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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팔경, 임경대를 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해석서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1804년?~1866년)의 한국지리서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임경대(臨鏡臺)’가 황산역(黃山驛) 서쪽 황산강(黃山江:지금의 낙동강)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산시지(梁山市誌)에는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산 72번지로 기록돼 있다. 임경대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돌을 직접 쌓아서 만든 뒤 노닐었다 해서 고운대(孤雲臺),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며 고문헌 등에는 임경대는 경상좌도의 최고 명승지로 신라 4선(영랑·술랑·남랑·안상)이 노닐었던 관동의 ‘사선정(四仙亭)’에 비길 만한 기상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고운 최치원이 이곳의 절벽에 ‘황산강 임경대’를 새겼다고 전하나 임경대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낙동강의 비친 산의 모습이 마치 거울 같다하여 읊은 시에서 임경대라는 말이 유래했다 하나 사실상 임경대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임경대의 위치가 절 아래 임경대에서 관원과 풍류객들이 매일 고기를 먹고 풍악을 울려 폐사되었다고 전하는 임경사터가 있는 절벽이라는 설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절벽에 임경대라고 쓰여진 사진들이 여러장 있었고 경치 또한 사방이 틔여진 절경이었다. 다음에 직접가서 찾아보고 자료를 올릴 생각이다.
양산에서 밀양간의 1022지방도로변에 임경대의 주차장과 화장실
최치원의 시비가 들어올 장소
임경대로 내려가는 나무데크로 깔아놓은 남쪽 산책로
남쪽 산책로쪽에서 본 복원된 임경대의 정자모습
임경대는 12개의 돌 기둥 위에 세워졌으며, 단청을 하지않은 백골문의 형태로 깔끔해 보였다.
소나무 숲길에 잠겨있는 아름다운 정자.
인공석을 깔아 놓은 경사진 산책로
건너편은 상동마을로 옛 기록에 황산강에는 황산진과 가야진 두 곳의 나루터가 있었다는데 임경대쪽에서 보면 김해 상동을 잇는 나루터였던 황산진은 바로 이 부근이었을 것이다.
오른 쪽 끝에 가야진이 보인다.
해질 무렵, 다시 찾은 임경대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황산강(낙동강)
▒ 臨鏡臺 題詠
煙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산은 기묘하게 뾰족뾰족하고, 물은 가득하게 넘실거리네.
- 통일신라때 최치원이 임경대의 원경을 읊다가 시선을 외로운 돛배와 아득히 멀어지는 새로 옮김으로써 풍광과 자신의 심경을 애절하게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로서 최치원의 문집인 『고운집(孤雲集)』권1과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권19에 「황산강 임경대(黃山江 臨鏡臺)」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임경대제영(臨鏡臺 題詠)은 최치원이 황산강(黃山江: 낙동강의 옛 이름)가에 노닐면서 지었다고 하며, 그래서 임경대를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한다. 불행하게도 천년이 흐른 지금은 이 시는 찾아볼 수 가 없다고 한다. 최치원이 이 시를 읊은 이후 많은 시인들이 임경대를 제재로 하여 시를 읊었다. 고려시대 김극기는 이 시에 차운을 하였고, 조선시대 김순룡(金舜龍), 안필효 등도 대해 칠언율시를 남겼다.
▶ 임경대 유적지 정비사업
2005년 임경대 유적지 복원정비계획에 의거, 원동면 화제리 산72-4 일원 2만4천893m²에 국비와 도비 및 시비 등 39억원이 투입돼 임경대를 조성하고 주차장, 산책로, 화장실 등을 설치해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관광명소로 만들고있다. 이번 사업으로 임경대로 추정되는 너럭바위 주변 낙동강의 경관이 빼어난 곳에 전통정자가 세워지고, 정자와 연결되는 약 800m의 산책로가 조성되었으며. 최치원 선생이 남긴 시를 돌에 새긴 시비도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임경대는 지난 2001년 개봉했던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과 차태현이 이별을 했던 장소이다. "견우야.미안해~ 나 정말 어쩔수가 없나봐, 견우야~~ 미안해~ 미안해~ 나도 어쩔수 없나봐. 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어쩔수 없는 여잔가봐, 견우야~미안해~~" 라고 애절하게 외치던 장소가 바로 임경대다.
펌 : - (글,사진) 석암 이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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