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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ロ-マ亡き後の地中海世界) (하)
· 저자 - 시오노 나나미 저 / 김석희 역
· 가격 - 16,500원
· 분량 - 412page
· 출판일 - 2009년 7월(1판 4쇄)
· 출판사 - 한길사
· 평가 - ★★★★★
· 批評
딱 보름 만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 같다. 석사논문 제출 날짜가 일주일도 채 안 남았음에도 이렇게 이 책의 서평을 쓰는 이유는 논문을 쓰다가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이 책을 읽을 정도로 이 책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강추!’하고 싶을 정도로 재밌는 책이다. 일단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상’권을 읽었을 때의 흥분과 전율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筆力에 의해 필자가 감동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역사적 지식과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통찰력은 정말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중간 중간 약간의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역사해석도 물론 있지만 그것이 결코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역시 그녀가 책 전반적으로 신뢰할만한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서양사 전공자들 중에 이만한 필력을 가진 大家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런 분들이 이와 같은 수준의 책이나 연구 성과를 내놓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보고 열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설사 그 독자가 관련 전공자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배은숙이 쓴『강대국의 비밀』을 처음 봤을 때 ‘아! 우리도 드디어 로마사 관련 전공자가 책을 썼구나~’하는 마음에 당장에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느낀 점은 ‘뭐야! 이거 Adrian Goldsworthy의 The Complete Roman Army와 내용이 거의 유사하잖아! 번역서 아니야 이거!’였다. 그만큼 외국 연구 성과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고대 그리스-로마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놓은 대중서적이나 연구서적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암튼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이 책이 정말 재밌다는 사실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오자. 일단 (상)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서 여기에서는 그렇게 할 얘기가 많지는 않다. 다만, 주인공도 바뀌고, 내용도 바뀌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잠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권이 (상)권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주인공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상)권에서 지중해를 무대로 활약하는 수많은 해적들이 아무리 코르사르였다지만 주변 국가에서 보기에 그들은 해적일 뿐이다. 당장 우리 땅을 침략해 사람들을 잡아가고 물건을 빼앗아가고 지나가는 우리 배를 약탈해가는 해적이 눈에 보이는데 그들이 피라타인지, 코르사르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직함을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투르크 해군’이라는 직함이다. 해적이 왜 갑자기 해군이 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해상전력이 강하지 못한 투르크가 해적을 해군으로 조직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상비군 전력으로 운용하면서 해상력을 장악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해적의 두목을 ‘해군제독’으로 임명하고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만 달라졌다. 어쨌든, 해적의 위상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제 세상 만난 것처럼 해적들은 지중해를 활개치고 다니게 된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헉! 그럼 이제 정말 난리 났네~예전에 해적 신분으로 분탕질하고 다닐 때도 난리였는데 이제는 아예 투르크 해군이라는 직함까지 얻고 공식적으로 해적질을 다니면 유럽 사람들은 정말 큰일 났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당시 투르크가 술탄 메메드 2세(1451~1481)-바예지드 2세(1481~1512)-셀림 1세(1512~1520)-술레이만 1세(혹은 술래이만 大帝 : 1520~1566)로 이어지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유럽에서도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해양 도시국가들이 결코 투르크에 비해 뒤지지 않는 해군력을 보유하면서 지중해 바다를 누볐기 때문이다. (상)권에서 언급했지만 당초에는 미약하기 그지없던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들이 이 시기가 되면 수백 척의 범선과 갤리선을 보유하고 지중해 바다를 당당히 활보하던 시기였으니 해적들이 기고만장해진 것과 맞물려 유럽인들 역시 콧대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빅 매치’가 가능해진 시기가 됐다는 소리다.
이 시기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남아있는 지극히 인간적 군상들이 밀집해 있는 사회로 변모해간다. 로마 교황의 권위는 바닥을 치고 파문이라는 신의 대리인이 내리는 무시무시한 선언은 콧방귀만 이끌어 낼 뿐이었다. 프랑스, 에스파냐, 헝가리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각자 영토국가로 발전해가면서 투르크 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맞섰다. 그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위치를 절감하고 더욱더 종교와 민족, 국가와 사회를 초월한 등거리 외교에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와 투르크 동맹에서 극에 달하는데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에스파냐와 극렬하게 대립했던 프랑스는 투르크와 군사동맹을 맺어 유럽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베네치아가 비록 욕을 먹으면서도 경제동맹은 맺지만 군사동맹은 결코 안 맺었었는데 프랑스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투르크가 동쪽에서 치고 들어오고 프랑스가 유럽 각지에서 에스파냐를 공격해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욕 먹으면서 이룬 동맹도 헛되고 말았으니, 전설적인 해적 두목(훗날 최초의 투르크 해군제독으로 임명된) 바르바로사가 ‘국빈’으로 초대되어 프랑스에 머물면서 온 유럽을 제 집처럼 분탕질하고, 투르크의 군사행동은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배상금이라 해야 하나? 아니 작별선물이 더 낫겠다. 무려 7만 두카두나 되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지불하고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해적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욕 먹고, 돈 버린 셈이다.
