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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기상하 메시야 왕국의 대망
(5) 야베스의 기도 역대상 4장 9-10절
지난 시간은 역대기 족보가 한참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는 유다자손, 그 처음이 되는 ‘유다’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셨습니다. 유다는 동생을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형제들에게도 공범이 되어 거짓증언을 하도록 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그 일로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가 가나안 사람이 되고자 했지요. 아버지를 떠나왔으니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가나안의 문화와 풍습, 저들의 생활방식을 더욱 배우고 익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유다였지만,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자녀들을 통해서, 그리고 마침내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자신의 죄와 악을 깨닫게 하시지요? 그리고 가나안의 풍습과 문화, 그 사상과 생활방식을 버리고 아버지께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랬던 그는, 지난 날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큰 상처를 드린 아버지께 대한 빚진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집을 위해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으로 세워져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애굽의 좋은 땅으로 이주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쓰임받지요. 요셉의 마음을 형들에 대한 용서로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채워내는 역할을, 바로 이 회개한 유다가, 진심으로 삶을 돌이킨 유다가 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 유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야곱을 통해 어마어마한 약속을 주시지요? 지난 시간 함께 읽으셨던 말씀처럼, 유다의 허리에서 끊어지지 않고 지도자들이 세워질 것을 약속해주셨고, 유다는 자격없는 못나고 악한 자신에게 주시는 과분하다 못해 감당못할 말씀이었음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힘껏 붙들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유다는, 잊혀져버릴 인생에서, 저 위대한 다윗의 조상, 예수그리스도의 선조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더욱 이전의 삶을 돌이키고 아버지의 집으로 오십시오. 도망치고 숨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는 하나님 백성의 자격이 없어, 더욱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보다 더 세상처럼 살다가 죽을거야 하고 삶을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돌보고 계시는, 돌아오기를 오늘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오셔서, 다시금 주시는 말씀과 언약을 붙들고, 이전의 죄악을 기억할 수도 없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고 누리시는, 그리하여 내게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을 자자손손에게 남기는 이 시대의 유다가 되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 은혜와 축복의 주인공들로 서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본문이 계속, 이 유다자손들을 소개하고 있고요. 그 절정이 바로 3장, 다윗의 자손, 솔로몬의 자손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러니 모두 왕족들의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은 17절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 역대기가 쓰여지고 있는 지금까지의 사람들의 이름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역대기를 읽고 있는 유대백성들, 그들의 뿌리가 이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다는 것을 힘을 다해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방향과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이야기들 속에 내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경을 펴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내가 서 있음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림없는 시선과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길을 힘차게 걷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오늘 본문 4장은 그 유다의 족보가 바벨론 땅까지 다녀오고 났는데도, 아직 소개해야할 유다자손이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 읽기도 어려운 이름들만 주욱 소개되는 족보 한복판에, 아브라함도 1구절로 끝난 족보에, 2절이나 그것도 길게 할애하여 소개되고 있는 인물하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그 사람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베스, 여러분들 이미 잘 알고 계신 이름이지만, 기도하는 교회 찬송하는 교회, 27주년 하일교회에 꼭 한번 또 살펴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누구인지, 그는 도대체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이 저녁에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야베스가 누구일까요? 사실 야베스에 대한 기록은 성경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추정해보건대 이런 사람입니다.
먼저 야베스는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야베스는 유다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유다 자손이긴 해도 다윗 왕이 태어난 주류 가문의 자손이 아닙니다. 역대상을 보면 3장 까지 유다 지파 중 주류 가문의 자손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4장에 와서야 그 나머지 가문들의 자손을 간략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베스는 바로 이 비주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야베스는 불우한 상황 속에서 자랐습니다. 주목해 볼 것은 그 이름을 어머니가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들의 이름은 당연히 아버지가 짓습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가 지었을까요? 아버지가 이름을 지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야베스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거나 아니면 중병에 걸렸거나 도피생활 중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야베스는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할 힘겨운 가정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고통’입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은 왜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작명 전통은 축복을 담아서 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왜 그 이름을 저주라고도 볼 수 있는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요?
