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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마을 동래구협의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야 이춘효
*** 보는 순서 ; 중앙일보, 한국일보, 불교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국제신문, 경인일보, 광남일보, 부산일보,
대전일보, 농민신문, 매일신문(당선취소), 경상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 한경청년신문, 전북일보, 동양일보,
경제신문, 무등일보, 영주일보, 한국문학방송(교육신문사),
강원일보, 한라일보, 경남신문, 영남일보, 웹진 시인광장
■ 2015년 《중앙신인문학상》당선작 1
투명인간
-못생긴 너에게 / 김소현
오늘은 티브이에 나오는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나는 잠깐 무표정하다가
웃는 얼굴을 연습해보았다
그럴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건전하게 너를 사랑할게.
오늘의 운세에선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천천히
목표한 곳만큼 전진하라 한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
한 쪽 눈을 감고 보는 풍경과
두 눈으로 보는 풍경은 조금 다르고
왼쪽 눈의 풍경과 오른쪽 눈의 풍경은 아주
많이 다르지 그래서 나는
깜빡이면서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아름다웠어 혹은 슬프지 않았어
조건 따지지 않고 무담보 대출 삼백.
오래도록 울리지 않았던 휴대폰에 문자가 온다
내 몸은 자꾸만 헐렁해졌다
옆집에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신문 배달원이 툭, 하고 던져 놓고 가는 신문 소리에
덜컹거리는 몸의 내장들
당신은 나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이해한다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
손을 잡고 외출을 하자.
어쩌면 새로운 세기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체위를 바꾸는 구름만큼 무방비한 우리의 주소록
아무렇게나 번호를 눌러 불쑥
나야, 하고 말을 한다면.
나는 나를 더 미워하고 싶어진다
나는 지구의 회전을 지나치게 의식하였다
그리고 걷는다
■ 2015년 《중앙신인문학상》당선작 2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 유이우
자유에게 자세를 가르쳐주자
바다를 본 적이 없는데도 자유가 첨벙거린다
발라드의 속도로
가짜처럼
맑게
넘어지는 자유
바람이 자유를 밀어내고
곧게 서려고 하지만
느낌표를 그리기 전에 느껴지는 것들과
내가 가기 전에
새가 먼저 와주었던 일들
수많은 순간 순간
자유가 몸을 일으켜
바다 쪽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저기 먼 돛단배에게 주었다
돛단배는 가로를 알고 있다는 듯이
언제나 수평선 쪽으로 더 가버리는 것
마음과 몸이 멀어서 하늘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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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송탄 출생.
*평택시립도서관 기간제 근무 중.
■ 2016년 《한국일보》시 당선작
위험수목 / 노국희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잃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 201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봄 / 한상록
보십시오. 내게 빈 하늘을 열어
가벼운 마음 옷차림으로 흙을 밟게 하십시오
어디선가 두엄 지피는 향내 그윽하고
새살 돋는 들풀의 움직임 간지럽지 않습니까
돌아오지 않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꿀벌의 잉잉거림 속에 묻어오고
겨우내 강을 건너지 못했던 나무들의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 실핏줄로 살아나지 않습니까
잃은 것이 있다면 내 뜰로 와서 찾으시지요
이제 내 뜨락에 샘을 내므로
흩어진 목숨붙이들 찾아 모으려 합니다
바람만 드나들던 수족관을 가셔내고 맑은 수면에다
튀어오르는 날빛 지느러미를 풀어놓으면
찰랑거리는 햇빛을 입고 내 생의 물보라 아름다울 겁니다
옥상에 내어걸린 빨래 나날이 눈부시어가고
누군가가 돋움발로 벗어붙힌 몸을 넘겨다 보면
산록의 묵은잠을 흔들어 놓을
아스라한 진달래향 더욱 곱지 않겠습니까
저 만치 다가오는 나무들의 길이 보이고
새순같은 배꼽을 드러낸 개구쟁이 아들놈
동화 속의 악당을 찾아 타앙 탕 말을 달리면
그 길목을 따라 몇굽이의 강이 흘러서
우리의 얼어붙은 꿈도 촉촉이 적셔지지 않겠습니까
■ 201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생일 축하해 / 안지은
걷던 길에서 방향을 조금 틀었을 뿐인데, 신기하지
낯선 골목에 당신의 얼굴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니
네게선 물이 자란다, 언제 내게서 그런 표정을 거둘거니
누군가가 대신 읽어준 편지는 예언서에 가까웠지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의 감정을 선언하니
벽이 조금씩 자라나고, 그 때에
당신은 살아있구나, 눈치 챘지
문장의 바깥에 서서
당신은 긴 시간동안 사람이었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언젠가 손을 맞잡았던 적이 있지, 짧게
우리라고 불릴 시간은 딱 그만큼이어서
나에겐 기도가 세수야
당신을 미워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오래 마주보고 있기엔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
표정은 쉽게 미끄러지고
벽을 등지고 걸으면 내 등이 보이는 오늘
누구랄 것 없이 녹아 흘러내리지만
언제나 당신은 젖지 않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신의 종교가 되길 바랄게
기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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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6일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4학년 재학 중
■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 조상호
입술을 달싹일 때 해안선이 느리게 펼쳐진다 거기 혀가 있다 행려병자의 시체 같은 풀잎처럼 흔들리는 그림자, 달은 빙산이 되어 은빛을 풀어헤친다 물빛을 깨고 비치나무 냄새 번져오는 젖을 희끗희끗 빤다 안개, 서늘한 빗방울, 물방울 띄워올린다 뿌리가 부풀어오른다 물거품처럼
웅웅거리고 부서지고 내장처럼 고요 쏟아져 내리고 내려야 할 역을 잃고 흘러가는 페름 행 전신주 흰 눈송이들 백야의 건반을 치는 사내 -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 길고 가는 손가락 갈라지고 떠도는 핏방울 소용돌이 변두리로 나를 싣고, 창 밖 쁘이찌 야흐 행 마주보며 또 길게 늘어나고 민무늬 토기처럼 얼굴 금이 가고 스쳐가는 가, 가문비나무 그늘 나뭇가지 그림자 일렁이는 시간 산란하는 밤의 시작을 경계를 지나 나는 또 바라보고 있고
마젤란 펭귄들 발자국 소리 울음 아, 미역줄기처럼 늘어지고
움푹 파인 자국, 발자국들, 혀뿌리가 길게 늘어져 꿈틀거린다 하얀 모래밭, 그리고 하얀 추위, 그리고 하얀 포말 기억과 마디가 끊긴 생선뼈와 조개 무덤 사이를 가마우지들 종종 걸어 나오고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 뒤틀린 비치나무 뿌리, 물거품이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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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전북 고창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재학
■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 정선희
