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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제2공화국과 제2제국(1)
공화정과 그 좌절
1848년 2월 25일 아침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공화국의 선포는 프랑스 안팎에 갖가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깊은 걱정과 놀라움에서부터 무한한 희마오가 열광에 이르기까지. 당시 로마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브로글리 공은 공화국 선포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란 사람 중의 하나인데,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가, 가족, 명예, 희망, 이익, 개인적 안전이 모든 것이 일시에 위협을 받고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듯하였다. 사람들은 1793년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화정이란 유혈, 재산 몰수, 공포정치, 전쟁을 의미하였다.
공화국이 선포되자 부자들은 재산을 팔고 은행 예금을 인출하였다. 은행은 잔고가 바닥이 났다. 프랑스에 와 있던 영국인은 일주일 안에 1,300명 이상이 본국으로 총총히 돌아갔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낭만적인 희망과 낙관이 여러 모양으로 폭발하였다. 파리만 해도 한 달 사이에 450종의 클럽이 생기고 프랑스 대혁명을 찬양하는 무도횡가 곳곳에서 열렸다. 1835년의 신문지법이 철폐되면서 갖자기 사회적, 정치적 프로그램을 선전하는 신문과 팸플릿이 범람하였다. 2월혁명과 새 공화국은 새 시대의 새벽으로 찬양되었다.
7월혁명의 경우에도 그랬거니와 2월혁명에서도 혁명의 해석에 두 의견이 대립하였다. 하나는 신문 <르 나시오날>이 대표하는 의견이고 또 하나는 <라 레포름(La reforme)>이 대표하는 의견으로서, 2월혁명을 전자는 정치혁명으로 해석하고 후자는 사회혁명으로 해석하였다. 전자는 제한선거에 바탕을 둔 왕정의 자리에 보통선거에 바탕을 둔 공화정을 수립함으로써 혁명의 목적이 완전히 달성되었다고 생각했으나, 후자는 그러한 정치적 변혁에 머물지 않고 산업주의가 낳은 사회적 폐해와 노동조건의 급진적 개혁으로 사회문제까지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자는 그러한 급진적 사회개혁은 오히려 혼란과 무질서만을 낳고 정치적 개혁의 성과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하여 후자에 맞섰다. 7월혁명의 결정적 승자는 부르주아지였으나 2월혁명의 승자는 노동자계급과 주소 부르주아지의 연합이었다. 사실 1830년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본질적 차이가 여기 있었다. 따라서 1848년에는 부르주아지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두 의견의 대립으로 양 파는 타협에 의해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의 각료를 보면, <르 나시오날>파에 아라고(Francois Arago), 크레미외(Adolphe Cremieux), 마리(Alexandre Marie), 라마르틴이 있고, <라 레포름>파에 루이 블랑, 플로콩(Ferdinand Flocon), ‘노동자’ 알베르(Albert, 본명 알렉상드르 마르탱, Alexandre Martin), 르드뤼 롤랭(Alexandre Auguste Ledru-Rollin)이 있었다.
2월 25일 아침 파리는 적색으로 꽉 찼다. 빨간 때, 빨간 모자, 빨간 리봉. 소총과 칼로 무장한 민중이 사람들에게 빨간 휘장을 나눠주고 있었다. 집집마다 빨간 깃발을 꽂았다. 시청에도 앙리 4세의 동상에도 붉은 기가 꽃혀 이;ㅆ었다. 이는 파리에는 2월혁명을 사회혁명으로 해석하는 급진파가 우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마르틴의 웅변의 요술은 붉은 기를 내리고 삼색기를 달게 하였다. 라마르틴은 군중 앞에서 “붉은 기는 1891년과 1893년에 민중이 흘린 피 속에서 샹 드 마르스를 한 ㄴ바퀴 돈 일밖에 없다. 그러나 삼색기는 조국의 명예와 영광과 자유를 짊어지고 온 세계를 두루 뛰어다니지 않았던가?” 라고 연설했다. 파리 시민은 흥분 속에 내걸었던 붉은 기를 내리고 삼색기를 국기로 결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것은 <르 나시오날>파의 큰 승리였다. 27일 정부 기관지 <모니퇴르>는 다음과 같이 포고문을 실었다.
