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꽃에 대해 괴로워하며 말하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젊은 날부터 그랬다. 각종 집회와 가투의 시절을 보낼 때에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찍부터 나에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었다. 사람의 추함과 나약함이 슬퍼서 최루가스 자욱한 거리에서 세족식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사람에 속한 나에 대한 일종의 동종요법, 혹은 연민이랄지 하는 것이 나를 거리로 이끌었다고 말하는 쪽이 정직하다.
내게 꽃은 말 그대로 話頭이다. 그리고 모든 꽃은 다 花頭다. 저마다 오로지 꽃으로 盡花事待天命한다. 꽃에 대한 집요한 예찬 때문에 더러 욕 먹는다. 꽃, 혹은 꽃으로 상징되는 세계에 대해 지나치게 근본주의자 같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아닌 게 아니라 꽃을 향한 내 마음이 좀 과잉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기는 하다.
꽃병에 꽂는 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드는 꽃을 바라보는 일도 괴롭거니와,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버려야하는 일이 주는 곤혹스러움이 싫어서다. 꽃병에서 시들어가는 꽃은 완전히 시들기 전에 차라리 벽에 걸어 말린다. 이따금 무슨 축하할 일이라도 생길 때 꽃다발을 선물하려는 벗들에겐 이런다. 잘린 꽃 말고, 화분으로 주라.
지인들과 봄길을 산책하다가 누군가 무심코 들꽃을 꺾으면 화가 난다. 어떤 벗들은 그런 나를 알고 일부러 꽃을 꺾기도 한다. 사람도 꽃처럼 좀 예뻐해주라. 사람이 얼마나 예쁘니? 그런다. 화를 내다가 제풀에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꽃마리, 제비꽃, 꽃다지, 별꽃, 양지꽃, 냉이꽃 등이 총총히 돋아난 봄의 풀밭길을 걸을 때면 가끔, 걸음을 떼지 못하고 우뚝 서버릴 때가 있다. 어디로 발을 옮겨도 풀꽃들을 밟게 되는 정황이 펼쳐지니 가만히 서있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그럴 때 가끔 내 속의 내가 말한다. 야, 너 지금 좀 과잉 아니니? 오버다 오버.
언젠간 무슨 여성지의 스파 광고를 보다가 화가 난 적이 있다. 이럴 땐 정말 꽃이 액면 그대로의 火頭다. 대리석 욕조의 물에 가득 떠있는 화사한 꽃들. 그 욕조에 몸을 담근 여자의 실루엣. 그 순간 나는 아마 ‘끙’ 하고 목젖을 애써 누르는 소리를 냈을 것이다. 꽃을 욕조 가득 풀어놓은 진짜 스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해 욕조에 가득 담겼다가 곧 배수구로 사라질 꽃들의 운명이라니! 배수구로 빨려들어가는 꽃들의 영상을 실제로 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갑자기 히치콕 영화의 배수구 씬이 지나가며 부르르 몸을 떠는 그 순간, 꽃에 대한 이 ‘과잉’이 나는 좀 징그러워지기도 했다. 아주 살짝.
그런데 그보다 조금 훗날, 꽃이 火頭 역할을 한 결정적 계기가 왔다. 미장원에서 본 여성지에서였다. 특별한 인테리어로 장식한 일종의 ‘멋집’ 소개란. 우아한 마블링 무늬의 변기 속에 진분홍 꽃이 몇 점 떠있는 거였다! ‘꽃이 담긴 변기’ 사진 옆에, 집의 다른 장소도 감각적이지만 특히나 욕실 인테리어가 훌륭하다 못해 미학적이기까지 하다는 코멘트가 붙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도저히 ‘끙’ 정도로 참지 못했다. 가끔 내가 내뱉는 몇 마디의 욕들 중 사감을 잔뜩 섞어 최대한 저주스러운 뉘앙스로 욕했다. 그러고도 속이 후련해지지 않아 책장을 ‘탁’ 덮었고, 이런, 젠장할! 소리쳤다. 주변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여자군, 하는 눈초리들.
나는 꽃 예찬론자인 만큼이나 ‘변소’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변소. 그 장소에 대해서라면 원고지 500매라도 기꺼이 써바칠 예찬론을 가지고 있다. ‘변소’는 생리적 쾌감으로부터 철학적, 미학적 쾌감까지를 기꺼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장소다. 그곳은 단순한 공간성을 넘어선 쾌락의 시공간이다. 쾌/불쾌의 감각이 지닌 멋지고 황당한 자기기만과 허구까지를 포함해, 쾌락이 가진 단순하고도 드라마틱한 기원을 변소만큼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물론 ‘변’(아무래도 나는 똥이라는 말이 가진 생동감이 훨씬 좋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마당 있는 내 집을 갖게 되면 나는 서재만큼이나 공들여 ‘나의 변소’를 설계할 것이다.
그런데, 예찬하는 두 품목인 꽃과 변기의 결합에서 나는 그때 왜 그렇게 흥분한 걸까. 내가 꿈꾸는 변소와 ‘그’ 변소가 너무나 다른 감각으로 추구된 것일지라도, 변기에 꽃을 떨구어 놓은 그 감각이 내가 그토록 흥분해 욕할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꽃과 배설물’이라는 이질적 결합의 상상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고도 할 수 없다. 나는 꽃과 배설물을 이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종족이니까. 그러면 뭔가…….
어제 나는 주문 받은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잠깐 고민했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끌리듯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강원도에서의 오후 두 시 반의 햇빛에는 저녁이 깃들기 시작한다. 햇빛 표피의 온기에 비해 햇빛의 심지는 쌀랑해진다. 내가 살고 있는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는 구식건물에 비해 조경만큼은 꽤 신경쓴 편인데, 흰색 연분홍 진분홍 철쭉이 절정이다. 살금살금 꽃을 따기 시작했다. 꽃을 딸 때, 손가락에 묻어나오는 끈적한 진액이 살짝 소름끼쳤다. 미안, 미안. 꽃의 진액이 풍기는 생것 냄새에 쫓기듯 후다닥 꽃을 따 집으로 올라왔다. 그리곤,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꽃들을 변기 속에 털어넣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초창기 물건인 쿨픽스 4500을 들고 액정을 들여다본다. 내 무의식이 선택한 한 컷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역시 일사천리. 셔터를 딱 두 번 누른다. 주문받은 한 컷과 보너스 한 컷.
<꽃에 대해 괴로워하며 말하기>라고 제목을 친다. 지금, 제목 앞에서 살짝 갸우뚱한다. 몇 개의 문장이 지나간다. 이것은 꽃 핀 변기가 아니다. 이것은 변기다. 이것은 꽃 핀 사람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두상이 퍽 잘생긴 누군가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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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우님이 애용하는 변기를 방금 보았습니다. ^^
두상이 잘생긴 누군가의 얼굴. 정말 그렇네요. 변기가 표백미인으로 변하다니. 그것도 분홍빛 연지로 곱게 단장한 얼굴로. 꽃이 변기를 만나니 조화를 부린거로군요.
변소 이야기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떠올리게 하네요. 원고지 500매... ^^
'그늘에 대하여' 요? 골드문트 님의 덧글이 신선한데요. ^^
언젠가 원고지 500매이상 씌영진 <변기에 대하여>를 읽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