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전화를 했을 때, 장석주 시인은 침묵을 지키겠단다. 좌담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글을 쓰라고 한다. 나는 글쓰기의 자유를 얻었다. 나의 사유가 자유로움으로 충만하기를 바라면서 수졸재로 향한다.
1. 물의 철학자
금광저수지를 지난다. 물풍년이다. 어린 오리의 발가락에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물 젓는 모습에서 힘이 넘친다. 어린 오리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저수지를 발로 때려 울음을 만드는 것. 저수지의 울음을 평생 입고, 마시며 살아야 하는 것. 이미 새댁티가 나는 오리들도 있다. 녀석들은 머지않아 울음의 무늬를 물살 위에 그리며 사랑을 할 것이다. 울음으로 꽃을 피울 것이다. 내가 얻은 첫풍경은 발랄하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몇 마리의 소금쟁이를 발견한다. 물의 표면장력은 대단해서 소금쟁이는 잠수를 못한다. 수면 위를 밀착하여 돌아다니고 있다. 소금쟁이에게 물은 활주로이다. 그러나 수심 깊은 곳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가장자리에서만 맴돈다.
시집『붉디 붉은 호랑이』는 물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인용하기가 벅찰 정도지만 몇 대목을 추려본다.
가랑잎 아래 고인 물로 목 축이는 다람쥐,/ 나뭇잎과 나뭇잎을 건너뛰던 햇빛,/ 다 함께 깊은 소(沼)로/ 첨벙, 첨벙, 뛰어든다./ 계곡 깊으면 물의 심지도 깊은 법,/ 물의 딸과 물의 어머니가 왜 저 물로 뛰어들었을까./ (중략)/ 산멱통에서 터져 나오는 물소리, 물소리떼./ 발목 관절의 작은 부처들이 먼저/ 숙연해진 물이 저승까지 나아갈 것을/ 알고 비명을 지른다./
- 「소금강」부분
보일러도 돌리지 않는 방에서/ 누가 생리통을 앓고 있다./ 봄비가 하혈하듯 쏟아지니/ (중략)/ 이 봄비 그치면 저 힘찬 풀들/ 초록지붕을 이루고/ 솟는 힘으로/ 마을을 불끈 들어 올리겠다./ -「봄비야 봄비야」부분
빈들을 맨발로 뛰어다니는/ 저 어린 빗방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중략)/ 흙덩이를 잘게 부수며/ 봄비가 저 혼자 잘 놀다 간다./ -「38번 국도」부분
산수유 노란 꽃잎 속에서 봄비가 옹알이를 한다./ 청산은 봄비에 젖는데,/ 체불 임금 때문에 네팔 노동자들이/ 안성공단 문앞에서 서성거린다./ (중략)/ 붉은 촉 내미는 모란을 힐끗 본 뒤/ 봄비가 나를 앞질러/ 가협에서 사그막으로 건너간다./ 봄비 따라 이승 너머까지 걸어가는/ 사람도 있겠다./ -「청산이 젖다」 부분
작품에 나오는 물의 이미지는 깔깔 웃는 생기발랄한 물이다. 불끈 힘이 솟는 물이다. 산멱통을 터트리는 물이다. 생리통을 앓게 하는 물이다. 하혈을 물컹하게 하는 물이다. 딸이며 어머니인 물이다. 이승에서 저 혼자 잘 놀다가는 물이다. 그리고 심지가 깊은 사색의 물이다. 저승까지 건너가는, 삶과 죽음을 교통하는 물이다. 어느 곳으로나 스며들 줄 아는 물은 저승까지 관통한다.
