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釋으로 읽는 姜台壽의 墓碣銘]
김안국이 지은 姜台壽의 묘갈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墓碣銘 行間이 모호하여 진실을 곡해할 수 있다고 게시자는 판단했다. 게시자는 묘갈명 行間을 쉽게 파악하도록 전후사정에 대한 論據를 出典에 의거 自意로 註釋을 달았다. 아울러 註釋에서 慕齋가 간과하고 있거나 明記하지 못한 여백까지 門中史學의 입장에서 敍述하여 객관성을 堅持하였다. 註釋의 오류는 전적으로 게시자의 잘못이다. 叱責과 是正을 바란다.
註釋者: 姜朱遠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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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국조인물고
강태수
姜台壽
원본글 출처 강태수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김안국(金安國)
대표관직 부사(府事)
이명 자 : 자삼(子三)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0 문관(文官)
아! 강 자삼(姜子三)이 죽었다. 자삼은 나와 나이 한 살 차이로 약관(弱冠) 때부터 함께 공부했다.1) 천품이 초매(超邁)하여 학문에 민첩하고 재주가 많아 한 때 높은 명예를 독차지했으므로2) 나 같이 노둔한 사람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는데, 자삼이 과분하게도 동지(同知)가 될 것을 허락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기가 형제 같았고 아들과 딸로 서로 혼인시키자고 약속했던 터라,3) 결국 나의 딸이 자삼의 큰 아들인 강복(姜復)에게 시집갔다. 나는 항상 자삼에게, “벼슬길에 진출하여 현달할 것이 의당 나의 앞에 설 것이니 그대는 나의 적수가 아니다.” 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辛酉年, 1501년 연산군 7년)에 자삼과 나는 함께 생원ㆍ진사 두 시험에 합격했건만 내가 모두 자삼의 앞 등수를 잘못 차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4) 자삼은 정덕(正德) 신미년(辛未年, 1511년 중종 6년) 과거의 장원 1명에 선발되어 비로소 영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또 나보다 도리어 9년 뒤졌으니 역시 굴절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겠다.5) 함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기에 미쳐서도 다시 쌀겨와 쭉정이처럼 보잘 것 없는 부끄러움이 있었는데,6) 나는 무능하면서도 잘못되어 육경(六卿)의 반열에 서는 은전을 입었고, 자삼의 재능으로는 겨우 하나의 대읍(大邑)을 맡는 데 그쳐 크게 그 포부를 펴지 못한데다가 또 장수하지 못하여 나를 버리고 먼저 갔으니, 어찌 평범한 몸으로 명예와 지위ㆍ수명과 관록에 있어 늘 자삼보다 앞섰다고 말하겠는가?7) 아니면 세간에서 추측하는 바 스스로 명분(命分)이 있어 인간의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라든지 어짐과 불초함에 얽매이지 않은 것인가?8)
자삼의 휘(諱)는 태수(台壽)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진산군(晉山君) 문량공(文良公) 휘 희맹(希孟)의 손자이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대민공(戴敏公) 휘 석덕(碩德)의 증손(曾孫)이며, 동북면 순문사(東北面巡問使) 휘 회백(淮伯)의 현손(玄孫)인데, 순문공(巡問公)의 부친은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 공목공(恭穆公) 휘 시(蓍)이다.
진주(晉州)의 강씨(姜氏)는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성씨로서 대대로 조정에 영달한 벼슬을 했으며, 공목공부터 더욱 귀하게 되었다.9) 문량공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진원군(晉原君) 숙헌공(肅憲公) 휘 귀손(龜孫)이며, 차남은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 휘 학손(鶴孫)이다. 숙헌공은 종자(宗子)로서 후사가 없어 사평공의 셋째 아들을 데려다 후사를 삼았으니, 그가 바로 자삼이다. 자삼의 어머니 신씨(申氏)는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휘 숙주(叔舟)의 손녀이며, 관찰사 신면(申沔)의 따님이다. 순문공의 호는 통정(通亭)이고, 대민공의 호는 완역재(玩易齋)이며, 문량공의 호는 사숙재(私淑齋)인데, 3대가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저술한 바가 많다.10) 문충공 역시 훈덕(勳德)과 문장으로 세 분의 임금을 보좌한 이름난 재상이었다.
