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차
두 시간 여 버스에서, 두 시간 여 쾌속정에
그저 몸뚱아리 올려놓고 흘러왔을 뿐 한 일이 없는데 숙소에 몸을 누이니
유체이탈한 듯 부웅 뜨고 머리도 어지럽다.
- 2일차
파도가 거친 숨소리 내는 듯 미친 듯 너울대는 한 가운데 몸을 날리면
살려달라는 구차한 비명도 무정하게 삼켜지고
흔적도 없이 그렇게 자알 갈 수 있겠다.
- 3일차
모든 사연 있는 것은 굳어서 돌이 되나보다.
풀지 못한 깊은 사연들이 뭉치고 뭉쳐 단단하게 굳어버린 돌.
그 돌이 인간의 역사다.
- 4일차
동행이 생겨버렸다. 내 순례(?)의 원칙에서 벗어났다.
대신 제주의 대자연을 더욱 깊이, 가슴 터지도록 쓸어 담았다.
시커먼 현무암 덩어리로 가득 찬 바다, 그것과는 극명한 포말,
숨이 차도록 뛰고 춤추고 노래하고픈 푸른 바다목장의 초원.
조금 걸었다 싶으면 바다가, 조금 걸었다 싶으면 저 푸른 초원이,
또 조금 걸었다 싶으면 설탕가루 같은 백사장이......
심심할 틈이 없다. 지루할 틈 역시 없다.
- 5일차
비가 온다더니 오름 너머에 태양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고
햇살도 간간히 쏟아냈다.
빗방울 없이 낮게 구름이 깔리고 바람이 계속돼 걷기에는 편하다.
허나 나는 태양이 좋다.
태양이 내리쬐었던 동안 나는 화악 정신이 나갔었다.
바닷가에서는 더욱 더.
그래도 나는 뫼르소처럼 그 어디에도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으리.
- 6일차
신령하고 조용한 숲속이라는 말뜻을 지닌 제주어, 사려니.
1년에 한번 개방한다는 그 숲을 걸었다.
그곳을 가기 위해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넘어가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울창한 산림.
나무가 많아 숲이 울창하다는 건 그 어떤 곳간보다도 배부른 일이다.
- 7일차
오늘은 그냥 쉰다. 잠시 멈추기로 했다.
무릎과 발목,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통증을 무시할 수가 없다.
모두가 나간 방에 홀로 앉아 방으로 넘어오는 햇살을 기쁘게 맞이하고.
일정을 멈추고 하루를 쉰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
- 8일차
양쪽 발목과 무릎 보호대를 구입하고 스틱까지 준비해 걸었다.
보조도구 사용의 첫 경험이다. 효과적이란 이런 것이구나.
드디어 "왜 걷는가?", "뭣 하러 걷나?"라는 질문이 시작됐다.
지난밤 전화 때문인가?
갑자기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아 '생각'을 올스톱시켜버렸으나
'생각을 말자'라는 '또 다른 생각'이 걷는 길 내내 따라다녔다.
놀멍 쉬멍이 줄어든 채 걸으멍만 반복되고 있다.
- 9일차
이중섭 미술관에 들렀다. 부부의 사랑이 감동적이다.
7코스에 접어드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족들, 연인들, 다양한 연령대의 부부들.
모두가 행복해보이고 그림 같다.
나의 가족..... 나의 엄니와 아부지.
애틋한 사랑 나누지 못하고 지금 상황에 이르러버린 두 분이 안타깝고
어느 한 쪽도 맘껏 인생을 즐기시지 못 한 그들 인생이 가슴 아프고......
여러 가지로 만감이 교차한다.
나를 보기 위해 걷는 길인데 다른 사람들 삶을 기웃거리며 걷는 꼴이다.
- 10일차
바당올레에서 시작된 오늘 아침은 포롱포롱 나비 한 마리가 동행했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꿈속을 헤매는 건 아니나
이 순간만큼은 나비가 되어 함께 날고프다.
코스에서 잠깐 벗어나 길을 걸었는데 쩌~어 앞에서
아는 선배님이 나타났다.
세상은 이렇듯 좁다.
