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코 여행4 - 닛코의 도쇼구에 도착해서는 센고쿠(戰國) 시대를 돌이켜 보다!
2022년 11월 6일 야마가타(山形)에서 도치기현 닛코 (栃木県 日光) 역에 도착해 코인로카
에 배낭 을 넣은 다음에 버스를 타고는 교외에 기리후리노타키 (霧降ノ滝) 에 가서
폭포를 구경하고 다시 버스로 도부 닛코역에 내려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도쇼구 로 갑니다.
7~8분을 달려 신쿄 (神橋 신교) 라는 다리에 도착하는데 강과 다리 를 경계로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 가
갈라지는 모양인데 늘 그렇듯 다리는 붉은 색 이며 200미터를 올라가서 버스는 멈추는데 “西參道
서참도” 에서 내려서는 지하도로 해서 반대편으로 올라와 계단을 올라가니 넒은 참배도로가 보입니다.
참배로 오른쪽에 일광산 윤왕사(日光山 輪王寺) 라는 절은 금칠을 해서 화려한데다 마침 단풍 이
고운데.... 일본에서는 단풍놀이를 ‘단풍 사냥(모미지가리)’ 라고 부르니 그림 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여행을 떠나는 ‘단풍 사냥’ 이 가을을 상징하는 레저 로 인식되고 있답니다.
참배로는 엄청난 구름같은 인파 가 밀려나오며 또 그보다는 적은 인파가 들어가는데, 1602년에
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 인 도쇼구(東照宮 동조궁) 에 온
사람들로 참배로는 미어 터지는 가운데도 줄지어 늘어선 포장 마차 들은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1,300엔을 내고 입장권 을 사서 높은 계단을 올라가니 신사에는 수많으 인파로
붐비는 가운데..... 전각들은 금칠 을 한지라 번쩍거리는 모습을 봅니다.
도쇼구 東照宮 는 닛코역에서 도보 20분 거리로 동조궁 은 일본을 통일하고는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의 위패를 모신 사당 입니다.
1616년 이에야스가 죽자 여기 깊은 산속 닛코(日光) 에 웅장한 동조궁 을 지어서는
유골을 안장했으며 일본 각지에 위패를 모신 동조궁 이 속속 세워져
에도시대에 수가 500여개소 에 이르렀는데 현재는 130여개소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1603년에 세워진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將軍 장군)
인데...... 그가 막부 를 세우고 "쇼군" 이라고 불린 과정 을 생각해 봅니다.
660년 백제가 망하자 일본은 인질로 와 있던 풍왕자에게 왜군 5천 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 왕위 를
잇게하고, 임시 수도를 후쿠오카 로 옮기고는 배를 건조하고 무기를 만들며 식량 을 모아서는 3년
후에 1천여척의 배에 3만 에 가까운 대군을 태워 보냈으나.... 당나라 수군의 화공 으로 패해 쫃겨옵니다.
이때 사비성과 웅진성 등지의 백제 왕족과 귀족 1만 3천명 은 당나라로 잡혀갔지만 남은 귀족
과 중산층은 거의 대부분이 철수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 했으니.... 이들을
동원해 산성 을 쌓았고 그후 모국 백제와의 인연을 끊고 국호도 왜국에서 일본 으로 고칩니다.
이후 수도를 아스카에서 나라 로 옮겼다가 80년후인 794년에 50대 간무왕(천황)이 수도
를 헤이안쿄(平安京 평안경) 로 옮기니, 곧 오늘날의 교토 인데, 천황(일왕) 친정체제
가 강화되면서 동북 지방으로 쫓아낸 조몬인의 후손인 에미시(아이누) 들을 공격 합니다.
이때 일본 원주민 들을 쫓아 내기 위해 조직된 군대의 사령관을 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 줄여서 쇼군
(將軍 장군) 이라 했는데.... 일본의 영토는 오늘날 혼슈의 끝인 아키타와 아오모리 까지 확대됩니다.
하지만 오랜 평화가 계속되고 일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실권은 천황가(일왕가)의 외척 인 오랜 귀족
백제계 후지와라씨 로 넘어갔으며 이후 무사계급인 타이라(平)씨와 미나모토씨(源) 가 성장하게 됩니다.
이들 세 성씨가 가문 내에서 분화되어 서로 권력 쟁탈전을 벌이다가 타이라(平)씨 가 최종적
으로 권력을 쥐게 되니 멀리 관동지방으로 달아났던 어린 미나모토씨 가 세력을
기르는 가운데, 일왕과 타이라씨가 불화하자 미나모토씨가 궐기해 숱한 전투 끝에
승리해서는 1184년 미나모토 요리토모 (源 賴朝)는 도쿄 못미쳐 가마쿠라에 막부 를 세웁니다.