그 답은 9절에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베스를 낳을 때 난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죽을 고생을 했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 남편도 없는 상황인데 아이도 너무 힘들게 낳았습니다. 아마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갓난아이를 돌봐야 하고 또 가정의 생계도 책임을 져야 하니 어머니는 야베스를 볼 때마다 고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탄식을 들어야 했던 야베스는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마다 ‘고통아!’, ‘고통아!’하고 부르는 그 소리를 들어야 했던 야베스는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한국 최초의 맹인 가수 이용복 씨가 부른 노래 가운데 ‘어머니 왜 날 나셨나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 앞부분이 이렇습니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사고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됐던 그 어린 시절 그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요? 자식이 갑작스럽게 앞을 보지 못하게 돼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아마도 어린 시절 야베스의 마음이 이랬을 것입니다. 자기를 ‘고통아’, ‘고통아’라고 불러야만 했던 어머니를 바라보며 야베스는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야베스가 기도했던 기도의 자리는 바로 절망의 자리였습니다.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남다른 재능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 하나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구요?! 야베스는 이런 자리, 이런 형편, 이런 처지에서 원망하기 보다는 기도했습니다. 좌절하기 보다는 기도했습니다. 절망하기 보다는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에서 배워야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대로 내 바람대로 되는 것이 없어서, 아니 애초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좌절하는 그 자리에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러봐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그 자리에서 더욱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해, 그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쓴 책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일으켜주기 위해 쓴 책인 것입니다.
역대기가 주목한 인물은 다윗입니다. 다윗을 주인공으로 하여 선조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 10장부터 대상 마지막 29장까지 다윗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하에는 다윗의 후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역대상 1-9장까지는 아담에서부터 다윗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의 족보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500여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띠는 사람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야베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이름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조차도 한 절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야베스만큼은 두절이나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야베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길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곳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사람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을 왜 이곳에서는 이렇게 길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다른 이야기도 없습니다. 역대기 기자가 소개한 야베스에 대한 내용은 그가 드린 기도입니다. 야베스는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야베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가 드린 기도”라는 말입니다. 물론 야베스가 살면서 참 많은 활동을 했을 것이고, 많은 업적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잊혀지고 다 묻혀졌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게 “그가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후손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과연 후손들이 나를 기도의 사람으로 기억할까? 아니, 지금 우리 성도님들에게, 내 자녀들에게 물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을 할까? 기도의 사람, 찬송의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실까? 참으로 자신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후에 자손들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요? 기도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으면 참 행복하지 않을까요?
9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이름조차 소개되고 있지 않지만 야베스의 이름은 소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래 고통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귀중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역대상 2장 55절을 보면 ‘야베스(길르앗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지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시지요? 보통사람의 이름으로는 지명이 되지 않습니다. 서울만 해도 세종로, 충무로, 율곡로 대단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지명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워싱턴 DC, 케네디 공항과 같이 대통령쯤 되어야 이름이 사용됩니다. 인천공항, 김포공항, 청주공항 속상한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 이 야베스라는 이름이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베스는 비주류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통”, 괴로움 불행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정도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살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훗날 자손들에게 귀중한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고, 또 지명에 그 이름이 쓰일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든 것이 바로 그가 드린 기도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야베스는 기도가 만든, 기도로 세워진 사람입니다. 기도에 전념하다 보니 그 기도가,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이 기도의 사람을 존귀한 사람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 뭐라고 드렸느냐는 것이지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0절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내용, 우리 기도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복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야베스가 기도했던 복은 욕심이 가득 들어찬, 이기적인 기도, 단지 자기가 받을 복, 자기가 받고 자기에게만 머무르게 될 복이 아닙니다. 자기가 복을 받고 그 복을 나누어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다 복되게 하는 복, 더 나아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나라와 민족이 함께 복을 누리는 그런 복이었던 것이지요.
야베스를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통 중에 태어났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며 태어났던 야베스가, 가족들을 복되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베스 때문에 가문이 일어나고 가족들이 다 복을 누리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를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이구, 이런 복덩이~가 될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지명이 생겨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지역 사람들이 야베스 때문에 복을 누리게 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베스 때문에 그 지역 공동체가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게 되어 야베스를 기리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 12:2-3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은 나누는 복입니다. 모든 족속을 복되게 하도록 주신 복입니다.