공손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향해 규칙적으로 다가갔다
흑백으로 갈라지는 길들이 뒤섞이더니
우리 사이는 점점 간격이 사라졌다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다는 것
그가 먼저 돌을 놓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끝까지 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입 안에선 쉬지 않고
돌들이 달그락거렸다
우리는 마주 보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위험했다
돌을 던지고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체하고 싶었다
길이 팽창하고
수거함엔 깨어진 얼굴이 가득하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한번 시작한 길은 멈출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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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경남 거창 출생
▲ 2011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상
■ 201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티커 / 이명우
대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뜯다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붙는 스티커를 뜯다가
스티커 뜯기를 멈추고 산동네를 떠났다
멈추고 떠날 때는 다 지운 것이어서
지운 것은 없는 것이어서
없는 여기 산동네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 몰랐다
대문을 겹겹이 도배한 스티커 화려하기조차 했다
긁히고 찢긴 조금도 아물지 않는 가업
허파와 심장과 위장이 모두 철대문에 붙어
겨울 냉기를 고스란히 빨고 팽팽해졌다
추락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력서를 쓰고 찢고 쓰고 찢었던 것
부도난 회사의 대표였던 이력은
지급기일을 넘긴 어음처럼 휴지였던 것
부도를 막기 위해 오래전에 빌린 사채가 펄럭이며 휴지를
산동네 꼭대기까지 얼마나 난타해댔던가
골목을 돌며 전봇대 기둥과 자주 부딪친다
골목에는 늘 똑같은 소리로 이자가 와 달라붙는다
눈치 없는 거미줄에 발걸음에 와 걸린다
발이라도 와 걸어주는 이것이 거미줄의 눈치
잠만자는직장여성환영 오십세이상알바모집 선원大모집
배달부즉시출근가능 일수당일대출 신용불량자도대출可
얼어붙은 전봇대를 덮이는 환영, 가능, 대박,
대문에 붙어서 스티커를 뜯어내고 있는 아들이 보인다
컴퓨터 게임 대신 싫증 모르는 스티커 뜯기 놀이
경첩이 떨어지려는 대문을 어서 받쳐보려는데
어제까지 떼어낸 적색 신불자대환영 스티커가
어린 아들의 등에 세습처럼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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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경북 영양 출생. 영양고 졸업.
▲현재 서울에 살며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음.
■ 201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대봉 / 김 이 솝
파르티잔들이
노모의 흐린 눈에 가을을 찔러 넣는다.
턱밑에 은빛 강물을 가두고 은어 떼를 몰고 간다.
쿵! 폭발하는 나무들.
온통 달거리 중인 대봉 밭에
감잎 진다.
며느리가 먹여주고 있는 대봉을
다 핥지 못하고
뚝뚝, 생혈(生血)을 떨구는 어머니.
남편과 아들이 묻힌 지리산 골짜기
유골을 찾을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삽을 놓고 우는 섬진강변.
귀를 묻고 돌아오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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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대전출생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현재 (주)해외인증센터 근무
■ 2016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길 / 문귀숙
허풍빌라에서 내린,
수백억 상속녀가 떨어뜨리고 간
셀 수 없는 동그라미의 말들
깔깔 거리다 휘청거리며 사라졌다
꽃뱀의 뱃속 같은 골목을 후진으로
나오는 오늘 일진은 구부러진 끗발이다
금요일을 발광하는 네온사인을 비켜선
흐린 그림자 하나, 번쩍 손을 들었다
뒷자리에 앉자마자 웅얼거리는 목소리
백미러로 읽어야 하는 목적지가
번져 읽을 수 없다
붉은 신호등 하나를 넘으며 자정의 경계를 넘었다
어떤 넋두리도 용납되는 할증의 시간
갈림길 마다 좌회전을 외치며 더 흐려진 그림자
젖은 넋두리에 수몰된 길을
재탐색하라고 내비*가 얼굴을 붉힌다
붉은 기운이 부족한 사납금만큼 미터를 올리고
대낮처럼 환한 불면의 광장을 지나고
늙은 벚꽃나무가 떨어뜨리는 흐린 시간을
지나 돌고 돌아도 이어지는 길
더 이상 택시로는 갈 수 없는 길
내비가 멈췄다
그림자의 손가락 끝에 만월이 걸렸다.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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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전남 진도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5ㆍ18문학상 동화 당선
▲현재 국립5ㆍ18민주묘지 근무
▲광주시 문화관광해설사
▲일곡시회 동인
■ 201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큐브 / 강기화
면을 돌린다
네 개의 뿔을 가진 성난 눈초리
다가갈 수 없는 모서리
익숙하지 않은 경계
면을 돌린다
반듯하게 줄을 긋는
곧은 대답
전설처럼 등지고 있는 벽
위로받을 수 없는
네모의 의혹은 커지고
수상한 귀퉁이의 각은 증명한다
면을 돌린다
중앙을 공격한다
눈을 뜬다
놀이가 된 도형
일정한 방향으로
서로 맞춘다
다시 면을 돌린다
갇혔다가 풀려나는
매혹을 느끼며
활기차게 뛰어든다
비즈니스센터의
저녁 창문은
퍼즐의 공식
밀폐된 면과 면이
독기를 띠며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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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부산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석사과정 재학 중.
국어·논술 학원 강사
■ 201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맹수 / 정율리
하늘에는 울타리가 없다
이 쪽 저 쪽으로 몰려다니는 철새들
초승달로 기러기 행렬이 지나간다
하늘을 맹수라 불러보다 깜짝 놀란다
이동하는 저 철새들의 몇 마리는
땅으로 혹은 바다위로 곤두박질 칠 거다
초승달이 몇 마리 삼키고
구름이나 혹은 비바람이 또 몇 마리 삼키겠지
기러기들 서둘러 달빛을 벗어나려
한밤의 속도로 튕겨져 나온 행렬
어둠에 묻힌 채 날고 있다
하늘은 야생이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려는 난무(亂舞)의 태생지다
밤낮이 자유롭고 계절도 마음대로 바꾼다
낮과 밤은 서로 피해 다닌다
가끔 날아가는 비행기가 지상으로 떨어지고
하늘을 날아오른 집이며 자동차들이
구겨진 채 떨어진다
빈 껍질만 떨어지는 걸로 보아
저 하늘에 포악한 야생의 무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울타리가 없으니 야생이다
날아가는 것들은 무엇에 쫓긴 듯 서둘러 날아간다
낮과 밤이 맹수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폭식을 하고
낮엔 낮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하고
밤엔 밤에 보이는 것들을 사냥한다
조용한 날들이 없는 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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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고려대사회교육원 시창작반수료,
현 삼정문학관 관장.
