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필자는 각각의 성씨와 가문에는 독특한 DNA가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교육자가 많은 집안, 군인이 많은 집안, 의사·약사가 많은 집안, 체육인이 많은 집안, 음악인이 많은 집안 등이 있다. 이들의 자긍심은 전통이 되고 저력이 된다.
일례를 들면 필자의 충주지씨 인물 중 지백원은 조선시대 관혼상제 때 택일과 길흉을 가리는 천기대요라는 책을 증보(增補)했으며, 그의 손자 지일빈 역시 관상감 교수로 재직하면서 왕실의 대소사에 참여하였다. 지석영(1855~1935)은 우두를 들여와 천연두를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성의학교 초대교장을 역임했다.
근자에 청오 지창룡(1922-1999)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동작동국립묘지, 대전국립묘지 등을 선정하면서 1990년대 까지 풍수계를 선도했다. 그리고 필자 또한 현재 풍수계에 몸담고 있는 것을 보면 충주지씨 DNA는 천문과 지리를 살피는 음양오행술에 관한 재능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영월엄씨 시조 엄임의(嚴林義)는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년) 때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후 영월 땅에 안주하면서 영월엄씨 시조가 되었다. 처음 정착한 영월읍 하송리에는 그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1200년으로 추정된다. 용문산 은행나무와 함께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천연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의 큰 이변이 있을 때 마다 무언의 예시가 있다고 해서 신목으로 불린다.

영월엄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2) 영월호장 엄흥도가 청령포에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들 문중산에 장례를 치루면서 비롯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음력 10월 땅이 얼어 작업이 어려웠으나 노루가 머물던 양지바른 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에 안장했다고 한다.

남몰래 장례를 마친 엄흥도는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이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자취를 감춘다. 옳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뜻이다. 엄흥도는 당시의 절대권력에 저항하며 죽음을 무릅쓴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영월엄씨는 200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엄씨 성을 감추며 숨죽인 체 지내야 했다. 그리고 1669년 송시열의 주청에 의해 비로소 은둔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1669년 현종10년 1월 5일)
송시열 아뢰기를
"노산군이 해를 당했을 때 시신을 아무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고을의 아전 엄흥도란 자가 즉시 가서 곡을 하고 스스로 관곽을 준비하여 거두어 묻었으니, 지금의 이른바 노묘(魯墓)입니다. 엄흥도의 절의는 사람들이 지금도 칭찬하고 있는데, 신이 전조(銓曹)를 맡고 있을 때 그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고자 했으나, 그 유무를 알지 못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자손이 본 고을에 있기도 하고 괴산에 있기도 하다는데, 그 절의를 장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녹용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해조(該曹)에 명하여 찾아 녹용하게 하였다. 그 후 엄흥도는 1743년(영조10) 공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사육신과 함께 영월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그 시기부터 영월엄씨들은 과거급제를 통해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영월엄씨 근대의 주요인물을 보면 고종황제의 후궁인 엄황귀비(1854~1911)는 영친왕의 생모로서 교육사업에 사재를 털어 양정, 진명, 숙명 등의 사학을 세우니 구한말 선각자셨다.
엄복동(1892~1951)은 일제시대 때 수차례 자전차 대회에 출전해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함으로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당시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라는 유행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엄항섭(1898~1962)은 김구 주석의 최측근으로 상해임시정부 외교부장을 지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엄항섭군은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려는 것이었다.” 그 후 엄항섭은 6.25 때 납북되었다가 1962년 북한 애국열사 능에 묻혔다. 남북한 모두에서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엄항섭, 우측이 김구
최근에는 영화배우 엄행란, 아나운서로 이름을 떨친 엄기영, 히말라야 8000m급 16개 봉우리를 세계 최초로 완등한 엄홍길 등이 있다. 그리고 건영그룹을 이끌던 엄상호 회장은 현재 대종회 회장이며, 육군대장 출신 엄기학은 대종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 엄병윤 유라그룹 회장, 엄석오 일레븐건설 회장, 엄주섭 단해그룹 회장 외에도 정치, 경제, 문화, 법조, 학계, 언론 등에서 수많은 인재가 활동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성씨는 274개에 달하는데, 그 중 엄씨는 약 12만 명으로 50위권이다. 인구대비 인재의 비율을 보면 영월엄씨가 최상위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충효와 예에 관해서는 타 성씨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이것이 영월엄씨 가문으로 면면이 이어지는 DNA라고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그러한 저력이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하였다. 그리하여 풍수인의 관점에서 영월엄씨 시조 엄임의 묘를 주목하게 된다.