- 11일차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 캠프에 들렀다.
캠프 앞 나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 자리 너무 멋지다.
이 자리를, 이 분위기를, 이 바람을, 이 마음을 그대로 광주로 가져갈 수는 없겠지.
이제껏 쭉 걸어온 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저 걸으면 될 뿐인데 모르겠다는 또 다른 상에 집착하려 한다.
어제는 밤새도록 꿈속에서 애가 탔다.
그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12일차
하루 더 있으려던 캠프에서 조용히 빠져나오려다 단장님께 걸리고(?) 말았다.
갈 길이 남아 있으니 이 자리가 겉돈다.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약간은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계속 걷는다. 부지런히.
지금 제주는 마늘수확이 한창이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라고 하신다.
강한 햇살 아래 노부부가 기어 다니듯 일하시는 감자밭도 지났다.
그들 곁을 걷는 마음이 편치 않고 죄송하다.
차창으로 싹 지나칠 때는 미안한 맘도 싹 지나가는데
걸을 때는 걸어가는 길 내내 그 속도로 죄송하다.
- 13일차
내가 경험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을 걸었다.
누군가 생각났다.
순간이동으로 딱 그곳, 그 숲에 떨어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길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 14일차
어제에 이어 또 비가 왔다. 오늘은 더 세게.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가 '언니, 같이 가면 안 돼요?' 하는데
“안 돼.”라고 할 수가 없어서 동행을 시켰다.
짧은 순간 거절을 생각했으나 나는 그렇게 매정하지 못 하다.
마늘밭을 지나 쭉 숲길을 걸으니 바다가 나오고 다시 숲이 나오고
또 다시 나타난 바다는 절경을 감추고 있다가 드러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우중 걷기, 조오타.
중간중간 화살표와 리본이 뜸해질 때면 동행한 그녀는 불안해했다.
"길을 잃으면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돌아가면 되는 일,
더구나 손바닥(?)만한 제주 땅에서 그대 자리로 돌아가지 못 할까봐 걱정이우?"라고 했다.
동네 아저씨 소개로 들어간 식당 밥이 무지하게 맛나서 행복했다.
- 15일차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비가 더 세졌다. 그래도 나는 길을 나섰다.
비오는 날 엉또폭포는 절경이라는 얘기를 들었기에.
며칠째 모자 없는 비닐 옷을 입고 검정 비닐을 머리에 동여맨 채 씩씩하게 걷고 있다.
비에 젖은 가죽신발은 원래보다 열 배는 무거워진 것 같고
마치 전지훈련하는 운동선수처럼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것 같다.
그래도 이렇듯 용감하게 걷는 내가 대견하고 기특해서 흐뭇하다.
그렇게 다다른 엉또폭포, 정말 절경이다. 횡재한 기분이다.
이제 돌아가기 위해 성산항으로 왔다.
일출봉 아래 동암사에 들러 108배를 하려 했으나 중도 포기했다.
걷기는 되나 구부리는 일이 안 된다. 이런~~~
제주에 도착해서 성산포에 머무르는 처음 며칠 동안도 108배가 됐었는데
우중 걷기가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나 보다.
구부릴 때마다 허벅지며 장딴지 근육 통증이 '악' 소리 날 듯 해 하다가 멈췄다.
돌아가야 하나 돌아가기 싫은 맘도 크고......
걷기명상을 하기에 제주는 오살라게 아름다워서 명상보다는 감상이 주를 이뤘다.
그래도 오기를 잘했다.
올레를 걷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다정한 올레 리본과 간세다리 덕분에
눈물이 나도록 행복했다.
그 길을 닦아주고 내주신 분들, 리본을 달아주시고 화살표를 그려주신, 간세다리를 놓아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깊이, 거듭거듭, 진심을 다해 감사드린다.
첫댓글 드디어 긴여정의 갈무리를 하시는군요....다음주 뵐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자유로운 여행길에 동행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8년도에 서귀포-제주간 구불구불 산길을 넘었던 추억이 확 떠오르네. 성큼 커져버린 나무를 봅니다. 그대 산. 녹음마냥 싱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