■ 201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농림6호 / 김우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볍씨를 담갔다. 바람 한 잎과 구름을 벗겨낸 햇살도 꺾어 넣었다. 봄 논의 개구리 울음도 잡아다 넣었더니 비로소 항아리가 꽉 찼다.
나흘 밤의 고요가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항아리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저 경건한 나흘, 지나가는 빗소리도 발끝을 세우고 갔으며 파란색 바람이 일렁이다 갔으며 또한 파란 별들이 농부의 발목 근처에서 무수히 떴다 갔다.
항아리 속에서 적막의 힘이 차오른다. 씨앗들이 뿜어내는 발아의 열, 항아리가 드디어 익어가기 시작한다. 촉촉이 스며든 물기에 몸을 여는 씨앗들, 부드러워진 껍질을 걷어내며 깊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귀가 열리고 부리가 생겼다. 몸속에 숨겨둔 하얀 발을 내밀었다. 흙이 묻지 않은 순결한 발들, 뿔을 달고 푸른 들판으로 달려가고 싶은,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도란거리는 그들 모습을 보고 나는 씨나락경전을 듣는다.
적막은 발아의 요람
작은 항아리 속에서 거대한 우주가 발아하고 있다.
●‘농림6호’는 1960~1970년대 재배된 볍씨 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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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전남 광양 출생 ▲경기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수주문학상 수상,
▲2008년 전국문화인 창작시 대상 수상
■ 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페가를 어루만지다 / 양진영
허물어지는 것은 새것을 위한 눈부신 산화
나는 철거될 농가의 마룻바닥에 가만 귀 기울인다
그들이 나눈 말이 옹이구멍에서 바스락대고
안 보았어도 떠오르는 정경이 살포시 열린다
문풍지에 꽃핀 청태靑苔는 그들의 회한 혹은 눈물의 자국
뒤틀린 문틀만큼 가족이 부서지는 아픔도 맛보았으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목재에 왜,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노모의 손등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인연의 무결이 배어 있을까
헐리는 것은 거룩하다 그것은 촛농과 마찬가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히고 남은 잔해이므로
뜨락에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날려 금빛 보료를
까는데
새집을 짓는다는 설렘은 어디 가고 나는
누가 잠든 것 같아서
누가 숨어서 부르는 것 같아서 자꾸만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평생 주인을 덥히며 보낸 폐가의 일생은
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그들의 온기를 느낀다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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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광주 출생·한국외국어대학 졸업
●(전) 중앙일보 뉴욕지사 기자
●김만중문학상, 목포문학상, 천강문학상 등 수상
■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 李箱에게 /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 201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타크나 흰 구름 / 이윤정
타크나 흰 구름에는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
배웅이 있고 마중이 있고
웅크린 사람과 가방 든 남자의 기차역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엔 출발보다 도착이, 받침 빠진 말이
받침 없는 말에는 돌아오지 않는 얼굴이 있다가 사라진다
흰 구름에는 뿌리 내리지 못한 것들의
처음과 끝이 연결되어
자정을 향해 흩어지는 구두들
구두를 따라가는 눈 속에는 방이 드러나고
방에는 따뜻한 아랫목, 아랫목에는 아이들 웃음소리
몰래 흘리는 눈물과 뜨거운 맹세가 흐른다
지금 바라보는 저 타크나 흰 구름은 출구와 입구가 함께 있다
모자 쓴 노인과 의자를 잠재우는 형광등 불빛
그 아래 휴지통에 날짜 지난 기차표가 버려져 있다
내일로 가는 우리들 그리움도 잠 못 들어
나무와 새소리, 새벽의 눈부신 햇살이 반짝이고
어제의 너와 내일의 내가 손을 잡고 있다
새로운 출발이 나의 타크나에서 돌아오고 있다
우린 흘러간 다음에 서로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라서
지우지 않아도 지워지는 얼굴로
지워져도 서로 알아보는 눈으로
뭉치고 흩어지고 떠돌다 그렇게 너의 일기에서 다시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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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구 출생 ▲한양대학교 행정자치대학원 수료
▲커리어 컨설턴트
■ 2016년 한경청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서하
므두셀라 / 이서하
납작한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가락들
그 손가락들은 내 안에 들어온 적이 있다
내게 주먹을 쥔 적이 잇다
배가 부은 날엔 혼자 병원에 갓다
두 개의 주머니가 팽창하는 중이다
주머니 속 먼지를 작게 쪼개면
더 작아져 날아가는 티끌처럼
수십 억 년을 떠돈 므두셀라처럼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욥기 29;18)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어
두 개의 주머니를 오렸다
피 묻은 봉투 속에서도 나는 편안하다
좋은 것만 기억하라는 그의 말이 잠속까지 따라온다
나를 작게 쪼개면 더 작게 쪼개지는
내 아이들
혼자 떠도는 행성이 있다
그 행성의 이름은 므두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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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경기 양주 출생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16년 전북도민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해(花蟹) / 하송
냄비뚜껑을 열자 꽃처럼 붉은 꽃게가
철갑을 하고 있다
건들기만 하면 잘라버리겠다는 듯
엄지발을 치켜든다
뭉툭한 가위로 발을 절단하자
소리를 지르는 것은 꽃게가 아니라
가위였다
골수가 울컥 쏟아지자
바다는 잠잠했다
사는 일은 파도가 잠자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것
꽃게, 파도가 거칠수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등딱지에 힘을 준다
한 평생 꽃처럼 배를 보이지 않는 것이 꽃게다
섬 하나가 안테나를 세우고
육지로 나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닷바람에 허리가 꼿꼿하다
바다를 버린 꽃게, 절대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화해花蟹 : 꽃게
■ 2016년 제22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정자나무를 품다 / 염병기
내 고향
동구 밖
수백 살 나이에 지난 세월 움켜쥔 늙은 정자나무는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다
고향 길에
어김없이 지나야 하는 그 곳은
돌담 길에 호박 엮이듯
어릴 적 추억들도 걸려 있다
옹기종기 모여 동네의 쉼터로
부초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야기
풍문으로 떠돌던 이끼 낀 세월의 얘기도 묻혀 있고
저마다 자신만의 사연으로 바라본다
만만치 않은 세상, 삶이 고달플 때
의연함으로 시절을 버틴 정자나무는
살아온 날에 대한 다독임
살아갈 날에 대한 묵묵함으로 속마음을 대신한다
한 움큼씩 안고 사는 시린 사연도
송두리째 흔들렸던 삶의 모습에도
지나온 세파에 견딘 세월의 약(藥)으로
그 앞에서면 살포시 봄눈 녹듯 치유가 된다
고향 정자나무에서 느끼는 바람결
한 자락 쓸어 담아 가슴에 품는다
말 없는 살랑거림은 존재 의미를 더 하고
굳건함은 의지에 다시 일어나 시작할 마음을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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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경남 거창 출생.
