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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14-3: 『내 생애의 산들』, 제3장 「그랑 카퓌셍 동벽 초등」(1951)
14-3-1 보나티에 이르는 숲길
보나티의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보나티의 발자취가 보인다. 서유럽 산악계에서 오랫동안 아웃 사이더였던, 무엇보다도 현대 알피니즘 역사에서 봉인되었던 그가 배낭을 메고 눈보라치는 암벽을 오르는 자유로운 모습을 상상한다. 은둔하길 즐겼던 그를 따라 나는 저절로 그곳, 알프스 첨봉으로 흘러들어가는 곳곳을 걷게 된다. 보나티가 태어난 이탈리아 베르가모와 북부 토리노에 가고 싶어졌다.(https://www.youtube.com/watch?v=mwNVDFtZJL8, 보나티 삶에 대한 영상으로 이것을 추천한다.) 우선 그가 살았던 마을 몬자Monza로 가보고 싶다. 그리고 포 강가를 거닐며 산책하다가 그랑 카퓌셍과 가장 가까운 산장인 토리노 산장으로 가서 몽블랑과 오른쪽에 있는 ‘몽 모디Mont Maudi’t, ‘에귀 뒤 디아블Aiguilles du Diable’, ‘몽 블랑 뒤 타퀼Mont blanc du Tacul’과 같은 바위로 된 첨봉들을 올려 보고 싶다. 그 다음에는 보나티 산장으로 올라가서 왼쪽의 당 드 제앙Dent du Géant과 앞 쪽에 보이는, 보나티가 1964년에 올랐던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 북벽’, 그 언저리까지 가고 싶어졌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보나티와 그의 아내가 살던 마을에 가서 머물고 싶어졌다. 아래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u2lf5-yx4bw)에서 메스너가 보나티의 아내 로산나를 만나러 가는 숲길을 따라, 보나티가 살았던 시골 집에 이르는 조붓한 오솔길을 걸어 가보고 싶어졌다. 그 곳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보니티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 같다.(보나티와 로산나의 삶에 대해서는 아래 영상에 잘 드러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OdryG8fn7A )
한글 번역본의 제3장 「그랑 카퓌셍 동벽초등」(1951)은 영어 번역본에서는 제4장이고, 불어 번역본과 일어 번역본에서는 제2장이다. 보나티가 1949년에 오른 그랑 조라스 북벽 등반은 영어 번역본의 제3장으로 있는데, 이탈리아 원본, 독어, 불어, 일어, 한국어 번역본에는 빠져 있다. 김영도는 영어 번역본에만 있는 제2장 「브레갈리아 3대 북벽」을 번역해서 책에 넣었고, 영어본에만 있는 제3장 「그랑 조라스 북벽」(1949) 등반은 생략했다. 다음번 해제에 좀 더 자세하게 밝히겠지만, 이탈리아 원본과 독어 번역본에서도 「그랑조라스 북벽」(1949) 등반은 찾아볼 수 없다. 이탈리아 원본의 첫 번째 장이 「시작하며Gli inizi」(1948)이고, 두 번째 장이 「그랑 카퓌셍 동벽La parete est de Grand Capucin」(1951)이고, 「25년 후 그랑 카퓌셍Sul Grand Capucin viticinque anni dopo」이 이어져 있다. 정리하면, 제3장 「그랑 카퓌셍 동벽초등」(1951)은 이탈리어 원본을 비롯해서 영, 불, 일, 독어 모든 번역본에 실려있는 글이다. 그리고 한글 번역본 제3장 「그랑 카퓌셍 동벽 초등」(1951)의 원제는 ‘초등’이 빠진, 「그랑 카퓌셍 동쪽 벽La parete est, La face est, Die Ostwand, The East face」이다. 보타티에게 중요했던 것은 초등이 아니라 창조자로서 오르는 데 있었다. 그 태도와 입장이 알피니스트를 정의한다고 굳게 믿었다.
2000년대 초에 나온 몇몇 서양 등반사에 관한 책에서 보나티의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Because it’s there』(Ed and Trans by Alan Weber, Taylor Trade publishing, Maryland, 2003)는 서기 200년부터 오늘날까지 서양 등반사에 중요한 연대기에 관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이 안에 발터 보나티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책에는 1906년 월터 웨스턴Walter Weston과 고지마 우스이小島烏水가 <일본산악회Japanese Alpine Club>를 창립한 것까지를 적어 놓았고, 1950년 프랑스 원정대의 안나푸르나 등정, 1963년 에드먼드 힐러리의 히말라야 등정을 중요한 연대기로 남겨놓았다.