지금 야베스가 구한 복이 이것입니다. 유다 한 사람으로, 남유다가 복을 받듯,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이 복을 받는 그런 복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교회가 복을 받는 그런 복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일터가 복을 받는 그런 복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나라와 민족이 복을 받는 그런 복입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드린 기도는 비전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복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복은 비전이 담긴 복이어야 합니다. 남이야 어찌 됐든지 나만 복을 받는 그런 복이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남들이 피해를 보더라도 남들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나만은 복을 받아야 한다는 그런 복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로 인하여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가 다 함께 복을 받는 그런 복을 구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복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역이라는 것은 현재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내가 속한 가정,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살고 있는 이 땅 이것이 나의 지역입니다. 사실 내 가정과 가문에, 복을 나누기도 쉽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 지역에 복을 나누는 것도 어찌 보면 벅찬 일입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전을 담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지역을 넓히라는 명령입니다.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8절도 같은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게 될 것이고, 또한 그 비전을 향해 나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좁은 우물을 넘어 온 세계와 열방으로 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로 세워지고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이 대한민국에도 복음이 들어와 올해 2023년이 감리교 하디 선교사 대각성 원산 대부흥 운동 120주년이 되어 또 한 번의 부흥을 기대하며 도약을 준비중인 중인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 하나, 내 가족을 위한 비전을 가지고 살면 안됩니다. 항상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도 늘 내 교회 내교회만 하면 안됩니다. 항상 지역을 넓히는 비전을 가지고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 한민족의 이민사를 살펴보면 19세기 말 만주로 그리고 연해주로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160여 개 나라에 70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구 비율로 계산해 볼 때 세계 그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5천년동안 좁은 한반도에 갇혀 살던 우리 민족이 불과 130년 만에 획기적으로 그 지역을 넓혀간 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민 역사는 기독교 선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복을 주셨고 그 복을 나누기 위해 우리 민족이 꾸준히 지역을 넓혀왔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품고 마음에 그 지역을 넓히십시오. 교회와 일터와 사업장 모두 그 지역을 넓히며 기도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여러분들의 삶의 지역이 넓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베스라는 믿음의 선조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망과 절망의 자리에서도 기도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복된 자리로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전을 품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을 나누게 하시고 또한 지역을 넓혀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가 유명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쓰셨고,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에게도 이 야베스가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 하나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소개하고 말씀 마무리 하겠습니다.
존스(Jones)라는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 여기 저기를 안내해 주는데 한 이상하게 생긴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거대한 창고(warehouse)가 있는데 이 건물은 창문은 하나도 없고 오직 문 하나만 달랑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간청을 해서 존스는 겨우 이 창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창고 안에는 바닥에서 천장까지 선반들이 빼곡이 들어 차 있는데 각 선반에는 빨간 리본이 묶여진 하얀 상자들이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상자들은 모두,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고, 존스는 자기 이름이 쓰여진 상자를 열심히 찾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할 수 있으면 존스가 자기 상자를 열어보지 않기를 바랬지만 존스는 자기 이름이 적힌 상자를 즉시 찾았고,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묵직한 상자를 드디어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있었을까요?
존스가 열어 본 상자 안에는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했던 수없이 많은 복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존스는 한 번도 그 복을 구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 보고에도 여러분을 위한 복이 여전히 가득합니다. 이미 많이 주셔서 더 주실 복이 없으실까 걱정이십니까? 아뇨, 아직도 무궁무진한 복이 남아 있습니다. 더욱 구하고 찾으시고 두드리셔서 그 모든 복을 누리시는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안구하시면 포장그대로 상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야베스처럼 기도하시고 복을 누리십시오.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시되, 넓어진 만큼 환난과 근심이 겸하여 커지면 곤란합니다. 주의 손으로 늘 도와주심으로 넓혀주신 모든 지경이,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은혜를 입으시는 복의 사람들, 기도할수록 주변을 풍성하게 하시는 그 이름이 기도의 사람으로 기억되시는 존귀한 분들로 다 쓰임받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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