시인은 「물 예찬」이라는 산문을 쓴 바 있다. "물의 본성은 동요하지 않을 때 맑아지고, 움직이지 않을 때 수평이 된다."는 장자의 말, "물은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하다. 하지만 물은 가장 단단하고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고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 한 물의 성품을 따라서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한껏 제 몸을 낮추는 물처럼 낮은 곳에 기꺼이 엎드려 산다는 뜻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여미었더니 세상과 자주 불화하며 잦던 시비가 줄었다고 했다. ‘물의 철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이번 시집이 갖춘 큰 특징이다. 「은자전(隱者傳 )Ⅰ」에서는 시냇물에 귀를 씻고 눈을 닦은 허유(許由)를 그리고 있고, 「은자전(隱者傳 )Ⅱ」에서 돌로 양치질을 하고 시냇물을 베개 삼겠다는 손초(孫楚 )를 그리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금광저수지 허리를 따라 돌았다. 서울에서 안성의 금광저수지까지 오는 길은 변화가 거의 없는 넓은 직선의 길이었다. 그런데 금광저수지를 끼고 도는 길은 전적으로 곡선의 길이다. 직선보다 곡선이 더 날카로운 예각(銳角)을 품고 있다. 아차 하는 순간 중앙선을 이탈해서 저수지로 떨어질지 모른다. 제어장치와 핸들의 유려한 꺾임을 산통의 아이처럼 잘 받아내야 한다. 한적한 길이라 속도를 낮추고 천천히 돌았다. 저수지에는 상류에서 떠내려 온 형체들이 쌓여 있다. 새발자국이 찍혀 있고 온갖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노동과 휴식을 취한 흔적이 있다. 외로운 사람이 오래도록 바라 본 눈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물은 생명체의 몸에 스며들어 또 다른 갈증이 되고, 정액이 되고, 미세한 흔들림이 될 것이다. 물은 작은 경사에도 예민하게 흔들리고 스며들어 흔적을 남길 것이다. 금광저수지를 거의 한 바퀴를 돌아 안개 지펴 오르는 물꼬리 근처에 다다르니 거기 하얀 수졸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잠시 차를 세웠다. 원경의 사진을 찍는다. 절반은 저수지가 보이도록, 절반은 뒷산 능선이 병풍을 이루도록. 그 때 곡선의 길목에서 매미의 울음이 들려온다. 올해 내가 듣는 첫울음이다. 며칠이 지나면 수많은 울음이 깨어나 나무들의 신경섬유를 모두 풀어 현악기로 만들 것이다. 산 전체가 팽팽하게 출렁이는 유체가 될 것이다. 판초에 쏟아지는 빗소리가 될 것이다.
다시 시집을 펼쳐 본다. 울음을 찾아본다. 그의 시집에 울음소리가 있을까 의심을 한다. 울음은 비천한 것들의 목소리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울음이 많았다.
산통(産痛)이 오는지 개가 운다./ 호소하는 듯 긴 울음이/ 딱딱한 내 몸통 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 「초산」부분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수그리다」부분
오리나무에 와서 우는 것은/ 뱁새다./ 숲이 낸 곡비(哭婢)다./ 당신의 이마에서 숲냄새 나고/
당신의 어깨에는 산 그림자가 앉는다./ -「가협시편」부분
살강 위 뚝배기 작살내는 듯/ 저녁 이내 속에서/ 개구리떼가 왁작왁작 운다./ 붉은 영산홍 다 진다고!/ -「가협시편」부분
오월 밤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은/ 무논 개구리떼,/ 밤낚시 온 취객들./ 네발 달린 고요 거사(居士)들,/ 밤새도록 짖는다./ -「가협시편」부분
목울대 가득한 울음으로 베갯머리를 적시고,/ 오오, 봄비야./ 저 슬픔의 천근 천일염을 다 녹일테냐./ -「외롭다는 것」부분
그의 시집에는 울음 곳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개가 울고, 불빛이 울고, 들고양이가 울고, 뱁새가 울고, 개구리가 울고, 봄비가 울고, 봄비를 빨고 있는 밤나무들이 울고 있다. 그는 왜 울음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인가. 다시 찬찬히 살펴본다. 그의 울음을 우는 축생과 울음을 우는 곡식들은 외로움의 냄새가 난다. 근원적 고독의 냄새다. 외로움의 수액을 먹고 자라는 울음들인가. 산통의 개가 토해내는 울음은 가련하고 안쓰럽다. 코뚜레 뚫은 소의 울음은 길고 처절하다. 곡비(哭婢)의 울음을 우는 뱁새의 소리는 애절하다. 붉은 영산홍 다 진다고 우는 개구리 울음은 절절하다. 얕은 울음이 아니다. 한결같이 심연의 울림이다. 평화로운 풍광 속에 피돌기처럼 치열한 울음의 순환, 울음의 급류가 존재하고 있었다. 치열성의 울음이었다. 칠장사에 가서는 토담을 후려치며 내리는 햇빛 아래 이끼 짙은 절집 기와지붕에서 고양이가 진저리 치며 우는 모습에서 ‘제 털에 붙은 적멸(寂滅)을 털어내어’(「칠장사」) 고요가 세운 요사채를 돌아본다고 했다. 그것은 고요를 향한 울음이었다.
