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선의 하나님
―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
주재용
I. 서 론 : 문제의 소재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주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표준 새번역, 렘 12:1)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기했던 가장 어려웠던 문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들에게만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 때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악인이 선한 사람보다도 더 성공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악과 선'의 판단 표준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고, 무엇이 과연 '성공'이냐는 문제가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악이 선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회인 것이다. 정치계, 경제계, 문화·예술계, 교육계, 법조계, 심지어는 종교계까지도 악이 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배신자가 득세하는 사회이다. 얼마나 잘 배신하느냐가 그의 정치적 능력의 판단표준이 되기도 한다. 법을 어겨야 잘 사는 사회,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악과 선의 하나님' 문제는 심각하게 대두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것은 고난의 시대상황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IMF 시대에서 성실한 사업가가 망해야 하고, 정직하게 일하던 노동자가 실직을 하여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의 한계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 "왜 선한 사람이 억울하게 당해야 합니까?"
악의 사실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요 이의제기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취급하는 신학을 '신정론'(theodicy)이라 한다. 신정론(神正論)은 희랍어에서 신을 가리키는 '데오스'(theos)란 말과 '정의'를 가리키는 '디케'(dike)란 말의 합성에서 온 것이다. 그 의미는 정의로운 하나님과 악의 존재에 관한 것을 뜻한다. 즉 이 세상에 악의 존재가 선과 능력에 있어서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와 조화되고 화해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 그의 무한한 능력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악의 현존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역사와 인간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존재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는 악이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그 세력을 가시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완전히 선하다면 그는 모든 악을 없애기를 원해야 하고,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는 또한 모두 악을 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악은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지 않든가 전능하지 않아야 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였다(요일 4:6).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셔야 한다. 그런데 악은 언제나 있어 왔고 인간은 이 악 때문에 온갖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 그의 사랑, 그의 의에 대해서 회의적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 그의 선하심, 그의 의로우심, 그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이와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불가지론을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악과 선의 하나님 문제를 극복하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 문제를 가지고 교회 역사에서 가장 심각하게 논의를 한 사람 중의 하나가 어거스틴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거스틴을 중심하고 악과 선의 하나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II. 어거스틴의 배경과 사상 일반
어거스틴이 서방신학에 끼친 영향은 오리겐이 동방의 신학에 끼친 영향보다 크다. 니브는 "어거스틴은 실로 서구신학의 아버지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많은 특징들은 그의 신학에 나타난 개념, 원리, 암시 등에서 그 기원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곤잘레스도 "그는 고대 교부들의 맨 마지막이며, 동시에 중세신학의 선구자이다. 고대신학의 주류가 어거스틴에게서 합류되었다가, 그에게서 중세 스콜라주의의 강물 뿐만 아니라 16세기 개신교 신학의 강물까지 도도하게 흘러내려온다"라고 어거스틴의 중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어거스틴이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기독교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 때 수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카르타고(Carthago)로 갔으며, 여기서 한 여인과 동거하는 등 무질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들까지 얻었으나, 수사학 공부도 열심히 한 것 같다. 이 때 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연구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한 교훈이 담긴 것으로 [호르텐시우스]라고 한다.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나의 애정의 대상을 바꾸어 놓았으며, 나의 기도를 주님께로 향하게 해서, 오 주여, 나에게 새로운 희망과 욕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했다. 헛된 희망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제대로 보게 했으며, 믿을 수 없는 뜨기운 마음으로 나는 영원불멸의 지혜를 애타게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그러나 하나님의 선과 사랑이 악의 존재와 어떻게 화해할 수 있겠는가를 가지고 끊임없이 고심해 온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앙으로 발을 돌린 것이 아니라 마니교로 돌렸다. 그는 마니교의 이원론에서 해결방법의 길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어거스틴은 마니교의 교훈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당시 마니교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던 파우스투스(Faustus of Milevis)에게서 해답을 얻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에게서 큰 실망만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회의주의에 빠진 어거스틴에게 새 빛을 비추어 준 사상이 신플라톤주의였으나, 그러나 진리의 구도자였던 그는 밀란의 암브로스와 그의 스승인 심플리키안(Simplician)의 영향력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후에 히포(Hippo)의 감독이 되었다.
