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눈물 외 2편
이기철
태식이와 장길이가 떠나간 학교에 나 혼자 남아 있다.
후박나무 잎새를 떨어뜨려놓고 바람은 가도 교문은 남아 있다.
냉돌의 자취방에서 자주 감기를 앓던 태식이와
방학이 되면 막노동판에 나가 등록금 마련을 위해 삽을 쥐던
장길이가 졸업을 하고 떠나도
담장 가의 측백나무처럼 나는 혼자 남아 있다.
2월 하늘에 노고지리 뜨지 않고
너희는 왜 떠나야 하고 나는 왜 남아야 하는지를 물어도
바람은 아직 벗은 나뭇가지를 때릴 뿐 대답이 없다
너희는 월급이 없어서 떠나야 하고 나는 재직증명서를 뗄 수 있어
아직은 남아 있다
미안하다, 우리의 고통은 줄기는 같은 것이면서도 잎은 다른 것이어서
나는 너희의 발냄새 나는 담요에 몸을 눕히지는 못했다
하루에 2천 단어의 말을 교실에 흘리면서도 너희의
아픔은 씻어 주지 못 했고
속이 다 차 버린 너희의 대학노트에도 내 발가숭이 마음을
적어주지는 못 했다
이제 그 고통의 색깔은 봄볕 속에 필 패랭이꽃이 대신 피워 줄 것이다
소 한 마리, 논 다섯 마지기에 생애를 건
경상북도 청통면 산바람 차가운 아버지 곁으로는 부끄러워 못 돌아가고
강원도 동해시 구멍가게 하는 홀어머니에게로는 더욱 죄스러워
못 돌아간다던
너희는 지금 흐린 날빛 아래서 어느 낯선 바람 속으로 가고 있느냐
스무 장의 이력서와 창백한 교사 자격증을 들고
채용 예정도 없는 학교와 출판사를 온 종일 돌고와
갈 곳도 없어 찾아온 내 작은 아파트 불빛은 그날도 밝았다
오징어 다리 하나와 경주 법주 한 잔에 너희의 고통스런 날은
묻혀 가겠지만
아직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우울한 후배들에게
나는 내일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태식이는 학교 앞 복사기 수리공으로, 장길이는 절에 들어가
소설이나 쓰려하더라고
그 가망 없는 복사점 주인 되는 일과
기약 없는 소설 당선 통지나 기다리려 하더라고
2월이 가고 3월이 오면 돋아나는 보리잎을 바라보며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갈잎 부서지는 소리로 나는 그렇게 말할까
습관의 분필을 쥐고 페인트 벗겨진 칠판 앞에서
그들의 끓는 사랑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차가운 책장이나
넘기면서 말할까
기다리면 좋은 날은 올 거라고, 모든 것은 시대 탓이라고
희근에게
이기철
지난 봄 꽃피기 전의 벚나무 숲속을 걸으며
너와 내가 마주보고 건네던 몇 토막 이야기를 기억하느 냐
영남대 여학생 기숙사를 지나 의인정사(宜仁精舍) 가는 길의
오리나무 자작나무들
아직 잎을 피우기 전의 2월 중순의 눈물 같은 햇살을 기억하느냐
총선이 끝나면 저 추운 잎새들이 피어나듯이 우리의 마음도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고 내가 말했을 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고 고개를 떨구면서 힘없이 대답하던
너의 밭 끝에 채이던 돌멩이를 기억하느냐
졸업하면 취직은 안되고 지방대학에서 받은 2급 정교사
자격증은 버리고 일일노동이나 전자 부품상 고용인이라도
해야겠다던 너의 꿈은 이루어졌느냐
지난 여름도 변함없이 동풍과 비쭈루기 새울음을 맞고 보냈던
농축대 가는 길 양쪽 중턱의 상수리나무들은 무성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언 날씨가 스산해서 따스한 면내의라도
끼어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을
나는 그동안 모나미 볼펜과 문교분필의 몇 타스를 소모하며
아파트 사이를 부는 바람과 지켜지지 않은 선거공약과
덩달아 뛰고 있는 도매물가에 대해서만 민감했다
그 풍성한 올림픽 기록을 보면서도
이 가을에 저 말라가는 버즘나무 개가죽나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거기에서 알낳고 깃털 빼앗긴 굴뚝새 물레새에 대해서는
시계탑과 중앙 도서관 앞길에서 흘린 너의 땀과 지워진
발자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2월 중순 꽃피기 전 너와 걸었던 벚나무 숲길을
지금은 점점 엷어져 가는 햇살 속을 나혼자 걸어나가며.
봄
이기철
고사리 순 돋는 걸 보면 뉘우칠 일 많음을 깨닫는다
버리면서 사는 일 이제 이력이 나서
낙타 등처럼 누운 산 아래 오두막 짓고
아주까리 순에 북주며 사는 삶 마다하고 떠나
지난 날이 뉘우칠 일 많음을 안다
저녁 종 산그늘에 울고 사금파리 놀 속에 물들 때
베옷 속에 추위 감추고 가슴 속에 파도를 키우던 일
비둘기 울음 들으면 아직도 냉이꽃이 배고픔꽃이었음을 안다
살아온 길 멀어질수록 두근거리는 밤은 잦아
작은 불빛 보아도 절로 아픔은 일어
어리석게 남보다 앞서려 했던 일
우겨서 짐짓 정직한 체 했던 일
질그릇 속에 내 생애를 담아두고
모직과 반피 장갑으로 내 거짓 많은 몸과
마음을 은폐했던 일
이랑 속에 돋는 메밀싹 보면
자랑이 오히려 부끄러움임을 안다
햇볕 속에 눈은 녹고 눈 속에서 여기저기 연두빛이 돋을 때
떼어낸 달력만큼, 버린 신발만큼
섧게 부는 바람소리 속에 속죄할 일 많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기철 시집『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문학과 비평사,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