2. 호랑이는 은자(隱者)이며 견자(見者)였다.
수졸재에 들어서기 전에 잠깐 차를 세운다. 몇 가지 대화꺼리를 다시 떠올려본다. 시집 제목을 왜 『붉디 붉은 호랑이』라고 했을까? 어떤 호랑이를 키우고 있을까? 품격 높은 시는 ‘새로운 발견’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시인이 자연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을 직접 목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시대에 은자(隱者)는 무슨 의미일까? 또한 이번 시집은 외로움의 정서가 짙다, 그리고 성 에너지가 흠뻑하게 드러난다. 왜일까?
하얀 색의 수졸재. 온통 하얀 색깔의 현충사 건물 같다. 호랑이를 타고 있는 칠성각의 산신령 얼굴처럼 하얗다. 요사채의 냄새를 풍긴다. 소복을 입고 있는 듯 차가운 느낌도 든다. 하얗게 분장한 귀신같다. 초록의 산야에 홀로 드러내고 있는 하얀 살결은 어떤 유채색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시인이 현관을 나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관상을 보니 표범을 닮았다. 호랑이를 닮았다. 살쾡이를 닮았다. 눈빛이 날카롭다. 콧수염은 미세한 탐지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 같다. 두툼한 양볼은 고양이과(科) 동물의 턱을 빼닮았다.
서재로 들어간다. 어지럽다. 쇼파에도, 의자에도, 방바닥에도, 책꽂이에도 온통 책들이다. 껑충 뛰기도 하고, 살짝 비틀기도 하고, 깨금발로 걷기도 하면서 몇 발자국을 걷는다. 한아름의 책을 옆으로 밀치자 겨우 엉덩이를 내려놓을 비좁은 공간이 확보된다.
“옛날 은자(隱者)들이 거처하는 암자는 책이 거의 없었을 텐데, 여기는 도서관이네요.”
“그런가? 옛날 은자는 말 그대로 몸만 숨어사는 은자들이고, 나는 시대에 맞추어 새롭게 변화된 창의적인 은자가 아니겠어? 요새는 은자도 치열함을 잃어서는 안 돼.”
하하하. 그러고 보니 시인은 한참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모니터 화면의 크기가 32인치 텔레비전 같았다. 빨려들 것 같은 화면이다. 치열성이 그 안에서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보물창고에 들어온 느낌이다. 호랑이 뱃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내가 묻기도 전에 이미 내 질문의 의도를 훤히 알고 있기나 한 듯 시인은 앞질러 몇 마디 자신의 말을 한다.
“도시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초록 세상이 존재하지. 초록언덕, 초록물, 초록바람, 초록그늘을 통과해야 수졸재로 들어올 수가 있지. 그게 나는 좋아. 장인수 시인도 초록터널을 지나서 왔지?”
“네.”
“초록을 통과하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가 없어요. 나와 타인 사이에 초록터널이 존재한다는 것. 그게 큰 즐거움이지. 나 또한 도시로 나갈 때는 초록세상을 지나야만 도시로 갈 수 있거든. 초록은 정화이며, 용서이며, 씻음이며, 성찰이며, 사색이야. 이번의 내 시집은 그 초록세상을 이루며 살고 있는 존재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다짜고짜 외롭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다.
