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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대의 동촌유원지는 주위가 모두 사과나무 밭이였다고 한다 그당시 일본인들이 물에다 모터보트를 띄워놓고 즐기기 시작하면서 유워지로서 기능이 시작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지금의 망우공원내 동흥식당 자리에는 엣날에 정자가 하나 있었기에 망우공원밑 10호정도의 동네 이름이 원래는 강정마을이였다. 옛노인들 말로는 강지마을이라고 하였다. 그때는 소똥을 가마니에 넣어 가을에 지금 제3아양교밑에 용수덤에 던져넣었다가 이듬해 봄에 끄집어 내면 소래기에도 다들어가지 않는 큰잉어가 가마니속에 들어앉아 있다가 잡히곤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정기가 끝나고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 시절이 동촌유원지의 가장 좋은 시절이 아니었나 한다 일요일이 되면 그당시 교통이 불편하였기에 대구시민들이 모두 놀수있는 장소는 동촌유원지 뿐이였다 버스가 강건너 동촌동에 까지 오기에 나룻배와 케이블카는 쉴사이가 없다 유원지에서 지금의 망우공원 까지는 사람들이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그당시 어린 내가 유원지 술도가 팔승상회까지 심부름을 가는데 사람에 받혀 내려갈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당시 주음식은 막걸리에 매운탕 통닭이였다 동촌장식당에서 잡는 닭이 천마리도 넘었다고 한다. 식당은 식당대로 흥청거렸고 강은 강대로 수영하는사람 과 유성기를 틀은 유람선 연인들이탄 보트등 이 썩여 그야말로 뽁딱 그렸다. 또 산은 산대로 시골에서 놀러온 사람들이 장구 ,징,깽가리를 치면서 빙빙돌며 놀곤 하였다. 지금의 그린파크수영장 일대는 길따라 색시집이 쭉늘어서 있었는데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은 접대부들이 한집에 5~6명씩 이었다 손님들이 오면 상을 차려놓고 젖가라을 두둘겨가며 노래부르고 노는것이다 그당시여름에는 밤이되면 강에 남여노소 모두 멱감으로 나온다 호기심많은 내친구는 술집색시 엉덩이를 보려고 물속으로 가까이 갔다가 숨을 참지못하고 바로 배꼽 앞에서 튀어 올라와 따귀를 맞기도 하였다 너무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다, 이이야기는 1960대 이야기이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시작 되면서 유원지도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하였다 아베크 위주의 손님에서 각종계모임 위주로의 손님 유치방향이 바뀌었다 1960년대 최고의 식당이 동촌장 식당이였다면 1970년대 최고의 식당은 수정식당이다 계모임 위주로 정식의 반찬이 획기적으로 20가지 이상으로 늘어난것이다. 대히트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 동촌유원 대표적 식당은 두호관이다. 지금의 두호식당이다 지금은 식당이지만 그당시는 관이다 관이란것은 기생집을 의미하는 것이다 . 두호는 기생의 호이다. 호를 따서 두호관이라 하였다. 장구를 치면서 당시 권력자들과 한량들이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내친구의 모친이 두호이다. 지금은 아들과 서울에 생존해 계신다. 이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업화의 좋은점과 나뿐점이 동촌 유원지에 그영향이 나타난다. 자가용이 생기고 도로가 새로 생기고 해서 행락객들이 타지로 흩어지기 시작 하였다 특히 타격적인 마이너스 요인은 금호강의 물이 시커먼 하수구화 되어 조개와 물고기가 전멸하다시피하고 보트를타다가 물이 튀기면 그물을 손수건으로 딱아야할 만큼 물이 더러웠다.