● 서울 광운대 산업정보대학원(무역학) 중퇴
● (주)신한개발S&D 대표이사, 중국 신한그룹 총 경리 역임
● 현 (주)유림기업 전무이사, ㈜핑거팁스 대표/컨설팅
■ 2016년, 제11회 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솟대 / 유택상
들판은 왜 저리 푸른가
아버지는 늙어서도 솟대이다
들판을 한 평생 지키시다 한 마리 새가 되었다
지적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땅을 지키기 위해
비를 맞고 눈을 맞고
가난한 살림에 몸피가 말라 있었다
자갈밭을 논으로 만든 옹이는
힘겹게 일궈 온 들판들 언제쯤 아버지 가는 주름살의
내력을 읽어 낼 수 있을까,
이것만은 지켜야 자식들 산목숨 이어줄 수 있다고 콜록콜록 막걸리 한 사발
가득 마시던 순간, 야윈 갈비뼈 사이에 깊이 앓았던 병이 도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들판에서 자꾸 흔들렸다
빛보다 어둠이 두려웠던 나는 들판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깃털을 뽑아 내 몸을 덮었다
겨울 동면에도 흘러 들어온 견딜 수 없는 추위 때문에
조금씩 아버지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한 평생 내내 몸이 젖은 들판은 살과 뼈로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아버지의 몸이 된 들판은
새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바람 찬 방안에서 비가 새는 걸 막으려고
밤새 솟대가 된 몸
밥그릇에 메아리치는 뜨거운 목숨의 노래
수풀 사이 땅바닥에 낙석처럼 버려진 삽 한 자루
아버지의 몸이다
■ 2016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 지연
무덤 자리에 기둥을 세운 집이라 했다
비가 오고 이팝꽃이 떨어지고 진흙이 흘러내리고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으므로
무너진 방을 가로질러 뒤안으로 갔다
항아리 하나가 떠난 자들의 공명통이 되어 여울을 만들고 있었다
관 자리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던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한때 그들은 지붕을 얹어준 죽은 자를 위해
피붙이 제삿날에 밥 한 그릇 항아리 위에 올려놓았을 것도 같고
그 밥 그릇 위에 달빛 한 송이 앉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항아리 혼자 구멍 뚫려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만큼
물을 조용히 흘러 보내고 있었다
산자와 죽은 자의 눈물이
하나가 되어 떠나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이 세상에 무덤 아닌 곳 없고
집 아닌 곳 없을지도
항아리 눈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이팝꽃이 내 어깨에 한 송이 툭 떨어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 후두둑 그 집을 뛰쳐나갔다
비가 오는 날 내 방에 누우면
집이기도 하고
무덤이기도 해서
내 마음은 빈집
항아리 위에 정한수를 올려놓는다
■ 2016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맹목 / 김종화
너의 서식지는 날짜 변경선이 지나는 곳, 어제와 오늘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가방 속에 접어 넣은 지도의 모서리가 닳아서 어떤 도시는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오늘의 해가 다시 오늘의 해로 떠오를 적도 부근에 숙소를 정한다 날개를 수선할 때는 길고양이의 방문을 정중히 거절해야 한다 난 철새도 아니고 지금은 사냥철도 아니니까 너에게 이미 할퀸 부분을 다시 또 할퀴는 일 따윈 없어야 하니까
기착지를 뒤적이다 마지막 편지를 쓴다 마지막이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쓴다 나를 전혀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는 너에게
삼일 전에 보낸 안부가 어제 도착한다 너는 나를 뜯지 않는다 흔한 통보도 없이 너는 멀어졌고 난 네가 떠난 지점으로부터 무작정 흘러왔다 너의 안부는 고체처럼 딱딱하고 나의 안부는 젤리처럼 물컹하다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기미조차 미약하여 난 비행(非行)이 너무나 쉽다
싸구려 여관방에서 보이는 야경이 주르륵 주르륵 흘러내린다 오늘도 나의 다짐은 추락하지 않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나의 착란은 뼈마저 버린다 너는 결코 이방(異邦)이 아니다 태초부터 회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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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시학」회 회원
부평구정신문 「부평사람들」 취재 기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재학중
■ 2015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은자, 5편) (2015년 3월)
● 둥근 잎꿩의 비름* / 김은자
움켜잡은 손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창칼에 쫓겨 낭떠러지에 몸을 던진 여자 죽은 뿌리에 걸려 바위틈 몇 알의 흙을 부여잡은 여자 수직으로 날이 선 채 과부처럼 살아온 여자의 살결에서 살의가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실족이라 했지만 엄연한 개화였다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산 맨발을 보아라 흙을 딛지 못하면 살 수 없어 비탈에 집을 지었다 얼마나 많은 바람을 끌어안아야 했을까? 꽃잎이 어긋나 있는 것을 보니 수천 번 엇갈린 것이 분명하다 계곡의 습기를 모아 터지는 눈망울 마주나거나 돌려 난 녹백색 잎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난다 산비탈 아래 마을의 반짝이는 불빛이 진홍색 눈물처럼 짙다 아찔하면서도 고혹적인 자태 절벽 위를 날던 새가 둥근 저녁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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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비탈 바위틈에서 자라는 돌나물과에 속한 여러 해 살이 풀의 이름
● 폐염전 / 김은자
무너진 서른세 번째 소금창고가 그녀였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모른다
무거운 도시를 이고 풀썩 주저앉은
케케묵은 소금집이 애를 순산하고도 버림받은
소래 여인이었다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풍경을 위해 이목구비를 지운 여자
