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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외출금지(外出禁止)' 전
어제 '광주 비엔날레'의 개막이 있었다고 하고, 또 '부산 비엔날레'도 열리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국제적인 '비엔날레'가 이리 많아졌는지......
그런 행사에는 국내외 많은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도 참가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한 평생 작업만 하면서 살아온 '화가'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전시에 단 한 번의 작품 출품이나 설치 의뢰를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런 국제적인 전시는 물론이고, 국내의 일반적인 화랑에서조차 내 그림을 전시해준다는 곳은 없다.
전시를 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돈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화가'라는 사실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인식시켜주는 일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설사, 억지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돈이 없는 나는 전시를 하고 나면 빚만 지니까.
빚은, 그나마 평안한 것처럼 보이는 나를 자학까지 하게 만드는 요소다.
나는 '자학'하면서, 그나마 내 '화가'라는 삶을 지탱해주는 작업의욕마저 상실되는 일이 두렵다.
그래도 내가 화갈까?
9 . 11
그러던 몇 달 뒤 어느 날, 인야에게 뜻밖의 전화가 왔다.
모 신문사 미술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떻게 인야를 알게 되었는지, 인야의 작품을 보고 미술관 측과 맞으면 전시를 열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숨어서 작업하는 화가를 발굴하는 그들 사업의 일환인 듯했다.
인야가 처음 취한 자세는 큰 기대를 걸지 말자는 것이었다. 인야의 작품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일들이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되다 보니,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미리 방어막을 쳐놓는 교활함도 몸에 익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반가운 건 반갑게 받아들이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화가에게 이런 반가움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미술관 측에서 작품을 둘러보러 인야를 방문했고, 일주일 여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전시를 열어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얼떨떨했다.
'이 건 무슨 일인가,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나?'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화가가 스스로 미술관에 돈을 주고 대관해서 여는 전시가 아닌, 미술관 측에서 모든 비용을 들여 열어주는 기획전이었다.
그것도 봄, 4월부터 한 달 여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얼떨떨하던 감정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책임감으로 바뀌어갔다. 6년 만에 갖는 전시였다. 새로 크게 해야 할 작품 재료와 운송 비용, 액자 비용. 작업 공간도 문제였다. 생각 끝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하는 수 없이 인야의 방에서 하기로 했다.
인야는 그 당시의 심경을 홈페이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모처럼 전시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99년도에 대학로의 '미술회관'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못해왔으니까... 6년 만에 열게 되는 전시가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모 신문사 미술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나를 알게 되었는지, 우선 내 작품을 보고 미술관측과 맞으면 전시를 열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숨어서 작업하는 화가를 발굴하는 그들 사업의 일환이었을 겝니다.
제일 먼저 내가 취한 자세는... 큰 기대를 걸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되는 경우를 미리 각본에 넣어두는 여유를 부리며 침착하게 대응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심 반갑다는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미술관측에서 내 작품을 둘러보러 나를 방문했고, 일주일 여 후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전시를 열어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며 일정을 잡자더라구요.
기뻤습니다. 아니, 처음엔 얼떨떨했습니다.
'이 건 무슨 일인가? 나한테도 이런 일이 생기나?'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니까, 화가가 스스로 미술관에 돈을 주고 대관해서 여는 전시가 아닌, 미술관 측에서 이런저런 전시비용을 다 들여 화가의 전시를 열어주는 일이니... 나에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지요.
게다가 한 달도 넘는 기간을 열어주는 '기획전'이거든요.
얼떨떨하던 처음의 감정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최선을 다해 좋은 전시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각오가 되어가는데, 한편으론 또 고개를 내미는 걱정에 마음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지요.
생각 끝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고... 하는 수 없이 이 좁아터진 내 방에서 할 수밖에 없답니다.
이 어수선한 연말이 넘어가면 바로 준비작업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멍- 한 상태로, 머릿속만 복잡합니다.
잠잠하기만 하던 내 일상에, 한 회오리 바람이 불고 있는 기분이랍니다.
12 . 25
요즘엔 전시를 빌미로나마 작업에 빠질 수밖에 없다보니, 문득, 정말 내가 바라던 모습으로 살고 있음도 느껴지면서 그 게 기쁘고 또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요.
역시, 화가는 작품 속에 빠져 지낼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습니다.
