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강론 : 개미와 거미/ 한국천주교회사>(9.3.일)
1. 9월 순교자성월 첫 주일입니다. 이번 한 달간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도록 열심히 노력하자는 의미에서 ‘개미와 거미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개미야, 너 뭐하니?” - “짐 나르고 있어.” - “좀 쉬었다 하지. 이것 봐. 나는 가만히 있어도 먹이가 걸려주잖아!” - “넌 좋겠다.” - “하긴 넌 줄을 못 만들지? 힘들겠구나! 참 불쌍하다.”
거미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개미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개미는 거미 얘기를 들으며 거미가 너무 부러워 엄마에게 불평했습니다. “엄마! 왜 우리는 거미처럼 줄을 못 만드는 거야?” - “무슨 소리 하고 있니?” - “거미는 가만히 있어도 먹이가 와서 걸려 주잖아. 난 이렇게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 - “거미라고 좋은 것만은 아니야. 거미는 굶을 때가 정말 많아! 늘 벌레가 와서 거미줄에 걸려주는 줄 알아? 배고플 때가 많아. 그래서 나는 개미가 좋아. 열심히 일하자. 그게 더 좋은 거야.”
거미줄을 쳐놓고 가만히 있어도 먹이가 걸려들기 때문에 거미의 삶이 더 좋아 보이지만, 거미처럼 사는 사람은 게으르고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불란서 리용 유학 때 돈이 없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거나, 사고 싶은 것을 살 수가 없었고, 서른이 넘었는데도 언제 신부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석사학위를 최대한 받고 빨리 귀국하자는 결심으로 의자에 허리를 묶고 공부해서 2년 4개월 만에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며 유학 마치고 돌아왔는데 신부가 되기까지 1년을 더 기다렸습니다. 아무튼 돈이 없던 시절을 되새기며 열심히 저축했고, 20년 적금을 들어, 현재의 모하비 차를 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미처럼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2. 그러면 순교자성월을 맞아, 한국천주교회사의 실화 한 가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국천주교회사 전문가 김길수 교수님이 당신의 강의를 재구성해서 < 하늘로 가는 나그네 >를 출간하셨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승훈과 이벽에 관한 실화’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이벽은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는데, 1777년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천진암 주어사에서 천주교에 대해 공부했고, 1784년에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승훈과 이벽이 신앙실천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림은 크게 걱정했습니다. 젊은 선비들이 전통적인 유교를 따르지 않고, 서학(西學)이라는 이상한 것을 들여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 천주교 교리대로 살아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대 최대의 유림학자 이가환이 이벽을 설득해보기로 나섰습니다. 전통철학의 대가였던 그가 천주교 대표 이벽을 만난다는 것은 전통문화와 계시 진리가 처음으로 만나서 논쟁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들의 토론날짜가 정해졌습니다. 당시에 서학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 있다는 선비는 다 참석했습니다. 거기서 두 대가(大家)가 만나서 사흘 밤낮 토론했습니다. 이벽은 서른의 소장파였고, 이가환은 당대를 대표하는 나이 든 선비였습니다. 그들은 여러 문제에 대해 무제한 토론했습니다.
그런데 100년의 박해 동안 그때의 기록이 전부 사라졌는데, 다행스럽게도 정약용의 묘비에 남아 있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가환의 논지는 먼지처럼 흩어졌고, 이벽의 논증은 태양처럼 빛나고, 바람처럼 몰아치며 환도처럼 끊어냈다.” 이 내용으로 볼 때, 정약용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토론 3일째 저녁, 이가환이 이벽한테 자네 말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정말 양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이렇게 안 하겠죠? 어른 체면에 젊은이한테 토론에 진다니 인정하겠습니까? 아무튼 그때 이가환의 말이 명언이었습니다. “자네 말이 옳네. 그렇지만 그 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불행이 올 것이 자명한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튼 토론에 이긴 이벽은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자기 논리를 인정했으니, 이가환이 천주교 신자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연구하고 공부만 했지 믿지 않아서 아주 섭섭했습니다. 사흘 밤낮 토론해서 천주교 논리가 옳다고 인정했으면 천주교를 믿어야지, 왜 안 믿느냐고요. 물론 이가환은 나중에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그때 이벽은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인정한다고 신자가 되는 건 아니구나. 교리대로 살아야 신자다.’는 생각입니다. 그 후 유학자인 이기양과 또 토론했지만, 이벽은 쓸데없는 토론보다 열심히 살며 천주교를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계속 공부하다 의문이 생긴 이벽은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책을 구해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몇 달 두문불출하며 그 책을 읽은 이벽은 이승훈과 정약용에게 말했습니다. “이건 하느님이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 소명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은 지금도 하기 어려운 신앙고백입니다. 이벽은 “구세주가 우리 민족에게 오시는 길을 닦겠다.”라며 세례명을 ‘세례자 요한’이라 정했고, 그 이름에 맞게 천주교를 증언하다가 집안에서 순교했는데,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3. 지금은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 약간 알고 있지만, 한국천주교회사를 제일 먼저 책으로 썼던 분은 한국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본 적도 없고, 한국인을 본 적도 없는 프랑스인 달레 신부였습니다. 그는 < 한국천주교회사 >에 대해 쓴 이유를, 너무도 아름다운 한국순교자들의 삶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주님, 이 위대한 한국순교자들의 인내를 주님만이 갚아주실 수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순교자들이 있는 이 민족을 주님께서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지요?”라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달레 신부님이 기도와 눈물로 썼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접하면서 우리는 감동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그분들의 삶과 죽음이 주님 안에서 하나였던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