어거스틴의 개종에 대한 곤잘레스의 해석은 흥미가 있다. :
"어거스틴은 어릴 때부터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알아 왔으며, 한번도 참으로 의심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읽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글들, 암브로스의 설교, 심플리키안과 나눈 대화들은 그가 기독교 신앙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장애요소로 있던 의심들을 제거시켜 주는 기능만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심 후 여러 해 동안 진리를 추구하는 동안에 어거스틴은 진리의 본질과 참된 철학자의 삶에 대해서 신플라톤주의자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기독교인의 삶이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아부정적인 모습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철학적 삶'의 결합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밀란의 정원에서 있었던 회심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여러 교리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고 명상의 삶을 저해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틸리히는 어거스틴의 사상의 발전단계를 일곱가지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사상의 배경이기도 한 것이다. (1) 경건한 기독교인 어머니의 영향, (2)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의 연구를 통한 진리탐구에 대한 자극, (3) 이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마니교사상, (4) 마니교에서 떠난 어거스틴이 회의주의에 빠졌다는 것, (5) 신플라톤주의로 회의주의를 극복했다는 것, (6) 동시에 그는 교회의 도움, 즉 암브로스의 영향을 받아 회의주의를 극복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도자나 성자들이 실천하고 있는 금욕적 영성 등이다. 그러면서 틸리히는 어거스틴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거스틴에게 조정의 체계(system of mediation)가 없다는 것이며 개체의 강조가 없고 중용의 길(middle way)이 없으며, 합리적이며 수평적 과학의 사고가 결여되어 있고, 비주지주의적이며, 비귀납적 비경험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신플라톤주의의 종교관에 지배되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사상을 이 시각에서만 보면 깊고 참된 이해를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기독교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시편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밀란의 교회 생활에서 체험한 예배, 기도, 찬송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의 영혼에 깊은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제베르크가 지적했듯이 순수한 철학적 원리와 기독교적 원리가 조화되고 있었다. "교회의 권위는 어거스틴에게 그의 신앙의 본질적 내용을 제공해 주었으나, 철학은 그에게 그 형식을 마련해 주었다." 어거스틴의 입장은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igam)는 것이다. 지식은 신앙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395년에 히포의 감독이 되었는데, 그 이후로 그는 이성(지식)에 대해서 보다는 신앙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 니브는 매우 적절하고 분명한 요약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순수 절대적인 초월자로 보는 신플라톤주의의 신관에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이며 세계의 창조주요 주관자로 보는 신 이해를 첨부하였으며, 하나님을 단순히 심미적으로만 경험하는 것을 극복하고 순종의 생활을 통한 경험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결국 의지의 행위였다. 이것을 따른 계통이 중세 '주의주의'(主意主義)적 입장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생성하는 만물의 시원이며 모든 생물체의 생명의 근원이며, 아름다운 온갖 것의 미(美)의 표준이다. 그 하나님은 참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며 진리의 근거로서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요 우리 안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이 차원을 초월한다. 신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신은 가시적 존재가 아니라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이기에 형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불변, 불사, 생명, 진리, 지혜, 능력, 미, 지복, 그리고 정신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할 때도 그가 의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는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의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일반적인 신 이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신 이해는 그의 신정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III. 악과 선의 하나님 문제
1. 악과 선의 일반적 개념
악과 선이 쓰이는 여러 경우를 살펴보면 그것들의 의미와 암시하는 바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념 정의도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악'이란 정히 어떠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선'이란 정히 어떠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을 때, 여기 "정히" 또는 "마땅히"라는 말은 무분별한 비도덕적 대상에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 말은 "정당한 것"에 대한 서술로서 표현되는 것이 보다 좋다. 정당한 것은 규칙에 따른 것을 의미한다. 선한 것은 어떤 목적에 가치가 있는 것, 따라서 '바람직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선한 것'은 모든 점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이고 '악한 것'은 모든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만일 우리가 쾌락주의에 빠져서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이 쾌락이라고 한다면 이 개념 정의도 문제가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의 요약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바 선은, 그것이 나타나거나 기대될 때 우리가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얻거나 지키려고 애쓰며 만족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경험에 나타난 악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느 점에서인가 불유쾌하게 또는 참을 수 없게 느끼게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해서 악이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의 생각에 없어지거나 줄어들었으면 하는 어떤 것, 또는 시야, 청각,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것, 피하고 싶고 몰아내고 싶고 공박하고 싶은 것,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저항감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란 무엇이든지간에 환영하고 싶고, 추구하고 싶고, 먹고 싶고, 붙잡고 싶고, 지키고 싶고, 집착하고 싶고, 보존하고 싶은 것을 의미한다."