왜냐하면 솔직이 내가 가장 궁금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의 살결이 그리운 법이다. 개, 저수지, 뱁새의 살결이 사람의 살결과 같을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홀로 사는 즐거움은 홀로 사는 외로움의 반어적 표현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 혼자 찬밥을 먹고 있으면 괜히 울컥 목이 메일 것만 같은 게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런 산골에 묻혀 살게 된다면 가끔씩 고주망태가 되어 고성방가를 하며 외로움을 퇴치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산골은 약간의 일탈적 낭만을 허용하는 공간이 아닌가. 나는 가끔씩은 자신을 허물어뜨리는, 그래서 너무나 속물적이어서 인간적인 보통사람의 성품으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전적으로 내 입장에서 말이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야. 새벽에 일어나 책 읽고 글 쓰고, 때 되면 거르지 않고 밥끓여 먹어. 시간 나면 산에 가고 목판을 새기고 음악을 들으며 명상을 하지. 외롭다고 술 마시고 고성방가를 한 적은 없지. 혼자 있을 때는 전혀 술을 입에 대지 않아. 손님이 왔을 때나 즐겁게 술을 먹지. 하지만 큰소리를 낸 적은 없지. 여기 와서 미움을 잊었어. 싸움을 버렸지. 불화를 눌렀지.”
그의 표정은 더욱 온화해 보였다.
“은자도 외롭지. 나도 외롭지. 어쩌면 은자는 가장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일 거야. 그런데 외로움은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감당하기 힘든 것, 불쑥 나타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못 견디게 하는 것,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하는 것, 쓸쓸한 것이 그 하나지. 반면에 외로움은 특별식 같은 것이야. 외롭고 쓸쓸함은 게으른 자에게도 오지만 열정을 지닌 자에게도 오는 법이지. 초록세상도 외로워. 너무 열정적이어서 외로워. 그런데 그때 외로움은 친구야. 친근한 외로움. 아늑한 외로움. 즉 외로움은 달빛처럼 누릴 수 있는 것,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 함께 노니는 벗이야. 여기서 쓴 시들엔 외로움이 많이 투영되어 있을거야. 자연스런 일이지. 나는 외로움을 누리지. 외로움이 즐거움이 되는 거야. 엔돌핀이 막 솟아.”
외로움을 누린다는 말을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어렴풋이 느낌을 공유할 수는 있다. 시인의 외로움은 창의적인, 개성적인 어떤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사항을 질문했다. 제목이 왜 『붉디 붉은 호랑이』냐고. 질문을 할 때 나는 시인의 발바닥을 보았다. 슬리퍼를 벗고 다리를 꼬고 있는 그의 발바닥이 나를 바라보았다. 발바닥의 뚝살이 나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는 발바닥 뚝살을 뜯어내어 개미에게 준 적이 있다. 개미는 제 몸의 몇 배는 족히 되는 뚝살을 물고 갔다. 그 때의 기억이 중첩되었다. 나는 희죽 웃었다. 그는 내가 실없이 웃는 동안 지갑을 뒤적거려 명함을 내밀었다. 두 개의 명함이 나왔다. 하나는 초록색 표범 그림, 하나는 금빛 무늬의 호랑이 그림이 박혀있는 명함이었다. 그리고 목판화를 내밀었다. 요즘 한 창 목판의 질감에 빠져 있단다. 그가 찍어낸 목판화에는 나무, 새, 산길, 언덕, 물길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와 고양이도 목판 속에 들어가 있었다. 호랑이는 눈매를 살렸고, 고양이는 털을 살렸다.
그는 왜 호랑이와 고양이를 목판에 새기는지, 명함에 표범과 호랑이를 새겨 넣었는지 더 이상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의 눈빛을 응시했다. 관상을 다시 살폈다. 호랑이 형상을 한 얼굴임이 분명했다. 명함 속의 표범과 호랑이는 그의 몽타쥬였다. 고양이과(科) 동물들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구(天球)가 존재한다. 나선형의 은하계가 강체회전운동(剛體回轉運動)을 하고, 성단(星團)이 가득 산포되어 시원의 빛을 발하고 있다. 고양이과(科) 동물의 눈은 별의 눈처럼 반사층을 지니고 있다. 어둠을 막막 안으로 모아들였다가 반사를 시킨다. 모든 빛은 고양이과의 눈동자를 비켜갈 수 없다. 태아의 심장소리, 혈액의 펌프질, 저수지의 출렁임도 표범이나 호랑이에게는 눈동자로 인식된다. 그들의 반사광을 따라가면 거기 제 3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담장 위에, 지붕 위에, 능선에 제 3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내부를 꿰뚫고, 외양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내부와 외양을 둘러싼 우주적 주변을 동시적으로 통찰하는 제 3의 눈동자.
