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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선교의 개척자 이기풍 목사의 딸 이사례 권사 간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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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섬이나 농촌 시골교회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하시던 개척교회 목사였기 때문에 내가 어린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이삿짐에서 아버지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셨던 물건은 큰 벼루와 먹, 그리고 아주 큰 붓과 중간 붓, 다음에 제일 가느다란 붓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소중한 물건은 아주 무거운 맷돌이었습니다. 맷돌에다 콩을 갈면 두부가 되고, 비지가 나왔고, 녹두를 갈면 맛있는 빈대떡이 되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섬에서 육지로 이사를 갈 때도 이 무거운 맷돌을 꼭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물건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집 안방 벽에 걸어 놓았던 가훈이었습니다. 제일 왼쪽에는 한글로 크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쓴 말씀이었고, 그 옆에는 두 마디씩 한문으로 세장을 붙여놓았기 때문에 아주 어린 시절에는 이 글을 그림처럼 구경만 했습니다. 그러나 5학년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나를 앉게 하시더니 세 가지의 글귀를 하나씩 읽어주시며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글은 관용이었고, 가운데 글은 백인, 맨 오른쪽은 겸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관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례야, 네 친구가 아주 슬프고, 고통을 당할 때에 즉시 그 친구의 슬픔과 고통을 네 슬픔으로 바꾸어 생각하고, 즉시 그 친구를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을 관용한 사람이라고 한다. 두 번째 백인은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잘 참되 열 번, 스무 번, 혹은 오십 번이 아니고 백 번이라도 참고 견디는 것을 간단하게 백인이라고 한다. 세 번째 겸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너보다 낫게 여기고 네 친구를 항상 칭찬해 주는 마음을 가질 때 겸손한 아이라고 인정을 받게 된다.” 아주 쉽게 설명을 해 주신 이 말씀이지만 85세가 된 이날까지 제 일기책에 써놓고 매일 몇 번씩 읽어보며 아버지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아주 관용하신 분이셨습니다. 청년 시절 예수를 믿은 후에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나셨기 때문에 더욱 관용하신 아버지였습니다. 항상 상대방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즉시 행동으로 옮기시어 때로는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끝까지 상대방을 도와 주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7년에 한국 초대로 일곱 분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독노회가 조직이 되고, 1908년 2월 달에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렀고, 같은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완전히 말과 풍속이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제주도에 도착하자 제주도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 양귀신을 가르치는 야소교 목사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보려고 접근해 보았으나 무조건 도망을 가버렸다고 합니다. 도망을 가버린 원인은 몇 년 전에 대원군이 천주교 신도 만 명을 학살했기 때문에 예수라는 예자만 들어도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으지겐”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달아난다’는 뜻입니다. 야소교를 믿으면 무조건 죽임을 당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야소교를 퍼뜨리는 자에 대한 인식이 나빴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제주도에 아주 큰 홍수가 나서 관덕정 옆으로 흐르고 있는 냇물에는 급물살에 돼지가 떠내려 오고, 고리짝도 내려오며, 어떤 집 한 채는 산산이 부서진 채로 떠내려 왔습니다. 제주도 주민들은 양쪽으로 늘어서서 이 가슴 아픈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저 위에서 사람이 떠내려 온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상류 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40대나 되어 보이는 여인이 큰 통나무가지에 매달려 떠내려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 대열에서 가슴 아픈 광경을 보고 계셨던 아버지는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여인을 발견한 즉시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속바지만 입은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가까이 오는 순간 죽음을 각오하고 물에 첨벙 뛰어 들어가서 있는 힘을 다하여 이 여인을 언덕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평양 대동강에서 헤엄쳤던 실력을 여지없이 발휘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주민들은 너무나도 놀라서 숨을 죽인 채 도대체 저자가 누구인가를 살폈습니다. 제주도 주민들은 아버지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도 자기들이 박해했던 야소교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제각기 한 마디씩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양귀 신을 믿으라는 야소교 목사란 자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 “거참 대단하군” 이때부터 주민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크나큰 홍수를 통하여 교회에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마침 길거리에 지나가던 미치광이를 데려다가 기도한 즉시 귀신이 나가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을 보게 되자 이곳저곳에서 앉은뱅이, 소경 등으로 고생하는 신체장애인 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제주도 전체의 전도계획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우선 교통편으로 조랑말 한 필을 구입해서 말을 타시고 한라산을 한 바퀴 도는데 한 달이 걸렸다고 합니다. 