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관세음보살의 화현
세계의 선지식들 4 - 대만 자제공덕회 창시자 증엄 스님
50년 만에 비약적인 불교중흥을 이룬 대만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님은 과연 어느 분일까. 불광산의 성운(星雲) 스님, 법고산의 성엄(聖嚴) 스님, 중대선사의 유각(惟覺) 선사 등 존경받는 큰스님들을 제치고 인기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분은 의외로 비구니스님이다. 끝없는 자비와 보살행으로 세계 각 국의 천만 신도는 물론 대만인들에게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칭송받고 있는 자제공덕회 회주 증엄(證嚴) 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적시고 자비로운 눈빛에 중생구제의 굳은 원력으로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실천해 온 증엄 스님은 대만 국내 및 해외에서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마다 신속하게 재난구제에 나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99년 9월 21일 타이완 중부 지역에 발생했던 리히터 7.3규모의 강진 참사를 들 수 있다. 이 대지진으로 2,318명이 죽고 사회기반시설의 상당수가 초토화되었다. 진앙 지역 부근 지대인 타이중과 지지 지역에는 구조대원들조차도 접근하기 전, 이미 2만여 자제공덕회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구호물자를 전달하며 구제활동을 펼쳤다. 곧이어 자제공덕회는 80억원(한화 약 3,200억원)을 모금해 재난 지역에 50개 학교를 건립 기증하겠다는 ‘희망공사’를 발표했다.
2만여 자원봉사자가 1,630채의 임시 가옥을 건설했던 이 불사는, 2003년 4월 마지막 50번째 학교인 차오툰의 이앤펑 초등학교가 완공된 후 막을 내렸다. 당시 현지 언론은 기자보다 빠른 기동력으로 재난 현장을 찾아간 자제공덕회를 ‘푸른 옷의 천사들’이라고 불렀다.
특히 2001년 미국 뉴욕에서 9·11테러사건이 발생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기에도 스님은 ‘세상을 놀라게 한 재난은 그에 맞는 깨달음이 있어야 함’을 호소하며 10월 중순� 천주교, 기독교, 회교, 불교 등 종교단체를 초청하여 세계평화 기원의 촛불행사를 마련하였다. 또한 2003년 세계적으로 ‘사스’의 먹구름이 드리워졌을 때, 자제공덕회는 ‘사랑으로 세상을 적셔 함께 질병을 구제하자’라는 구호와 함께, 사람들과 함께 소식(素食, 채식 위주의 소박한 식사) 운동으로 선행을 쌓아 천재와 인재, 질병을 없애자고 호소하였다.
이처럼 증엄 스님의 수행 이력은 자제공덕회의 성장과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자제공덕회의 자선, 의료, 교육, 인문 등 ‘4대 지업(四大志業)’의 배경과 성장을 살펴보면 더욱 더 증엄 스님의 숭고한 보현행을 실감할 수 있다.
1)매 순간 중생을 위해 살리라
스님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2개월 전인 5월 4일, 타이중 칭수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어머니의 위궤양 수술 때, ‘관세음보살’ 기도를 해 낫게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1960년, 한창 활동 중이던 부친이 입적하면서 인생의 무상을 절감한다. ‘도대체, 삶이란 어디서 왔다 죽으면 어디로 가지?’라는 의문이 생명에 대한 탐구의 계기가 되어,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자비심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전 인류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1961년 9월, 스님은 출가의 뜻을 굳혀, 수도 스님과 함께 타이똥의 루이에산의 낡은 왕모(王母) 사당에 들어가 낡은 『법화경』으로 구도행을 시작한다. 밤에는 주민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10월에는 일본어판 『법화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몇 번의 삭발 출가가 좌절되자, 스님은 조용히 수행할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게 된다. 루이에를 떠나 대만의 북부, 중부, 동부 등으로 만행하는 우여곡절 끝에 화리앤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삭발해 줄 은사가 없어, 스스로 삭발한 후 본격적인 출가생활을 하게 된다. 쉬총민(許聰敏)이라는 노거사와 인연을 맺어 수참(修參)이란 법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 25세였다.