임시정부는 삼색기를 국기로 선포한다. 이 삼색기는 프랑스 공황국이 수립한 새 질서 속에 계속 계앙될 것이다. 삼색기에는 프랑스 공화국, 자유, 평등, 우애라는 낱말들이 씌어 있다. 이 낱말들은, 이 깃발이 상징하는 동시에 삼색이 그 전통을 지속하는, 가장 뜻깊은 민주주의 이념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라 레포름>파도 노동자의 권익을 획득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민의 노동권을 선언하고 노동자의 단결권도 승인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민중에 의해 수행된 혁명은 민중을 위한 혁명이 되어야 하므로 노동자의 오랜 부당한 고통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여 노동자 대책 정부 위원회를 창설한다”고 공포하였다. 루이 블랑과 알베르가 각각 의장과 부의장에 취임한 그 위원회는 노동문제를 조사 연구하는 상설 기관이었다. 또 정부는 실업자 구제를 위한 재정 부담을 선언한 동시에 국립 작업장(아틀리에 나시오노, Ateliers nationaux)의 즉각적인 설립을 결정하였다. 국립 작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하루 2프랑의 임금을 일률적으로 지불하기로 하였다. 3월 4일에 벌써 3만 명의 실업자가 국립 작업장 취업을 신청하였다. 그런데 신청자 수는 날마다 늘고 있었으나 그들에게 줄 만한 일거리도 자금도 넉넉지 않았다. 그리고 지방의 대도시들도 파리의 본을 받아 국립 작업장을 만들었다.
한편 3월 1일 노동위원회가 업무를 시작하였다. 231명의 자본가 대표와 242명의 노동자 대표로 전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튿날 노동위원회는 노동시간을 파리에는 하루 열 시간, 지방에서는 열한 시간으로 단축했다. 많은 노동쟁의를 조정하고 파업을 정지시키고 또 노동조합 결성을 원조했다. 이 모든 것은 7월왕정의 자유방임 정채고가는 격세의 감을 주었다. 분명히 커다란 변화였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열광적 희망을 부풀리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은 이 변화를 사회의 전반적 변혁의 서곡으로 생각하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3월 5일 보통선거제가 결정되었다.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것이다. 유권자는 1846년 8월 선거 당시의 24만 8,000에서 일약 960만 명으로 늘게 되었다. 선거일은 4월 9일로 공고되었다. 보통선거와 함께 검열도 보증금도 필요 없는 출판의 자유, 노예제의 폐지, 사형과 신체의 구속 및 체형의 폐지 등 일주일 사이에 평등주의의 포고가 꼬리를 물고 잇달았다. .170개의 신문이 발간되고, 국민 방위대가 5만에서 20만으로 급증하였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일주일 사이에 공화주의자가 되고 값싼 자유와 우애의 정열에 도취하였다.
그러나 그 보편적인 우애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는 체하면서 실은 정열이 환멸로 바뀌는 때를 기다려서 혁명에 반격을 가할 기횔ㄹ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 꼬리를 물고 연이어 공포된 그 많은 개혁 가운데는 무장 시위의 압력에 강요된 것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은 정부 내외의 온건파에게 공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들은 이제 곧 다가오는 선거에서 일대 정치적 투쟁을 감행할 터였다. 온건파는 과격파에 대결하기 위하여 반정부 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벌써 3월 13일에는 정통파가 ‘선거의 자유를 위한 공화 클럽’이라는 위장 장치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기관지 <국민의회>라는, 역시 그럴듯하게 위장된 이름의 신문에서 오로지 사회질서와 종교의 옹호만을 외치고 있었다. 이는 마치 공화국이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종교를 박해하기나 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풍겼다.