밤중에 인가를 만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를 않아서 마구간에서 주무실 때가 허다했고, 매 끼니 식사를 못할 때는 흘러내리는 물로 배를 채우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깊은 시골에 있는 초가집에 들어가서 깜짝 깜짝 놀란 이유는 크나큰 구렁이를 부뚜막에 놔두고 밥을 먹인 후 천정에 뚫어진 구멍 속으로 기어 올라가게 하는 광경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주민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이 구렁이가 자기의 집을 지켜주는 신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뱀의 칭호에도 존칭어를 붙여서 가시님 혹은 뒷집 하라방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구렁이가 쓸쓸 기어서 마당으로 들어오면 반가워서 “어서 옵소겐” 하고 맞아 들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미신타파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매일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라산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오신 후 집집마다 섬기고 있는 구렁이를 때려죽이기로 결심을 하고 튼튼한 긴 몽둥이를 준비하여 조랑말에 싣고 제일 구렁이를 많이 섬기는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낮이 되어 모두들 밭에 나가고 없어서 마루에 앉아서 먼저 기도를 드리고 나니 어느 방에서인지 어린 아이의 신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 온 몸이 불덩이 같이 되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 급히 끌어안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아이를 자리에 뉘어놓고 밖으로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크나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동그랗게 말려서 부뚜막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지고 온 큰 몽둥이를 두 손으로 꼭 붙들고 구렁이의 머리를 겨냥해서 힘껏 후려쳤습니다. 그 순간 구렁이가 성이 나서 꿈틀거리며 마당으로 기어나갔습니다. 아버지는 구렁이를 따라다니며 머리통을 계속 후려쳤습니다. 끝내 구렁이는 마당 한 가운데서 길게 뻗어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 구렁이를 때려 죽였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해가 질 무렵까지 이집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해가 질 무렵 집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집주인이 마당에 들어서자 길게 뻗어 있는 구렁이를 보더니 살기가 찬 음성으로 “어떤 놈이 우리 가시님을” 하고 고함을 지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침착하게 제가 죽였습니다고 말하자마자 “우리 가시님이 죽었으니 네 놈도 죽어봐라” 하고 달려들더니 아버지의 목덜미를 있는 힘을 다해서 조아 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주님만 부르짖었습니다. 1분만 더 조이면 숨이 막혀서 죽어 버리게 될 찰라 에 고개를 들었습니다. 방문을 열어보니 죽을 줄 알았던 귀한 아들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집주인은 그 아이를 번쩍 앉았습니다. “이것이 웬일이냐, 네가 걸음을 다 걷다니, 아버지는 애기를 안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그 아이는 ‘저 아저씨가!’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아버지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이렇게 소란한 소리들이 들리게 되자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동네 사람들이 이 집 마당으로 몰려 들어와서 길게 늘어져있는 구렁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 구렁이가 여러분의 집을 지키는 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가 이 집에 와서 애기의 신음소리를 듣고 들어가서 불덩이 같은 애기를 안고 기도를 드리고 나왔더니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구렁이를 믿지 마시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천년만년 뜨거운 지옥 불에서 죽지도 아니하고 고생합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으시면 구원을 받고 빛나는 영원한 천국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서 전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게 된 어린 아이를 통하여 이 가정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제주도 변두리에 있는 시골 농촌지역에서 가을추수가 끝이 나고, 추운 겨울에 방안에 모여 앉아있는 시기를 이용해서 틈틈이 변두리 농촌 지방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때로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으시고 전도한 결과 제주도 사역 13년 동안에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기독교학교인 영흥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하고 제주 시내 성내교회를 시작으로 삼양교회, 내도교회, 금성교회, 한림교회, 협재교회, 두모교회, 용수교회, 고산교회, 모슬포교회, 동문교회, 법환교회, 성읍교회, 세화교회, 조천교회 이상 열다섯 군데의 작고 큰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내가 세살 때 아버지가 제2차 제주도 선교하실 때 따라 와서 9살 때(3학년)까지 살다가 그 후 벌교라는 전남 시골 교회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 벌교 역시 벌교교회를 시작하여 낙안 낙성 무만동 잣고개 이렇게 다섯 군데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셨습니다.