2012년에 『내 생애의 산들』이 출간되기 전에 김영도가 출간한 책들 가운데서도, 2012년에 출간한 책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수문출판사) 속, 제 2장 「등산 역사를 바꾼 사람들」에서도 발터 보나티에 관한 글은 없다. 김영도는 『내 생애의 산들』 역자 후기에서, 발터 보나티를 “뒤늦게 보나티의 책을 만나며...2010년 새해를 맞으며...독일어책을 옮기기 시작했다.”(한349, 351)라고 적어 놓았다. 그 해가 2012년이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김영도는 보나티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보나티는 세계 등반사에서 마이너에 해당하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무엇보다도 20세기 당대 산악계와 거리를 둔, 조용한, 은둔의, 고유한 알피니스트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제3장에서 보나티가 그랑 카퓌셍을 등반하고나서 당대 이탈리아 산악계의 “당파성과 이기심과 무정견”(한42)을 비판한 바를 알 수 있고, 결국 1965년에 산악계를 떠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영어 번역본에서도 같은 순서로 “Sectarianisme, selfishness, and inconsistency”(영49)로 되어있는데, 무정견은 모순이란 뜻이다. 김영도의 번역 텍스트로 삼은 독어 번역본에서는 “광신Fanatismus, 종파주의Sektierertum und 우둔함Stumpfheit”(독34)로 쓰여있는 것으로 보아, 김영도의 이 부분 번역문은 영어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어 번역본도 “광신fanatisme, 종파주의sectarisme와 우둔함bêtise”(불40)으로 되어있고, 일어 번역본도 “광신적 태도狂信的 態度, 당파 근성黨派 根性, 바보같은 언동ばかげた 言動”(일36)으로 번역했다.
최근에 읽은 책, 『산에 오르는 마음』(로버트 맥팔레인 지음, 노만수 옮김, 글항아리, 2023, )에는 그랭 카퓌셍을 “대수사大修士라는 뜻의 그랑 카퓌셍은 다갈색의 바위 두루마기를 두르고 호젓한 수도원을 지키고 있으며”라고 썼고, 거인의 이빨이라는 뜻을 지닌 당 드 제앙에 대해서는 “마치 카페인 얼룩이 묻은 엄니처럼 또는 183미터 높이의 악센트 부호처럼 자신의 이름을 강조하며 위로 비스듬히 솟아있는”(172-174쪽) 첨봉이라고 썼다. 보나티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에, 유튜브에서 <보나티에게 헌정Tribute to Walter Bonatti>라는 제목이 붙은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그 영상의 첫 장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우리의 꿈꾸는 방식을 바꿔 준 사람에게 헌정합니다Dedicated to the man who changed our way of dreaming.” 그리고 마지작 장면은 “13/09/11 영웅들의 시대가 오늘 끝났네요. 고마워요. 발터 보나티Today ends the age of heroes...Thank you, Walter”이 적힌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MNNWaNmV_g 참조)
보나티가 등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묻고 되물었던 것은 등반에서 금기란 무엇인가이다. 이는 곧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묻는 것이기도 한 데, 그 결론은 제3장 끄트머리에 있는, “알피니즘의 과제는 어디서 시작하고, 불가능의 알피니즘은 어디로 사라지고 있는가”(한50)이다. 1951년 세 번의 시도 끝에 그랑 카퓌셍을 등정하고 나서부터, 스물 한 살의 보나티는 조금씩 이탈리아 산악계에 대해서 회의를 지니게 되었다. 그 절정은 1954년 이탈리아 K2 원정에서 귀환했을 때였다. 보나티가 스물네 살 때 일이었다. 이 부분은 서론 해제에서부터 밝힌 것처럼, 제17장 「알피니즘이여 안녕」(1965년)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이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아르디토 데지오의 폭압과 거짓, 대원이었던 아킬레 콤파뇨니, 리노 라체델리의 증언이 그 중심 내용이 될 것이다. 1954년 7월 30일, 히말라야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8611미터)의 8100미터 지점(캠프9)에서 보나티는 버려졌다. 캠프9는 그곳에 없었고, 밤새 지옥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다. 등반이든 아니든,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삶 전체를 규정하게 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어떤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단편적일지라도, 그 때 삶은 새롭게 다시 열리게 된다. 빛처럼. 보나티가 산소통을 메고 약속된 캠프9에 이르렀을 때, 과연 그는 무엇을 보았고, 깨달았을까? 나는 보타니가 그 때 경험한 칠흑같은 어둠과 바람 그리고 모든 존재를 집어 삼킬 듯한 추위 속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실신보다 더한 침묵 속에서, 그는 곤두박질치는 삶의 실재를 보았을 것이다. 이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다음 날, 베이스 캠프까지 가까스로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그 후부터 그의 영혼은 달라졌을 것이다. 산에서 다른 이들과 한 경험을 모두 제거한 보나티, 자신의 정체성마저 지운 그는 새로운 보나티가 되었다. 식물성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426230 참조, K2 비밀에 대해서는 메스너가 증언하는 다음의 영상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ieJNNLPZsI )