자삼의 자질은 이미 절륜(絶倫)하였고 일찍이 가풍을 본받아 문학에 힘써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가업을 잘 계승했다고 말할 만하다. 자삼의 형제는 일곱 명인데,11) 사평공은 성품이 엄하여 여러 아들들에게 말이나 안색으로 겨를을 주지 않았고, 숙헌공 또한 엄하고 강직하였으며 첩의 소생이 많았는데, 자삼은 효성과 순종이 다 갖추어져 있었고 우애 또한 돈독했으므로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숙헌공이 죽자 정경 대부인(貞敬大夫人)을 섬김에 있어 더욱 삼갔으며, 여러 형제 자매와 재산을 분배하는 데 적자(嫡子)라 자처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나누어 주어 숙헌공의 뜻대로 하였다.12)
친구와 사귐에 있어서도 신의(信義)가 더욱 두드러졌다.13) 13년 동안 벼슬하면서 거친 직책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공조 좌랑(工曹佐郞), 예조 좌랑(禮曹佐郞)ㆍ정랑(正郞),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광흥창 수(廣興倉守),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인데, 관직에 있으면서 두루 삼가며 게으르지 않았고 일에 임해서는 민첩했으며, 담당한 일은 반드시 해결했다.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 겨울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지방 수령을 자청하여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제배되었는데, 관리로서의 일에 능숙하여 일을 신속하게 결정했으며, 백성을 위무하고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고 순후했으므로, 3년 만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얼마 뒤 사평공의 상을 당하고14) 다음 해에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는데, 평소에 허약하여 병이 많던 자삼은 연이어 상고를 당해 여묘살이를 하느라 몸이 많이 상하여 깊은 고질병이 되어서, 가정(嘉靖) 5년인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 8월 24일에 상중(喪中)의 몸으로 卒 하니, 그가 태어난 성화(成化) 기해년(己亥年,1479년 성종 10년)부터 계산하면 수명이 겨우 48세이다. 애통하도다. 이 해 겨울에 자삼의 관이 영광(靈光)으로부터 안산(安山)의 직곶리(職串里) 선영으로 왔는데, 나는 달려가 조곡(弔哭)하고 문량공의 무덤 왼편 동쪽 언덕에 자리를 잡아주어 하관하게 했으니, 자삼의 평소 뜻을 따른 것이다.15)
자삼의 부인은 연일 정씨(延日鄭氏)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 휘 회(淮)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강복(姜復)이고, 딸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원계채(元繼蔡)의 아들 원호섭(元虎燮)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강영(姜英)인데 어리다. 강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기러기 큰 날개를 움추리자 산까치 메추라기 구름처럼 날게 되고 천리마도 혹 넘어지는데 노둔한 말16) 쉬지 않고 달리네. 우연인가 운명인가? 나는 누구에게 물어볼꼬? 단명인가 장수인가? 또 누구의 죽음인가? 아! 어찌할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오?
註釋)
1) 奇遵, 趙光祖, 金安國, 姜台壽 등은 寒暄堂한훤당 金宏弼의 제자였다. 김굉필은 台壽의 生父 姜鶴孫과 김종직 門下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다. '文平公李繼孟 朱溪君深源 文敬公金宏弼 謂堂上曰 姜鶴孫毅節 非刑訊可屈庸 是可免泉攘.'(遺事) 한훤당은 이렇게 사건에 처한 학손을 변호해 주기도 했다.