1 . 31
전시를 준비하면서, 인야는 자연스럽게 그동안 해온 작업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미술관 측에서 관심을 보인 것들은 생각 밖의 것들이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달력이었다. 인야가 달력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연습장에 다음 달 달력을 그리면서 계획을 세우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고 매달 달력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로잉 자체가 일기 형식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달력도 그 범주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 1990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15년이 지난 상태로, 모두 모으면 최소한 150점 정도는 될 것이었다.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던 이 일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는 의무로 변하면서, 어떤 달은 달력이 나오지 않아 몇 시간 동안 괴로워할 때도 있는 스트레스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달력 만들기'는 그렇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업(業)'이 된 느낌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애당초엔 몰랐지만, 내 일상의 달력이 이렇게 작품으로 미술관에 전시가 될 줄이야......
4 . 20
또 하나가 종이 상자 작업이었다. 사용하고 남은 종이 상자 안쪽 바닥에 색종이를 가지고 오려 붙이는 작업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했던 것이었다. 대학원 실기실에서 굴러다니던 조그만 물감 상자 안쪽에 파스텔로 뭔가를 그리면서 시작된 작품이었다. 하다 보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색종이를 찢거나 오려 붙이거나 잡지에서 사진을 오려 구성하는 작업으로 발전했다. 마치 연극 무대를 꾸미듯, 상자 안의 공간감을 이용한 것이었다.
당시 민중미술 전시에 출품했을 때, 이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인야는 팔지 않겠다고 했다. 더 이상 발전시키지도 않고 그만뒀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의아하지만, 어쨌거나 이번 전시에서 다시 꺼내게 되면서 앞으로 더 발전시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칼로 오려 3차원적인 공간감을 주는 작업도 있었다. 인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점점 단순해져 가고 있었다. 사실적인 인체 묘사 대신 실루엣처럼 평면적으로, 나중에는 몸의 무게마저 잃어가는 식으로. 그 과정에서 종이가 이용된 것이었다. 바르셀로나 시절 종이를 오려 자화상을 만들고, 멕시코에서는 '이방인' 시리즈로 발전했다. 해발 2200m의 고원지역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게를 잃어가던 기분이 그런 작업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은 평면적이거나 그저 단순한 선 몇 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묘사 대신 자꾸만 단순화시키면서 없애고 감추려는 식이지요.
그러다 보니 투명인간 식으로 가다가, 이제는 선 몇 개로만 나타내는 식으로 자리를 잡더라구요.
4 . 22
테라코타 작업도 빠질 수 없었다.
대학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흙 작업을, 인야는 나이 마흔이 될 무렵 멕시코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개방적인 멕시코의 학교 시스템 덕분에, 벽화를 공부하러 갔다가 테라코타에 입문할 수 있었다. 얼마나 빠져들었는지, 점심 먹는 시간이 아까워 한 손으로는 또르따를 먹으면서 한 손으로는 작업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 쓰러지다시피 잠을 자고, 일어나자마자 다시 학교에 나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귀국한 뒤에도 틈틈이 흙 작업은 이어졌다.
인야의 테라코타 작품은 회화 작품과 맥락을 같이 했다.
종이를 오려내듯 얇게 표현한 인체들, 평면에 저부조. 회화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작품을 하지 못할 것이란 말도 들었다.
그 뒤로 폴리코타, 석고붕대, 브론즈, 철조까지 손을 댔다. 해보고 싶은 것은 여건을 만들어가면서까지 해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전시 준비를 하면서 인야는 자신이 해온 작업들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달력, 종이 상자, 종이 작업, 테라코타.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하나의 전시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전시 제목은 '외출금지(外出禁止, No Exit)'로 정해졌다.
그런데 전시가 시작되면서부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관람객이 좀처럼 늘지 않았던 것이다.
미술관측의 압력으로, 인야는 신문사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는데... 전화기 앞에 앉아 번호를 누르다가 손이 돌아오곤 했다.
아, 못 할 것 같다...... 혼자서 탄식처럼 내뱉는 말에, 담당 여직원이 웃었다. 그 웃음은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한 가지 뜻밖의 일이 있었다. 누님 가족을 기다리던 중 정문으로 들어오던 한 가족이 인야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저, 선생님 팬이예요."
날마다 홈페이지에 들어와 글과 그림을 읽는다고 했다. 아이들까지 함께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야는 움찔했다. 마치 자신의 몸을 훤히 읽히는 기분이었다.
'격'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산장 아저씨의 안부까지 묻는 등 夢想? 시절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 여자 분 앞에서, 인야는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 같은, 이제 더 이상 밝혀질 것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들이 미술관을 나간 뒤, 인야는 전시장 난간에서 멍청히 바깥을 바라보다가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가는 그 가족의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후다닥 가방을 열고 디카를 꺼냈다. 유리를 통해, 나무에 가려지거나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리고 하면서도, 앵글을 맞추려 애를 썼다.