풀숲으로 돌아가는 저녁이면
머리 위로 흰뺨검둥오리 날아오른다
바람만은 지우지 못하고 떠난 그녀,
번제를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었으리라
쓰러진 소금창고 정지된 시간 위에
여체는 광물처럼 누워있다
촛농처럼 녹아내린 발가락들이 바다로 쓸려갈 때마다
염전이었던 방은 파도소리를 토해 놓는다
축적된 것들이 소금처럼 고요한데
시체 한 구가 민물에 밀려갔다 밀려온다
습지의 갈대들은 느리게 돌아가는
무성필름처럼 동작과 대사가 맞지 않는다
과거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염부들이 팔뚝에 불뚝 솟은 힘줄 같은 전설을
말없이 바닷물에 밀어 넣는 밤
백야(白夜)다,
스러진 것들이 경계를 허물며 갈대숲을 피워 올리는 하얀 밤
소금창고 지붕이 바람에 휘날린다
오래 잊고 살았다
소금창고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를
비무장지대처럼 살다 바람이 된 갯골 여자를
● 화장 / 김은자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죽을힘을 다해 엄마를 불렀다
안 보이는 영토가 썰물처럼 밀려들어 갔다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천착되어가는 시간의 무늬들이
탯줄이 끊긴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오열했다
엄마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 편히 쉬세요’
엄마는 평소 화장을 지우던 저녁처럼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을 지우러 가는 거란다’
무거운 옷을 벗고 속뼈까지 태워달라는 엄마
흐린 날이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가는
갈매기 눈썹 그려 넣었던 시절이 엄마에게도 있었다
슬픔과 웃음을 섞어 견고한 입술을 찍으며 살았던 시간
엄마의 귀는 접혔다가 펴지는 우산 같아
토란잎처럼 젖지 않았다
엄마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받아 쥐고 알았다
한 움큼의 웃음, 한 움큼의 울음, 한 움큼의 엄마
자리를 비운 사이 창 밖에는 겨울이 오고 있지만
하얀 맨발 엄마가 지금도 따스하다
● 버려진 집 / 김은자
버려진 것들은 구멍으로 살신하는 근성이 있다
구멍은 퇴화되어 바람으로 부활하는 마력이 있다
남겨진 것들은 모두 저 혼자 쓰러진 것들
혼자 우는 사이 구멍이 되고,
구멍이 통로가 되어 문으로 변한 것들이다
빈 창살이 바람과 몸을 섞어 부재가 되었다
행간마다 숨결을 놓지 않은 까닭이다
고독이 짐승처럼 뛰쳐나와 깨진 창문
버림받은 것들은 안으로 소리를 품고 있다
기울어진 빛들이 벽으로 위태롭게 쏟아진다
방목된 것들이 기원 속으로 스며드는 저녁
빛바랜 페인트가 몸을 추스르고 앉은 노파의 등처럼
허물어진 지붕 위로 쿨럭 쿨럭 마른기침이 새어나가고
침묵하던 것들이 흐르기 시작한다
떠돌던 새가 돌아올 징조다
이제 바람 소리를 기록하던 것들이 귀화하리라
마른 골격위에 별들이 휘추리처럼 매달려 있다
바람은 길게 누운 몇 세기전의 계절을 접신한다
방울을 세게 흔들며 버려진 자가 버린 자를 부르는 밤
한 뼘 열린 뒷문으로 스무 평 남짓 전답이 바다 같다
● 동태 / 김은자
동태가 생태보다 무서운 것은
토막 난 몸으로도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문객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후의 눈
내 살 누가 파먹나 사력을 다해 노려본다는 것이다
핏발이 선 눈빛에 말없이 수저를 놓는다
용서 같기도 하고 포기 같기도 한 눈빛이
내공처럼 탱탱한 울음을 채워 넣고 있다
흐릿한 기억으로 생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꽝꽝 얼도록 시력은 흔들리지 않는다
살이 달콤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진다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누가 비웃었던가?
동태 눈깔 파먹는 재미 쏠쏠하다고 입을 모으는 저녁
시선은 골격을 허물지 않는다
남은 한 점의 살점까지 지켜본 뒤 버려지리라
지느러미 불태우고 내장이 뿌려지도록
마르지 않는 눈길이여
동태가 보고 있는 것은 허공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쏘아보는 냉혈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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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서울출생
△숙명여대 졸업
△《시문학》 등단.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재외동포문학상(시) 대상, 윤동주해외동포문학상, 미주동포문학상,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뉴욕 라디오코리아(AM 1660) 방송인상, 환태평양영화제 최우수 시나리오상 수상.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당선
△(전)KCBN(미주기독교 방송) 아나운서
△(현)뉴욕일보 시칼럼 《시와 인생》 연재
△(현)뉴욕 라디오코리아(AM 1660) 방송 프로그램 고정출연
△(현)「붉은 작업실」 문학교실 운영
△시집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 『청춘, 그 포스트 모더니즘』(시선집)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 온다』
△수필집 『혼자 닦는 별』, 『이상한 유추』
■ 2016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양을 찾아서 / 구녹원
마침내 양은 사라졌다
한 의식을 잃고서 나는 은주발에 담긴 눈*이 되고 싶었다
갈피가 다 바랜 경전 속에 없던 신이
밑창 닳아 낮아진 가죽신 아래에서 흘렀다
눈 내리는 게르 뒤란에서 그 의식은 치루어졌지
양 한 마리는 선택되었고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걸음걸이
죽음으로 걸어갈 때 누구라도 하늘을 보고 땅을 볼 것이다
단도가 양의 숨길을 통과하는 직전 그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워지고
목자牧者 는 숨 털 한 올을 뽑아 속주머니에 소중히 간직한다
산자에게 건너간 울음소리, 가슴에서 질척이고
가장 조용히 자기를 버려 안식을 얻는 양의 침묵을 본다
양떼구름이 언덕으로 무리 지어 지나갈 때
두루마리 편지처럼 자꾸 도사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초원을 한 뼘 더 자라게 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펼친다
만나고 싶은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침상 캐시미어에 머리를 파묻고 싶었다
천년을 흐르는 구름도 있었다
양은 어디에 있을까