선거일을 4월 9일로 공고한 것은 임시정부의 큰 실수였다. 반혁명세력은 유권자가 24만에서 갑자기 960만으로 늘게 되는 사실에서 승산의 요인을 발견하고 있었다. 1833년의 초등교육법이 실시되어 문맹률이 많이 낮아지고 대중용 출판물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유권자는 아직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농민이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의식을 좌우하는 것은 교구 신부들이었다. 그러한 유권자들로 공화국이 수립될 수 있으리라고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공화파가 선거에 이기려면 무식한 농민을 교육하고 공화주의를 전전할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조기 선거는 공화파에게 불리하고 보수파에게 유리하였다. 그러므로 파리 시민은 선거일을 연기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겨우 2주일이 연기되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차차 보수파의 반격 태세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첫 표시가 3월 16일에 나타났다. 국민 방위대 가운데는 파리의 부유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선발 중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라 레포름>, 상설 노동위원회, 국립 작업장, 기타 일체의 사회개혁을 과격한 공산주의와 구별할 줄 모르는 보수적 공화파로서 다가오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로 귿게 결심하고 있었다. 내무 장관 르드뤼 롤랭은 그 ‘선발 중대’를 해산시켰다. 3월 16일 해산에 반대하는 시위가 공화파 지도자들을 빨갱이라고 매도하였다. 공화파는 깜짝 놀랐다. 이튿날 선발 중대에 반대하는 민중의 시위가 벌어지고, 21일에는 극좌파의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가 ‘클럽의 클럽(Club des Clubs)'를 창설하여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선전하면서 선거의 무기한 연기를 요구하였다. 4월 9일에는 블랑키보다 더 과격한 바르베스(Armand Barbes)의 ’혁명 클럽(Club de Revolution)'이 임시정부를 향하여 프랑스 은행, 보험회사, 철도, 광산, 염광 및 운하 일체의 즉각 국유화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정부 안의 사회개혁파를 포함한 모든 공화파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블랑키도 큰일 났다고 생각하였다. 4월 16일은 국민 방위대의 장교 건거일이었는데, 이날 노동자의 시위대가 선거의 연기를 다시 요구하고 나섰다.
농민의 눈에는 공화국인 소란 자체였다. 프랑스 농민은 대혁명의 결과 비록 경작 면적은 영세하더라도 대체로 토지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프랑스 농민은 근검 질박의 특성을 지니고 자기 소유지에 대한 애착이 극히 강했다. 그들은 파리의 사회개혁의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혁명정부가 새 농지법을 재정하여 개인의 토지를 재분배하거나 국유화할 것이라는 소문에 기절초풍하였다. 프랑스 농민의 보수성은 보통선거제의 도입과 함께 오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정치의 보수적 경향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리하여 프랑스 민주주의의 특성을 농촌 민주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한 농민이 1848년 4월 하순 총선 거의 960만 유권자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니 그 총선거의 파리의 혁명을 후퇴시켰다고 하여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총선거의 결과는 정통파 등 우익 왕정파가 차지한 약 150석과 좌익의 사회주의자가 얻은 약 100석을 제외한 나머지 600석 이상이 중도파에게 돌아갔다. 파리에서조차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인기가 없었다. 노동위원회 의장 루이 블랑은 12만 표밖에 얻지 못하였는데 라마르틴은 26만 표를 얻었다. 이 비교는 파리에 사는 일반 시민의 정치적 성향을 말해 주고 있다.
5월 4일 제헌의회가 열렸다. 876석 중 700석이 신인이었다. 1792년 9월의 입법의회를 연상시켰다. 정치에 경험이 없는 이 의회는 “마지막 지롱드 당원”이라고 불리는 라 마르틴의 웅변에 호응하여 최고 행정권을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다섯 명의 집행위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이 위원회에 종속하는 장관들도 위원회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다.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는 이런 행정권은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후 탄생했던 총재정부의 권력 구조를 닯은 것이었다. 그리고 의회는 10일과 11일에 5인 집행위원에 아라고, 가르니에 파제스, 마리, 라 마르틴 및 르드뤼 로랭을 선출하였다. <라 레포름>파는 르드뤼 롱랭 한 사람이 끼어 있을 뿐이고 이제 루이 블랑도 알베르도 없었다. 의회는 그 졸렬함과 보수적 경향을 개회 벽두부터 노출한 것이다.