14-3-2 보나티의 고백과 그랑 카퓌셍
제3장의 중심어는 알프스 그랑 카퓌셍, “삼각모를 쓴 듯해서 봉우리가 모자를 썼다는”(38) 그랑 카퓌셍(3838미터) 등반 과정과 그 이후 보나티가 겪어야만 했던, 젊은 보나티에게는 광풍과도 같았던 당대 산악인들의 몰이해, 질시와 허위, 음해와 왜곡에 관한 것이다. 보나티는 1950년 7월부터 그랑 카퓌셍을 등반하려고 시도했다. 그랑 카퓌셍은 알프스에서 단일형태의 화강암벽type monolithique granitique des Alpes으로 유명한 첨봉이다. 고대 이집트, 그리이스의 신전이나 도시에 세워진, 길고 좁은 기둥인 피라미드 모양의 오벨리스크obélisque와 같이 생겨, 대수사라는 뜻의 카퓌셍이란 이름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카퓌셍의 동쪽 벽은 아침 햇살로 더욱 화강암의 붉은 색을 지니게 되어, 그 외양이 태양 신앙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연상하게 한다. 1차 시도는 1950년 7월 24일, 다음 날 비박 1차 시도를 하면서까지 등반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등반은 실패했다. 2차 시도는 8월 13일, 다음 날에도 비박으로 바위 위에 지냈고, 4일을 등반했지만 “동벽을 뒤로하고”(37) 하산해야 했다. 그 원인은 기상악화였고, 결국 2차 등정도 실패했다. 2차 시도에 관한 내용의 일부분(한36, 독28-29, 영41, 불34)은 일어 번역본에서 생략되었다.(일31)
보나티의 두 번의 등반 실패에 대하여, 당시 이탈리아 산악계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 사려 분별이 없는 젊은이들은 우리의 위대하고 멋진 고산을 무시하고, 그 고전적 루트가 너무 쉽다며, 산장에서 케이블카로 1시간 걸리는 루트를 암벽에 하켄을 박으며 3일동안 매달렸다. 아무 소용없는 체조놀이가 아닐 수 없다. 알프스 최고의 성취였다고 칭찬받았지만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은 미숙한 시도였고, 어느 면으로 보든 등산가라기보다는 스포츠맨과 다름없으며,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에나 관심이 있는 자들로,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나타난 것이 없다. 육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미비하고, 하켄과 쐐기의 등반보조 등 잡다한 물건들이 지나치게 동원됐다.”(한44)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보타니에 대한 음해와 왜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보나티는 이탈리아 산악계의 더러운 손을 탔다. 아니 내쳐졌다.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하여, 보나티는 자신이 쓴 하켄의 갯수를 들어, 오히려 적게 사용했다고(한46) 주장하며, 자신의 등반에 관한 비판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44) 보나티는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전에 루트 공작을 해서 그랑 카퓌셍에서 승리를 얻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러한 정신 상태도 아니었다는 것이다.”(한44)라고 하면서 반박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도가 실패한 것은 “갑작스런 기상악화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시도였다”(한44)고 말했다. 당대 산악인들은 보나티의 경험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그가 쓴 도구에만 주목했다. 보타티에게 등반은 바위 안에 거주하는 것, 산 위에서가 아니라 산 아래에서 그는 알피니스트로서 첫 번째 죽음을 경험했다.
3차 시도는 1951년 7월 20일에 시작했다. 등반하는 내내 바위 곁에 의지해서 비박을 해야 했다. 세 번째 비박은 “완전히 자일에 매달린 채 허공에서“(38)에 매달렸고, 같이 등반했던 친구 루치아노 기고Luciano Ghigo와 함께, 등반 4일째, 오후 2시 20분, 그랑 카퓌셍 정상에 올랐다.(한38), 그리고 그날 저녁 9시에 토리노 산장에 도착했다,(한40) 이 길은 나중에 <보타니-기고 길La voie Bonatti-Ghigo>로 이름지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qs_5-bjBTnU 프랑스 산악인들이 보나티 그랑 카퓌셍 길을 따라 재현하는 동영상으로, 당시 등반 루트를 보여준다.)
보나티는 ”1951년 7월 23일, 사흘하고 반나절 만에 그랑 카퓌셍 정상에 올라섰다.”(한40)고 썼다. 이 등반에 대하여, 가스통 레뷰파는 “이탈리아 알피니즘이 자랑할 만한 위대한 등반”(한40), the greatest rock climb ever done till now, an achievement of which Italian mountaineering can be very proud(영46), Le plus grand exploit en rocher accompli à ce jour, un exploit dont ’alpinism italien peut être fier(불38)” 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보나티의 등정을 “...그들은 불가능해 보인 벽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불가능은 전통적인 방법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드릴과 해먹을 고안해서 지붕과 오버행을 넘어섰다.”(한42)라고 했는데, 보나티는 이런 반응에 대하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그것은 1950년대가 아니라 적어도 그보다 뒤 이야기다...내 등반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한42)라고 주장하면서 당대 주류 산악계의 비판을 부정했다.