나는 제주도에서 지나던 어린 시절에 현재 제주도 성내교회의 목사관에서 자라났습니다. 이때에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평생 제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유치원 시절에 아버지가 새벽기도회에 가셔서 식사 때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을 때 아버지를 모시러 심부름을 가끔 다녔습니다. 하루는 교회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버지의 큰 음성이 들렸습니다. 강대상을 부여잡으신 채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라고 큰 소리로 울면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나는 문간 옆에 있는 신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버지가 울고 계시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순교하시는 날까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라는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성내교회에 유물로 남아있는 강대상을 볼 때 아버지의 눈물 어린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두 번째 가훈은 백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달게 참으셨습니다. 1907년에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받으신 후 즉시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서 인천까지 걸어오신 후 인천에서 조그마한 동선을 타시고, 서해바다를 건너 목포까지 왔습니다. 이때도 풍랑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말씀을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목포에다 어머니를 두시고 1908년 2월 달에 아버지 홀로 제주도를 향하여 돛단배를 타셨습니다. 사공이 노를 저어서 제주도에 가까운 추자도 섬 근방에까지 도착했을 때 심한 조류에다가 강풍이 몰아쳐서 갑자기 배가 뒤집어지면서 파도로 인하여 동선이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깨어진 배의 널판을 발견하자 재빨리 두 손으로 꼭 붙들고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둥둥 떠돌아 다녔습니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낮에는 그런대로 물체가 보여서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으나 점점 어두워지고 아주 깜깜하게 될 때는 아무런 물체도 보이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때 추운 것은 참을 수가 있고, 배고픈 것도 참을 수가 있었으나 잠 오는 것은 아주 참기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여름밤에 아버지와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어서 이 기가 막힌 옛 이야기를 들을 때에 “사례야, 네가 물속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면 널판을 꼭 쥐고 있어야지 혹시 놔버리면 여지없이 물에 빠져 죽는다.”라고 들려주신 말씀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물 위에서 하루 반(36시간)을 표류하고 다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 부르짖는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저를 살려 주셔야 제주도의 불쌍한 영혼을 살릴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옵소서.” 계속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 먼동이 트기 시작하고, 조금씩 환하게 날이 밝아오자 추자도 부근에 고기를 잡으러 나온 어부에게 발견이 되어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살아나시게 되었습니다. 2일간을 추자도에서 몸을 회복하고 즉시 제주도를 향하였고 무사히 제주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끈질긴 인내심과 성령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이 있었기에 제주도에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앞에 기록한 바와 같이 제주도에서 13년간 사역하신 후에 벌교라는 시골에 5개처를 8년간 개척하시고, 70세가 되던 해에 전남 여수 남면 우학리 교회에 부임하게 되셨습니다. 이 곳 역시 우학리를 중심하여 안도, 돌산, 기타 두 곳 섬까지 합해서 5개처의 섬을 종선을 타고 두루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우학리교회 목사관 뒷산에 신사가 세워져 있어 국경일만 되면 온 섬마을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이 되어서 목사관 담을 지나 신사로 가서 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방안에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신사참배 행사가 끝이 나면 의례히 고등계 형사가 여수경찰서로 아버지를 연행해 갔습니다. 아버지의 죄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신사참배 거부, 둘째, 미국 남장로교에 속한 선교사들과 같이 교회개척을 했기 때문에 강력한 스파이로 인정받음, 셋째, 묵시록을 강해한 죄입니다. 강대상에 올라가셔서 힘찬 목소리로 사신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곧 망한다고 외치셨기 때문에 무서운 불경죄로 몰아붙였습니다.
드디어 1940년 11월 15일 새벽 2시에 순천노회 소속 목사님들 17명이 일제히 검거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연세는 73세였는데 17명 목사 중에 가장 악질분자로 인정하여, 여수항에서 따로 일본국기가 달린 경비정이 출동하여 아버지 한사람을 체포하러 15일 새벽 2시에 사택에 당도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체포당하여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그 당시 나라의 법이 70세 이상은 감옥에 가두지 못하게 되어있으나 그 법을 무시하고 연행해 갔습니다. 아버지는 취조를 받을 때마다 누가 취조인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신사에는 절할 수 없다’고 고함을 치셨다고 합니다. 일단 풀려나온 목사님들이 ‘이기풍 목사님이 좀 순순하게 대답을 하시면 저렇게까지 고생을 안하실 것인데’라고 말씀들을 하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얼마 후에 광주형무소로 이감하기로 서류가 다 작성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17호 죄수였습니다. 