이에 의회 해산을 외치는 시위가 12일부터 시작하더니 15일에는 드디어 경찰의 저지를 뚫고 의사당에 난입하였다. 데모대는 경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의회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의회에 기만당한 국민의 이름으로” 의회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보통선거의 침해에 대하여 무언의 항의밖에 할 수 없었던 의원들도 드디어 의사당에서 쫓겨났다. 시위대는 새 임시정부를 선언하기 위하여 시청도 점령하였다. 시청에는 알베르와 바르베스가 선언문의 기초와 새 각료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 방위대의 반격이 의회와 시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2의 혁명을 노린 극좌파의 시위 주동자들은 모조리 체포되었다. 진심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사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 공화국의 구출도 그만큼 용이하였다. 사회공화국을 꿈꾼 자들은 정치적 실책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과오를 저질렀다.
이 5월 15일의 좌익 쿠데타의 실패는 국립 작업장의 해산을 결정적인 데로 몰고 갔다. 국립 작업장 취업 신청자는 4월 말에 11만 5,000명을 넘었는데, 그들의 일거리는 나흘에 하루밖에 없었다. 그들은 노는 날에도 1프랑의 수당을 받았는데 국가 재정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공짜 수당을 받는 쪽은 굴욕감을 느끼고 납세자 쪽은 국고의 낭비를 비난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권의 보장이란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하다고 불만을 타트렸고, 일반 국민은 놀고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의 부도덕함을 꾸짖었다. 거기에다 정부 재정의 낭비는 경제 부흥을 저해하고, 많은 노동자의 집단 수용은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5월 15일 쿠데타에 국립 공장 노동자가 많이 가담했으니, 보수파는 이제야말로 국립 작업장을 폐쇄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5월 17일 의회는 국립 작업장의 운명을 결정할 전문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한다. 이 위원회의 설치안의 입안자는 철저한 보수파 가톨릭의 팔루 자작(Vicmte de Fallou)이었다. 24일 그 전문 위원회의 결정은, 18세에서 25세까지의 독신 노동자는 군에 입대하거나 아니면 즉시 해고되고, 6개월 이상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는 증명을 제시하지 못하는 노동자도 해고되고, 나머지 노동자는 일급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청부제에 의하여 공장주에게 징집되고, 만일 징집을 거부하면 즉시 아무 보상도 받지 않고 작업장 명단에서 제명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이 너무 가혹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5월 30일 군입대 조항을 취소하고 파리 거주 기간도 3개월로 낮추었다.
이러한 완화 조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나롤 불온해 갔다. 더구나 6월 4일의 보궐선거에서 11석 중 4석을 얻는 데 성공한 극좌파는 한층 더 혁명적인 기세를 보였다. 매일 밤 노동자의 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5월 30일 법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팔루 일파는 의회에서 노동자를 자극하는 선동과 함께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을 공작에 열중하였다. 그들의 은밀한 계획은 첫째 노동자의 폭동을 유발하고, 둘째 폭동 진압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군사독재를 수립하고, 셋째 폭동 진압의 혼란 속에서 최고 행정위원회를 전복하고, 넷째 의회의 승인을 얻어서 쿠데타를 완성시키는 동시에 합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계획대로 진행되어 갔다.
우선 첫째로 의회로 하여금 “국립 작업장 명단에 등록된 18세에서 25까지의 노동자는 병역의무에 복무해야 하고, 나머지는 지정된 도에서 토지 정리 작업에 종사하게 할 것”을 결의하게 하여 21일 이 결의를 공포하게 하였다. 이것은 최악의 사태를 유발하려는 팔루 일파가 꾸민 음모의 첫 성과였다. 아니나 다를까, 21일 밤 천 수백 명의 노동자가 삼색기를 앞세우고 항의 시위를 일으켰다.