악이란 인간의 생명과 삶 전체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해를 끼치는 유·무형의 부정적 실재의 통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인간 내면에 있는 도덕적 선의 대립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악은 근원적인 것, 악마적 힘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존재론적 악과 윤리적 죄악도 나타난다. 칸트는 근본악과 악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뜻의 말을 하고 있다.
"근본 악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도덕법을 거부하고, 감각적인 충동에 따르려는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본능적인 경향을 말한다. 악은 모든 피조물 속에 내재 또는 초월해 있는 어떤 존재론적인 기능을 가진 실재인데 비해, 악마는 이러한 악의 실재가 구체화된 존재로서, 인격적으로 사람이나 그밖에 여러 생물들을 악마적인 힘으로 지배하고, 악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다르다."
칸트에게 있어서 선은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선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되어 있다. 도덕적 선은 객관성을 지녀야 하며 개별적으로 달라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입장이 모두에게 찬동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힉크는 '선'과 '악'에 대한 비신학적 개념을 기술하면서 홉스(T. Hobbes)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반면에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 한다." 여기서는 선과 악은 '옳은 것'(right)과 '옳지 않은 것'(wrong)보다는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과의 관계에서 개념화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힉크는 "신정론에서 사용되는 악이란 '잘못된 의지'(wrong volitions)와 '나쁜 경험'(bad experiences)을 모두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일반적인 말"이라고 한다. '나쁨'(bad)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간이 싫어하는 것, 환영하지 않은 것, 기피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것은 행복의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미성취, 또는 근본적인 좌절을 반영한다. 그것을 불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어떤 것이 '행복'(happiness)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가에 대한 판단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의존한다. 만일 그가 부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세상을 믿는다면 그는 부를 추구할 것이다. 그가 사교에서 명예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부보다도 명예를 추구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피조물의 행복은 그 자체가 가지는 목적(telos)을 성취하는데서, 또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성과 잠재력의 실현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스스로 성취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국화씨의 목적은 활짝 핀 국화꽃이다. 그 식물이 자의식이 있다면 그 식물의 행복은 완전한 형태를 갖춘 만개한 국화로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이란 인간 본성의 잠재성(력)의 성취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과 견해를 '좋은 것'(good)의 반대로서 '나쁜 것'(bad)에 적용시키면, 그 근본적 의미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 환영하지 않는 것,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악과 선이 기독교 신학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적 도덕 선은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플라톤이나 스토아 학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만 신은 인간행위의 최고 모델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본적 주장은 인간 자신의 행위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이교의 도덕적 선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 입장을 달리한다. 악의 문제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기본적인 입장은 악이란 아담의 원죄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명령(법)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2.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과 선
문제에 직접 들어가기 전에 악과 선에 대한 성서적 의미를 개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악은 '라'(ra), 또는 '라아'(raah)이며 희랍어로는 '카코스'(kakos), '포네로스'(ponèros), '파울로스'(phaulos)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서에서 악하다고 보는 것은 '어떤 것이 무가치하고 부패할 때'(왕하 2:19; 잠 20:14; 렘 24:2; 마 6:23; 7:17), '불쾌하고 추하고 근심스러울 때'(창 21:11-12; 28:8; 전 7:3), 혹은 '고통을 주고 해가 될 때'(창 26:29; 31:7; 신 26:6; 잠 11:15; 계 16:2) 등이다.
이것은 모두 현상이나 결과로 판단한 것이다. 이 악의 의미와 연관되어 유래된 것이 '고통', '가난', '재앙' 등이다. 악은 하나님이 내리는 벌이요 응징이다(창 19:19; 47:9; 시 90:15; 마 6:34; 엡 5:16). 이 점에서 하나님이 악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욥 2:10; 사 45:7; 암 3:6). 하나님은 악을 현명한 목적에 사용한다. 여기 고난의 성서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악은 성서에서 도덕적 영적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악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잘못을 행하는 것(창 19:7; 신 26:6; 약 3:8), 도덕적 과오, 악의, 죄악된 마음의 고집을 암시한다(욥 8:20; 시 26:5; 렘 20:13). 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과 선하심을 망각한 '사악한 자'다(렘 2:19).