1963년 2월, 증엄 스님은 타이페이시 임제사에서 열린 수계식에 앞서, 인순(印順:태허 대사의 뒤를 이어 ‘인간불교’를 제창한 대만 불교계의 최고 원로) 대사를 뵙게 된다. 수계식이 열리기 바로 전이라 급박한 시간이었지만 인순 대사는 스님을 위해 간소한 스승과 제자의 예를 갖추고 ‘증엄(證嚴)’이라는 법명, ‘혜장(慧璋)’이라는 자(字)를 내리며, 이렇게 법문을 설한다. “너와 나의 인연이 수승(殊勝)하구나. 출가를 했으니, 매 순간 불교와 중생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인순 대사의 가르침대로 매순간 불교와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서원이 형상화되는 뜻밖의 경험은 3년 뒤에 일어난다.
1966년 어느 날, 스님은 화리앤의 한 진료소로 신도를 찾아갔다가, 병실을 나오면서 병원 바닥에 피가 낭자한 것을 발견했다. 한 원주민 임산부가 난산으로 병원에 왔다가 의료비와 보증금이 없어 다시 들것에 실려 나갔다는 것이다. 이때 스님은 돈이 없어 생명이 죽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바라보며, 금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한들, 환자의 위급할 때 의사의 손길이 닿지 못한다면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스님은 돌연 경전의 한 구절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하게 된다.
‘1,000개의 손과 1,000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동시에 여러 곳에서 고통과 재난을 구해주듯이, 만약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마음을 가진 500인이 각처에 흩어져 천수천안관세음보살처럼 중생의 아픔을 구제할 수 있지 않을까? 500여 중생의 손이 모이면 한 분의 천수관세음보살이 되지 않을까?’
2)세계 최대의 자제공덕회 설립
이리하여 500명 단위로 조직된 단체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역할을 대행함으로써, 출세간의 정신을 다시 세간으로 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966년 4월, ‘불교 국난극복 자제공덕회’가 설립되는 순간이다.
자제공덕회의 자선, 빈곤구제 사업은 여섯 명의 상주 스님들이 각각 영아용 신발을 하나 더 만들고, 회원 30명에게 ‘대나무 저금통’을 나눠주어 매일 50전을 아껴 저금통에 모으면서 기금을 만들었다. 그때 하루에 매번 50전을 모으자고 하니, 동참하던 회원 한 명이 차라리 한 달에 15원을 기부하면 되지 않겠느냐며 스님께 건의했다. 하지만 증엄 스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매일 저금하는 그 순간에 남을 돕겠다는 좋은 마음이 일지요. 그럼 한 달에 30번 그 마음을 일으키고 발원하는 셈이지요. 그건 한달에 15원을 기부하여 좋은 마음을 그저 한 번 일으키고 마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단순한 모금이나 기부 단체가 아닌,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스스로를 계발시키고 보살도를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스님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가난을 구제하고 병자를 치료하며 교육의 장을 열어 준 자제공덕회의 사회에 대한 공헌은 시민들에게 깊은 불심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의 심성을 정화하기 위해 ‘문화 환경’과 ‘인문’ 분야에도 시각을 돌리게 된다. 스님은 98년 1월 대북, 화련 등 5개 지역에 위성방송,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갖춘 ‘대애(大愛)TV’를 개국한다. 이를 통해 스님은 사심 없이 사랑을 베푸는 ‘대애사상’을 실천하고 있으며, 격주간 신문 『자제도려(慈濟道侶)』나 중문·영문·일문 등 3개 국어로 발간하는 월간 잡지 『자제』 등을 발간하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47년 전, 스님이 처음 한 생각 일으킨 자비의 마음은 2004년 12월까지 이미 2만 2,419명의 자제위원에 1만 1,837명의 자성대원, 전 세계적으로 천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6개 종합병원과 종합대학, 방송국, 잡지 등 산하시설 직원 수만 2천여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를 통해 보살행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님의 ‘인간불교(人間佛敎)’에 대한 제창과 그 결과물은 실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스님의 중생구제는 단순히 사람들의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뇌를 제거하는 데 주안점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증엄스님은 교회가 없어 거리에서 집회를 하는 기독교도들을 위하여 교회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오늘도 증엄스님은 이렇게 발원한다.
천하에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천하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
마음의 번뇌와 원망, 근심 버리고
만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허공 가득 다함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