*벽암록 제 13 칙 파릉(巴陵) 은완리성설(銀椀裏盛雪)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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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목포 生
△경기대 예술대학원 독서지도과 재학
■ 201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팥죽 / 이은주
매월 달의 소유 기간은 멀면서 가깝다
쟁반에 빚어놓은 옹심이
달이 되려면 뜨거운 솥 안에서 익어야 한다
반은 떠있고 반은 잠긴 달들
팥물을 빨아들여서 잔뜩 부풀어 있다
오늘 뜬 달엔 팥죽이 묻어 있다
붉은 저녁이 걸쭉하게 담긴 그릇마다
몇 개의 잘 익은 달이 떠있다
그릇마다 달빛이 새어 나온다
그릇 하나를 밝히는 달빛,
하마터면 달빛을 엎지를 뻔 했다
예전에는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많이 떴었다
죽보다 달을 먼저 뜨셨다
만월이 씹히지도 않고 몰락한다
달이 하나 씩 줄어 들 때 마다 어두워졌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죽 그릇에 달이 그대로 떠있다
어디로 가는 길을 비추려고
죽 그릇에 달 하나를 남겨 두었을까
달 하나를 남기는 식량
누군가에게는 달이 되고 부적이 되는 애기동지
보름으로 갈수록 살이 오른다
동짓날 밤 수십 년째 비어있는 어머니의 밤을 열어 보면
그릇하나를 밝히는 얼음으로 빚은 달이 무수히 떠있다
해마다 오는 긴 밤을 비춰줄 달을 꺼내 놓으시는 걸까
그런 밤이어서 달이 익어 가는 걸까
저 달이 잘 익으면 드시기 좋겠다
청상은 불구의 밤을 부적으로 쓰는 달
저 달들을 골목마다 내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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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강원도 홍천 출생 ▷인천 거주 ▷'시아카데미 시회'동인
■ 2016년 《경남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앵두나무 상영관 / 진혜진
신호등은 봄을 켠다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그루
이 도시에 앵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은 길목마다 앵두나무를 심었다
우듬지에 앵두가 켜지는 순간, 몇 갈래의 속도가 생긴다
몇 분 간격으로 익어 터지는 앵두
비와 졸음 사이에 짓무른 앵두
붉은 앵두는 금지된 몸에서만 터져 나온다
한 쪽 눈을 질끈 감는 사이
길바닥에 누운 흰 사다리를 오른다
아이가 손을 들고 소나기 그친 사이를 뛰어간다
할머니는 한 칸 한 칸 신호음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람들이 마중과 배웅으로
사다리를 건너면 앵두의 색깔이 바뀐다
빨강을 물고 순식간에 달려가는 계절이 다른 계절의 입술에 물리듯
앵두나무 뿌리는 발설되지 않은 소문까지 뻗어있다
앵두가 지고나면 초록 이파리
여름 정원에 비비새 울음으로 남아
그 울음 끝으로 떨어질 이파리로 남아
세를 불리는 앵두나무
공중으로 발을 들어 올린다
언제라도 짧은 치마를 입듯 가벼운 신호음
떠나갈 사람과 돌아올 사람의 안부가 위태로워
처음 같은 얼굴로
막을 내리지 못하는 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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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함안 출생.
*마산대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 과정.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
■ 2016년 《영남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로수 마네킹 / 강서연
란제리도 망사스타킹도 액세서리도
색 바랜 바바리코트도 한데 뒤엉켜있던 가판대
가을 정기세일을 마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마네킹들이 서 있다
가로등 불빛이 훤하게 조명을 비추는 쇼윈도
은행나무의 옹이가 생식기처럼 열려 있다
저 깊은 생산의 늪에 슬그머니 발을 넣어보는 저녁
어둠이 황급히 제 몸을 재단해 커튼을 친다
첫눈이 내린다
칼바람을 따라가며 천을 박는 발자국들
재봉틀 소리에 맞춰 나무의 몸속에서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길도 불빛도 사람들도
왕십리 돼지껍데기집 화덕 위에 불판으로 모여든다
올해의 유행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패션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새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오래 서 있어서 아픈 플라타너스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는 홑겹의 흰 눈발
■ 2016년' 제9회 《웹진 시인광장》선정 올해의 좋은 시' 賞 수상시
눈썹이라는 가장자리 / 김중일
눈동자는 일년간 내린 눈물에 다 잠겼지만,
눈썹은 여전히 성긴 이엉처럼 눈동자 위에 얹혀 있다.
집 너머의 모래 너머의 파도 너머의 뒤집힌 봄.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바람의 눈썹이다.
바람은 지구의 눈썹이다.
못 잊을 기억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까지 다 밀려온다.
계속 밀려온다. 쉼 없이 밀려온다. 얼굴 위로 밀려온다.
눈썹은 감정의 너울이 가 닿을 수 있는 끝.
일렁이는 눈썹은 표정의 끝으로 밀려간다.
눈썹은 몸의 가장자리다.
매 순간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울음이
울컥 모두 눈썹으로 밀려간다.
눈썹을 가리는 밤. 세상에 비도 오는데,
눈썹도 없는 생물들을 생각하는 밤.
얼마나 뜬 눈으로 있으면
눈썹이 다 지워지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밤.
온몸에 주운 눈썹을 매단 편백나무가 바람을 뒤흔든다.
나무에 기대 앉아 다 같이 뜬 눈으로 눈썹을 만지는 시간이다.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의 털과 다르게
눈썹은 몸의 가장자리인 얼굴에,
얼굴의 변두리에 난다.
눈썹은 사계절 모두의 얼굴에 떠 있는 구름이다.
작은 영혼의 구름이다.
비구름처럼 낀 눈썹 아래,
새까만 비웅덩이처럼 고인 눈동자 속에,
고인의 눈동자로부터 되돌아 나가는 길은 이미 다 잠겼다.
저기 저 멀리 고인의 눈썹이 누가 훅 분 홀씨처럼
바람타고 날아가는 게 보이는가?
심해어처럼 더 깊은 해저로 잠수해 들어가는 게 보이는가?
미안하다. 안되겠다.
먼 길 간 눈썹을 다시 붙들어 올 수 없다.
얼굴로 다시 데려와 앉힐 수 없다.
짝 잃은 눈썹 한 짝처럼 방 가장자리에 모로 누워
뒤척이는 사람. 방 한가운데가 미망의 동공처럼 검고 깊다.
눈물이 다 떨어지고 나자 눈썹이 한올 한올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가장자리에는 누가 심은 편백나무가 한 그루.
그 위에 앉아 가만히 눈시울을 핥는 별이 한 마리.