어느 날 너는 내게로 왔어./ 두 팔을 뻗어 안으려 하자/ 너는 낱낱의 원소가 되어 사라졌어.
넌 공중에 빗방울 파종하는 구름이었어./ 낮잠 끝에 흩어지는 모래알이었어./ 안 돼, 그렇게 가버리는 건 싫어./ 안 돼, 네가 없다면/ 난 미쳐 버릴거야.
네 살점을 조금만 떼어주면 돼./ 네 피를 한 모금만 마시게 해 주면 돼./ 아아, 그러면 살 수 있을텐데,/ 널 사랑할 수 있을텐데,/ -「고양이」전문
시인은 고양이를 갈망한다. 고양이의 살점과 피를 원한다. 원소가 된, 구름이 된, 모래알이 된 고양이를 사랑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붉디 붉은 호랑이 울음소리로 울고 싶어 한다.
시인은 나에게 『현대시학』7월호를 건넨다. ≪우리 시의 지리학≫ 연재를 시작했단다. 읽어보란다. 나는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시인은 자판기를 두드리며 글쓰기 작업에 몰두한다. 자판기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에서 호랑이의 발톱을 보았다. 안성에 사는 김종억 화백이 친구이며 스승이란다. 그이에게 요즘 목판화를 배우고 있단다. 248-249쪽에서 나는 중요한 단서를 얻는다. 이번 시집의 집필 의도가 명확히 적혀있다.
안성에 거처를 마련한 뒤 발길은 자연스레 일대의 들과 산으로 이어졌다. 가끔 석남사에서 서운산성으로 넘어오는 코스를 따라 걷는데, 완만한 경사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막힌 데 없이 환하게 트인 맞은편 산은 제 수하의 山陰과 솟은 등성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봄에는 진달래, 개나리, 산벚꽃, 살구꽃, 복숭아꽃, 영산홍 같은 봄꽃들이 만발하다. 봄꽃 진 뒤 녹색의 산빛은 꽃보다 더 싱그럽고 아름답다. 서운산 산빛은 오월에 절정에 이르는데, 그 즈음 산빛의 주종인 녹색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분광한다. 도시에 살 때는 녹색이 이렇게 다양한지를 몰랐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피워내는 잎들은 저마다 색깔의 차이가 난다. 신생하는 봄의 수목들이 뿜어내는 비린내는 관능적이다. 바람은 그 오월의 산빛을 너울너울 흔들며 녹색의 群舞를 추는데, 나는 그 앞에서 자주 마음을 풀어놓는다.
사람은 땅을 딛고 살며 땅에서 나는 것들로 제 육신을 양육한다. 필경 사람은 그 땅과 닮을 수밖에 없다. 내 시들은 내 거처를 둘러싼, 활엽 수목들과 일년생 초본식물들로 가득 찬 산을 등지고 앞에 논밭과 커다란 저수지를 굽어보는 주변 지형지물과 깊이 관련된다. 나는 여기에 와서 물을 보고, 물이 저를 고요함과 낮춤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물을 바라보며 평안하고 행복했다. 왜 노자가 물을 최고의 덕에 가깝다고 말했는지를 알 듯도 싶었다. 나는 물의 본성과 무위함을 관조하며 싹트는 나의 상상력의 외연을 키워갔다. 들과 물과 산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내륙의 지형학은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고, 이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체험을 꿰뚫고 지나가는 힘과 기운이 내 상상력을 지배한다. 최근 내 시는 이런 내륙의 지형학에서 배태된 상상력을 근간으로 한다. -『현대시학』2005년 7월호, 248-249쪽
