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일주일만 자자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받고, 바로 네팔 비자를 받았다. 사진1장, 30달러, 그리고 비자 신청서. 아이들도 각자 줄을 서서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영어도 안 되는데 무슨 심각한 질문이라도 할까봐 긴장이 되었다. 2달 짜리 비자를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세관의 배낭 검사를 끝내고, 컨베이벨트에 실려 나온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자 입구에 우리를 반기는 통통하고 땅딸한 환한 웃음의 여인네가 있다.
‘저사람이 네팔 짱(JJANG)의 주인인가 보구나...’
네팔짱 주인은 우리를 보자마자 대번 알아보며 미리 준비한 실크 스카프를 하나씩 목에다 걸어주었다. 그것이 네팔의 전통인데 무병장수를 기원한다고 하면서. 그녀는 굴러가기는 할까싶은 9인승 승합차 지붕위에 우리의 물건을 싣고, 드디어 카투만두의 다운타운으로 질주하듯 달려갔다. 속도는 얼마 안 낸 것 같은데 소리만으로는 120정도 밟은 듯 하다. 고장이 났는지 창문이 열리지 않는 맨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연신 놀라면서 눈만 더 동그래졌다. 시끄러운 크락션 소리, 무질서한 교통질서, 맨발에 도로를 걷는 사람들, 병든 개들, 공터에 누워 있는 소들,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이 철근들이 쭈빗,쭈빗 나와있는 위험해 보이는 집들, 먼지투성이 건물들, 쓰레기 속에 앉아있는 아이들.. 이곳이 바로 네팔의 수도라는 생각이 들자 네팔인들의 삶의 수준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가 네팔로 오게 된 것은 아주 우연히 발견한 인터넷에서의 비행기 티켓 때문이었다. 그 즈음 남편이 매일 했던 일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 컴퓨터에 “네팔-26만원”이라고 떴었다. 우리의 여행계획 자체가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자’ 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터넷의 그 광고는 당장 우리를 클릭하게 했고, 우리는 인도로 바로 간다는 계획을 네팔에서 국경을 통해 가기로 수정했다.
“2006년 7월 2일 저녁 9시 인천공항 출발”
“재식아, 잘 생각하고 하는 거지?, 기간이 너무 긴 거 아니야? 네가 잘 생각해서 하겠지만 하여튼 조심해라, 조심해.. 참,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지금은 종윤이가 중학교 2학년이고, 종하가 중1, 종은이는 4학년이니까 괜찮다 치지만, 종윤이 종하가 3년 후에 오면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텐데...무슨 생각은 있는 거겠지?”
“3년?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지 계획은 잘 세워둔거야? 호텔예약도 됐고? 우와 그거 생각만 해도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야~ 대단하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봐야 하는데 아마 마누라가 3년 동안 세계여행하자고 하면 대뜸 돈이 어딨어? 하며 미친놈 취급할거야...부럽다, 부러워...그런데 그곳에 가면 아는 사람은 있는 거야? 얼마나 인도에 있을 건데... 뭐? 네팔로 바꿨어?”
아직도 한참 갈 날이 남았는데도 우리의 송별회는 시작되었었다. 나름대로 주변관계가 좋았던 덕분에 우리를 아끼는 사람들이 기꺼이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었지만 모임이 끝나고 돌아 올 때면 우리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질문들을 받으면서 송별식은 철없는 부모 성토대회로 바뀌어서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괜찮아, 잘 결정한거야, 더군다나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일이 더 하고 싶잖아. 늘 우리부부의 지론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해보자. 그래도 지금이 우리인생에 최고의 기회잖아. 우선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우리가 젊고...”
그렇게 매일 밤 남편은 흔들리는 나를 도닥였고, 나는 결정적인 남편의 말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을거야. 3년, 배낭만 메고 우리가 세상 여행을 하고 온다면 장담하건데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아닐거야.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그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거지. 우리는 변할테니까”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 본 네팔은 나의 상상 그 이상이였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네팔에 오기 전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지 계획을 묻는 아이들의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 정확한 계획이 없어. 너희들처럼 우리도 처음이기 때문이지. 그러나 한 가지 정한 것은 기차역에 가서 일주일만 자보자라는 거야. 그러면 그사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을 걸 테고, 그렇게 그 사람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여행이란 걸 시작하게 될 거야..”
“그러다 그 사람이 사깃꾼이면 어떡해?”
걱정 많은 종하의 물음이다.
“그럼, 우리는 여행을 하자마자 사기를 당하는 거지-”
언제나 긍정적인 종윤이가 내 대신 해준 답변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아이 방학을 이용해 매년 두 번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주일에서 이주일정도 걷기 여행을 9년 넘게 해왔던 우리 아이들은 길에서 잔다라는 말에도 아무런 놀라움이 없었다. 그건 우리의 여행에선 늘 필수조건이었으니까-
“엄마-, 우리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었어요”
“무슨일로?”
“선생님이 우리가 네팔로 갈 때 뭔가 부탁하실 것이 있다는데...엄마랑 다시 통화하고 싶으시대요”
이틀 후면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운영하던 사랑아이의 이것 저것을 손봐주느라 매일밤 늦게 귀가하는 그즈음 종윤이 선생님의 메시지는 이상하게 뭔가를 기대하게 했다.
