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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사도행전 6장 1-7절 / 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는 전문 분야의 일을 통해서 세상이 예전과 같지 않고 점차 종말을 향해 치달려가고 있다고 보면서 그렇게 있어 가는 여러 요인들을 말하는데, (1) 자연 훼손과 변동에 따른 현상으로 온도와 기후의 변화가 가져오는 온난화로 있게 되는 기근, 또는 태풍 및 쓰나미, 홍수, 대설, 빙하를 비롯한 극한의 재난, 동식물의 멸종 (2) 우주 현상으로 행성의 지구충돌 (3) 핵폭탄 및 수소폭탄 사용 등 전쟁이 지구에 미치는 재앙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도 예전과 같지 않은 채 온 세상에게 임할 종말을 향해가는 상황에 있습니다. 소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피부적으로 느낍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하면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a)라고 하였는데,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벧전 4:17b)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요일 2:18a)라고 하면서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라고 말하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활동 또한 더욱 활발해지고 있는데, 유다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유 1:18)라고 말한, 각 사도들의 말에서 보는 마지막 때1)의 현상인 불경건하며 정욕대로 행하여 마음대로 살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나, 여기에 둔감하여 믿음에 마음 쓰며 몸가짐을 조심하는 등 자기를 살피는 것이 없이 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으로 사는 삶에 게을러져 교회의 공예배를 소홀히 하며 교회의 모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흘러갈수록 가중되듯이 더욱더 커지고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있는 자는 그러한 모습을 대하면서 심히 안타까워하며 고통스러움을 겪게 되니, 사도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라”(딤후 3:1)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교회의 공예배와 교회의 모임이 성도에게서, 그래서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교회로의 연합에 있지를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더 이상 지속해 나가는 생명력을 발휘함에 있지를 않고 그 수명을 다함에 있는, 마침내 없어지는 현상이 이곳저곳에서 생길 것입니다. 모학자 비그리스도인임에도 그의 눈에 보이고 판단되는 생각에 교회를 염려하는 것에서 유럽의 교회는 나이 많은 몇 사람이 자리하고 있을 뿐 텅텅 비어 있고, 교회는 관광 산업화 되었다며, 한국교회도 그렇게 되어 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비그리스도인이 갖는 생각도 이러한데, 그리스도인인 학자나 목회자들도 갖는 우려는 더욱 심각하며 큽니다.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이 교회에 아이들이 없으며, 학생과 청년, 중장년 가릴 것 업이 급격이 줄어들고 있어 노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10-20년 또는 30년쯤 모두 교회에서는 사라질 것인데, 그 뒤를 따를 세대가 뒷받침되고 있지 못하니, 교회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심화되어 갈 것입니다. 교회의 공예배와 교회의 모임이 성도에게서, 곧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교회로의 연합에 있지를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라”(딤후 3:1)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이는 교회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상에 세워진 교회는 더 이상 지속해 나가는 생명력을 발휘함에 있지를 않고 그 수명을 다함에 있는, 마침내 없어지는 현상이 이곳저곳에서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지상의 교회는 이렇게 되어갈지라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께 신실한 믿음에 있는 성도인 천상교회의 빛남이 마치 새벽 미명에 빛나는 샛별같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겪게 됨에 있을 것이며 이를 피할 수 없을 것이기에 지상의 교회는 더욱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듯이 하여 어떤 상황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되어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에 있어 나가야겠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언제나 교회에서 있어야 할 것이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에서 (1)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식에 있어야 할 것, (2)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 (3)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 (4) 제자들에게 날마다 임할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과 그에 따른 죄 용서, 악으로부터의 보호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임을 알고 그 의존에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있게 하신 기도의 성취로 온 세상에 있게 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됨에 있는 교회를 이룸에 있는 것에서 교회가 존속해 가는 마땅히 행할 기도에 있습니다. 곧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심에 따라 주님께 가진 한 믿음에 의해서 주님의 한 교회로 말씀의 터 위에 든든히 서나가게 하시는 기도에 있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직무에 있는 목사에게서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 주께 견고히 서나감에 있는 성도에게서 있습니다.
이를 사도행전 6장 1-7절에서 말씀해 주시는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서 봅니다. 예루살렘에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직무를 맡은 사도들에 의해서 최초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창설(창립)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며 교회 모임을 갖는 회집이 있게된 것입니다. 오순절에 있은 사도들에 의해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함으로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음에 있는 신도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으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아 교회의 수에 가입한 수가 삼천 명에 이르렀으며(행 2:41), 또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았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으며(행 4:4),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므로 계속하여서 믿는 자들이 더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행 6:7; 12:24; 19:20).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왕성하였으며, 그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에 많은 유대인들이 복종하고 주께로 돌아와 그리스도인이 되는 개종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차 교세가 크게 확장되면서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며 그러기 위해서 기도에 힘쓰는 것에 점점 어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간적으로 기도 시간을 가지며 말씀의 뜻을 깨달음을 갖는 여유로움에 있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 사도들은 결심하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예루살렘교회 온 성도들은 크게 기뻐하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도들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라고 제안한 대로 일곱 집사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은 그들에게 안수하여 사도들이 행해왔던 집사(봉사하는 자)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서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으니, 이는 곧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를 맡은 사도들이 결심하고 결단한 그들이 맡은 전념해야 할 직무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기도하는 것으로, 이 모두에 전념하겠다는 것입니다.
