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조계종 교육원은 지방 승가대학(강원) 교육체계 개편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교육원 체제는 1994년 종단개혁 이후 마련됐다. 당시 종단개혁의 출발은 승가교육 개혁이었다.
강원교육은 그 때 까지만 해도 거의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었다. 지금은 기본교육기관을 이수해야 구족계 수지 자격이 주어지지만 당시는 그러한 제도가 없었다. 강제성이 없다보니 강원교육을 받지 않는 스님들이 많았다. 받는다 해도 제도상 허점이 많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짧은 기간에 수료하는 스님들도 있었다.
교육원이 들어서고 교육체계가 정비되면서 이같은 폐해는 거의 사라졌다. 당시가 하드웨어 구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불교의 정수를 제대로 배워 말 그대로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로 자리매김하는 교육을 하겠다는 것이 현 교육원이 주도하는 기본교육기관 개혁의 핵심이다.
1956년 동학사에 첫 비구니 강원 개설
어깨너머로 배우던 비구니스님들 해방 후 강사돼
‘비구강사 전강’ 시대서 ‘비구니강사’ 시대로 전환
‘정화참여 계기 교육 활발’…1960년대 급속 발전
그런데 강원, 즉 지방승가대학을 비롯한 기본교육기관 개편의 대상은 늘 비구 사미였다. 1994년 당시 강원 개혁의 핵심이 수학 정원 하한선이었는데 작은 강원의 정원은 5~6명에 불과한 곳도 있었다.
이 규모로는 제대로 교육이 안된다는 것이 교육원과 스님들의 지적이었다. 문제가 된 강원은 모두 사미 강원이다. 강원교육을 받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이동질서의 문란도 모두 사미들 문제였다. 사미니 강원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비구니 강원은 가장 규모가 큰 운문사가 250여명에 이르는 것을 비롯 대부분 100명이 넘는 대규모다. 사미니들은 또 예전부터 강원을 의무적으로 거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단에서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알아서 잘 가꿔온 것이다. 그러나 좋은 조건에서 편하게 보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사회의 냉대 차별에다 승단 내 비구 스님들의 이중 차별을 견디며 일궈낸 역사다.
<사진> 1974년 봉녕사승가대학 첫 졸업식. 앞줄 왼쪽이 묘엄스님(불교신문 자료사진).
비구니 강원의 출발은 정화의 성과물이다. 비구 스님 보다 훨씬 많은 수가 동원되고 현장에서 활동도 더 적극적이었다. 함께 방에도 앉지 못하게 하던 완고한 노 비구스님들의 인식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중앙종회의원에 비구니 스님을 배치하고 사찰도 할당했다.
비구니 교육은 해방 전부터 있었지만 뜻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비구 스님 강원 근처 암자에서 통학하며 비구 강사 스님에게 수업을 받거나 개인지도를 받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다. 이를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분들이 1960년대 비구니 3대 강백으로 인정받는 월광금룡(1892~1965), 정암혜옥(1901~1969), 화산수옥(1902~1966)스님이다.
이들 중 금룡스님과 수옥스님은 운문사와 인연이 있다. 금룡스님은 정화 후 운문사 초대 주지를 역임했다. 수옥스님은 한국전쟁 후 경남 양산 내원사 주지로 내원사를 중창했는데 운문사 강원을 일으킨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스님이 수옥스님을 건당(建幢)했다. 해방 이전 비구니들에게 강원 교육의 혜택을 베풀었던 비구 강사들은 만우상경, 해담치익, 운허용하, 고경법전, 소하대은 스님들로 주로 동학사 통도사, 해인사 국일암, 서울 응선암, 청암사, 법주사, 운문사, 보문사, 남장사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해방 전 최초의 근대적 형태 비구니 전문 강원은 남장사 관음강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광우스님이 <부처님 법답게 살아라>(조계종출판사)에서 밝히면서 알려졌다.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남장사는 원래 비구도량이었는데 광우스님의 속가 부친 혜봉스님이 조실로 주석하면서 비구니 강원을 개설했다.
강사도 비구니 수옥스님이 맡았다. 광우스님은 직지사 서전에서 탄옹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 등을 배우다가 동화사 부도암으로 옮겨 비구 강사인 대우스님에게서 <치문> <서장> 등을 배웠다. 큰 절에 있으면서 비구 스님에게 경을 배운 과정을 밟은 것이다.
그러다 혜봉스님의 배려로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돼 20여명의 비구니들이 입방했다. 지원자는 많은데 수용 능력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받지 못했다고 한다. 교과목은 지금의 전통강원과 다르지 않았으며 일과, 공부 방식 등도 거의 같았다.
1944년 졸업한 스님들은 광우스님을 비롯 대구 지장사 지형스님, 벽안스님 세 명이었다고 한다. 3년 만에 1기 졸업생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 이유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제가 정신대를 징집하는 바람에 비구니 스님들이 이를 피해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수경스님(삼선승가대학 강사)이 2007년 정리한 비구니승가대학 역사에 따르면 남장사 강원 이전에도 국일암, 옥련암에 비구니 전문강원이 있었다. 해방 전에도 복수의 비구니 강원이 존재한 것이다.

1970년 운문사 서장반의 학인들과 강사 묘엄스님(‘사진으로 본 통합종단 40년사’).
해방 전 교육을 받은 비구니 스님들은 정화 후 비구니 강원을 개설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주역이 된다. 해방 전부터 교육을 받은 비구니 강사 1세대들은 정화 후부터 비구스님들로부터 전강을 받아 후학 양성의 발판을 마련한다.