히브리어로 선은 '톱'(tob)이고 이것을 LXX에서는 '아가도스' (agathos), 또는 '칼로스'(kalos)로 번역을 했다. 아가도스는 '좋은'의 뜻이고 칼로스는 '아름다움'의 뜻이다. "좋고 광대한 땅"(출 3:8), "좋은 사람이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삼하 18:27)는 것 등이 전자의 예이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왔다."(창 1:4), "야훼의 아름다운 말씀"(수 23:15) 등이 후자의 예이다.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인정된 가치기준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고 아내를 얻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것'은 '선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의 근거는 하나님이다. 야훼 하나님 자신이 선하기 때문에 그의 교훈도 선하다(시 136:1).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다(마 19:17; 막 10:18). 그러므로 인간이 선하려면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 결론적으로 "선과 악이라는 표현은 모든 범주의 도덕적 또는 영적 가능성 및 그것들의 필연적인 결과를 총망라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악이란 무엇인가? 어거스틴을 평생 괴롭히고 그가 가장 고민하면서 심각하게 다룬 문제의 하나가 악의 문제였다. 그가 마니교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이나 있었던 것도, 마니교의 교훈에 실망한 것도 신플라톤주의에 몰입한 것도,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인 것도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그의 구도자적 순례였다고 할 것이다. 그는 이 악의 문제를 기독교의 창조 교리와 신플라톤주의의 종합에서 극복할 수 있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의 악의 문제의 근본 초점은 이미 '문제의 소재'에서도 암시한 바 있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성과 그가 창조한 피조 세계에 악이 존재하므로 피조 세계의 불완전성과의 모순의 문제였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왜 불행이 닥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악의 문제는 그의 악의 본질론부터 구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악의 본질을 창조 교리에 기초해서 구명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악의 문제는 그의 창조론에서 파생된 것이다. 우선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명백한 실재인데, 그 "하나님은 영원하고 초월적이고 무한하고 완전하다. 하나님은 지고의 빛으로서 모든 지식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지고의 선으로서 모든 인간적 의지가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다." 무(nothigness)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고의 선'(Supreme Good)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완전한 존재(Perfect Being)라는 것이다. 그 반면에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무에서 창조되어(ex nihilo) 유(有)의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이나 영원한 본성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다면 피조 세계에도 신성이 있다고 할 것이며 또 그것을 피조 세계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철저한 사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근원했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크든지 작든지, 모든 권세는 크든지 작든지, … 모든 지성은 크든지 작든지, 모든 평온함은 크든지 작든지, … 모든 감동은 크든지 작든지, 모든 빛은 크든지 작든지, … 모든 아름다움은 크든지 작든지, 모든 평화는 크든지 작든지, 그 외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지, 특히 만물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무슨 일이든지 영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크기나 형태나 질서가 크든지 작든지 간에 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무에서 유의 존재가 된 피조물은 존재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비존재(Non-Being)에도 관여한다. 피조물이 비존재에 관여하고 있는 한, 불완전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완전해 지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며, 결과적으로 가변적 존재가 된다. 이 가변적인 불완전한 피조물이 지고의 선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면 부패하여 타락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피조물은 지고의 선인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 선을 함유하고 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말하는 피조물의 우주론적 속성이다. 그래서 그는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크기(modus)와 형태(species)와 질서(ordo)를 갖는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선하다"고 하였다.
그러면 악이란 무엇인가?