■ 2016년, 제5회 《웹진 시인광장》 新人賞 公募 당선시 (2명)
호모루덴스 / 배익화
나는 질병의 문학도, 담배 한개비에 몽환적 유희를 낳고
사물과 풍경과 침잠하는 사유는 황량한 도로를 질주하는
헤드라이트의 교차로, 사막을 유영하는 건조한 유목의 언어들,
이내 쓰디 쓴 커피향과 함께 도로를 질주하며
밤마다 찾아드는 불면의 언어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처절한 사투에서 한 마리 거대한 허무주의만 낚고
세속의 사태를 교살하고 있다
거대한 물고기는 은밀한 배교자, 어둠 속에서 피는 나태의 천일야화,
퇴락을 반복하는 영겁회귀의 데카당스,
질병의 문학도가 거처할 곳은 문학을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영혼을 버리고 악마와 교신하는 타락한 천사의 미로, 미지를 순례하는
어둠을 낳은 빛의 그림자, 그림자의 그림자, 생멸하는 의식 속을
무한분열하는 회색의 언어들,
커피와 끽연과 일탈과 통정하는 언어의 식민주의, 돌아서면 초라한
침묵만이 고통스럽게 반겨주는 불온한 악마,
무표정 / 배익화
온종일 낡은 지폐처럼 떠돌던 오후,
다가오는 낯선 남자와 여자와
추억이 황량하여 쓸쓸한 하루는
묘비처럼 서 있다
아파트 17층 여자는
무료한 시선으로 베란다에서
이불을 늘고 있고
놀이터에는 집을 나간 고양이들이
텅 빈 쓰레기통을 뒤지는 저녁,
실내에는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과 먼지,
건조한 공기와 차와 찻잔이 놓여 있고
황사가 부는 날이면 집집마다
굳게 닫혀 있는 문들은 침묵을 지키며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인사도 없는
도시의 여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달마다 우편함에 꽃혀있는
관리비 고지서를 들고 오던 날,
생의 달콤한 것들의 외출로
쓸쓸한 노래도 없이 무표정한 하루가
고장난 시계처럼 흐르고 있다
지구별 여행자* / 배익화
1. 상실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거품을 사랑한다
그들의 창고엔 끊임없는 식욕을 가진 황금식탁이 있고
폐수를 배설하는 도시의 수족관에는 화석연료를 소비하는
검은 물고기들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결핍의 계절이 돌아오면 집을 버리는 족속들,
거품이 자라는 곳에 페허가 자란다
낙타도 없이 사 막을 여행하는
도시의 여행자가 몸살을 앓는다
2. 외로운 밤에 별이 뜨면 달과 구름과 바람을 부르는
초원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포도나무 덩쿨에서 밀주를 담고
지구의 종말을 예언하는 사과나무를 심는다
정원에는 달빛이 떨어지는 우물에서
꿈을 길어 올리는 목동들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순한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사막의 낙타와 함께 먼 여을 준비한다
3. 수채화같은 그녀가 걸어 오고 있었다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그녀가
갈길을 재촉하고 바다로 바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물새도 없는 바다,
황량한 겨울의 백사장 구석에서
화토장 하나가 뒹굴고
우리의 오늘은 밤을 만나러
이름도 모르는 도시의 새들을 만나러
맥주와 시와 음악이 있는 도시로
몰려가고 있었다
날개 꺽인 새들은
주섬주섬 자신이 주워 온 먹이를 내 놓고는
제가 머물던 둥지로 돌아가기 위해
이별을 고하고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이국의 향기에 취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지구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더운 내 손의 감촉이 전해지면서
먼 옛날 동화에 나오는 님프처럼
우리의 가슴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 류시화 시인의 여행기 '지구별 여행자'에서 인용
뜬구름 / 배익화
작은 마을에 뜬구름이 나타나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산 속의 노승이 도술을 부리는 구름이라는 말도 있고
미국에서 보낸 위성구름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어느 유명한 족집게 무당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뭉게구름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뜬구름은 뉴스특보에 나오기 시작했고
먹구름으로 변해 천둥 번개를 동반한 사나운 폭우로 변할 수도 있으니
외출할 때는 단단히 준비하고 주의를 할 것을 국민들에게 알렸습니다.
뜬구름을 배경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가 제작되었습니다.
가수들은 뜬구름을 노래하고
기자들은 뜬구름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였습니다.
뜬구름이 나타나면 나타났다고 야단법석이고
뜬구름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촛불시위가 일어난 것도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것도
뜬구름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습니다.
그 때마다 주가는 폭락하였고
주식시장에는 뜬구름 장세가 형성되었습니다.
경제가 불안해지자 뜬구름을 잡기 위해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습니다.
작은 마을에 경찰 병력을 주둔시켰고
군 부대에서는 헬기를 동원하였습니다.
CNN 뉴스에서는 요코스카 항에 정박하고 있는
미 7 함대가 뜬구름 쪽으로 항로를 변경하였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뜬구름이 잡히지 않자
미모의 여배우를 동원하여
미인계를 써보자는 작전도 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뜬구름이 전 국민이 보고 있는 뉴스에서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뜬구름은 뜬구름일 뿐입니다."
푸념 / 배익화
나의 하루는 그러하다.
찬밥 한그릇과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책갈피 하나,
가난과 쓸쓸함이 낡은 악기처럼 궁상을 떨고 있는 하루는
휑한 바람이 불면 집을 나간 거리의 고아가
동네의 놀이터에 있는 빈 쓰레기통을 뒤지는 무료한 거리,
그 거리를 활보하는 아이들과 동네 아주머니들 몇몇이
조그만 햇살을 쬐는 놀이터의 평상에 앉아
군것질을 하는 풍경이 내가 가진 잡화들이다.
빈처가 밤 늦은 때에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면
빈처의 바가지가 낡은 음악처럼 변주된다.
바가지에는 10년 전에 먹다 남은 쉰밥이 소란을 피우는데
새는 바가지의 쉰밥을 먹다가 체하는 날이면 왠지 울컥해진다.
가난과 쓸쓸함, 어딘지 모르는 외로움까지 내 위장속에서
스멀 스멀 기어나와 폭발을 하는 것이다.
이럴때면 죽고싶어진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까닭모를 존재의 이유를 물으면서
밤 하늘의 별을 안고 있는 그대의 눈부신 사랑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흘러간 옛노래처럼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
당신과 나의 그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가난한 망루에 피어난 지란의 애틋한 노래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오늘같이 방구석에 뒹구는 휴지처럼,
가망없는 가난한 시인의 하루처럼,
NGC 5252* / 임태경
왼쪽으로 기울기 위해서는 3억 광년의 날갯짓이 필요해.