1956년 묘엄스님이 경봉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는데 이는 비구니가 비구 강사에게 처음 받은 전강이다. 묘엄스님은 이듬해는 운허스님에게 전강을 받는다. 같은 해 태경스님은 만우스님에게, 지현스님은 대은스님에게, 1958년에는 명성스님이 성능스님에게 전강을 받아 1950년대 4명의 비구니 강사가 탄생한다. (수경스님, <한국비구니 강원 발달사> 참조)
비구 스님들에게 강맥을 전수받은 비구니 스님들은 현재 5대 비구니 강원으로 꼽히는 운문사, 동학사, 봉녕사, 청암사, 삼선승가대학을 설립했거나 설립 주역들이다.
수경스님이 정리한 5대 강원 강맥 전승도에 따르면 경봉, 운허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은 묘엄스님은 운문사 강사를 거쳐 1970년대초 수원 봉녕사 강원을 개설해 오늘에 이른다. 명성스님은 성능스님을 전수해 운문사 강원에서 강사로 역임하고 최대 비구니강원으로 키웠다. 동학사 일초스님은 호경스님의 강맥을 이었다. 청암사 지형스님 상덕스님은 지관스님을 이었다.
해방 후 최초의 비구니 강원은 동학사에 개설됐다. 동학사에는 1864년 만화스님이 강원을 개설해 제10대 운허스님 때까지는 비구강원으로 맥을 이어오다가 1956년 비구니 대현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경봉스님(1885~1969)을 모시고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강원을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수경스님에 의하면 동학사에 비구니 강원이 개설된 것은 정화가 한창일 때 비구니 성현스님이 경봉스님에게 요청해 이뤄졌다고 한다. 성현스님은 경봉스님 밑에서 경을 보던 학인으로 동학사 강원에서 전 과정을 수료한 첫 졸업생 중 한명이다. 대처승이 맡고 있던 절을 비구니들이 맡으면서 대중이 40여명으로 늘어나고 사찰 논을 되찾아 혼란하던 사찰을 바로 세운 역사를 갖고 있다.
동학사에 이어 1958년 청도 운문사에 비구니 강원이 문을 열었다. 운문사에 비구니 전문 강원을 개설한 분은 통도사 강주 오혜륜스님이다. 운문사는 정화 후 비구니 사찰로 바뀌는데 초대 주지가 1954년 부임한 금룡스님이다.
대강백이기도 한 금룡스님은 주지로 부임한 뒤 중창불사를 하면서 비구니 교육도량 개설 준비를 하다가 1956년 입적한다. 스님이 입적하고 난 뒤 같은 문도인 성문스님의 권속이 동화사에서 운문사로 와 강원 개설을 적극 돕는다. 정화불사에 적극 동참했던 성문스님은 1955년 동화사 주지에 임명되는데 이는 처음 있는 일이며 유일한 비구니 본사 주지였다.
성문스님은 ‘가지산 호랑이’로 불렸던 인홍스님, 진주 대원사 주지를 지낸 법일스님, 정안스님등과 함께 가람을 일신하다가 1년 뒤 동화사가 비구 사찰로 바뀌면서 수행처를 운문사로 옮긴다. 성문 스님은 비구니강원 개설을 돕다가 1957년 출가 본사인 해인사 삼선암으로 돌아간다.
운문사 강원은 오혜륜스님에 이어 임재응스님, 묘엄스님 등이 강주를 지내면서 교육을 담당하다 1970년 명성스님이 강주로 부임하고 이어 스님이 주지와 강주를 맡으면서 가람을 크게 일으키고 도량을 일신해 오늘날 비구니 최대 강원으로 발전했다.
수원 봉녕사승가대학은 이보다 훨씬 뒤인 1971년 묘전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전기를 맞았다. 묘전, 묘엄스님 등은 운문사에서 봉녕사로 옮겨와 비구니 강원을 열어 오늘에 이른다. 묘엄스님은 1963년 가을 동국대 불교학과에 편입해 신학문을 배우고 졸업 후 운문사에서 4년간 강사로 학인을 가르치다 30여명의 문중 스님들과 함께 운문사를 나와 봉녕사를 복원하고 강원을 개설했다.
청암사승가대학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봉태수스님이 주석하며 가르치고 고산스님, 우룡스님이 강사로 활약해 40명에 이르는 학인이 경을 배웠지만 이후 쇠락해졌다. 이를 1987년 학장 겸 주지인 지형스님과 강사인 상덕스님에 의해 비구니 승가대학으로 거듭난다.
이제는 폐원된 비구니 강원도 있다. 서산 개심사는 1968년 성능스님을 모시고 개원해 1979년까지 운영했다. 화운사는 1974년 개설해 1985년 폐강했으며 전주 정혜사는 1954년부터 1994년까지 존속했다.
해방 후 현대 비구니 교육 시대를 개막한 주역으로 꼽히는 묘엄스님, 광우스님, 명성스님 등은 전통 강맥을 잇는 한편 동국대에서 현대 학문을 섭렵한 공통점도 갖고 있다.
비구니 스님들의 교육은 이처럼 해방 전부터 시작된 선각자들의 자발적 교육열에다 일부 비구 강사들의 지원으로 씨앗을 뿌린 뒤 해방 후 비구니 강사가 양성되고 정화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찰을 할당 받으면서 본격적인 ‘비구니 강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첫댓글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