2년간 여수경찰서에서 시달리는 동안에 뼈와 가죽만 남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양용근 목사님이 경찰서에서 소천하셨기 때문에 여수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 상태가 너무 악화되었으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회복이 된 후 다시 와서 광주형무소로 이감하는 전제 조건으로 아버지를 향해서 일단 집으로 가라고 말을 할 때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집으로 가지 않겠다’ 고 고집을 하셨으나 강제적으로 끌어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여수 남면 우학리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극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1942년 6월 20일에 순교를 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너무나 노쇠하여 광주형무소로 이첩되지 못한 것을 매우 억울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75세였고, 저는 18세였습니다. 손주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억울하고 슬퍼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일이 많았습니다. 4남 2녀 중에서 오빠 4명과 사라 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고, 아버지가 순교하시는 날까지 제일 못난 찌꺼기 같이 혼자 남아서 아버지의 모든 행적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며, 자라 왔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솔로몬의 영광보다 욥의 인내를 더욱 소중히 여기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면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도 기쁘게 마음으로 참으시며 헌신, 봉사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부득이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제1차 제주도 선교 8년을 마친 후 1918년에 광주북문교회(제일교회)에 초대 목사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과로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이 회복되어 1920년에 순천중앙교회에 초대목사로 부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921년에 10회 총회장을 역임하셨으며, 1927년에 순천에서 고흥을 거쳐 또 다시 제주도에 2차로 선교하러 가셨습니다. 7년만에 다시 전남으로 돌아와 그곳 벌교 시골과 여수섬 5개 교회를 돌보시며 복음전파에 평생을 바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세 번째 가훈은 겸손입니다. 이 가훈에 대하여도 아버지의 교훈을 써야 되나 어머니의 생생한 가르침을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외유내강의 저력을 가지셨고 말할 수 없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1879년에 황해도 안악중골에 있는 윤진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15세 때부터 18세까지 말라리아(초학)에 걸려 가죽과 뼈만 남게 되어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 소문을 듣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김채봉 씨가 깊숙이 윤진사 댁 안방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찾아와 예수를 믿으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갔습니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누워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치 기도하는 중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위쪽 문을 열고 하얀 옷을 입은 분이 어머니 몸 위에 전지를 비취는 순간 시체와 같이 누워있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아래쪽 문으로 나가 버려 안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벌떡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죽과 밥을 먹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크나큰 기적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평양에서 마포삼열 선교사가 한 달에 한 번씩 황해도 안악에 오셔서 성경공부를 시키시는 곳을 어머니가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시간에 그 동네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즉시 외할아버지에게 고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말할 수 없이 화가 나시어 어머니를 데려다가 처녀의 머리를 가위로 삭발해 버리고, 방에 감금시켜 버렸습니다. 처녀의 몸에 서양 사람이 손을 대어 양반집 가문을 망쳐 버렸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밤에 갇혀서 “하나님, 저도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중 어느 날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속히 담을 파라.” 어머니는 추운 겨울에 새벽마다 삼일 동안 밖에 나가서 호미로 담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개가 기어서 나갈만한 구멍이 뚫렸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섣달 그믐달 머슴의 옷을 빌려 입고 얼굴에 숫 검정을 칠하고 거지로 분장한 후 성경책 한권을 허리에 묶은 후 새벽 두시 경에 이 구멍으로 간신히 빠져나와 평양 방면으로 향하여 걷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낮에 인가가 나오면 밥을 얻어서 먹고 밤에는 남의 집 아궁이 곁에 앉아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길거리에 나가면 야 거지야 하고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놀려댔다는 말을 내가 어린 시절에 어머니에게 들으면서 어머니에게 거지라고 부른 것이 하도 분해서 울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100년 전인 그 시절에는 길도 없었고, 험한 산도 넘으며 때로는 냇가도 건너 물어물어 15일 만에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도착했을 때 어머니 발은 완전히 동상에 걸려 피가 흘러서 하얀 버선이 빨갛게 되어 버렸다고 말씀했습니다.