이것을 시발로 가두시위 군중이 시시각각 불었다. 23일은 아침부터 사태가 매우 험악하였다. 정부는 국민 방위대를 소집하였다. 그런데 팔루는 다음 날 하기로 되어 있는 국립 작업장 폐쇄에 관한 보고를 하루 앞당겨 “여자 작업장 이외의 모든 작업장을 사흘 이내에 해산하고 간부에게만 3개월간의 휴직 급료를 주고, 나머지 노동자의 보상을 위하여 300만 프랑의 예산을 책정하고, 소요에 가담하여 체포된 자에게는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제안하였다. 보고를 하루 앞당긴 것도, 노동자들을 격분시킬 만한 내용의 제안도, 모두가 폭동을 과격하게 만들려는 팔루 일파가 꾸민 음모였다. 팔루의 보고가 노동자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의 감정은 격앙하고 행동은 거칠어졌다. 그들은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제제되지 않았다. 그것은 팔루의 계략이었다.
의회는 사태의 악화에 당황하였다. 의회는 육군 장관 카베냐크(Louis Eugene Cavegnac)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팔루가 짠 프로그램의 제2단계였다.
카베냐크는 약 5만의 정부군을 수도에 배치하고 지방 각 도에 방위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23일 오후 군대는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쌍방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것은 1830년 7월이나 1848년 2월의 시가전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24일 아침 이 놀라운 사태에 직면한 의회는 이미 사실상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카베냐크에게 군사적 독재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를 행정 장관에 임명하였다. 최고 행정위원회는 소리 없이 전복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팔루의 프로그램의 셋째 단계가 실현되었다.
전투는 계속되었다. 처참한 유혈전이 26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사망자의 정확한 수는 알 길이 없다. 정확한 것은 약 1,000명의 군인이 죽었다는 것뿐이었다. 푸타스(C. H. Pouthas)는 “며칠간 파리의 도웁 지구들은 공동묘지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뷔리(J. P. T. Bury)는 기술하기를, 이 6월 폭동은 “구호도 주모자도 깃발도 없는 10만 명의 반란이었다. 그것은 국민의 일부가 다른 일부에 대해 봉기한 반항이었다.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계급적 투쟁이었으며 일종의 노예 전쟁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그것은 무자비한 싸움이었다. 체포된 자 약 1만 1,000명 중 주동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4,000명쯤이 알제리아로 유배되고 약 6,400명이 석방되었다.
폭동의 와중에서 탄생한 카베냐크의 새 정부는 내각의 형태를 취했는데, 새 정부는 이제 위험한 요인을 일체 단호히 제거하였다. 국립 작업장의 폐지, 온갖 종류의 클럽의 폐쇄, 폭동 진압에 응하지 않는 공화적인 국민 방위대의 무장해제 또는 해산, 신문지법의 부활에 의한 언론 탄압, 하루 열두 시간으로의 노동시간 연장, 온갖 빛깔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과 감시 등 공화국은 이제 이름뿐이고 반동이 완전히 지배하였다. 루이 블랑과 같은 온건한 사회주의자도 총총히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으면 그 생명이 위태로왔다. 카베냐크가 폭동을 다 진압하고 그 사실을 의회에 보고하고 나서 “공화국 만세”를 불렀을 때 라마르틴은 “공화국은 죽었다”고 외쳤는데, 과연 6월 폭동과 함께 프랑스 제2공화국은 죽었던 것이다. 2월혁명을 승리로 이끈 세력은 이제 실망과 좌절에 빠지고, 수개월간의 꿈과 낙관은 내란의 공포 속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공화국이라는 이름은 몇 년 더 존속하지만, 그것은 이미 공화국이 아니었다. 혁명에는 승리했으나 결국 패배한 자들은 비참한 패배의 기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고, 공화국에 대한 불신을 오랫도록 씻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6월 폭동 이후의 의회는 노련한 정통파와 오를레앙파에게 이끌려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기는 하나 그 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결국 이 기묘한 공화국에 일격을 가하여 공확국이라는 이름마저 지워버리고 말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