보나티의 그랑 카퓌셍 등반 이후, 1952년부터 베라르디니, 장 쿠지 등 프랑스 산악인들이 그랑 카퓌셍에 올랐다. “1955년 8월에는 헤르만 불이 비박 한 번으로 14번째로 성공했다.”(한46) 아무튼 보나티의 그랑 카퓌셍 등반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보나티는 당대 산악인들의 “악의...비판...의 이유를 모르겠다...하켄 35개, 카라비너 25개, 나무쐐기 2개, 마로 짠 30m 자일 2동, 발을 서너 군데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든...줄 사다리 3개 전부다”(한49)라고 썼다. 보나티는 그때까지 만연해 있던 이탈리아 알피니즘의 절대적 규범을 따르지 않고, 저항했다. “내가 사용한 용구와 장비에 대해 악의에 찬, 사람을 깎아 내리려는 논평이 지금도 나돌고 있다”(한49) 라고 계속 쓰면서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한50)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나이프 블레이드, 스토퍼와 프렌드 등...이런 것들은 아주 닳고 닳은 암벽에서 전통적인 하켄이나 대개의 경우 볼트 하켄 대신에 재빨리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알피니즘의 과제는 어디서 시작하며, 불가능은 어디로 사라지게 되는지 모르겠다.”(한50)라고 기술중심의 현대 알피니즘을 우려했다. 이런 태도는 알피니즘의 기원을 묻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험악한 첨봉을 오르면서, 첨봉 아래, 알피니즘의 기원, 심연과도 같은 바닥을 떠올렸다. 기록을 보면, 1924년 엔리코 오귀스토Enrico Augusto, 아돌프 레이Adolphe Rey, 앙리 레이Henri Rey 및 루이 라니에Louis Lanier가 긴 막대와 갈고리를 사용하여 서쪽에서 올랐다. 그랑 카퓌셍 첫 번째 등정이었다. 그러므로 한글본 제3장의 글제목은 원제목처럼 수정되어야 한다.
산에서 시간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법, 1951년 7월, 등반을 끝낸 후, 25년이 지난 1976년 6월 말, “올랐던 날을 기념하고, 내 자신을 검증하기 위해서”, 보나티는 다시 그랑 카퓌셍을 찾아갔다. (한40) 그 때 보나티가 발견한 것은 바위에 드릴로 구멍을 내고 박은 “볼트 하켄”(한41)이었다. 현대 알피니즘의 재현, 계승과도 같은 이에 대하여, 보나티는 “전통적인 루트에서 공정성을 잃은, 질이 나쁜, 모독적인 행위”(한41)와 같은 등반 방식, 이른바 비윤리적 등반(한41)이라고 했다. 이 일은, 바위와 등반이 도살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등반의 비윤리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비윤리적 등반이란 보나티가 같이 등반했던 안젤로 피조콜로를 수식한, “가장 옳은 정신을 가진, 마음씨 넓은un des alpinistes les plus cohérents et les plus généreux, one of the most ethical and generous-hearted mountaineers”(한41, 영48, 뷸40)에 있는 ‘옳은 정신’(한41)의 등반에 반하는 것을 뜻한다.
보나티는 1976년 그랑 카퓌셍을 다시 오르면서, 처음 등반했을 때를 자세하게 기억했다. 그럴수록 “그렇게 무엇인가를 다시 할 때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창의는 아예 존재하지 않으며, 신비가 가져오는 자극과 유혹과 의심도 없”(한47)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비스럽게 미지인 것 그리고 불가능이라는 감정은 익스트림 알피니스트의 주요 구성요소다”(한47)라고 덧붙였다. 영어 번역본은 “unknown and the sense of the impossible-these are the two essential components of traditional extreme mountaineering”(영55), 독어 번역본은 “알려지지 않은 것과 감정적으로 불가능한 것: 이것은 전통적인 익스트림 알피니즘의 두 가지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Das Unbekannte und das, gefühlsmäßig, Unmögliche: Das sind zwei entscheidende Komponenten des traditionellen extremen Alpinismus.”(독40) 불어 번역본은 “Mystère et sens de l’impossible, telles sont les deux composnates essentielles de l’alpinisme extrême traditionnel.”(불48) 한글 번역본에는 ‘두 가지’(구성요소)가 빠졌고, 이것은 ‘알피니스트’(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알피니즘’(의 구성요소)이다.
