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는 형제(빌레몬서)
2023. 8. 20. 주일오후예배
이 시간 빌레몬서 말씀을 통해서 ‘사랑 받는 형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빌레몬서는 골로새교회를 섬기고 있는 빌레몬 형제에게 사도바울 선생님이 성령의 감동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그 집안에 잘못을 저지르고 옥에 갇혔을 때 마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곳에 투옥되었던 사도 바울 선생님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제 주님 안에서 귀한 형제가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그동안 멀어졌던 이 두 사람의 관계를 한마음 한뜻으로 맺어주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한 장밖에 안 되는 짧은 성서이지만 되새겨볼 내용이 많은 성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사랑 받는 형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처음의 인용은 빌레몬을 가리킨 말이고 중간에 또 나오는 말은 오네시모를 가리킨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을 무엇보다도 사랑 받는 형제로 세우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빌레몬서에서 사랑 받는 형제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사랑을 주는 형제
빌레몬서의 내용을 보니까 빌레몬은 곁에 있는 성도들과 믿음의 교제를 했고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선생님도 빌레몬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증언합니다. 달리 말해서 빌레몬, 그는 사랑을 주는 형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일방적일수는 없고 쌍방통행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특이한 사랑이지요. 그들도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았는데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다윗은 요나단 사랑하기를,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기를 더 깊이, 더 월등하게 했다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자손들까지도 이 형제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언약을 맺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기분에 따라 주는 사랑이 아니라 언약적인 사랑을 주는 형제라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을 받는 형제인가는 내가 사랑을 줄 때 증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고 했지요. ‘사랑을 주는 형제’가 우리의 대명사가 되기를 소원해봅니다.
둘째, 참된 변화(무익한 자가 유익한 형제로)
무익한 자가 유익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변화라 할 수 있겠지요. 사도 바울 선생님은 오네시모를 가리켜서 저가 전날에는 너에게 무익한 종이었는데 이제는 너뿐만 아니라 나에게 유익한 형제가 되었다고 오네시모의 변화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만큼 변화되었는가!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 선생님의 심복이 될 정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의 서신이 여러 편 있지만 어떤 형제를 내 심복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기에 처음이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이 무슨 아름다운 말로 설득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으로 그에게 전도했을 때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된 것이겠지요. 이처럼 복음은 우리 옛사람을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오늘 많이 참여하셨는데, 복음만이 그 나라의 희망이고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도, 청장년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마치 주님이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듯이 우리가 주님에게 필요한 새사람이 되는 거지요. 주님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형제에게도 꼭 유익을 주는 필요한 사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공산주의 국가 시절에 루마니아 감옥에서 16년간 옥살이를 했던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갇혔던 감방이 4호실이었습니다. 그 4호실 감방은 별명이 죽음의 감방이었어요. 중형자들이 들어와 있었고 또 사형수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죽음의 그늘이 있었던 곳인데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 한 분 때문에 그 살벌한 4호실 감방이 천국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이가 주고 간 각설탕을 서로가 먹지 않고 옆의 사람에게 전달하면서 몇 달째 빙빙 돌려지다보니 시커멓게 변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 험악한 사람들이 변하여 다 새사람이 된 것이지요.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에 지금 천국 가신 이천은 목사님이 청소부로 병원에서 5년간 노역했습니다. 1년 후에 병원장이 이천은 목사님을 불렀어요. “당신이 우리 병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아십니까?” 그러자 “잘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병원장은 이 병원 병동 곳곳에서 찬송과 기도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데 병원을 청소하라고 했더니 교회로 만들었다고 했지요. 주님이 하신 일이었다고요. 이천은 목사님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해와 같이 밝은 모습으로 병원을 청소하고 다닐 때 사람들이 물어보지요. “당신 왜 그렇게 얼굴이 밝습니까?” “네, 이유가 있습니다. 이야기해드릴까요?”하면서 예수님을 전했던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전도 받고 변화되어서 그곳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우리는 직접 들었습니다.
