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냥 중 백냥”...조선시대도 ‘부동산’으로 한탕 했다
‘거래가의 10%’...예로부터 수수료가 만만치 않았던 부동산 시장
가쾌에서 복덕방 그리고 공인중개사로...부동산 중개업의 변천
옛 복덕방 정경. 복덕방은 1961년에 신고제가 되었다. 복덕방 글자 위에 쓰인 26호로 보아 1960년대 초반의 모습일 것이다. (출처: 페이스북 '사진으로 보는 코리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기자가 어릴 때 살던 아파트는 한때 피아노 교습소였다.
1970년대 후반 강남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던 무렵이었다. 이웃집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누나는
아예 집에다 교습소를 차렸다. 아파트 단지 상가에 아직 피아노 학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빠 복덕방 해요.” “아냐, 부동산소개 사무소 하시잖아.”
누나가 새로 등록한 자매에게 부모님이 뭐하시는지 물어본 모양이었다.
동생의 대답에 언니가 야무지게 바로잡은 장면이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왜 인상에 남았냐 하면 1970년대만 해도 집 거래는 ‘복덕방’에서 했고, 복덕방에는 거의 동네 노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아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이 복덕방을 한다니
어렸던 기자의 생각에도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부동산소개 사무소란 단어도 낯설었다.
지금은 강남구 역삼동이 된 당시 도곡동은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그 외곽 상가에는 ‘복덕방’ 간판과
‘부동산소개’ 간판이 함께 걸려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따져보니 복덕방에서 부동산중개업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였다.
(2021. 10. 14)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아파트. 단지 입구 상가 1층에는 부동산 사무소들이 늘어섰다.
조선 시대에도 집을 구하려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옛날에도 집을 구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나 보다. 조선 시대에 ‘집주름’이나 ‘사쾌(舍儈)’ 혹은
‘가쾌(家儈)’ 같은 부동산 중개인이 활약했다고 한다. 여기서 ‘쾌(儈)’는 거간 혹은 중개인, 즉 집을 거래하는 중개인을 말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는 가옥의 매매, 전당, 임차를 중간에 주선”하는 사람이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보증인으로 내세워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역할로만 보면 오늘날 공인중개사 업무와 비슷하다.
이들은 거래 쌍방을 도우는 중개인이었기 때문에 수수료를 받았다. 조선 시대의 다양한 직업을 정리한 《조선잡사》에서
신택권의 〈성시전도시〉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해 당시 수수료 체계를 설명했다.
특별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중략)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
중개 수수료가 거래가의 10%였다. 같은 책에서 7000냥짜리 고택을 거래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만약 이대로 수수료를
받았다면 700냥이다.
당시 한성의 번듯한 초가집 한 채가 100냥 내외였다고 하니 한번 거래 성사로 집 7채분의 수수료를 벌 수 있는 셈이다.
한편 1890년 한성부에서는 「객주거간규칙(客主居間規則)」을 제정해 가쾌들에게 허가증을 내주었다.
관련 연구를 보면 매매의 경우 거래 쌍방에게 각각 매매가의 1%, 총 2%를 받았고, 임대의 경우에는 양측으로부터 05%씩,
총 1%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관행이었을 뿐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는 집주름이나 가쾌들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서류 위조나 의뢰인의 부동산을 속여 뺏는 사건도 많았다고.
복덕방의 시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본인의 부동산 활동을 보호하고자 객주, 거간 등의 규칙을 폐지했다.
그리고 1922년에 「소개영업취재규칙」을 공포했다. 부동산 중개 업무를 표준화한 것이지만 조선인의 부동산 거래를
착취하거나 단속하려는 방법으로 사용됐다고.
가쾌가 위축되자 그 자리를 복덕방이 이어받았다. 이 점포들은 아래를 여러 갈래로 가른 누런 삼베에 ‘福德房’이라 쓴
간판을 내걸었다. 누런 삼베는 수수해서 복이 잘 붙고 감이 질겨 오래갈 수 있다는 뜻을, 아래를 여러 갈래로 갈라놓은
것은 편히 들어오라는 뜻을 품고 있다고.