악은 자연(본성)이 아니다. 오히려 악은 '반본성적'(contra naturam)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은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이다. 악은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악은 자연(본성)으로부터의 이탈이요, 본질의 규범, 질서 또는 성격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것은 비존재의 경향성이요 부패인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실체들에게 일정한 크기와 형태와 질서를 부여하였는데, 악이란 이 세가지 중의 어느것 하나가 부패하여 생기는 타락이다. 자연이 악하다는 것은 이 세가지 중의 어느 하나가 부패 또는 손질(損質)되어 있는 자연을 말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악은 선의 부정이요 선의 결핍(privation)이다. 물론 이것도 지고의 선인 창조주 하나님, 그의 창조, 그리고 피조물이라는 그의 기본 사고의 틀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어거스틴이 악을 자연의 타락이요 선의 결핍이라고 할 때, 신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신플라톤주의보다 더 확신을 가진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기독교 창조 사상이었다. 이것이 그의 해석의 기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하지만, 악이 무존재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존재가 못된 존재의 실패요 충족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 계동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a pure absence of Being과 Nothingness를 구별해야 한다. 결핍이 있는 곳에 惡이 존재하며 惡이 존재하는 곳에는 결핍이 있다. 이와 같이 악이란 어떤 존재로부터의 결핍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어떤 존재를 전제로 하여 이 존재가 실존하는 한 선인 동시에 그 존재가 결핍을 지니고 있는 한 악하다."
이와 같은 악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이 문제는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유의지의 문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으나 악을 위해서 사용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합리적인 존재가 지닌 특성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창조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악이며 또 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악의 창시자일 수가 없다. 자유의지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동시에 택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적' 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항상 자유의지가 있으나 자유의지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유해야 한다. 그것이 창조질서다. 인간은 여러가지 가능성 가운데서 선택할 수 있는 참된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선택은 결국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말이 가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악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비록 그가 선한 의지가 악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악한 의지도 선한 의지를 동반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타락의 경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악한 행위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은총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도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은총이 없으면 인간의 의지는 선을 택할 수가 없다. 인간 존재에 은총은 절대적이다. 이것이 그의 '불가항력적' 은총론이다. 그의 은총론에는 사실상 인간의 의지의 선택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관계없이 우리의 의지를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가 뜻을 세우고 의지에 따라 행동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협동한다. 그렇다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경건한 선행도 할 수 없으며 우리가 뜻을 세울 수도, 뜻을 세웠을 때 협력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은총론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 결렬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are)이 창조때부터 주어져 있다고 한다. 즉 그에 의하면 인간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으며 은총의 영향력 없이도 그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조화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펠라기우스는 '반대로 선택할 수 있는 힘', 즉 "형식적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본성의 능력' 또는 '본성의 선'(bonum naturae)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것을 지켜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죄성을 가볍게 취급한 것도 아니고 은총을 부인한 것도 아니다. 그는 죄를 짓는 인간의 선례가 보여주는 매력의 힘, 연면히 계속되어 온 죄성에 대해서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은총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와 같이 불가항력적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계발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지로 선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피조물은 비존재로 돌아가려고 하는 강한 경향성 때문에 은총이 없으면 악을 불가피하게 행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의지가 불가피하게 악한 의지가 되고 피조물이 부패하여 악을 초래한다면 하나님은 자유의지도 부여하지 말고 창조행위도 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타락할 수 있는 자연, 죄를 택할 수 있는 의지를 창조했는가? 이 문제는 악의 종류, 즉 '자연악'(Natural evil)과, '도덕악'(Moral evil)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미 악이란 말을 사용해 왔지만, 악을 의미하는 영어의 evil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그 말에서 사악과 같은 도덕악과 질환이나 자연적인 재해같은 비도덕적 악을 구별해야 한다. 독일어에서 Übel은 도덕악과 비도덕인 악을 다 포괄하는 일반적인 언어인 반면에 Böse는 정확히 도덕적인 악을 의미한다. 신정론에 있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도덕악과 자연악을 구별하는 것이다. 도덕악은 잔악하고, 불의하고 사악한 사고와 행위같은 인간에 그 기원이 있는 악이며, 자연악은 지진, 폭풍, 가뭄, 병의 세균 등과 같이 인간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발생하는 악이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악은 두가지 의미(유형)가 있다. 인간이 행하는 악이 있고 인간이 당하는 악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죄이고 후자의 경우는 죄의 벌이다."
인간이 행하는 악인 도덕악은 궁극적으로 보면 유일한 악이다. 반면에 죄의 벌의 성격을 가진 자연악은 정당하고 선한 것이다. 그것은 선한 하나님의 자비일 수도 있다.