이 시기에는 몇몇 유명한 해적 두목들이 등장하는 것이 볼 만하다. ‘바르바로사’를 비롯해서 ‘유대인 시남’과 ‘투르구트’, ‘울루치 알리’까지. 저자는 당시 투르크의 인재 등용 범위가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얘기를 꺼냈다. 맞는 말이다.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이든,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은 알라의 가호를 받으며 이슬람의 집을 넓히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사인데 말이다. 물론 정통 이슬람파가 아니므로 사회적인 제약은 어느 정도 있겠지만 당시 마녀 사냥이나 화형, 구교와 신교의 대립 등으로 혼란스러운 기독교 사회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능력만 있으면 성공하는 사회와 능력이 없어도 신분과 지위, 명성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있다면 어느 사회가 더 빨리 성공하고 발전할까? 그래도 유럽은 다행이다. 베네치아가 기독교를 믿지 않고 이슬람교라는 종교의 교리에 보다 친밀감을 느껴 행동했다면 유럽의 바다는 과연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리고 해군을 조직적으로 정비하지 않고 안일하게 생각한 투르크 역대 술탄들의 성격 역시 유럽 사회를 지키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빨리 끓은 냄비가 빨리 식는 것처럼 투르크 해(적)군은 한동안 지중해를 제 집처럼 활보하다가 일순간 얻어맞기 시작한다.
몰타기사단(로도스기사단의 나중 이름)은 이슬람 해적과 똑같은 짓을 하고 다녀(이슬람 배 약탈, 이슬람 애들 노잡이 등 노예로 쓰기, 이슬람 물건 약탈하기 등) 이슬람 애들을 못살게 굴었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면서 바다에서 만나면 싸움걸기 일쑤였다. (상)권에서부터 나오지만 이슬람 해적들은 규모면이나 기동성면에서는 유럽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장비나 항해기술, 조선 수준, 해상전투 능력 등은 한참 모자랐다. 그런 약점을 간파했기에 이 시기 유럽의 해군들은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상초계업무와 함께 직접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다 위에서의 해상전 뿐만 아니라 상륙전과 진지 점령전까지 병행하면서 말이다. 불과 백여 년 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을 유럽 국가들이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냐, 몰타기사단, 교황청 해군, 제노바, 베네치아 등등 수많은 국가들이 이른바 연합함대를 여러 번 결성해 직접 해적의 근거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戰士와 軍士의 능력 차이가 전투에서 현격하게 드러났다. 비록 투르크의 정예병인 ‘예니체리’까지 동원된 대규모 전투들이 벌어졌지만, 규모나 전투 능력적 면에서 순수한 군인들로 이뤄진 군대와 정규군과 비정규군(해적 혹은 용병, 기타 뜨내기들)이 섞인 군대는 차원이 달랐다.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하느냐, 아니면 일단 불리하면 도망갔다가 다시 이해관계에 따라 모여 싸우느냐는 마인드는 천지차이니까 말이다. 투르크가 왜 해군을 그렇게 해적에만 의존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돈이 많이 드니까, 혹은 지금 당장 결과를 보고 싶으니깐 단기적인 투자에만 의존한 것이겠지만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대규모 해군력으로 제압한 당을 보면 투르크가 그 정도의 정복 욕구는 없었던 것 같다. 뭐 한편으로는 당 태종의 정복 야욕이 술레이만 대제의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해적의 본거지들이 하나둘씩 까이고 에스파냐는 거기에 진지를 구축하고 눌러 앉는다. 그리고 방어만 한다. 저자가 책 뒤에 부록으로 실은「민족에 따라 다른 해적 대책」부분을 보면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제국은 해적을 물리적으로 절멸하는 동시에 그들의 본거지를 점령하고 그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켜 농지를 주고 생계를 해결하게 했다. 조선 초기 해상세력을 억지로 내륙에 정착시켜 농경을 장려한 것이 떠올랐다. 암튼 해적은 근절됐다. 그와 달리 베네치아 공화국은 로마처럼 강력한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자국 선박의 사활이 걸린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만 일단 장악한다. 그들은 해적들의 본거지를 장악하는 대신 그 곳에서 신선한 물품을 보급 받고 선박수리소를 세워 중고령층의 고용을 보장하는 한편 그 동네 젊은이들을 갤리선 노잡이로 채용한다. 로마와 약간 다르지만 상업 활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답게 경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정말 특이했다. 그들은 항구 바깥의 곶 위에 세워진 요새를 장악하고 해적선의 출입을 감시할 뿐 실질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저자는 비판한다. ‘마치 자신들이 잘났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 같다.’ 