일제강점기 복덕방의 모습. (출처: 페이스북 '사진으로 보는 코리아')
이태준의 단편소설 《복덕방》을 읽으면 20세기 초반 복덕방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이 복덕방에는 흔히 세 늙은이가 모이었다. 언제, 누가 와, 집 보러 가잘지 몰라, 늘 갓을 쓰고 앉아서 행길을 잘 내다보는,
얼굴 붉고 눈망울 큰 노인은 주인 서참의다. (중략) 이럭저럭 심심파적으로 갖게 된 것이 이 가옥 중개업이었다.
소설처럼 복덕방은 주로 동네 입구에 자리했고, 동네 노령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일하다가 일이 생기면 중개를 했다.
그 보답으로 선물이나 수수료를 받았는데 이를 구전(口錢) 혹은 구문(口文)이라 했다.
광복 후 복덕방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많이 생겨난다. 1960년대 경제개발 계획이 추진되며 부동산 수요가 늘어나 복덕방
역할도 커진다. 이에 1961년 「소개영업법」이 제정된다. 그 이후부터 복덕방은 관할 관청에 신고하고 영업을 해야 했다.
복덕방은 1961년부터 관할 관청에 신고해야 한다.
관허 271호로 시기를, 옆집 간판의 회현으로 지역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페이스북 '사진으로 보는 코리아)
1970년대 들어 대형 택지개발이 추진되자 동네 복덕방은 이런 대형 계약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반면 규제의 허점을 이용해 복덕방의 확대와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 투기 조장이나 가격 조작과
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정부로서는 제도 정비의 필요성을 느낀 지점이었을 것이다.
공인중개사의 탄생
앞에서 언급한 자매의 아빠뿐 아니라 부동산 경기가 불타오르던 1970년대 중후반 부동산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았다.
법률이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던 시점이라 새로운 기회, 혹은 법을 초월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2년 9월 20일 〈매일경제〉에 실린 "개포동 일대의 부동산소개업 대부분이 무신고 업소" 기사나, 1982년 11월 같은
신문에 실린 "불법 영업 복덕방 2천68업소 적발"이라는 기사를 보면 당시 부동산 업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취지의 기사가 비슷한 시기 여러 신문에 실렸다.
골목 안 풍경을 사랑한 김기찬(1938~2005) 사진작가가 기록한 송파구 삼전동 개발 현장.
부동산 업소들이 난립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사진: 김기찬 사진작가)
관할 구청에 신고만 하면 할 수 있었던 부동산소개업인데도 이렇게 불법 영업이 많았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
정식으로 신고했더라도「소개영업법」에 허용하지 않는 영역까지로 업무를 확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동산 가격 급등은 투기 붐으로 이어졌고, 복덕방은 이를 조장하거나 불법 중개 행위로 이어졌다.
이른바 복부인과 함께 복덕방은 사회문제로 지탄받았다.
정부는 부동산중개업을 규제할 필요가 늘자 1984년 4월에 「부동산중개업법」을 제정한다.
이 법 시행과 함께 오래전에 만들었던 「소개영업법」은 폐지된다.
1985년부터 시행된 공인중개사 시험은 다가오는 10월 30일에 32회 시험을 치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이 시험에 40만 8492명이 접수했다. 현재 자격증 보유자는 42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한켠에는 부동산을 중개하는 사무실이 있다. 집주름이나 가쾌에서 복덕방으로,
또 부동산중개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지만 기능은 예전 그대로다. 수수료가 화제가 되는 것도 여전하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복덕방(福德房)은 ‘복’과 ‘덕’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복과 덕이 넘치는 집이 최고의 집이라는 뜻도 담겼을 것이다. 수수료를 복비(福費)라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집은 ‘부동산(不動産)’, 움직여 옮길 수 없는 재산을 뜻한다.
그래서 부동산중개업이 집이나 땅을 굴리고 굴려 재산을 일구고 또 불려주는 역할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어쩌면 복과 덕이 오늘날에는 날로 오르는 부동산 가격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발 소문만 나면 부동산 업자들이 그 동네에 천막을 치고서라도 몰려드는 것인지도.
(2021. 10. 14)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공사 현장과 그 옆에 자리한 야외 부동산.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 참고 자료
강문종 등, 《조선잡사》, 민음사
이승일, 〈대한제국기 한성부의 가옥 거래와 가쾌의 역할〉, 역사교육
임이택 등, 〈부동산중개업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한국지적정보학회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건평방 가옥』 전시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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