셋째, 천국은 인격적인 관계
천국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사도 바울 선생님은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를 받아들이기를 자신을 영접하듯이 귀하게 영접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라는 권위로 명령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가까운 형제이기 때문에 빌레몬의 승낙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레몬이 충분히 자유로운 마음으로 헤아리고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놓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안에서도 주님의 인격처럼 천국을 소유한 형제들이 맺는 관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자신을 낮추고 형제를 높이는 마음은 이것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형제의 마음은 쌍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허락을 구하는 마음, 강제로 어떤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의로 될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 이것이 인격적인 관계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찾아온 병자들에게 그 말을 꼭 물어보시지 않습니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낫기를 원해서 왔겠지만 다시 한번 그의 자유의사를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왔는지! 낫기를 원한다고 할 때 네 믿음대로 고쳤다고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주님을 위하여 함께 갇힌 자
사랑을 받는 형제의 뿌리는 주님이십니다. 빌레몬서 1장 처음에 사도 바울 선생님은 자신과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주님을 위해 갇힌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감옥에 있지만 디모데는 자유로운 몸인데도 불구하고 갇혔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 위해서 좁은 길을 걷는 자라는 뜻이지요. 또한, 편지의 마지막 즈음에는 주님 안에서 함께 갇힌 자 된 에바브라, 함께 주님 모시고 좁은 길을 가고 있는 마가, 아리스다고, 누가 등의 귀한 형제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 주님을 위해서 함께 갇힌 자들이지요. 「언덕 위의 찬송」 가사에도 우리가 사도 바울 선생님처럼 ‘그 웅장한 높고 깊은 설교는 못 할지라도 주님 위해서 깊은 감옥에는 기꺼이 갈 수 있다’는 형제의 뼈있는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님을 모시고 섬겨가는 오늘의 길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오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실 영광입니다. 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자 바벨론 느브갓넷살 왕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보여주는 그 믿음의 길, 함께 십자가를 지는 길은 우리에게 보여지는 교훈이 많습니다.
다섯째, 은혜와 평강
어제와 그제 이웃 나라에서 의사고시를 본 우리 형제가 카톡으로 의사고시를 마치고 나서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금요일날 본 의사고시는 좀 어려웠나봐요. 토요일은 좀 쉽게 나왔다고 했는데 어렵든 쉽든, 합격이 되든 불합격이 되든 관계없이 시험을 치루면서 주님이 은혜로 강하게 붙잡아주시고 평강 가운데 인도해주신 것이 깊이 감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사랑하는 형제에게 가득 넘친 것이 감사가 됩니다. 할렐루야! 이 빌레몬서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 선생님의 보내신 각 서신서에도 서문에는 공통적으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인사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와 평강을 주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사도 바울 선생님이 이것이 너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그리고 몸 된 교회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담아서 보낸 편지들이라 생각합니다. 이 은혜와 평강은 우리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세상에서 구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께로부터 그 보좌를 바라보고 있는 주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요 평강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주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지요. 은혜와 평강, 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잘 아시는 사도 바울 선생님은 우리에게도 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시고 당시의 형제들에게도 강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조금 연약함이 있거나 가난함이 있거나 외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 속에서 살아가는 형제, 걱정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담대합니다. 바로 주님의 사람으로서 걷기 때문에 말입니다.
마지막 여섯째, 형제를 위해 기도하며 섬김을 준비하는 마음
형제를 위해 기도하며 섬김을 준비하는 마음은 사랑 받는 형제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형제 빌레몬과 그 집에 있는 골로새교회 형제들이 자신을 위한 처소를 준비할 것을 연락했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처소를 준비하는 것이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매개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예 부탁도 하지 않겠지요. 사도 바울 선생님의 인격으로는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담을 주려고 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충분히 이 마음을 알아줄 빌레몬에게는 자신을 영접하고 섬김을 준비하는 마음을 연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베다니촌 나사로의 집에 가실 때마다 언제든지 기쁨으로 영접하고 기다리는 형제 자매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친구 나사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수넴 여인도 엘리사 선지자와 그 일행을 위해서 남편의 허락 속에 집 담장 위에 조그만 쉴만한 방을 마련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쉴 수 있도록 주밀하게 준비한 것,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요. 많은 사람에게 능력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지혜로 세상을 통치하는 모습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 형제에게 쉴 수 있는 작은 처소를 마련한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 선생님은 빌레몬과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주님의 길이 열리고 여러분의 기도, 형제의 기도로 말미암아 내가 나아가기를 원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주님의 마음과 형제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랑 받는 형제, 이 말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 선생님도 해당됩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자들 앞에 부활의 증인으로 보내시면서 “내 형제들에게 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1장에서는 사도 요한 선생님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지만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라고 따뜻하게 자신의 위치를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의 길 속에 서계신 예수님과 사도들의 길을 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라는 복된 길에 서 있고, 이 ‘사랑 받는 형제’라는 아름다운 대명사가 우리의 이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