보나티는 알피니즘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암벽에 구멍을 내고 불트 하켄을 고정시켜 개척하는, 알피니즘의 원리로 보면 말도 안되는 무용한 루트, 게다가 대다수의 경우 실은 벽 가운데 어디라고 정할 수 없는 그런 일부를 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한48)라고 강조했다. 야생과도 같은 바위는 흔적을 보이지 않는 법, 보나티에게 벽이란 “본격적인 암벽만”(한48)을, “하나의 산이나 정상에 대해서, 다른 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하나의 측면 전체 또는 그 경계선이 명백해서 산악인의 직관과 미적 감각이 만족하고 납득이 가는, 이치에 맞는 그것”(한48)을 뜻한다. 이 부분은 바위를 오르는 알피니스트가 남긴 흔적보다 더 오래된, 바위 고유의 흔적을 발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보나티는 “하켄이 등반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암벽의 본질적 곤란성을 제거하는 아니”(한48)라고 여겼다. 그는 “그랑 카퓌셍의 경우에서처럼 1m 앞이 돌파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루트에서는 의지의 강인함과 루트를 보는 머리가 시험대에 오른다”(한48)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용기야말로 매력적이고 생기왕성한 것이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암벽을 이겨내게 된 유일한 특별장비였던 셈이다.”(한49)라고 썼다. 보타니가 언급한 용기는 곧 바위의 흔적을 자신의 손과 몸으로 포응하는 것, 곧추선 바위를 오르면서 자기자신을 확장시키는 것, 그리고 나서 올랐다는, 올라간 후 다시 내려와 바위에서 사라졌다는 흔적만을 남기는 것일 터이다. 둥반이 알피니스트의 글쓰기와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읽은 이를 포함해서 끝나지 않는 여행이다.
14-3-3 산과 가까이 혹은 멀리
1976년 6월, 보나티의 그랑 카퓌셍 재등반은, 자기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성찰을 가져다 주었다. “오늘날 내가 생각하기에 산악계는 피조콜로(보나티의 친구, 가이드로 당시 36세, 보나티는 그를 옳은 정신을 지닌 알피니스트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여겼다. 한42)이 지닌 덕성과는 대개 거리가 멀다. 당파성과 이기심과 무정견이 오늘의 산악계에서 자주 보는 경향이다. 그래서 양심적 가책이 없으며, 제멋대로의 생각이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알피니즘의 역사를 좀먹기도 한다.”(한42)라고 쓴 것을 보면, 보나티가 유명해졌지만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1954년, 이탈리아 K2 원정대에서 겪은 상처 이전에 이미 같은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보나티가 서른 다섯 살이었던 1965년, ‘알피니즘이여 안녕’이라고 말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던 그 마음가짐은 이미 1951년 그랑 카퓌셍을 등반한 이후 겪은, 당대 이탈리아 산악계로부터 받은 질시와 무시, 중상과 모략과 같은 아픔을 투영한 것이고, 이 때부터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랑 카퓌셍 등반과 K2 원정, 그 사이는 겨우 3-4년에 불과할 뿐이다. 이즈음, 보나티의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그로부터 등반이 아니라 등반 이후에 펼쳐진 허위의 풍경 앞에서, 그 아픔을 지닌 10년의 세월 사이, 1955년에는 ‘드뤼’ 단독 등반, 1958년에는 ‘가셔브롬4’ 등정, 1963년에는 ‘그랑 조라스’ 겨울 북벽 등반, 1965년에는 마터호른 겨울 북벽 등반을 끝으로, 갈 곳이 아니라 올라가야 할 가치를 잃은 35살의 그는 산을 벗어났다. 그리고 산보다 더 큰 곳으로 갔고, 산을 더 너른 곳으로 확장하는 데 자신의 온 삶을 제공했다. 그 최대값은 자신이 산처럼 고정되는 데 있었다. 그가 남긴 이런 글을 다시 읽어보자. 보나티는 그랑 카퓌셍 등반에 쓴, “...이 산은 우리의 용기와 침착과 결단의 도를 넘었고, 오늘날 상상 이상의 것을 요구했다고 본다...그랑 카퓌셍은 근본적으로 나의 성격을 키워주는 경험이었고, 산악인으로서의 특징이 키워졌다.”(한50)가 제3장의 결론이다.
14-3-4 번역에 말걸기
전체적으로 제3장의 글읽기는 혼란스럽다. 그것은 여러 번역어의 혼합 때문이다. 3장은 첫 단락부터, 지명으로 ‘메르 드 글라스Le mer de Glace’, ‘제앙 안부Le col du Géant’(한32), ‘트리당 쿨와르couloir du Trident’(한37), ‘몽블랑 뒤 타퀼mont Blanc du Tacul’(한40), 암탑pilier, paroi(한32), 대설붕ledge, la grande vire(한37), 풍설gale(한38, 영44) 등과 같은 용어들이 등장해서 이해를 위해서는 잠시 멈춰, 자료를 들춰보아야 했다.