그런데 전시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인야는 홈페이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 옛 제자들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 며칠 만에 미술관에 나가보았습니다.
미술관에 가자마자 느낀 건데, 어째, 분위기가 썰렁하더라구요.
미술관에 찾아오는 관람객이 쑥 줄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더라구요. 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나,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뭔가 모를 부끄럼 같은 게 고개를 내밀던 것이었습니다.
'다 내 능력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술관 디렉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지난번 '기자 간담회' 때 와주었는데 아직 신문에 기사를 내지 않는 몇몇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럴까요?"
나는 바로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담당기자들의 전화번호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미술관 담당자의 자리로 가서, 전화를 걸어달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막상, 전화번호를 누르다보니...
'전화 걸어서 뭐라고 하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거기까지는 알 것 같았는데,
'그 다음은 무슨 말을 한다지?'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전화기를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몇 번, 전화번호를 누르려다가... 손이 돌아오곤 했지요.
"아, 못 할 것 같다......" 혼자서 탄식처럼 내뱉는 말에, 담당 여직원이 웃더군요.
그 웃음은, 안타깝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아! 도무지 못 하겠다......'
나는 전화번호 리스트를 내려놓으며,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서 전시장에 내려가 보니, 정말... 텅 비어있는 전시장이, 차라리 민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거 무슨 꼴이람? 이 좋은 전시장에서 실컷 전시를 준비해 주었는데, 이런 결과라니......'
그 모든 게 내 탓 같아서, 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니, 한 TV 프로에서 내 전시를 소개하겠다는 제의에도, 작품을 찍어 내보내는 거야 감사히 받아들이겠지만,
내가 대담식으로 TV에 나가는 것은 싫다는 얘기를 했던 내 생각은... 꼬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저녁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얼마 뒤에 제자들이 왔고, 또 그들이 전시장을 배경으로 내 사진을 찍는 일에 포즈도 취해주면서 이어 어울려 술도 한 잔 한 뒤,
공교롭게도 오늘 '월드컵 예선' 대 우즈베키스탄과의 축구 시합이 있어서 광화문 사거리에 '붉은 악마'들이 모여드는 상황인데도,
겉과는 달리 내 속은 어둡기만 했습니다.
나, 커다란 욕심 없습니다.
전시가 성공이 아니래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다만, 미술관 측에 미안하지만 않게 해주십시요......
나는 '대한 민국!'을 연호하는 젊은 열기가 올라가던 광화문의 밤하늘을 보며,
누군가에게 그렇게 빌기도 했습니다.
나, 원래... 하늘 안 믿는 사람이거든요......
6 . 3
그리고 엉겁결에 TV 인터뷰까지 하는 일도 벌어졌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이미 방송국 팀이 와서 작품 촬영을 시작하고 있었다. 작가가 확실히 나와야 한다며 카메라 앞에 세워지는데, 어안이 벙벙한 채로 인야는 그들에게 선취점을 내주고 말았다.
세 시간 가량 인터뷰가 진행됐다.
그런데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읽으니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유학하고 나이 50 넘어 돌아왔는데 별로 할 게 없었어요.'
스페인에 갔던 것은 유학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서 간 것이라고 몇 차례를 강조했는데, 기사엔 전혀 다른 뉘앙스로 실려 있었다.
그래봤자 사람 목숨이 오갈 정도는 아니니, 항의도 하지 않았다.
다만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전시는 한 달 넘게 이어졌고, 그리고 끝났다.
단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은 채로.
작품 포장을 다 해 놓고, 미술관을 나오면서... 내리지 않는 듯 이슬비를 맞으면서...
문득, 나는 서글퍼집니다.
에이, 전시를 한 달 넘게 열어줘도, 작품도 팔리지 않는 화가!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화가!
아, 인생이란... 그래도 날더러는, '화가'로 살아가라나 봅니다......
6 . 27
전시가 끝난 뒤, 인야는 어느 날 같은 미술관에서 다른 화가의 오프닝에 초대되어 갔다.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화환들, 웅성거리는 사람들, 활기찬 분위기. 인야의 전시 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한 바퀴 돌고 2층으로 올라가 미술관 디렉터와 얘기를 나누었다.
인야는 속으로 한숨이 나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분의 전시를 시기해서가 아니라, 인야의 전시 때의 텅 비었던 상황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가난한 나는 전시를 했어도, 끝내면서 그림 한 점도 못 팔고 빈 손으로 나와 계속 못 사는 쪽으로만 가고... 사람 구실도 못하고......'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인야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기 질투가 작용할 거라면 아예 이 전시회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