가마쿠라 막부 는 고려군을 앞잡이 로 삼아 쳐들어온 몽골군을 2차례나 방어 했지만 자비로 참전
해서 죽거나 다친 전국의 고쿠닌(國人) 들에게 보상할 돈 이 없었으니.... 실권을 잃었던
고다이고 천황(일왕) 은 이 불만을 이용해서 궐기를 촉구하니 결국 가마쿠라 막부는 망합니다.
이제 고다이고 천황(일왕)이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려하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 는 고다이고 천황(일왕) 과 싸워 조정이 남북으로 나뉘어진..... 오랜
내란 끝에 마침내 승리해 아시카가 막부 를 세우는데, 달리 무로마치 막부 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467년 1월 쇼군의 지위를 두고 조카와 삼촌이 싸운 내란이 교토 시내 에서 벌어졌으니 동군은 호소카와씨
일족등 24개국 16만이고 서군은 야마나씨 일족등 20국 9만명으로 응전하였는데...... 백제계 후손인
오우치(大內) 마사히로 가 2만으로 서군에 가담하니 10년을 끈 내전에서 교토시내 주택 3분지 1이 불탑니다.
전쟁이 승패없이 오래 끌자 지방에서 상경한 고쿠닌(國人) 들은 보상을 받지 못해 빚더미 에 올라
앉자 지방으로 귀향해 자립 하니, 이후 일본은 아시카가 막부의 힘은 없어지고 200여개
나라로 갈라 져서는 이웃 나라를 집어삼키고자 밤낮없이 싸우니 센고쿠(戰國) 시대 라고 불립니다!
이때 대영주는 스루가국(시즈오카현)의 이마카와 요시모토, 가이국(야마나시현)의 다케다 신겐, 사가미국
(오다와라) 호조씨, 에치코국(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 , 오와리국(나고야)의 오다 노부나가, 규슈
사쓰마의 시마즈씨, 시코쿠의 조소카베씨, 야마구치의 모리 데루모토, 에치젠국(후쿠이현) 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이며 그외 미카와(아이치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 입니다.
16명 중에 이마카와 요시모토와 다케다 신겐 그리고 호조 우지야스가 3중 결혼으로 겹사돈 이 되어
서로 동맹을 맺으니 등을 맞댄지라 "후방의 걱정" 없이 확장하니, 호조씨는 동쪽 관동(도쿄)으로
진출하고.... 다케다씨는 북쪽 시나노 (나가노현)로 진출해 80% 를 점령한 상황에서 에치코국
(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 이 남하하니 나가노시 인근에서 5차례 큰 전쟁 을 하느라 발이 묶입니다.
반면에 스루가국(시즈오카현) 의 이마카와 (今川氏)씨는 교토로 올라가 자기 막부 를 세울 욕심
으로 2만 5천 대군 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도쿠가와씨의 미카와국 은 서쪽
에서 오다씨, 그리고 동쪽에서는 이마카와씨의 군대가 양쪽에서 협공을 하니 인질이 되어
시즈오카로 잡혀 갔다가 이때 이마카와군 선봉 으로 진격해 오와리국(나고야) 국경을 침범합니다.
미카와(아이치현 동부) 의 소영주인 마쓰다이라(松平 송평) 가문의 5대 당주 나가치카는 5백
군사로 1만 이마가와군의 침공을 물리쳤는데.... 이후 7대 당주이자 이에야스의 조부인
마쓰다이라 키요야스 는 10차례 전투에 승리해 미카와국을 통일했으나 가신 아베에 암살 됩니다.
오와리국(나고야) 슈고 시바씨의 가신으로 성장해 독립한 오다 노부히데 는 1540년 미카와국
의 안쇼성을 점령하니.... 이에야스의 부친인 오카자키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는
옛날에 적국인 동쪽 스루가국(駿河國 준하국) 의 이마카와 요시모토 에게 구원 을 요청합니다.
1542년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히데 군이 오카자키성에 이르자 스루가국 이마카와군도 출진해
미카와군과 연합해 대항했으나 패하니 이에야스의 어머니인 오다이의 오빠 가리야 성주
미즈노 노부모토는 미카와국에서 이탈해 승자인 오다씨에게 복속 하자 히로타다는
처 오다이를 친정으로 추방 하고 이에야스를 이마가와에게 인질 로 보내며 설욕을 다짐합니다.
하지만 다하라 성주의 배신으로 이에야스가 중도에 납치 되어 오다씨 수중에 들어가고 부친 히로타다
마저 암살 되자 이마가와 가문의 셋사이는 1548년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안쇼성(安祥城)
을 쳐서 함락하고 노부히데의 장남 노부히로를 생포해서는 이에야스와 인질교환 협상을
벌이니 8살이 된 고아 이에야스 는 나고야에서 시즈오카 슨푸성으로 끌려와 인질생활을 시작합니다.