제 3장의 첫 페이지에서, 보나티는 1949년 8월, 수직형태의 붉은 그랑 카퓌셍un superbe pilier rouge을 처음 보고 현기증la vertige을 느껴, 아찔했다dizzy고 썼다.(불25, 영34). 한글 번역본은 “머리가 어지러웠다”(한32)라고 썼다. 이어서 김영도의 한글 번역본에서는 “이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전에 몰랐던 암탑을 오를 생각이나 했었나, 몽블랑 산군의 이 구석을 찾아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한32). 이 문장의 다른 번역문장을 찾아보면, “I recall how one of my first thoughts was to wonder whether there had ever been anyone who had dared to climb that pinnacle. At that time I didn’t know even its name. It was the first time I had ever been in that area of Mont Blanc”(영34), “Je me souviens qu’une de mes premières pensées fut de me demander si quelqu’un avait jamais osé escalader cette paroi, don't j’agnorais encore le nom. C’était en effet la première fois que je me trouvais dans cette partie du mont Blanc.(불25)이다 그랑 카퓌셍에 누가 감히 오르려고 했었는지 궁금했던 바가 그가 지녔던 첫 번째 생각이었다. 이 문장에서 보나티는 ‘이전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던 자기자신이 아니라, 그 이전에 오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때 보나티는 이 첨봉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고 쓴 부분은 번역되지 않았다. 이 즈음 보나티는 그랑 카퓌셍이 있는 몽블랑의 이 지역을 처음 가보았다. 이 문장에서, 그랑 카퓌셍을 영어 번역본은 붉은 바위벽pinnacle, red pinnacle(영34)로, 불어본에서는 paroi, pilier rouge(불25, 26) 표기했다. 김영도 번역본에서는 “암탑, 붉은 암탑”(한32)로 썼다. 일어번역본은 “암벽, 붉은 첨탑”(일24, 25)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보나티가 그랑 카퓌셍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먼저 올라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알아낸 루트로 산을 오르기를 꿈꾸었다.”(한32)라고 썼다. 이 문장은 보나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자세하게 새길 필요가 있다. 이 문장은 영어 번역본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 번역문은 두 개의 문장 즉 1) 그랑 카퓌셍은 처음부터 나를 매료시켰다와 2) 내 스스로 알아낸 루트로 정상에 오르기를 꿈꾸었다를 하나로 묶었다. 영어본은 “My dream was to reach a summit by a route discovered by myself alone”(영34)이고, 불어본은 “Je rêvais d’atteindre un sommet par une voie toute personnelle, voulue et tracée par ma seule imagination.”(불26)이다. 불어 번역본의 문장이 더 구체적이다. 보나티가 자기 만의 루트를 따라par une voie toute personnelle, 자기 스스로 발견한 루트로by a route discovered by myself alone라고 쓴 것은 같은데, 그것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낸voulue, 그린tracée 길이라는 것을 덧붙였다. 일어 번역본은 ‘상상력’을 ‘지혜知慧’(일25)로 번역했다. 그 다음 문장의 한글번역은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웅대한 처녀벽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다시 없는 기회였다.”(한32)인데, ‘웅대한 처녀벽’은 영어번역본의 “a great virgin rock face”(영36), 불어번역본의 “une grande paroi vierge”(불26)의 직역이다. 그런데 보나티가 “만난 적이 없었다”라고 한 것은 웅대한 처녀벽이 아니라 오른 적이 없는 대암벽을 마주하는 내적인 만족이나, 그 벽에 맞서는 감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never yet experienced the inner satisfaction of confronting a great virgin rock face(영36), “Je n’avais pas encore éprouvé l’émotion de me mesurer à une grande paroi vierge(불26)을 뜻하는데, 한글 번역본에서는 스무살의 보나티가 그랑 카퓌셍을 마주했을 때의 겸손함과 등반을 꿈꾸는 기쁨이 묻어있는 아름다운 이 문장을 생략했다.
등반하기 전, 그랑 카퓌셍 등반에 대한 겸손함과 기쁨은, 이어지는 그 다음 단락에서, 등반하는 내내 존경, 외경심respect과 더 큰 두려움, 더 불안한 마음plus de crainte, increased uneasiness(불27, 영36)이라는 양가의 감정으로 환원되어 보나티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보나티의 1차 시도는 등반 도중에 끝난다. “뇌우와 눈보라”(한33) 때문이었다. 보타니와 함께 등반했던 친구와 함께 “현수하강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한33) 일어 번역본은 “풀 스피드로 현수하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일26)라고 했는데, 영어 번역본과 독일어 압자일렌과 같은 abseil off(영36), 불어 번역본에 있는 빠른 속도로 하강이라는 en rappel à toute vitesse”(불27)를 일어번역본에 있는 ‘현수하강懸垂下降’으로 번역했다. 현수하강이란 단어는 전적으로 일본어 그 자체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별로 쓰이지 않는 단어일 터이다. 이 단락 끄트머리에 있는 ‘투리노 산장rufuge Torino’은 토리노 산장의 오기이다.