영월엄씨 시조 묘는 봉래산(800m)을 주산으로 삼아 동강변에 남향으로 자리하였다. 풍수고전에 ‘산고인귀 수심인부(山高人貴 水深人富)’라는 말이 있는데, 산은 인재를 키우고 물은 부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봉래산은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 : 방장산, 봉래산, 영주산)의 하나로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성삼문은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시를 남기는데, 이곳에도 봉래산이 등장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까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 시조의 봉래산이 봉화의 봉래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맞는 청령포는 봉래산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엄임의, 단종, 엄흥도, 성삼문, 장릉은 모두 봉래산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미스테리한 퍼즐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이를 토대로 영월읍에서는 봉래산 정상에 운치 있는 소나무를 심어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각설하고, 크고 높은 산들이 대부분 험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봉래산(800m)은 흙이 많은 육산이다. 이는 산의 기운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영월 봉래산은 웅장하면서도 중후하고 온화한 기품이 있는 형상인데, 고산치고는 매우 이례적이다.
봉래산은 멀리 오대산에서 파생된 주왕지맥 끝 지점이다. 산줄기가 이처럼 길고 유구하다는 것은 지기의 역량이 오랜 동안 이어진다는 것이고, 산줄기 끝부분에 있다는 것은 주왕지맥의 꽃과 열매에 해당된다는 의미다. 유기체인 기맥은 봉래산에 이르러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최종적으로 자신이 좌정할 곳을 찾다가 현재의 장소에 이르러 마치 용상에 걸터앉듯 언덕 위에 당당하게 자리하였다. 실제로 시조공 묘는 영월 읍내에서 가장 우뚝한 곳이다.
풍수에서 이러한 혈처는 산 중에서 가장 건강한 지점이며, 신비한 에너지가 표출하는 파워스팟으로 여긴다. 마침 이곳에서는 매년 시향제가 열리니 조상의 음덕을 원한다면 수시로 이곳에 들러 지기의 체험을 하는 것이 좋다. 이 현상을 풍수에서는 동기감응이라 하며, 2천 년간 유지되어온 풍수의 거대담론(巨大談論)이다.
예를 들면 형제간에도 조상을 잘 받드는 사람이 무탈하면서도 평안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결국 엄문에 큰 인물이 계속 이어짐은 봉래산의 역량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시조공 묘 앞에는 동강이 석항천, 남한강과 합수된다. 풍수에서는 물이 모이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재물이 쌓여 도시가 형성된다고 하였다. 즉 여러 물줄기가 합수되는 것을 가장 길하게 여기는데, 경제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월엄씨 중 재력가가 많은 것은 동강의 물줄기와 무관하지 않다.
세 줄기 물이 합수된 동강은 청령포에 이르러 크게 S자 모양으로 흐른다. 마치 물줄기가 살아 꿈틀대는 모습 같은데, 이곳을 수구처라 한다. 수구는 물빠짐을 막아주는 곳으로 청령포 지점은 영월읍내의 지기와 재화가 빠지는 것을 단속하는 장수의 역할이다.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면 수많은 봉우리가 봉래산 혈처인 묘소를 에워싸고 있으니 주인과 손님의 품격이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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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영월엄씨 시조공 묘는 장엄한 산줄기가 끝나는 혈처에 여러 물줄기가 합수되는 곳이고, 수구처까지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뭇 산의 봉우리가 웅장한 스케일로 마치 주군을 보필하듯 하니 풍수에서 지극히 귀하게 여기는 명혈이다. 최근 30년 동안 시향제를 치루면서 단 한 번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 없이 청명하였다 하니 마치 후손들에게 밝은 미래를 비추어주는 것 같다.
아! 뉘라서 조상의 음덕이 없다할 것인가.
시조공 이래 명문가의 기틀을 다졌던 엄문은 엄흥도 이래 200년간 고난의 시기가 있었지만, 이는 더 높은 명문가로 도약을 위한 재충전의 시기였을 뿐이다.
엄흥도의 복권 이후에 과거급제자가 속출하고 수많은 인재가 연이어 배출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엄문이여! 그대들은 축복받은 가문이니 자긍심을 마음 속 가득 지녀라.

엄기영 대종회 수석부회장, 필자, 엄상호 대종회 회장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단종 장례 치른 엄흥도 후손에 내린 공문서. 국가에 기탁했다고
연합뉴스, 강원일보에 실렸습니다.
영월엄씨 종친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훈민정음 헬레본 수천억
달라고 하는 집안과 대조적 입니다.
소중한 자료를 모든 사람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셨군요
영월엄씨 종친회의 과감한 결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