(1) 먼저, 목사는 말씀에 전념하는 것에서 또한 함께 기도에 있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 말씀이 준비되지 않습니다. 목사가 기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이 설교에 있게 되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전해지는 말씀에 있지 않는 것이므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해지는 설교가 아닌 목사 자신에 의하여서 행해지는 자의적인 설교에 있게 되므로, 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장된 외식일 뿐인 것으로,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야 할 지식에는 무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하시는 복음의 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설교는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대신에 다른 것으로 채워 설교하니 여타의 이종교와 철학자들이 하는 말을 동일하게 말함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축복을 내세우며, 예레미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가 만사가 형통하여 평안할 것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자기 마음이 완악하여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렘 23:17). 사도 바울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함”(살전 5:3)에 있을 것인데, 이들이 “주여!”를 외치게 하면서 기도하게 하는 것은 기복주의 신앙, 치유신앙, 은사신앙, 상급신앙 등 온갖 것을 내세우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구원의 복음인 진리에는 눈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합니다. 이는 거짓 선지자, 거짓 목사, 거짓 교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니, 곧 적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교회에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올바르게 전하는 것에 전념하기 위해서 또한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2)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념하는 것에 있어야 할 것은 목사만이 행해야 할 일인지요, 목사뿐만 아니라 성도들 또한 증거해 주시는 말씀에 전념하는 것에서 또한 함께 기도에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해야 하는지요. 성도들이 교회의 공예배에 참석하며,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는 가르침을 듣고 따름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그럴 마음의 가짐과 자세와 지혜와 힘에 있기 위해서 기도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 증거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는 기도로부터 공급되는 성령의 지혜와 권능에 함께 하는 것이 없기에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설교를 듣고 깨달음에 있게 하시는 귀에 있지를 못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기도가 뒷받쳐 주는 것이 없기에 공허한 말로 들음에 있게 됩니다. 하여, 기도를 소홀히 하고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3) 그러기에 목사와 함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가르침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 믿음으로 굳건히 서 나가기 위해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 기도에 있지 않으면서 교회가 정상적으로 그리고 복음의 진리에 온전히 잘 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병행하며 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는 것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교자인 목사는 말씀의 증거를 위해서 기도가 뒷받침하며, 그 말씀의 청종에 성도가 있어나가기 위해서 또한 기도가 둣받침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을 청종함에 있는 ‘말씀’이란 언어(言語)를 사용함에 있는 ‘말’이란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심에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데, 그렇게 있는 ‘빛’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 영광을 봅니다. 곧, 하나님을 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있은 모든 날에서 보게 됩니다. 요한은 그 ‘말씀’(헬라어, 로고스)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으로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말씀’이 만드시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임을 알려주었습니다(요 1:1-4). 요한은 이 증거를 통해서 자신이 증거하는 ‘말씀’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하면서, ‘그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요 1:11). ‘그 말씀’은 곧 ‘성육신’, 또는 ‘도성인신’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증거되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가 증거됩니다. 설교에서의 ‘말씀’에서 있는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는 목사가 설교하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들으며 그분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엿새 동안을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신 은혜로 살아오지 않았는지요. 밥 한 그릇을 먹고 물 한 잔을 마시며, 입고 쓰고 거주하며 사는 모든 것에서 자신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힘입음으로 살지 않았는가요. 그리고 제칠일인 주일을 엿새 동안을 힘입음에 있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그러한 분이시며 우리 믿음의 주이신데, 그분을 섬김의 믿음을 신실히 가져나가는 기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않고서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리며 견고히 지속적으로 잘 가져나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 없이는 아무런 지혜도 능력도 발휘되지 못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하지 못하니, 참으로 교회다운 교회로 있지 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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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마지막 때’는 문자적으로는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시간과 역사의 끝에 이른 마지막 시기인 세상 끝인 종점을 의미하는 것이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말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구원과 심판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 말하는 ‘종말적 시기’의 관점에서 쓰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있는 십자가를 통한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에 계심은 온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함에 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부인함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행해짐에 있는 ‘마지막 때’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는 ‘만물의 마지막 때’에 놓여 있는 것이다. (2)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재림하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바라봄에 있는 것에서 그때의 가까움에 있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의 약속에 대한 깊은 신뢰에 있는 것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믿음의 고백에 있다. (3)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해 주신 말씀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 – 부활 – 영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마지막 때의 이름이 심히 가까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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