누워 천장을 보네. 지구가 과언으로 매달려 있는데,
매일 뒤채던 밤은 서로 친친 감고 있는 어둠 이후의
지구 혹은 지구 이후의 어둠을 보여주었으므로,
나는 알게 되었네.
우수수 질문하는 지구가 지나가고,
그 뒤를 침묵하는 어둠이 지나가네.
정해진 호흡과 냄새를 따라가는 개미들처럼,
하얀 손으로 눈을 감싼 채 당신이 지나갈 때
나는 알아차렸네.
수없이 번개처럼 스치던 히치하이커들이 버려진 광주리처럼,
모래시계의 떨어지는 모래처럼,
미스테리하게 실종되고 있다는 것을.
끓어 넘치는 마음의 흰 쌀죽을 흘리며 하하 웃으면,
수없이 부딪친 지난밤이 단단한 경계를 벗어나고,
우리의 마음은 조용히 일치되고 만다는 것을.
더는 철없는 명분으로 홀연히 머무를 수 없네.
이제는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네.
친친 감긴 채 천장에 매달려 이제는 눈도 없어지고,
귀도 없어진 어둠에서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날갯짓으로
3억 광년이나 멀어졌네.
하지만 우리는 잊은 것을 잊고 지금도 동행 중인지
무섭게 수수께끼를 푸네.
담벼락에서 처진 별들이 왼쪽으로 기울어
호젓이 빛나고 있네.
* 지구에서 3억 광년 떨어져 있는 처녀자리 블랙홀.
커리큘럼 / 임태경
젖은 눈곱을 떼어내며 하늘을 본다.
무서우리만치 타는 해를 물고 날던 까마귀가
연못 속으로 해를 던져 놓자,
연못이 크게 놀라 해를 받아내지 못하고 토해버린다.
연꽃들이 부르르 타오른다.
느릿하게 지나가는 여름,
송골송골 올라오는 땀을 닦으며
몇 년 혹은 몇 십 년 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나열해 본다.
결코 뜨겁지 않았지만 뜨겁던 시간
애초에 추억이 없었던 누추한 공간
아직 하지 않은 말처럼 떠벌려진 사람
오뉴월 햇볕의 목마름이 날카롭다.
적막이 쩍- 다 익은 수박처럼 급하게 갈라진다.
잃어버린 것들의 일정한 차이를 맞추는 데 필요한 울음이
희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유목민으로 산다는 건 반쪽으로도 살 수 있다는 것.
잃어버린 것들이 울며 연못 속으로 사라진다.
죽음 같던 잉어들이 날름 받아먹는다.
저 아귀 같은 입을 쩍 벌려서
농밀한 물을 아가미로 흘려보낸다.
의문을 가져볼 즈음,
페스트 같은 천둥이 쳤다.
급격히 팽창된 몇 만゚c의 공기 속에서
정확히 5초 뒤에 반쪽자리 사랑을 떼어내듯
젖은 눈곱을 떼어내며 하늘을 본다.
마냥 공허하던 연꽃이 비로소
달처럼 아련해진다.
몸의 기원 / 임태경
비 개인 오후 5시,
딱딱해진 것을 가져본 적 없는 지렁이가 납작하게 죽어 있다.
내가 밟아 죽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옹송그리며 지렁이의 몸에 새카맣게 들러붙은 똥파리들!
잘 차려진 식사 중이다.
태(胎)처럼 맨몸뚱이였던 내부로부터 뜨겁게 터져 나온 얼룩이
앞뒤를 찾던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는 걸 똥파리들은 알까?
저 죽음과 같은 공간에 있는
비에 젖은 흙냄새가 내 폐를 최대한 부풀린다.
흙이 묻어 지저분한 무거운 신발로 채 마르지 않은
가벼운 지렁이의 죽음을 구석으로 밀어준다.
살았던 침묵을 다시 한 번 느껴보라고,
앞뒤 없던 생은 짐이었으므로.
내가 일찍이 보았던 침묵의 텅 빈 시간같은
마른 낙엽들을 잘 비벼서 덮어 준다.
비 개인 오후,
먼 곳에서 속뜻도 모르는 풋살구 냄새가 날 것도 같아,
가벼움은 늘 무거움 뒤에 온다.
직관적 간증 / 임태경
매일밤 이웃한 십자가가 붉게 켜지면
내 방은 카바레로 변해요.
나 혼자 지르박을 추는 밤,
미쳤다고 하겠지만 선악은 백지장 같은 무게로
한 데 뭉쳐 싸우고 있는 걸요.
어차피 불가능한 간증이지만
마음에서 마음을 찾는 밤이면,
결국 간증은 빨갛게 부끄러워하며 뱅글뱅글 돌아요.
터미널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우리의 오늘은
바쁘지 않은 재촉을 서두르며 어색한 눈인사로 끝났네요.
무언가 말하려던 당신의 입술이 자꾸만 떠올라 오는 내내
조금은 설레었던 것도 같아요.
오늘밤도 내 방에서 아무도 듣지 않은 간증을 끝내고
지르박이나 추어야겠어요.
갱년기같이 깊어가는 열대야의 밤,
고장 난 에어컨의 리모컨을 한없이 눌러보며,
아직은 몇 십 년 더 돌 수 있음을 알았네요.
먼 데서 폭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밤하늘 먹구름이 몰고 오네요.
삽화 / 임태경
하늘에 빈자리가 생겼다. 그 후
구름과 바람과 비와 번개와 별과 달과 해와 같이 살던 새 한 마리가 없다.
하나의 공백은 그렇게 있다.
가끔은 땅에 있다 오기도 했기 때문에 잠들기 전엔 없으리라 믿었다.
흰 눈 가득한 겨울이었고
별을 닮은 눈을 한 새는 발끝으로 맞닥뜨린 물고기들을 잡아 올리곤 했다.
바람을 닮은 날개로 새는 마치 어제처럼 오래된 길로 돌아올 것 같다.
새는 버릇처럼 하늘에 한 점을 찍고 날아갔을 뿐인데 점점 새의 빈자리는
태양처럼 동그랗고 붉게 커져있다.
뻔히 저기 있는 걸 알았으나 아득하게 사라진 새들은
없는 날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날카로운 얼음에 발이 베일 때면
밤이면 밤마다 내게 없는 나를 안고 자고
새벽을 시작할 때도 내게 없는 나를 안고 일어났다.
그때마다 새들은 더 몰래 날아올라 돌아오지 않을 궁리를 했다.
저 공백은 신보다 더 오래되어 가고 있다.
겨울에 있는 모든 빈자리는 어디에 새겨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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