2) 태수의 文名은 당시 성균관 유생들 가운데 단연 독보적이었으며, 왕조실록에도 실려있을 만큼, 선비사회에서 膾炙(회자)되었다. '강태수는 젊어서부터 才名을 자부하고 義氣가 滿滿하였다.' 중종 12년 12월3일 갑진일, 실록기사.
3) 김안국은 모재집에서 信古堂辭를 지어 우정을 논한다. 사위 姜復이 早卒하자, 외손 강극성을 교육시켜 명종조의 名臣으로 성장시켰다.
4) 강태수는 1511년 신미별시에서 '策文'으로 장원 급제를 한다.
5) 실록은 台壽의 생부 강학손의 罷謫사건이 태수를 연좌제로 묶어 淸要職에 등용을 막았다고 한다. '司評公 罷謫사건은 강희맹 집안에 대한 당시 권신의 모함과 嫉猜의 결과'라고 大司成 梁應鼎은 記述했다.(司評公墓碣銘)
6) 중종은 태수를 경연관에 서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權臣들의 반대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7)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모재는 7세때 小學을 읽었고, 12세에 經史를 讀破, 大義를 깨우쳤다. 또한, 자삼과 관포지교의 실례로 자처하여 자삼과 사돈을 맺었다. 태수의 아들 復은 일찍 천수를 다하여 復의 獨子 醉竹 克誠은 외할아버지인 김안국에게서 양육되었다.
8) 이 구절은 모재가 詩文에 능하고 일정 수준의 경지를 초월했음을 보여준다. '其不繫於人之智愚賢不肖耶.'
모재는 <映湖樓>와 같은 秀作의 詩를 남겼다.
9) 일제는 한일倂呑(병탄)직후 1910년 조선반도 팔도 전역에서 호구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당시 총가구수 289만4,777호였다. 이중 양반 가구는 5만 4,217호로 집계되었다. 전국 가구수 대비 양반 가구 비율은 1.87%에 불과하였다. 아울러 조선 초기 姓氏인구는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10) 강희맹이 편찬한 祖•父•子 통정, 완역재, 인재 3대에 걸친 詩文集 진산세고는 조선 最初의 世槁였고, 사숙재집은 왕명으로 편찬된 최초의 문집이었다.
11) 사평공은 8아들을 두었는데 後漢말기 영천사람 筍淑의 여덟아들에 비유되었다. 이들은 대표적인 淸流派로 모두 효심이 깊고, 공부를 잘하여 뛰어난 관리가 되었다. 사평공의 호 八龍亭은 정실부인 소생 8아들을 뜻한다.
12) 先代의 재산이란 태종 즉위 定社공신 이숙번의 막대한 재산이 무남독녀 사위인 강순덕에게 계승되었고 이를 강순덕의 양자 강희맹이 물러 받았으며, 문량공 또한 2차례 훈공을 통해 공신으로 책봉된 후 축적된 재산이 숙헌공에게 유산되었으며 이 재산 또한, 양자로 입적된 系子 강태수에게 상속되었다.
13) 자삼은 주로 名士들과 교류를 하였다. 중종 6년 5월25일 갑술일 실록기사 참조. 중종 6년 6월1일 기묘일 실록.
14) 사평공은 1455년 서울에서 태어나 1523년 靈光에서 歲壽 69세로 卒하였다. 기묘사화를 예견하여 아들 태수를 중앙정계를 떠나 지방수령으로 불러 己卯被禍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然亂臣賊者...,己卯之禍果起 趙文正諸賢 又攫網打 人服其明鑑.(司評公家狀) 반면, 김안국은 신진파 士流로 지목되었으나, 겨우 화를 면하고 경기도 이천으로 은둔하였다.
15) 강희맹과 그의 후손들 묘역에 서있는 문인석은 여인석이 아니라, 童子石인데, 이는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문량공 家門의 習俗이다.
16) 문맥으로 보아 老鈍馬는 김안국 자신을 가르키는 謙讓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