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미학기행 멋과 미] 입춘의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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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연화(年畵), 여신 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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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토우에 멍에를 씌우고 관청 뜰에서 밭가는 시늉하여 풍년을 기원
입춘날 여자가 찾아간 집에 검질(김) 짓게 되면 그 여자의 음모가 많은 탓
민(民)의 교화를 위한 풍속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 1870~1940)는 "풍속의 역사를 기술할 경우 과거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첫째 목표가 돼야 하지만, 절대로 어떤 일정한 모럴(moral)의 기준을 과거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연구에서 연구가가 명심해야 할 사항은 역사에 영구히 적용되는 모럴의 기준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러한 기준이란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는 사실이다…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도덕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풍속(風俗)이란 말에는 바로 민중의 습속을 교화한다는 뜻이 숨어있는데, 이른바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국가적으로 이끌어나간다는 지배층이데올로기가 습합돼 있다. 바람이라고 해석되는 '풍'의 정신적인 의미를 따져보면, 기풍(氣風), 학풍(學風), 정풍(整風), 국풍(國風)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이때의 바람 '풍'은 이데올로기의 한 측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계급 간 투쟁의 결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매우 일반화돼 있다. 전 근대의 계급을 통치자(지배자)와 백성(피지배)이라는 애매한 분류에서 생산자와 소유자라는 시각으로 확장되었고,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계급구분으로 변화되었다. 사회적인 토대가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자신이 백성으로서, 생산자로서, 노동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기도 어렵거니와 스스로 계급의식을 갖기에도 시대마다 이데올로기의 파도가 너무 세었다. 또한 국가의 실체나 정체성에 대한 것도 다수의 국민은 그것을 감히 의심하지도 그것의 뜻도 거역하지도 못하고 있을 정도다. 가히 이데올로기의 힘에 놀랄 뿐이다.
새봄을 알리는 입춘이 내일 모레다. 입춘은 24절기 중 하나로 24절기란 태양력을 중심으로 한 세시(歲時)의 구분으로, 태양의 황경을 따라 24등분으로 계절을 세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력으로 입춘은 2월 4일경이고 황경은 315?이며, 입춘(立春)이 되면 '동풍이 불어 언 땅이 녹고 땅속에서 잠자던 벌레들도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수(雨水)가 돼 눈이 녹고 비가 오면 기러기가 북으로 날아가며 초목에서 싹이 튼다.
24절기는 농사를 기본으로 하던 시절의 구분이다. 이를 다른 말로 월령(月令)이라고 부른다. 월령은 농업 중심의 국가에서 농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여 이롭게 하기 위한 국가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가 지배체제 이데올로기가 깊숙하게 관여돼 있다. 풍농(?農)은 부국(富國)의 근본이어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진짜 같은 거짓말이 탄생할 정도였다. 과거에 정작 농민은 국가의 착취의 근본이 아니었던가.
앞서 푹스가 말한 것처럼 풍속을 연구함에 있어서 '절대로 어떤 일정한 모럴(moral)의 기준을 과거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눈으로 다른 종교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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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그림(황소와 흑우 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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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경 풍속 유래
굿이 민중의 한 많은 현실을 어루만져 준 것 때문에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역으로 진짜 민중의 정신을 교란시키고 현혹시킨 것은 여타의 종교와 다르지 않다. 허나 굿은 기층 민중과의 만남에서 민중의 풍속과 연관을 잘 짓고 그래서 현실의 자료를 풍부하게 남긴 것도 굿의 장점이다.
입춘을 맞아 춘경하는 풍속은 어디서 유래한 걸까.『예기(禮記)』에, 입춘 전에 토우를 만들어 봄을 맞이하던 기록이 있고, 또 『주례(周禮)』에서는 '왕이 친히 동쪽 교외(東郊)에 나가 풍농을 위해 적전(籍田)을 갈고 왕후는 종자를 바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기록에 의거하여 고려 성종은 998년 봄에 행하는 정령(政令)을 전국에 반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 '입춘 뒤 소날(丑日)에 견수곡문(犬首谷門)에서 풍백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 했다.