이 대목을 읽고 나니 내가 가졌던 여러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리기 시작한다.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발견, 그리고 자연 속에 넘쳐나는 성 에너지. 견자(見者)의 눈빛. 눈을 움직이지 않은 채 정지된 물체를 응시하면 그 물체는 찰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눈이 움직이던가 물체가 움직이던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움직여야 볼 수 있다. 움직이지 않고 있는 호랑이에게 움직이는 대상물은 그 어느 것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우주 삼라만상은 에너지의 순환성을 지닌다. 시인의 눈동자는 움직이는 모든 자연대상물을 포착한다. 그 속성을 포착한다. 단감의 배꼽으로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을 본다.(「단감」) 금엽(金葉) 햇빛을 쪽쪽 빨아먹고 혈소판마저 투명해진, 비릿한 게 마르면 가슴 더 붉어지고 몸뚱이는 가벼워지는 태양초를 본다. (「태양초」) 어머니가 밤새껏 피울음 울다가 돌아간 자리에 어린 누이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는 앵두를 본다. (「앵두」) 펼친 책 위로 기어가고 밥 때 기다리며 사는 자의 새벽꿈을 갉아먹는, 명성왕 같은 여름날의 긴 끝들, 밟혀 으스러지며 지나가는 무당벌레를 본다. (「무당벌레」) 매화나무와 박새가 서로 은밀히 나누던 비밀의 전말을 목격한다.(「박새둥지」), 청어떼 잔구름을 끌며 개간지 위에 일획으로 직립(直立)하고 있는 오동나무를 본다. (「오동나무) 대추 한 알 속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초승달 몇 낱이 들어있는 것을 갈파한다.(「대추 한 알」) 한 겹 창호지 환히 물들이며 지는 벚꽃 폭설에 방안 기물(器物)이 환해지는 현상을 관찰한다. (「벚꽃 폭설」) 은자(隱者)의 눈빛, 견자(見者)의 눈빛, 제 3의 눈빛으로 가협 골짜기의 온갖 자연 대상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본다.
산천은 온통 관능적이다. 시인은 산천의 관능을 즐긴다. 산천의 관능을 흡입하는 것도 은자(隱者)의 성품인가! 성 에너지는 하늘과 땅의 무궁한 기운이다. 생동하는 기운의 현현(顯顯)이다. 하늘과 땅의 퉁소소리다. 지뢰(地籟)이다. 나무들이 수액을 빨아올리는 원동력이다. 꽃들의 힘살이다. 성 에너지는 끝끝내 식을 줄 모르는 삶에 대한 열정이다. 우주적 에너지이다. 코스모스적 성 에너지는 「가협시편」에서 절정을 이룬다. ‘밤새껏 교접하고도 할딱이는/ 계집의 맨드라미 붉은 소음순’, ‘한 걸음 떨어진 데/ 작약꽃 붉은보지 쩍, 벌어진 걸 보고,/ 에그머니나!’, ‘다림질 잘 하는 여자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잘 늙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을 못 할 까닭이 없다고 외친다. ‘봉숭아빛 물든 봉창을/ 어둠이 우왁스럽게 끌어안는다./ 능소화가 옷 벗고/ 무릎 사이 샅을 연다. 그리하여 ’땅이 젖고 싹이 돋는 동안/ 우리가 사랑을 못할 까닭이 없다./ 샅을 열고 달아오른 눈 먼 두 몸이/풀무질하는 동안/ 우주의 질량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사랑」)며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 쑥을 보고서는 ‘움트는 것, 해토된 땅의 가랑이를 밀며, 가장 먼저 나오는 것, 나와서 솟는 것, 솟으며 일어서는 것(「쑥」)으로 생동과 약동의 성 에너지를 발견하고 있다. ’삼라만상에 기운이 깍 차 있으니, 피어나고, 걸어가고, 사라지는 것들은 저마다 그 움직임으로 생동한다!‘(「꽃과 그늘」) 그의 성 에너지는 종일 비오는 날 최고 절정에 달하고 있는 듯하다. 비오는 날 ‘신체의 말단까지 태우는 작열감’(「천리 꽃불」)에 미칠 듯 빠져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문심조룡』에서 유협은 이상적인 작품의 풍격을 갖기 위해서는 풍(風), 골(骨), 채(采)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어. 이번 시집에서는 채(采)의 묘미를 되도록이면 배제를 했지. 나는 누구보다도 채(采)의 재주를 부릴 줄 아는 시인이라고 자부를 하는데……. 그걸 버렸어. 아니, 버리려고 애쓰지. 자, 간단히 저녁이나 함께 하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해서 밖으로 나왔다.
