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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대하여 산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어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8-11).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교리를 말씀함에 있어서 전반부(1-7)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하면, 후반부(8-11)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데 강조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8) 합니다.
㉠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8상), 이것이 사실이라면,
㉯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8하)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려 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면 죽으셔야할 이유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이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9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말씀하고, 10절에서도,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하고 그리스도의 “살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그런 후에 11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 지어다” 하고 결론(結論)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4)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강생하셔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시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임금이 궁궐을 떠나 두메산골의 오막살이집을 찾아 왔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강생은 마귀가 왕 노릇하는 죄의 영역(領域)으로 들어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곳에 죄 값에 팔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히 2:15) 하는 우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마치 바로의 노예가 되어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시기 위해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하고, 모세를 보내신 것에 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신 18:15)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율법”을 주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③ 그러므로 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主張)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하고 말씀합니다.
㉠ “사망(死亡)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한 때나마 그를 주장한 때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은 우리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인봉하고 승리한 줄로 알았습니다.
㉡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흘 만에 무덤을 깨치고 마귀를 이기시고 사망에서 벗어 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행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死亡)에게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행 2:24) 하고 증거합니다. 이로 보건데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망에 매여 놓았던 때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의 결박을 끊고, 그의 영역을 깨뜨리시고, 그 지배 하에서 벗어나셨던 것입니다.
④ 형제여, 주님께서 이런 일을 왜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거기 우리가 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출(救出)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은 슬그머니 되어 진 일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죽었으며,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함께 살아남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 다시 강조합니다만, 주님께서 누구의 무엇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까? “죽으셨다”면, 사망의 권세는 누가 잡고 있습니까?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히 2:14)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사탄의 영역까지만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사망의 권세 하에까지, 즉 사자 굴속에까지 들어가신 셈입니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5), 즉 그곳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출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主張)하지 못한다”(9중) 하고 말씀합니다.
㉠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9)는 “사망”(死亡)은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사탄에 매여 있는 영혼들을 구출하기 위한 영적 전쟁을 “오만, 독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 하시면서,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탄의 영역에서 벗어 나셨을 때에 그의 품안에는 우리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사망의 권세 하에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으나,
㉯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 하에 들어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그러므로 “사망”이 우리 주님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에게도 동일하게 진리입니다. 사망이 형제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형제는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하나님이 보호하시며,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며, 하나님이 치료하시며, 때로는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하고 말씀합니다.
⑥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10) 합니다. 이는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 첫째는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합니다. 우리의 구출작전은 단 한번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단번으로 완성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단번”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7:27),
㉯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12),
㉰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28)합니다.
㉲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10:2),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그리스도의 대속은 단번에 성취되었고 완성된 것입니다.
㉡ 둘째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10하) 합니다. 사망의 영역에까지 내려오시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됨을 통해서 사망에게 매이시기까지 하셨던 주님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그렇게 높임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의 뜻입니다.
⑦ 그런데 이어지는 11절은, “이와 같이 너희도” 하고 시작이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 지어다”(11)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이 말씀을 암송하고 자주 묵상하게 되기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그마만치 무게가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 그러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란 무슨 뜻인가? 아담 하와가 죄를 범하자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分離)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끊어진(사망) 상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사탄)의 영역에 부속(附屬)이 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전(前)에는 “하나님께는 죽은 자요, 죄에 대하여는 산 자”였다는 것입니다.
⑧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 즉 전과는 정반대(正反對)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다시 강조합니다만 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고, 죄에 대하여 살았었습니다. 그 때는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고 말한 귀신들린 자처럼, 하나님과는 상관(相關)이 없었습니다. 이점을 6:20절에서는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自由)하였느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에 대하여 상관이 없습니다.
㉡ 혹시 실수하고 넘어진다 해도 죄의 영역에서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슬하에서 범한 것입니다. 죄를 범한다 해도 죄의 권세 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아도 아버지에게 맞을 것입니다. 달리 표현을 하면 율법(律法)에게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라는 이 엄청난 진리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1중)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죽고, 다시 새사람으로 태어난” 이런 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어진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연합교리는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은 그와 연합(聯合)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되어진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11절 서두의, “이와 같이”의 뜻입니다.
㉠ “여길 지어다” 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살았다”는 이 진리가 어떤 체험적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살도록 노력하라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음으로 “나도 그와 같이 되었다” 하고 “계산하다, 간주하다”, 즉 받으라는 뜻입니다.
㉡ 만일 체험으로 되는 일이라면 받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노력으로 되는 일이라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아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김선운 목사님은“여긴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비장(悲壯)하게 강력한 내용이 아니고서는 11절의 뜻하는 바는 허무한 거짓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여길 지어다>란 말은 이 말이 뜻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야한다”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길 지어다”라는 말은 믿음으로 되어지는 일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 하는 말씀은, 한번 듣고 넘어갈 말씀도 아니고, 알고만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 판에 새겨 두어야할 말씀이며, 자주 자주 묵상하며, “여기고 또 여겨”,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성령의 검”으로 삼아야할 말씀인 것입니다.
⑩ 이 지점에서 4장으로 돌아가, 6절, 9절, 10절, 11절, 22절, 23절, 24절 등을 상기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 구절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지도 못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주신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지> 못한다면,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칭의에도 확고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데”, 형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지” 못할 이유(理由)라도 있단 말입니까? 이 일은 인간이 행한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대속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 가운데 되어진 하나님의 구원계획인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