하류쪽의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강바닥이 들어나고 온갖 더러운 물은 모두 금호강으로 몰려드니 강의 고기만 죽는것이 아니라 장사집도 모두 죽었다 그러자 식당들도 이상한 변화가 왔다 남여가 단체로와 식사를 하고는 춤을 추는것이였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각가정의 남편들이 동촌유원지 출입금지령이 내리면서 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번에는 다시 한갑잔치 위주로 식당 메뉴가 바뀐다 식당마다 넓은방을 이용 장구잽이를 고용 장구를 치면서 흥겨운 한갑잔치를 한다. 이것도 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대구시내 대형 뷔페식당에 밀리면서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무었이든지 영원히 잘되는것은 없다 자기발전의 노력없이는 그냥되는것은 없다 그동안 동촌 유원지의 업주나 번영회에서 너무 태만한것 같았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너무 매운탕 통닭만 고집해온 것이다. 세월이 가면 그에따라 사람과 의식이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린파크 수영장도 문을 닫고 식당도 식당주인들도 그동안 늙어 버렸다 한예로 다른 지역 식당들은 모두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모두 바뀌었는데도 동촌유원지는 푸세식 변소 그대로 였다 그리고 외식문화도 고기위주와 화려한 인테리어의 서구식 식사화로 변화한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놀이기구는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지금의 구름다리 밑에 있었는데 회전목마 회전 비행기 회전그네 비행기 그당시에 놀이기구는 동촌유원지에 밖에 없었으니 그인기는 대단하였다 일요일 같은 날에는 벌어들인 돈을 일일이 셀수가 없어 마다리 포대기에 수셔넣어 이틑날 되면 은행 직원이 와서 가져 갔다나...?? 그덕에 어린시절을 유복하게 보낸 그집 막내 아들의 증언이다. 그후로 수해의 위험등 유원지 조성계획 변화로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자리도 자리지만 놀이기구 기계자체가 옛날 구닥다리 그대로 이다 새로이 놀이기구의 투자가 많이 되어야 될것 같다.
그러면 지금부터 다시 옛날 금호강부터 이야기부터 새로해보자 ! 가난했든 그시절 시원한 조개국이 먹고 싶으면 아침해가 봉긋이 올라올 즈음해서 강에간다 맑은 물이 흐르는 모래톱을 잘보면 모래에 작은 고랑이 길게 파져 있다 그고랑을 따라가 보면 칼조개가 기어가고 있다 그러면 그냥 주어 담으면 된다. 잠시 약30분정도면 반바케스 정도는 줍는다. 이것들을 집에 가져와서 하루정도 소래기에 소금을 약간넣어 두면 조개가 속에든 모래와 모든 회를 다내뱉는다 . 다음에는 솥에넣어 푹 삶으면 뿌연 국물이 우려 나오는데 이국물에 깐조개살과 정구지(부추)를 넣어 다시 끓이면 아주 구수하고 시원한 조개국이 되는것이다. 요즈음 중국산 조개가 판치는 이때와는 비교가 되 않는다. 또 쪼데흙이 있는곳에는 밤 조개가 많다 이놈들을 잡으려면 자무락질을 해야한다. 자무락질을 하기전에 먼저 똑바로 서서 부드러운 쪼데흙에 발가락으로 밟아나가면 날카로운 느낌의 딱딱한것이 발에 걸리면 자무락질해서 집어올리면 되는것이다 한참 물속을 들락거리다 한번은 조게를 집어 물위로 솟구치는데 머리위에 딱딱한것과 꿍하고 부딪힌다 물을 몇잔먹고 옆으로 나와보면 물속에 들어간사이 보트데이트를 즐기는 아베크의 보트가 내머리위를 지날때 숨쉬러 올라오다가 보트 밑바닥을 들이받은 것이다.
마땅한 놀이 시설이 없든 그때 눈만 뜨면 강에와서 논다. 발을 물에 담가놓으면 피라미 떼들이 물에 잠긴 다리 주위에 모여 다리를 쪼은다 겁도없다 그때 손으로 재빨리 물을 밖으로 퍼내면 피라미 새끼가 몇마리 파닥거리는데 너무 작아서 손으로 집을수가 없다. 파닥거리는것이 불쌍해서 다시손으로 물을 퍼서 강쪽으로 부어버리면 물과 함께 솔려 들어간다
망우공원 앞의 동흥식당 앞에는 해월장이 물위에 뜨있었다
이집들은 고급 식당이다 주로 맥주를 많이 판것 같았다 그집들의 화장실에서 변을 보면 커다란 잉어들이 와서 모두 받아 먹었는데 그래도 동촌유원지의 강물은 깨끗했다.