그 다음 단락은 보나티의 80시간 동안의 그랑 카퓌셍 2차 등반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그랑 카퓌셍 밑at the foot/au pied으로..”(한33)는 ‘그랑 카퓌셍 기슭’을 뜻한다. “이 해 기상은 예년과 달리 거칠었고 ...”(한33)은 늘 그런 것처럼 ‘폭풍우가 몰아치는 여름’이다라는 뜻이다. “시작이란 언제나 고무적인 법”(한33)은 ‘이번에도 시작은 고무적이지 않았다Again the beginning was anything but encouraging(영36), Cette fois encore le départ n’a rien d’encourageant(불33)’ 즉 용기를 돋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신통치 않았다라는 뜻으로, 김영도는 이를 정반대로 번역했다. 바위에 3일동안 매달려 있었던 보나티와 친구는 더 이상 마실 물이 없었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입술이 부르트고 입이 입술보다 작은 듯이 보였다”(한34)라는 문구는 이해가 어렵다. 번역문구를 보면, 김영도는 영어본을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오역이다. 영어 번역본은 “혀가 부어올라 입보다 더 커 보였다Our tongues were swollen and felf as if they were too big for our mouths”(영34)이고, 불어번역본은 “우리의 혀가 부어올라, 입 안에 넣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Notre langue a gonflé, et il nous semble que notre bouche n’arrive plus à la contenir”(불29)이다. 그만큼 추웠다는 뜻이다.
그랑 카퓌셍 3차 시도는 2차 시도 이후 1년이 지난 후에 있었다. 보나티는 이 등반을 루치아노 기고와 함께 했다. 1951년 7월 20일, 첫 날 등반을 하고 비박할 때 였다. “작년 북벽으로 가는 하강 시발적이었던 대설붕에 도달했다”(한37)에서, 눈덮인 긴 바위 선반이라는 ‘대설붕大雪棚’은 ‘작년 북벽을 통해서 후퇴해야만 했던 눈덮힌 큰 협로grande vire(불34), 영어 번역본에서는 great ledge이다. 문장 전제를 보면, the great ledge from which we had retreated via north face the previous year(영43)이다. 이 문장 다음 단락에서는, “눈에 덮인 커다란 바위 선반huge snowy ledge”(한37, 영43)이라고도 썼다. 정상에 이르기 하루 전, 그들은 그곳에서 슬링에 매달려 비박을 했고, 그 때 경험한 고통은 이 문장에 모두 담겨있다.“잿빛 음산한 아침이 밝았다. 눈은 오지 않았으나 바람은 여전히 강했다. 풍설에 톱니처럼 예리하게 갈라진 바위기둥에는 서릿발이 하얗다.”(한38). 이 문장은 매우 문학적 표현이라, 자세하게 들여다 보아야 뜻을 새길 수 있다. “It was no longer snowing but the gale grew stronger. The rocky spur from which the howling of the wind had come seemed all fringed with white icicles.”(영44), “L’arête tranchante contre laquelle hurle la tempête est maintenant couverte d’aigrettes de glace.”(불36) 그곳은 물고기 뼈arête와 같은 바위 모서리로, 밤새 비바람이 들이쳐서 고드름으로 덮여있었다. 서릿발은 땅 속의 물이 얼어 기둥모양으로 솟아오른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깃털aigrette 모양의 얼음 즉 바위 모서리에 얼어붙은 하얀 고드름whige icicles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등반 4일 째, 보나티와 기고는 그랑 카퓌셍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오늘날 이 길은 ‘보타니-기고 길’이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이 오르는 길이 되었다.