『동문선(東文選)』에도 입춘에 앞서 '주(州)와 부(府)에서는 흙으로 빚어서 소를 만들고, 쇠붙이와 나무로 만든 농기구와 채소, 과일, 술, 안주 등 제물을 준비하여 일을 맡은 아전이 목록을 적은 문서를 들고 이를 감독하여 빠짐없이 준비가 완료되면, 수령과 부관은 부서의 아전과 모든 군관과 병졸들을 거느리고 동쪽 교외에 나가 각기 관복을 착용하고 제사를 드린다. 이것은 사직(社稷)을 받들며 농사를 연습하는 것이고, 조세를 받아들이며 회계 사무를 수행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거나 경축 행사가 있거나 하는 등 1년의 사무를 모두 벌여 놓아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정자에서 하지 않으면 적당한 곳이 없다.' 이런 정자를 '영춘정(迎春亭)'이라고 하는 데 주(州)와 부(府)에 꼭 있으며, 영객정(迎客亭) 또한 따로 있었다고 한다. 영객정은 지역으로 오는 모든 사절이나 관원을 직급별로 맞고 전송하는 정자이다.
농경 국가에서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것을 시범하고 교육하는 것이며 온갖 공무를 위해 오는 관원을 맞고 전송하는 것이 수령의 주된 의무였다.
『미수기언(眉?記言)』에, '옛날 실직(悉直:오늘의 三陟)의 고사(古事)에, 입춘 날에 신농(神農:先嗇) 씨에게 제사하고 오곡을 뿌리는데, 북 치고 길을 돌아다니면서 봄기운을 발동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백사(白沙)의 『조천록(朝天錄)』에, 중국의 어느 관속(關俗)에, '입춘 하루 전에 봄맞이 놀이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갑옷 입은 기병 수백 명이 앞에서 인도하는 가운데 귀신 가면을 쓴 광대들과 흙으로 만든 소(土牛)와 울긋불긋한 종이로 만든 정자(亭子)가 길거리를 가득 메웠고.....시장의 상인들은 채색 종이를 얽어 만든 누각(棚子)을 만들어서 메고 가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으며…주옥과 비취로 눈부시게 단장하여 말을 타고 가는 창기(娼妓)들이 또 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실제 경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입춘의 봄맞이 행사는 중국에서 성행하여 고려에 전래되었다. 입춘날에 왕은 백관에게 춘번자(春幡子:머리에 꽂는 깃발 모양의 장식물)를 주는 데 이것은 송나라 고종 때 유래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토우(土牛)는 진흙으로 빚은 소의 토우에 멍에를 씌우고 채찍으로 때리며 관청 뜰에서 밭가는 시늉을 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타춘(打春)이라고 한다. 후대에는 진흙 대신 짚이나 갈대, 혹은 종이, 나무 등으로 소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를 일컬어 춘우(春牛)라고 불렀다.
이 토우는 『예기(禮記)』에 의하면, 겨울의 찬 기운을 마지막으로 보낸다는 의미에서 만들었다. 오행(五行)에 있어서 토(土)는 수(水)를 이기므로 추위를 이긴다는 의미가 있으며, 소는 논밭갈이를 잘 하므로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후에 이런 토우의 역할을 이어 받고 목우(木牛)로 변하게 된 것이다. 토우의 다른 말로는 '청우(靑牛)'라고 하는 데 수나라에서 부르던 말이다.
입춘을 전후하여 계절의 기쁜 소식으로는 소한(小寒)에 매화(梅花), 동백(山茶), 수선(水仙)을 볼 수 있는 것이고, 입춘이 되면 세 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으니, 영춘(迎春), 앵도(櫻桃), 망춘(望春)이 그것이다. 또 우수(雨水)의 세 가지 소식은 나물 꽃(菜花), 살구나무 꽃(杏花), 배꽃(梨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예술학,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