다시 지금의 구름다리 옆에는 케이블카가 다녔는데 일요일이면 강을 번개 같이 건너다닌다 오랜만에 동촌 유원지에 놀러온 사람들이 강을 건널겸 해서 많이 탓다. 케이블카 아래는 나룻배에 사람을 가득실고 건너는데 사람이 너무많이타 뱃전에 물이곧넘칠것 같이 찰랑대는데 사공은 긴 장대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땅을 짚어 배를 민다.
20여대의 유람선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 유성기를 틀어놓고 지금의 구름 다리 자리에서 제3아야교 까지 왔다 갔다하고 700대가 넘는 보트는 강을 메우고 들과 산과 식당에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한쪽에는 춤판이고 그뒤에는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다른쪽에서는 싸움을해 머리가 터져 식식대고 있고 그때는 음식먹고 도망가다 잡힌 사람들도 많았는데 보통 술값 음식값이 없으면 시계를 많이 벗어놓고 정 잡힐 물건이 없으면 양복 상의나 구두까지 마껴놓고 갔다.
강에서 놀기가 지겨우면 이제 산으로 간다 산에가면 새밥이라든지 먹을것이 있고 나무가지를 꺽어 우거진 소나무가지 밑에다 가려놓으면 훌륭한 움막이 된다 움막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 하다가 병정놀이를 한다 각자 흩어져서 숨으며 가는데 묘등 사이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난다 놀라서 돌아보니 왠 남녀가 부등켜져 있는데 남자는 위에서 엉덩이를 까고 밑에 있는 여자에게 궁글리는데 여자가 죽는소리를 낸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보니 여자 가랭이 사이로 말뚝 같은것을 남자가 쥐어 박는것이다 성난 성인 남자의 성기를 그때 처음 본것이다 어린 그때는 남자가 여자를 죽이려 하는줄 알았다. 그냥 얼어붙어 서있는데 밑에서 괴성을 지러든 여자가 우리를 본것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놀란 여자가 움추려 버리니 남자의 성기가 빠져 버리는데 그놈의 물건이 왜 그렇게 커보이든지 획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때서야 상황 판단이된 우리들은 겁이 덜컥나 경상도 말로 새가 빠지게 도망을 갔다.
6.25전쟁이 끝난지 10년정도 밖에 안된 그때는 너 나 할것없이 너무나 가난했기에 지금과 같이 러브호텔이 있을리 만무 했다. 산으로 들로 데이트를 즐기든 젊은 청춘 남녀가 뜨거워지면 그자리에서 달랑 손수건 하나 깔고 섹스를 했다. 그대 그렇게 해서 태어난 2세들이 지금은 4~50대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주역들이 그렇게 생산이 되었다.
그당시 유원지에는 각종오락기구 즉 회전그네 회전목마 회전그네 물래방아 쉴사이 없이 돌아가고 금호강에는 유성기를 틀은 유람선이 바쁘게 다니고 강에는 수영하는사람 보트놀이 하는사람 등 이 북적대고 그당시 술집은 모두 판자집으로 지었는데 색시들이 곱게 화장을 하고 술상을 받아놓고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한다 아마 지금의 노래방 반주 보다 더 신명이 났다 내친구 만식이집은 만포장 식당을 하였고 수열이는 대성식당을 하였는데 만식이와 수열이는 입에 닭고기 떨어질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이유는 손님에게 들어갈 닭찜고기중 몇점을 아들에게 줄려고 빼놓기 때문이였다. 창식이 집은 팔승상회라는 술도가를 하였는데 아침이면 일하는 사람들이 강건너 술도가에 가서 나무말통에 열말 정도의 술을 짐자전거에 실고 오는데 그것도 비포장 도로에 엉덩이를 들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패달을 밟았다 |
첫댓글 동촌에서는 장구가락이 최고입니다~~
그림을 보니 나 어릴때 눈에 맴돌고 생각에 귓가에 아우성치던 동촌 유원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겹게 놀던 모습이 감계무량합니다..... 아주 .....새스레 기깅 자알 하고갑니당감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