14-3-5 보나티와 등반윤리
제3장은 두 개의 글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 글은 1,2,3차 시도에 관한 글이고, 두 번째 글은 「25년 뒤Vingt-cing ans après」(불37)의 카퓌셍이라는, 영어 번역본에서는 「카퓌셍으로 돌아가기Return to the Capucin」(영45), 독어 번역본에서는 「25년 후 그랭 카퓌셍으로 돌아가기25 Jahre später zurück am Grand Capucin」, 이탈리아 원본은 「25년 후 그랑 카퓌셍Sul Grand Capucin venticinque anni dopo」이라는 소제목의 글이다. 보나티는 친구 안젤로 피조콜로와 함께, 1976년 6월에 “올랐던 날을 기념하고 내 자신을 검증하기 위해서(한40), to test myself(영46), faire une vérification personnelle(불37)” 그랑 카퓌셍 동벽을 다시 찾아가서 등반했다. 그 때 “25년 전에 느꼈던 것”처럼, “대자연 앞에 혼자 내던져졌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에 사로잡혔”고, “지금도 당시 체험을 그대로 계속하는 그런 기분이었다”(한40)라고 썼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그런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이에 대하여 김영도는 한글 번역본에 원문에 있는 단어를 생략한 터라, 이 문장은 애매해졌다. 그런 감정은 ‘나약함le sentiment de fragilité(불38), sense of fragility(영46)이라는 감정이다. 보나티는 자신이 25년 전, 대자연 앞에서 경험한 나약했던 감정을 되새기고 있었다. 일어 번역본은 이런 나약한 감정에 대하여 “미덥지 못함에 사로잡혔다”(일34)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지닌 상태에 대해서, 한글 번역본은 “지금도 당시 체험을 그대로 계속하는 그런 기분이다.”(한40)라고 간단하게 줄여 번역했다. 영어 번역본에 있는 “갑자기 시간이 되돌려진 것처럼as if time had suddenly been rolled back”(영47)이나, 불어 번역본에 있는 “갑자기 시간 차원이 연기된 것처럼comme si tout à coup la dimension temps s’était annulée”(불38)와 같은 문장의 번역은 생략되었다. 일어 번역본에서는 “시간의 길이가 갑자기 해소되어時の長さが突然解消され 오래전의 체험을 계속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일35)라고 번역했다.
두 번째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보나티가 새로운 등반장비에 대한 비판이다. 보나티는 이 때 그랑 카퓌셍 암벽에 박혀있는 볼트 하켄ring bolt, expansion bolt, piton à expansion을 보고 “서글퍼졌다sad, tristesse”(한41, 영48, 불39)라고 썼다. 그리고 “이런 전통적인 루트에서 공정성을 잃은, 질이 나쁜, 모독적인 행위가 왜 행해졌는지 이해하기 어렵다”(한41)고 하면서 이런 등반은 “비윤리적”(한41)이라고 했다. 영어 번역본은 같은 뜻인 unethical(48)이고, 불어 번역본은 분명한 실격 véritablement disqualifiant(불40)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드릴과 해먹을 고안해서 지붕과 오버행을 넘어선”(한42), “암벽에 구멍을 내고 뷸트 하켄을 고정시켜 개척하는type of ringbolt inserted into a hole drilled in the rock, type de piton dont la mise en place oblige à perforer la roche”(한41, 영48, 불40) 것을 뜻한다. 이런 보나티의 비판은 “...당파성Sectarianism과 이기심selfishness과 무정견inconsistency이 오늘의 산악계에서 자주 보는 경향이다...양심적인 가책이 없으며a lack of scruples and a great deal of slipshod thinkg, , 제먹대로의 생각이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알피니즘의 역사를 좀먹기도 한다.”(한42)로 귀결된다. 그리고 보나티는 1976년 다시 등반하면서, 25년 전에 들었던 자신을 향한 비판을 잊지 않고 있다. “사려 분별이 없는 젊은이들These unthinking youngsters”(한43)이란 소리를, “어느 면으로 보든 등산가라기보다는 스포츠맨과 다름”(한44)없다는 소리를 다시 등반하면서도 환청처럼 듣고 있었다.
보타니는 오늘날 바위를 훼손하며 등반하는 이들에게는 “신비스럽고, 미지인 것 그리고 불가능이라는 감정”(한47)과 같은 요소들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가 강조하는 알피니스트의 “유일한 특별장비the only special equipment, le seul équipement spécial”(한49, 영57, 불51)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암벽을 이겨내게 한 용기to dare more and to withstand more both physically and morally, quelqu’un ait osé et résisté davantage, tant au physiquye qu’au moral.”(한49, 영57, 불51))이다. 최종적으로 보나티에게 그랑 카퓌셍 등반은 “근본적으로 나의 성격을 키워주는as fundamental and formative in my development, une expérience fondamentale 경험이었고, 산악인으로서의 특성이 키워졌it was the linchpin of my entire climbling ethos, l’une de celles qui me caractérisent le mieux en tant que grimpeur ”(한50, 영59, 불53)던 기회였다.
한글 번역본은 제3장의 마지막에 이 문장을 옮겨놓고 결론으로 삼아 단락을 끝맺었다. 이 문장은 “나 자신의 형성과 개발에 근본적인 경험이었고 또한 클라이머로서의 성격을 가장 잘 특징짓는 경험이었다”로 번역하면 좀 더 분명해진다. 독어 번역본뿐만 아니라 다른 번역본 끝에 있는, 마지막 단락은 보나티와 안젤로 피조콜로가 그랑 카퓌셍 정상에 오른 마무리 단락인데, 한글 번역본은 이를 생략했고, 앞 페이지에 있는 문장을 떼어내서 끄트머리에 결론처럼 옮겨놓았다. 왜 그랬을까? 김영도는 이 대목을 알피니즘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여기고, 이를 강조하려 했던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