 스님들을 뵙고
다른 사람도 절에 가서 스님을 뵙게 한다.
제 자신도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다른 사람도 또한 듣게 하며
제 자신도 법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도 받아 지니게 한다.
제 자신도 이치를 관찰하고
다른 사람도 관찰하게 한다.
제 자신도 깊은 뜻을 깨달아 법을 따르고
법을 향해 수순하여 닦아 행하게 한다.
이와 같은 열여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그것을 우바새가 제자신도 편안하고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일상 신행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을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 불법의 벗이 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수행의 과덕은 어떨까요?
흔히 막연하게 신행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적어도 불자라면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경전의 내용을 보면 일상생활을 하면서 근본 번뇌를 버리고 청정하게 살아가는
이와 같은 깊고 오묘한 공덕을 얻을 수 있는 말이 많습니다.
대승불교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듯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고 하며
이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개인적 삶의 형태를 바꾸어
자기를 없앤 상태에서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한 행복감은 언제나 남아있는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욕구가 적멸한 상태여야 하는데
대승불자들은 이런 생각을 넘어 이타적 마음을 가지고
동체대비 (同體大悲)를 전제로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는
원대한 서원이 필요합니다.
또한 스스로 지은공덕을 부처님과 일체중생과 깨달음으로 회향하는
아름다운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이면서 부처님을 닮아가는 생활의 지침이고,
연기의 다른 표현인 공(空)의 실현입니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재가불자는 문(聞) 사(思) 수(修) 라는 기본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초기불교의 최상목표인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는
열반을 증득함과 동시에 개인의 삶을 완전히 버리고
이타적 삶을 지향합니다. 그렇듯 재가불자도 이러한
의식전환 없이는 최상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으며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과도 요원하게 될 것입니다.
보살이란 구체적으로 삶의 형태가 완전히 이타적인 사람이며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며 부처가 되고자 노력하는 불자입니다.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해탈열반의 개인적 성취로 만족했으나
대승불자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일체중생이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사무량심과 육바라밀 또는 십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사섭법으로 일체중생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어진 공덕과 지혜도 또한 집착하거나
자기 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향해서,
일체중생을 향해서, 법계를 향해서 돌려야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존재가 행복할 때, 깨달음을 성취하였을 때
함께 행복하고 완전한 무분별지의 반야 세계에 동고동락하며
함께 청정한 국토에 살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불국정토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상보다는 실천이 중요함을 깨닫고
무엇을 하든 세상에 이익을 주면서 같이 기뻐하고 고달파하고
함께 어울리면서 허공같은 중생을 위해 최상의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
그리하여 이 땅, 내가 존재하는 이곳이 바로 부처님의 본래도량이고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확인시키는 참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 - 보은정사 서원스님)
출처: 아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