고 말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에스파냐는 비록 수년~수십 년밖에 차지하지 못 했지만 어쨌든 북아프리카 곳곳에 자신들의 요새를 설치하였고, 지중해에는 이슬람 선박만 보면 어떻게 못 해서 안달이 난 몰타기사단 애들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가 베네치아 해군은 투르크 해적들이 감히 건들지도 못 하는 대상이었으니 예전에 지중해를 주름잡던 투르크 해적들이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다. 거기다가 술레이만 대제가 야심차게 수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한 자그마한 몰타 섬(몰타기사단의 근거지)이 공방전에서 승리를 하면서 투르크 해군은 예전의 위상을 되찾지 못 하는 듯 했다. 그렇게 술레이만 대제가 갔다. 그리고 전혀 술탄이 될 줄 몰랐던 그의 둘째 아들이 셀림 2세로 즉위하였다(첫째 아들인 바예지드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으로 죽었단다). 평생 부유한 왕자로서 쾌락에만 탐닉하던 셀림 2세가 뭘 할 줄 알았겠는가.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대외원정의 화려한 승리로 메우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섬을 공격하기로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포도주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하지만 저자는 얘기한다. 베네치아 영토가 된지 100여 년 동안 키프로스 섬은 최고 명주의 지위를 얻은 포도주를 생산했지만 과연 베네치아인이 경영하지 않고 투르크인이 경영했다면 그렇게 됐을까 하고 말이다. 마치 고려청자가 원 간섭기를 받기 전에는 국제교역에서 최고의 상품가치를 지녔지만 원이 유라시아를 하나로 만들어버린 다음에 더 이상 최고의 상품가치를 얻지 못 했던 것처럼 투르크인이 키프로스 섬을 공략하면 더 이상 그 포도주는 최고 명주가 안 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암튼 이 간단한 이유 때문에 셀림 2세는 10만 명이 넘는 대군과 200척이 넘는 배를 집결시키고, 이 결심은 투르크와 줄타기 외교로서 돈벌이에 활용한 베네치아를 결국 기독교 사회로 돌아서게 했다. 마치 미국 상선을 U-보트 작전으로 침몰시켜 단기적인 이익만 챙기려던 독일이 결국 미국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지닌 괴물을 적으로 돌려버린 것처럼 말이다.
키프로스는 버텼다. 수천 명의 방어군이 10만이 넘는 대군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유럽의 연합함대가 결성됐다. 베네치아 110척, 에스파냐 본국 14척, 에스파냐 지배하의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36척, 에스파냐 해군제독 도리아 소유의 22척, 교황청 12척, 몰타기사단 3척, 사보이아 공국 3척, 기타 3척 등 전체 283척의 선박과 8만 명이 넘는 병력(지휘관과 선언, 노잡이 포함, 기독교 사회에서는 노잡이가 노예가 아니었으므로 난전이 벌어지면 이들이 모두 전력으로 활용되었다)이 집결한 것이다. 이에 맞선 투르크 해군은 소형 갤리선인 ‘푸스타’를 포함한 270척의 대부대. 양측 모두 최고의 베테랑을 지휘관으로 기용하여 맞붙게 된다. 한쪽은 해적, 한쪽은 상설 해군을 유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던 베네치아의 남자들. 저자는 말한다. ‘지중해 세계 최대이자 최후의 해전이 될 레판토 해전’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극적인 양념(?)이 가해진다. 키프로스 섬에 상륙한지 1년여, 투르크측 지휘관인 무스타파 파샤는 항복하면 모두 살려준다는 약속을 하고 성문을 열라고 하였다. 수비대는 속았고 성안의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유럽인들은 분개했다.
저자는 레판토 해전 부분은 그녀가 따로 쓴 책『레판토 해전』을 참고하라고 언급하면서 간단히 넘어갔다. 암튼 1571년 10월 7일, 벌어진 이 전투는 기독교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정면으로 바다 위에서 적과 붙지 않고 게릴라전으로 일관해온 해적들이 얼마나 잘 싸웠을까 싶기도 하다. 투르크측 전사자는 8천명이었으며 여기에는 총사령관 알리 파샤를 비롯한 투르크 궁정 고관의 대부분, 예니체리 군단장과 그 부하 400명, 투르크가 공략하여 영토로 삼은 레스보스 · 키오스 · 네그로폰테 · 로도스 섬의 총독들, 바르바로사의 두 아들, 우익 총대장(해적) 샬루크 등이 포함됐다. 포로는 1만 명이었으며, 침몰한 배는 갤리선만 80척이었고 137척의 배가 나포됐다. 물론 기독교측도 피해는 컸다. 전사자는 7,500명에 부상자가 8,000명이었으니 말이다. 그 중 50% 정도가 모두 베네치아의 피해수치였으니 레판토 해전은 실상 베네치아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끌어낼 수 없는 승리였을 것이다(필자는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레판토 해전의 주력이 에스파냐인 줄 알았다. 창피하게도. 저자는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에스파냐 역시 투르크처럼 해군력이 약한 나라라고, 무적함대가 쉽게 깨진 것처럼 베네치아 없는 해군은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이런 과감한 표현 좋았다).