자연악은 하나님의 경고의 의미가 있다. 이 악에 의해서 인간은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이 인간을 순화시키고 시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악과 하나님의 섭리가 연결된다. 이 자연악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피조물의 유한성을 가지고 설명하려고도 한다. 하나님은 악의 창시자도 아니고 원인도 아니지만, 대 우주적 차원의 질서에서 악을 허용하였다는 것이다. 전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지금 우리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이 우주적 조화를 이루는데 불가피한 과정일 수가 있다. 어떤 존재가 결핍으로 소실되거나 소진된다고 할 때, 우주의 질서(창조이며 선인 것)를 파괴하는 것같이 인식될 수도 있으나 전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우주의 조화를 이루어 미를 창조할 수가 있다. 유한한 개별 피조물들은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전체의 완전함(우주적 미)에 기여하는데, 반듯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서 한다.
"이 우주적인 질서 안에 있는 미는 우리에게 감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제한성 때문에 그 미의 일부분에게만 싸여 있는 고로 그 부분적인 미들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미를 이루는 우주적 전체성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도덕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된다. 이 악은 자연악과 달리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악도 선택할 수가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의지는 '중간적 선'(intermediate Good)이기 때문에 그 의지는 사용되어지는 것에 따라 선의 의지도 될 수 있고 악의 의지도 될 수가 있다. 그런데 도덕악의 원인은 "불변하는 선을 저버리고 가변적 선을 향해 이탈해 간 천사들의 의지요 이것이 다음으로는 인간의 의지다." 그러므로 도덕악의 가능성은 영(정신)의 자유 속에 내재해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도덕악을 역으로 생각해서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선해지는 것은 필연성에 의해서 선해지는 것보다 더 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인간 존재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이것이 실현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죄가 실제로 왜 허락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고 인간은 그 위지로 선보다는 악을 택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Ⅳ. 결 론
악과 선(사랑)의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신학을 신정론이라 한다. 어의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면, 그리고 그가 창조주라면 악은 어디서 누구에게서 왔는가가 다루어진다. 하나님은 지고의 선, 전지전능한 분,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분, 만물의 주관자, 창조주, 정의로운 분이라고 생각할 때, 이와 반비례해서 악의 존재문제는 점점 신비로운 안개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극단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 그의 전지전능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아니면 선악의 구별에 있어서 우리와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고 주장하여 지식적 위안을 받으려고도 한다. 우리에게 부도덕하게 보이는 행동과 그것의 원칙도 하나님께는 완전히 선할 수도 있다. 성서는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사 55:9)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지한 신앙인에게도 만족스러운 것이 못된다.
악은 실제로 악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가 있다. 부분적으로 악한 것이 전체적으로는 선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다. 이것은 실제로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선하다는 것이다. 개별자에게 괴로움을 주는 악이란 실상 위대한 우주적인 목적을 이루는데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불평없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오! 행복한 범죄여!"가 가능할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악을 '징계의 대행자'로서 선하다고 했다. 또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는 주장도 한다. 이것은 악은 선의 부재요 선을 알거나 행하는데 필수 요건이라는 뜻이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자연악과 도덕악 등의 논리로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사실 고난이 사악하고 불의한 행동에 비례한다고 하면 악의 문제는 훨씬 덜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이 외견상으로는 차별없이 주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나학진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신정론 연구를 끝내고 있다.
"신정론은 신앙에 의한 확신에서 해명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비를 시인하는 것이요 종말론적인 설명으로 끝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도덕악의 설명에서나 자연악의 규명에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의 면을 긍정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신정론의 결론은 종말로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악의 근원에 대한 설명보다도(인간의 타락), 악으로부터 선을 이룰 수 있는 역사의 목표라는 미래(종말)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학진의 결론에 우리는 동의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과의 갈등에서 산다. 그러나 이 갈등은 결과적으로 영원한 최후의 승리를 낳을 것이다. 그리하여 악이 마침내 현실 속에서 패배당할 것이다. 그러면 고난받았던 우리는 겪었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믿음에서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서도 삶을 흥미있는 것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며 존재하는 것이 선하고 고통을 겪고 투쟁하는 것이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알게 해 주시는 하나님은 선하다. 그리고 그는 선한 것만을 계획하신다. 이 점에서 악이란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우리가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빗츠 유대인의 고난과 죽음은 신비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경륜에 속하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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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장만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후원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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