“어머님.. 종윤이 담임인데요. 내일 모레 저녁 비행기 맞으시지요? 제가 네팔에 있는 분에게 보낼 물건이 있는데 혹시 무게가 괜찮으시다면 가져 다 주실 수 있으실까요? 공항에 내리시면 그분이 공항에 나와서 픽업해 주실 거예요. ”
우리는 떠나는 날 오전, 종윤이 담임 선생님을 만나 네팔짱이란 숙소주인에게 가져다 주었으면 하는 몇가지 박스들을 받았고, 네팔짱에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숙소를 제공해 줄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일주일 기차역에서 자야지하는 계획은 사라졌다.
시내로 질주하는 승합차 안에서 기차역에서 자지 않고 이렇게 낯선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한국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상상했던 일보다 몇 배로 안심이 되는 일이란 것을 나는 곧 실감하게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기 때 보이는 스콜 현상이었다. 우산은 가져왔지만 큰 배낭을 지고 저런 비를 맞으면 우산도 소용없겠다 싶어서인지 숙소의 허름함이나, 벽돌이 몇 개 빠진 낡은 샤워실의 단수 안내문도 그 비를 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에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네팔짱은 작은 골목길에서 또 5미터정도 들어와 있었는데 그 5미터를 다시 나가자 아까 들었던 소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비포장도로임에도 차들, 오토바이, 사이클 릭샤, 자전거들이 느릿하게 걷는 소나 개들 그리고 사람들을 제치고 마치 무슨 시위현장에 화가 나서 달려가는 듯 다들 엄청난 속도를 내고 빵빵거리며 어수선했다.
이곳 저곳에 한눈을 팔며 떨어져 걷던 종하도 너무 무섭다며 내 옆에 찰싹 붙고, 종은이는 아빠팔짱을 단단히 끼고 걷는데 아들이라고 종윤이는 혼자서 담담히 걸었다. 그렇게 큰길을 지나 다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한 평이나 한 평 반 정도의 작은 가게들이 양쪽으로 즐비했고, 저녁 8시 즈음이었는데도 가게들의 대부분이 닫혀 있었다. 그나마 불이 켜진 가게들은 과일이나 야채들을 팔고 있었는데 먼지가 수북하고 다 시들어 보였다. 팔리기나 하는 건지, 오히려 하루 종일 할 일 없어 펼쳐놓고만 있는 장식용 같아 보였다. 더군다나 촉수 낮은 전등불은 그들의 가게 안을 더 음침하게 보이게 했고, 더군다나 남편 뒤에 숨어서 흘끔 흘끔 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가게 주인들은 서로들 낄낄 거리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코를 찌르는 야채 썩는 냄새와 비린내, 배수가 안 되어 여기저기 고여 있는 시궁창 물..나는 빨리 이 거리를 지나치고 싶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는데 철창으로 둘러쳐진 사당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검은색 돌 여기저기에 선명한 핏자국이 있었다. 그 이미지가 마치 돌에 머릴 부딪혀 피를 흘리며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소름이 끼쳤다. 한 시간 가량 동네를 돌아보고 나는 겁쟁이가 되어 빨리 숙소로 가기를 남편에게 재촉했다.
그런데... 길 눈 좋은 남편이 하는 말..
“어떡하지...길을 모르겠네..”
처음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를 보며 놀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정말로 길을 잃었다.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우리 숙소 이름인 ‘네팔짱’과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호텔 마낭(MANANG)'인데..
“Where is holel 마낭?”
“You know? hotel 매넝?”
왠지 길을 잘 알 것 같은 몇 사람에게 네팔짱이나 마낭호텔에 대해 물어봤으나 그들 중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할 줄 아는 사람도 우리의 발음이 이상해서인지 네팔짱이나 마낭 호텔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그랬듯이 늘 길을 잃으면 나만 바빴다.
남편은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골목들을 살피고, 우리아이들은 우리를 그저 따라다니며 여전히 난생 처음 보는 이 골목과 사람들에게 넋이 팔려 있는 듯 했다.
“여보! 여기 이 동네 지도 같은 것이 있어”
그리고 한 참 만에 우리는 그 어둑어둑한 골목을 되짚어 가며 숙소에 도착했다.
여행 전, 은수, 현수엄마가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준 “핑”이란 개구리책을 읽고 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여행 중 반드시 ‘뭔가를 얻을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 여행을 왔었더라면 난 그날 밤 짐을 싸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고민에 고민을 더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여행-
그리고 핑이 말하듯이 세상엔 오히려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 내기 위한 시간으로 우리의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에 오늘 이 낯선 곳에서 발견한 첫 번째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였다. 이렇게 하나가 깨어지니 조심스레 이 여행에 대한 작은 기대가 생겼다. 이 여행을 통해서 더 엄마다워지고, 더 아내다워지고, 그리고 더 열린 사고를 가진, 정말 내 속에 있는 그 멋진 내가 고스란히 조각 되어져 3년 후 이 용감한 결정에 대한 선물이 되기를, 그런 실낱같은 희망이 솟아오름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