이제 책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레판토 해전 이후 역시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는 다시 투르크와 극비 동맹을 맺어 이후 70여 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물론 베네치아는 계속 돈 버는 기계로 번성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하면서 지중해는 더 이상 유럽의 중심 패권지가 아니었다. 이제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빛나는 외교와 절묘한 정치 감각을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베네치아인들은 지리적으로 불리했던 것도 있었다. 영국과 같은 위치에서 베네치아인들이 활동했다면 어찌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if)’은 없으니 넘어가자.
저자는 마무리 짓는다. 왜 지중해 연안지방이 오늘날은 관광지로 유명한데 하필이면 바로크 시대 건물이 제일 오래됐고 19세기 이후의 건물들이 많은지 반문하면서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7세기부터 18세기까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드나들던 해적들 때문이었다. 이 해적을 빼고 지중해역사를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그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열게 해준 저자에게 무한한 존경과 고마움을 다시 한 번 표하고 싶다. 어쨌든 1740년 투르크는 해적행위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해적금지령’을 내렸고, 1816년에는 해적의 주요 근거지였던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에서도 해적금지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화하면서 해적은 근절되기 시작했고 결국 1856년 코르사로든, 피라타든 모든 해적행위를 엄금한다는 ‘파리 선언’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들이 극성인데 요즘 같은 시기에도 해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도 저자는 책을 손에서 못 놓게 만들었다. 또 다른 부록으로 그녀가 지금까지 썼던 다른 책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안 읽었으면 빨리 가서 이것부터 읽고 오라고 명령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필자도 모르게 그 중 몇 권을 구입하고 말았다. 압도당해서였나? 어쨌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일을 이 책과 함께 겪어서 또한 즐겁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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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서평을 보면 그다지 호평을 받고 있지 못 하고 있다. 필자야 기존의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대부분 기존의 책들을 짜집기한 흔적이 많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어서 말이다. 흠. 이래서 인터넷에서 여러 의견을 접하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필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기에 과감하게 별 5개를 주고 싶다. ^^
글쎄요....하편에선 돈의 흐름으로 형식을 조금 바꿨으면 했는데...상편 보다가 아쉬운 점이 경제 (돈의 흐름)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대부분의 견해들이...기존의 책들을 짜집기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저자의 다른 책들을 제가 보지 않았지만 그리운길님이 말씀하시는 경제구조에 대해서 다른 책에서 설명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실제 상편에서는 지중해 북과 남의 경제구조라든가, 교역관계라든가 뭐 이런 것들이 자세히 나와있어 흥미로웠거든요. 그리운길님 견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 아마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이 다음에는 대서양시대로 넘어가기 때문에 지중해와는 별도로 다뤄야 한다는 논지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전체적인 경제부분도 상권과는 크게 안 바뀐 것 같아서 말이죠.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도움되셨다면 다행입니다. ^^
저도 이 책은 읽었는데, 시오노의 관점은 서구 학자들과 매우 판이합니다. 이슬람 문명이 유럽에게 미친 영향..특히 르네상스의 발생에 이슬람이 미친 영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슬람의 침공이 유럽에게 큰 참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유럽의 기독교 문화 발전과 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에드워드 기번이 주장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시오노는 전문 역사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흥미 위주의 서술을 위주로 하는 일본인이라서, 중세 지중해가 단순히 기독교와 이슬람의 어리석은 종교 전쟁으로 일관했다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과 공존을 통해서 현대 유럽 문명의 토대가 이뤄졌다고 평가하죠.
저는 이런 사실 때문에 한국의 많은 분들이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를 맹신하는 사실이 좀 걱정스럽네요.
아무래도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인기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찰리브라운님 말씀대로 역사를 전공하거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단순히 교양서로 읽지, 그 안에서 절대적인 진리나 역사적 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대중 교양서이고, 대중 교양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오노 나나미가 아니라 그 누가 됐든지간데, 로마사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와 생각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단점을 굳이 부각시킬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으니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