쓰루히메 는 스루가국 영주인 요시모토의 질녀 로 요시모토에게 딸이 없었으니 슨푸성에서는
가장 높은 신분의 처녀로 쓰루히메와의 혼인을 통해 이에야스는 생명을 보장 받게되고
다음해 첫출전을 해서 큰 전공을 세우는데 미카와국 가신들 이 몸을 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와리국(나고야) 의 오다군에 포위 당한 오다카성 은 요시모토의 혈족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주변이 모두 오다군의 성채로 둘러싸인 앵무새부리 같은데 군량미가 완전히 바닥나서
위태로운지라 이마가와군 중에 아무도 나서지않는 가운데 신참 이에야스가 지원 한 것입니다.
사방이 적의 감시 아래인 적지를 그것도 느린 치중 부대 를 이끌고 돌파해야 하는 작전은
포위섬멸당할 가능성이 농후했는데 이에야스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주변 오다 성채
하나를 공격하는 척 하니 오다군 병력 모두가 이에야스를 잡기 위하여 별동대로 향합니다.
이에야스 치중대 는 본대 호위를 받으며 오다군의 감시가 잠시 사라져 버린 오다카 가도를 신속히 돌파해
군량미를 오다카성에 무사히 전달 하고는 그날 밤에 신속하게 성을 빠져나와 괭가리만 울리다가
슬쩍 피해버린 별동대와 합류해 병력 손실 없이 무사히 작전을 완수 하고 슨푸(시즈오카) 로 귀환 합니다.
그후 스루가와 도토미 2국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 는 교토로 상경해 일본을 통치할 야망을 품고 1560년
6월에 2만 5천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국 (尾張国, 나고야) 으로 침공 할때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松平元康
( 이에야스) 는 선봉장 이었는데.... 오와리국의 병력은 5천뿐이라 오다씨는 항복을 준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군사회의도 하지않고 술만 퍼마시고 시만 읊다가 이마가와군 6천이 오케하자마(桶狹間)계곡
에 머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6월 12일 단 1천 으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산아래로 달려내려가는 기습으로
이마카와 요시모토가 전사 하니.... 오다카성을 지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성을 버리고 미카와로 돌아옵니다.
고향 오카자키성으로 돌아가 옛 마쓰다이라 일족의 영지 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고 1562년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 을 맺은후 1568년 가이국 다케다 신겐의 제의 에 응해 함께
이마가와씨를 공격해 신겐은 스루가(시즈오카)를 이에야스는 도토미(하마마쓰) 를 분할 차지합니다.
이에야스는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성(性) 을 바꾸고 도토미국에 성을 쌓으니 하마마쓰(浜松 빈송)
로..... 오카자키에서 수도를 옮긴후 세력을 확장하다가 1572년 2만 7천 다케다 신겐의
침략을 받아 오다 원군 3천을 합쳐 1만1천으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학익진을 펼쳤지만 참패 합니다.
다케다 신겐 은 시나노(나가노현)로 출병해 숱한 전투 끝에 10명의 영주들을 멸망시키고 나가노
까지 진격해 80% 를 손에 넣었으나... 산 너머 에치고(니가타현) 의 용 우에스기 겐신 이
출진해와서는 15년간 5차례의 대 전투 를 벌이면서 늘고 병이 들었으니 도쿠가와군을
몰살시켰지만...... 그후 진중에서 병으로 죽으니 도쿠가와와 오다 노부나가는 한숨을 돌립니다.
다케다 신겐 이 전장에서 병으로 죽으면서 남긴 絶命詩 (절명시) 입니다.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 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
“대부분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도다.”
다카다 신겐은 1575년에 죽었지만 후지산 북쪽 가이군 기마대는 일본제일 이라... 신겐의 아들 가이국
우지자네 는 3년간 죽음을 발설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 을 어기고 1만 5천 기마군단을 이끌고
미카와 동부를 침공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8천과 오다 노부나가의 3만 연합군이 대적 합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젊었을 때 머저리 라고 불린 특이한 두뇌의 오다 노부나가 는 조총 3단 전술
을 창안했으니..... 1열은 쏘고, 2열은 총탄과 화약을 장전 하고 3열은 총구 소제 를 하는등
3열이 번갈아 연속사격 을 한 조총부대의 화력으로 다케다군 기마대를 섬멸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 출진할 때 왜군의 조총을 걱정하는 유성룡 에게, 조총은 장전
하는데 시간 이 걸리는 약점을 들며 쏘는대로 맞는답디까? 퉁명스레 대꾸했던
신립의 기마대는 적진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하고 이 전술을 쓴 고니시군에게 몰살 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