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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 더 깊고 서늘했다
-천양희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중에서- '오래된 농담'
천양희 시인의 시가 부부의 사랑에 대한 애틋함을 짐짓 농담인양 눙치듯 표현하며 일상에 들러붙은 크고 작은 구질구질한 따개비들은 정제한 단어 속에 부셔버리고 압축한 스케치인데 비해,
박완서 작가의 소설은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와 속물스런 남성 중심사회라는 우리 사회의 두 기본 축을 비판하는 농담 같은 박완서의 진담이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은 2000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된 박완서의 장편소설이다.
오래된 농담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장래희망을 의사라고 적어낸 영빈과 광에게 선생님이 어떤 의사가 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광은 돈이 없어 병원에 못가는 사람들을 거저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영빈은 돈을 많이 버는 유명한 의사가 되겠다고 대답하면서 발현했다.
가장 중요한 농담은 그런 영빈과 광에게 현금이 분홍빛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는 돈 많은 의사랑 결혼할 거라고 나풀거린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던 광은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아들딸 가려 낳게 해주는 재주로 돈 많은 의사가 되었고, 영빈은 대학병원 과장으로 실력과 학식을 겸비한 의사가 된다. 현금은 의사가 아니라 돈 많은 사채업자 아들이랑 결혼했다가 이혼했다.
소설에서 작가는 다양한 삶의 농담 같은 양태를 보여준다. 영빈이 현금과의 사통을 아내 수경에게 숨기는 것, 아내 수경이 영빈 몰래 아들을 잉태하는 처절한 몸부림, 현금도 영빈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는 고백, 영준이 느닷없이 미국에서 귀국해 거액을 기부하는 행위, 영묘의 남편 송경호의 병과 죽음을 두고 벌이는 송씨 집안의 행태 등등.
멀쩡한 아내 두고 오래된 초등학교 동창생과 얽히는 실존 행위는 그들이 오래 전에 나누었던 농담의 변용이 아닌가? 아내가 낙태와 의사의 도움을 통해 끝내 아들을 회임하는 것이나 현금이 초등학교 동창 영빈의 아들을 낳기를 희원한 것은 아들 하나는 있어야지 하는 사회의 오래된 농담을 두 여자가 진담으로 수용했음이 아닌가?
박완서가 이 소설을 통해서 세상에 대고 말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읽는다. 가치 중립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과 ‘아들’을 생산함의 의미는 막중하다는 것. 그리고 비록 발신자가 농담으로 말했다 해도 그 수신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진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뭐 깊은 생각하지 않고 농담으로 말하자면, 삶은 심각함을 가장한 농담이다. 수많은 농담과 농담 같은 일들이 뭉치고 섞여 흐르는 안개와 바람같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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