3. 수졸재의 풍경과 ≪내적 인간≫
현관을 나서자 어미 개 세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여섯 마리를 낳았는데 다 남주고 남은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죽었단다. 건강한 강아지가 갑자기 시들시들 해져 동물병원을 들락이며 수혈까지 했다고 했다. 어미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미역국을 끓여 먹였다는 내용이 시 「초산」에 나와 있다. 접시에 우유를 따라주며 키우던 강아지. 개는 주인을 극진히 섬기는 듯 했다.
슬리퍼를 신은 시인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워 보였다. 고양이도, 표범도, 호랑이도 가벼움을 즐기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솜털을 팔랑거리며, 폴짝 뛰며, 허공을 퉁기며, 덤불과 나무가 있으면 더욱 가볍고 부드러운 짐승이 되는 동물. 강아지의 폴짝거림도 주인을 닮았다.
뜰과 마당은 잔디밭이다. 초록이 온통 점령했다. 양보리수 열매를 따서 함께 먹었다. 달큼했다. 뜨거운 햇살을 쪽쪽 빨아먹고 자랐다고 했다. 물까마귀와 까치들이 내내 들락날락하며 가지가 휘어질 듯 다닥다닥 매달린 열매들을 다 따먹어서 나무의 상반신은 거의 없고 나무의 치마폭에만 열매가 달려 있다. 홍보석이 박힌 초록치마 같다. 초록치마에 초록 애벌레가 미세한 줄 하나를 타고 오르고 있다. 언뜻 보아서는 맨몸으로 허공을 오르는 것 같다. 줄을 먹어치우면서 한발짝한발짝 오르고 있다. 허공의 힘줄과 손금을 먹어치우고 있다. 꿈틀거리면서 제 몸으로 탄력을 만들어 오르고 있다. 스프링이 되어 허공 한 구역을 퉁기고 있다. 애벌레는 악사였구나.
수졸재 주변에서 누천년 묵은 부엽토 냄새가 난다. 그 안에 굼벵이의 오솔길이 있을 것이다. 그 안에 두더쥐의 고속도로가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지렁이들의 신작로가 있을 것이고, 개구리의 놀이터도 있을 것이다.
작약꽃의 자태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관능적이다. 시인의 눈빛에서 관능을 읽어낸 것은 잘못일까. 내 자신의 감정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모란과 병꽃은 이미 꽃이 다 지고 잎새만 무성하다. 땅 깊이 박아놓은 큰 플라스틱 함지를 수련이 차지하고 한창 꽃봉오리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이다. 머지않아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다. 돌확에도 수련과 개구리가 입주해서 살고 있다. 금송 아래에는 천리향이 다복하다. 시인과 나는 천리향을 오래도록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금 가득 천리향의 물길이 흐를 것 같다. 고개 들어 원경을 살핀다. 저수지 물꼬리가 보이고 안개가 살금살금 건너오는 모습이 보인다. 삼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오동나무, 참나무 등등 상록의 능선, 초록의 궁륭이 사방을 둘러쳤다.
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중화요리를 하는 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빼갈 한 병을 마신다. 우리 둘 사이에는 말이 없다. 고요와 정적의 술잔을 기울인다. 깔끔한 소식(小食)이다. 노을과 어스름이 함께 깔린다.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가 집필한 『풍경의 탄생』을 꺼낸다. 213쪽에 나오는 구절을 음미해 본다. “풍경은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아니다. 풍경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풍경은 오히려 '바깥'을 보지 않는 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풍경은 그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내적인간'들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는 구절…….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 꼼꼼히 읽은 『현대시학』의 기획연재물인 《우리 시의 지리학》에 나오는 구절도 다시금 미음완보한다. “자연 경관이란 단순한 자연의 물리적 형상을 넘어서서 자아와 교감하며 자아를 저 깊은 곳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사람은 풍경을 낳고, 풍경은 사람을 낳아 기른다. 사람이 눈꺼풀을 들어 들의 형세, 산의 모양, 흙의 빛깔, 초목의 우거짐, 물의 들고 나감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진 자연 풍경을 음미하고 거기서 생기는 생기와 감응을 제 것으로 삼을 때 풍경은 주체의 내면을 규정하는 하나의 외연으로 작용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장소는 인간 실존이 외부와 맺는 유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위치시킨다.’고 말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