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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오승철 시조시인 추도기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5월 19일 아침 김순이 시인께서 오승철(67) 시조시인의 별세 소식을 이메일로 알려 주셨다. 메일을 읽는 순간 허탈감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병상에 있어서 각오는 했었지만 그 각오가 면역이 되기 전에 찾아온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오승철 시인에게 생사의 갈림길을 좌우하는 병마가 엄습했다.
"한번 보고 싶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항공편이 단절되어 가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이 풀리면 당장 가겠다고 위로 메일을 보냈을 때 오승철 시인의 회답이었다. 지난해부터 서울만이 아니고 제주행 항공편도 날마다 왕복 편이 있었지만, 당장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루고 있었다.
지금, 허탈감과 회한이 전신을 휘감고 있다. 왜 약속대로 가서 만나지 못했는가 자문자답 속에서 이 회한은 필자의 일생에 옹이처럼 박힐 것이다. 그렇다면 장례식에라도 참가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되물음이 화살처럼 날아올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도 장례식에 참가 못하는 나는 또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하는 자기혐오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사무실 가까운 곳에 '오지조상'이 있다. 한국의 성황당 같은 곳이지만 일본에는 도시 속에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오승철 시인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오지조상 앞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면서 완쾌를 기원했었다. 오승철 시인은 가톨릭 신자지만 나는 샤머니즘이라고 할지 모르는 오지조상 앞에서 빌었다.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빌었다. 병상에 있을 때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의 바람은 완쾌에서 명복의 기원으로 바뀌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마음을 솔직히 오승철 시인에게 메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오승철 시인은 고맙다면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보내온 메일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27일 메일이었다. 나에 대한 시 두 편을 오승철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을 내는데 게재해도 좋은지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면서 보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가 발행하는 통일일보 오사카 지사장이 제주, 함덕 출신으로서 필자와 아주 친했었는데 어떤 일로 크게 다퉈서 소원한 관계 속에 그는 함덕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었다. 그 선배 부부와 세화 오일 시장에서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
미로와 같은 시장 골목길에서 우리는 서로 깜짝 놀랐다. 이것을 기회로 소원했던 감정의 앙금이 자연 소멸되어 예전과 다름없이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가 살고 있는 함덕집에 오승철 시인과 가게 되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주제로 쓴 <어. 어. 어>라는 시였다.
어. 어. 어
재일동포 한씨. 신씨
오사카에서 대판 싸워
거의 일 년 동안 등 돌리고 살았는데
물 건너 세화 오일장 딱 마주쳤네 어. 어. 어
또 한 편은 <이쿠노 아리랑>이었다.
이쿠노 아리랑
재일동포 소설가 깡다귀 김길호씨
세화장 한 켠 같은 이쿠노 쓰루하시 시장
좌판의 싸락눈 소리 오락가락 제주 사투리
나는 영광이라고 회답을 보낸 그 후에 소식 없이 지냈다. 오승철 시인이 지난 2월에 제주문협회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에 축하보다는 무모하다는 걱정이 앞섰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고 회장직을 맡았다는 사실에 솔직히 찬성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데 3월에 새로운 시집 <다 떠난 바다에 경례>가 나왔다.
언제나 새로운 시집이 나오면 바로 보내 주었었는데 이번에는 시집이 오지 않아서 코로나로 우편물이 지연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충격적인 별세 소식이었다. 제주문인협회 회장직을 맡고 3개월 만이었다. 취임했을 때부터 혹시나 했지만 오승철 시인은 스스로가 굳게 각오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만이 아니고 조직면에서도 현역으로서 장렬한 전사의 길을 택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시집 빨리 보내 달라면서 7월 이후에 제주에 가겠다고 지난 달 메일을 보냈는데 이것이 마지막 메일이 되고 말았다. 오승철 시인 부인이 제주시 연동에서 경영하는 <24시뼈다귀탕> 가게에서 비록 그는 못 마시겠지만 같이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벽에 걸려 있는 시들을 읽을 수 있는 7월의 꿈은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아주 오래 전에 그 가게에 처음 갔을 때 넓은 식당의 벽에는 메뉴판만이 초라하게 걸려 있었다. 오사카에 돌아온 나는 큰 공간으로 그냥 남아 있는 가게 벽에, 제주 문인들이 쓴 시들을 걸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읽을 수 있도록 권유했다. 잘 알았다면서도 좀처럼 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걸지 않으면 절대 가게에 가지 않겠다고 반협박성의 권유를 다시 강하게 요청했다.
그 후에는 벽에다가 여러 시인의 작품을 걸고 있어서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오승철 시인은 자리 요리를 좋아하는 필자에게 위미리에서 형님이 식당을 하는데 자리 요리만은 일류라고 했다. 가보지 못했지만 그 가게를 오사카에서 인터넷으로 조사해 보니 나왔다.
자리 요리 평이 좋다는 그 자랑보다 가게의 벽에 오승철 시인의 <비양도> 시가 걸려 있어서 필자는 흥분할 정도로 기뻤다.
제주 향토요리 전문집에 제주의 시가 걸려 있다는 그 풍경이 식문화와 어우러져 이국적이고 독특한제주 문화 향기를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오승철씨 부인이 경영하는 가게를 오랜만에 인터넷에서 열어보았다. 벽 전부에 시가 넘쳐나고 있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야! 하는 감탄사와 울컥하는 감동이 어우러져 튀어나왔다.
이번 제주 갔을 때, 오승철 시인의 여운이 넘치고 있을 그 가게에 가서 시를 읽으면서 독백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리라. 언제나 잔잔한 오승철 시인의 미소는 언제나 포근함으로 주위를 품어 주었다. 그 환상을 나는 그리면서 찾아갈 것이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필자가 좋아 하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사고 싶은 노을>이다.
사고 싶은 노을
제주에서 참았던 눈
일본에서 다시 온다
삽자루 괭이자루로
고향 뜬 한무리가
대판의 어느 냇둑길
황소처럼
끌고 간다.
파라, 냇둑 공사 다 끝난 땅일지라도
40여 년 <4.3땅>은 다 끊긴 인연일지라도
내 가슴 화석에 박힌 사투리 쩡쩡 파라
일본말 서울말보다
제주말이 더 잘 통하는
쓰루하시 저 할망들 어느 고을 태생일까
좌판에 옥돔의 눈빛 반쯤 상한 고향하늘
"송키" "송키 사압서" 낯설고 먼 하늘에
엔화 몇 장 쥐어주고
황급히 간 내 누님아
한사코
제주로 못 가는
저 노을을 사고 싶다.
그렇게 엔화 몇 장 쥐어주고 난 누님은 일본에서 돌아가셨다. 지금쯤 오승철 시인은 만나고 있을 것이다. 두 분의 명복을 함께 비는 바이다.
한국 시조시인을 대표하는 오승철 시인은 195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출신.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겨울귤밭>으로 등단. '개닦이' '누구라 종은 흘리나' '터무니 있다' '오키나와 화살표' '사람보다 서귀포가 그리울 때가 있다' '다 떠난 바다에 경례' 등이 있고, 중앙시조대상, 오늘의 시조작품상, 한국시조대상, 고산문학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서귀포문인협회회장, 오늘의 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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