밤길을 걸으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그렇게도 만나 뵙고 싶었던 마포삼열 선교사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15일 만에 찾아온 어머니를 얼싸안고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마치 게일 선교사(의사) 집에 자녀가 없어서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집에 있는 동안에 게일 선교사에게서 애기 받는 법을 철저하게 습득하고 평양 숭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평양에 20세에 도착하셨고, 게일 선교사 댁에서 24세가 되던 해에 마포삼열 선교사님의 중매로 여러 번 사양하다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08년 4월에 어머니는 목포에서 아버지보다 두 달 후에 제주도에 도착하였습니다. 100년 전인 그 당시에는 병원도 없었고, 애기를 낳다가 죽어 가는 산모가 많이 생기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애기를 낳다가 산모가 위험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가서 거의 살아날 소망이 없는 산모를 살리고, 애기를 잘 받아내었습니다. 이 소문이 점점 퍼져나가게 되자 어머니는 애기를 받으러 다니는 데 전념하시게 됐습니다. 애기의 배꼽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간 산모의 수발을 해 주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오면 그 산모가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 예수를 믿게 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게일 선교사에게 시체를 처리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상갓집에 가서 역시 묵묵히 시체를 잘 닦아내고 옷을 입혀주는 등 여러모로 어려움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 상갓집 식구들 역시 어머니의 사랑에 녹아져서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폐결핵 환자가 각혈을 하고 사망한 경우에는 입에 마스크를 쓰고 시체 처리때 입는 바지를 입고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후 어머니가 방바닥에 흘러있는 피를 철저히 닦아내고 소독하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결핵 환자가 각혈할 때 가장 균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전염이 될까봐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토록 어머니는 자기 몸을 희생하며 이웃 사람이 울고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해 주고 모든 어려운 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내가 9세 때 제주도에서 벌교라는 시골로 이사를 왔을 때 8년간 어머니의 사랑 실천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 시절에는 거지들이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아침에 거지에게 밥을 주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미신의 말을 믿고 대문을 꼭꼭 잠갔습니다. 이렇기에 거지들의 아침 식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대문이 없었습니다. 거지들이 아침에 들어오기가 쉬웠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밥을 많이 지어놓고 찾아오는 거지들에게 따뜻한 밥을 한 그릇씩 떠서 담아 보냈습니다.
그러나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온 환우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환우들을 더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제일 반가와 하는 손님들은 이 환우들이었습니다. 집을 찾아올 때 세 명 혹은 다섯 명씩 몰려서옵니다. 사모님하고 부르면 어머니는 황급히 나가서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앉게 했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마루에 앉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시자 급히 손을 움직여 밥과 국과 김치를 상에다 받쳐 들고 나오셨습니다. 나는 그 시간이 무서워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창구멍을 뚫어 놓고 누가 제일 밥을 많이 먹는가를 구경했습니다. 그 손님 중에 제일 많이 찾아오는 분은 양손이 없는 아주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꼭 밥을 먹여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 분들을 떠나보내고 방으로 들어오셔서 어머니가 기도하는 지정방석에 앉아 이 불쌍한 환우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음성이 이 시간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벌교에서 8년간 5개처를 다니시며 전도하시다가 아버지가 70살이 되던 해에 여수 남면 우학리 교회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곳 역시 안도, 돌산 이렇게 다섯 개 섬을 종선을 타시고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이 섬에 와서도 제주도에서 같이 애기 받는 일과 상갓집에 가서 시체 처리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1940년 아버지가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어 2년간 경찰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 어머니는 우학리 교회를 대담하게 지키셨습니다. 철저한 주일성수 및 수요예배까지 어머니가 강대상에 올라가서 아버지 대신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하시는 날까지 어머니는 아버지 뒤에서 말없이, 빛도 없이, 아버지와 함께 힘을 모아 희생, 봉사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년 후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20년간 마음 편하게 계시다가 85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세상 떠나시기 전에 세 가지의 유언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첫째, 세상과 짝하지 말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말라. 둘째, 열심히 교회 봉사를 하라. 목사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마라. 미리암과 같이 벌을 받게 된다. 셋째, 겸손한 사람이 되라. 겸손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시고 교만해지면 사탄에게 지게 된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진사의 딸로 세상부귀를 누리는 솔로몬의 영광을 버리고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녀의 머리를 삭발 당한 채 개구멍으로 기어 나와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욥과 같은 인내로 이겨내셨습니다. 옛날 선교사님들 중에서 윤함애와 개구멍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극동방송에서 김장환 목사님의 “경건시간 365일” 시간(오전 6시 20분)에뜻 밖에도 윤함애와 개구멍의 내용의 말씀이 방송이 되어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 혹시 미국 선교사가 기록한 논문을 읽으셨나? 매우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머니도 목회자의 아내(혹은 선배 목사의 아내나 총회장의 아내)로 누릴 영광에 관심을 두신 적이 전혀 없고 관용하여 피전도자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며 사랑하셨고, 처음 예수 믿을 때의 핍박을 참고 참은 것은 물론 전도받는 사람들의 몰지각한 행동에 이해할 때를 기다리며 끝없는 인내로 참으셨으며, 겸손하여 어려웁고 낮아진 사람들에게 혹은 버려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다가가 돌보아 주셨고 특히 한센병 환자를 돌아보아 친구가 되었고 아이를 해산할 때 수발해 주었으며 상을 당할 때 심지어 폐결핵으로 죽은 환자에게까지 접근하여 철저히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내게 교훈이 되어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인내로 사랑을 실천케 하는 위대한 교훈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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