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후의 삶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죽은 후 영혼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능하면 최대한 그 점에 대해 많이 알고 싶고요.
그렇다면 네 갈증이 채워질 때까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앞에서 나는, 벌어지는 일 모두가 너희가 원해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다. 너희는 몸을 지니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몸에서 벗어나 있을 때도,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
처음에는 너희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해 자신의 현실을 의식하면서 창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서로 다른 두 에너지인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이나 집단의식 중 하나가 너희 체험을 창조할 것이다.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이 집단의식보다 강한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반면에 너희가 집단의식을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내면화하는 정도에 따라, 바로 그 정도만큼, 너희는 그것을 자신의 현실로 체험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지금 삶에서 소위 현실이란 걸 창조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너희는 삶에서 언제나 자기 앞에 다음 세 가지 선택을 마주한다. 1. 너희는 조절되지 않은 자기 생각들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고, 2. 창조력을 지닌 자기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으며, 3. 집단의식이 그 순간을 창조하게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지금 삶에서 너희는 개인의 자각을 의식하면서 창조하는 쪽이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그 모든 걸 전제로 하면, 너희는 자주 자신의 이해(理解)를 틀린 걸로 치곤 한다. 이 때문에 집단의식에 굴복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렇게 한다.
반면에 처음으로 소위 사후(死後)라는 순간으로 들어갔을 때, 너희가 주변에서 보는 모든 걸 (아마 너희로서는 믿지 못할) 전제로 한다면, 너희는 아마도 집단의식에 굴복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 개인의 이해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너희는 그것들에 매달리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나니, 낮은 의식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자기 개인의 이해에 머무는 편이 너희에게 이롭고, 높은 의식에 휩싸여 있을 때는 집단의식에 굴복하는 편이 너희에게 더 이롭다. 그러니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을 찾는 게 현명하리니, 너희가 교제하는 동아리(집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소위 사후에는 너희가 이런 등급표를 놓고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순식간에, 그야말로 자동으로,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과 높은 의식 자체에 둘러싸일 것이기에. 그럼에도 자신이 그토록 크나큰 사랑에 둘러싸인 걸 너희가 모를 수는 있다. 당장에는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너희에게는 그런 상황을 자신이 ‘벌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자신이 그 순간에 아무 운이나 작용하게 하는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너희가 체험하는 건 죽는 상태에서 너희가 지녔던 의식이다.
너희 중 일부는 죽는 게 어떤 건지 알지 못하면서도 기대를 갖는다. 너희는 평생 동안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 왔다. 너희가 ‘죽으면’ 그런 생각들이 뚜렷이 드러나리니, 너희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갑자기 깨닫는다. realize (현실로 만든다. make real). 그것은 너희의 가장 강력한 생각들, 너희가 가장 열렬하게 지녀왔던 생각들, 즉 삶에서 항상 그러했듯이 우세해질 생각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 수도 있겠군요. 그 사람이 평생 동안 지옥을 가장 확실하게 존재하는 장소로 여겼고, 신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며, ‘겨에서 밀을’, ‘양에서 염소를’ 가려낼 것이고, 자신이 저지른 온갖 일들이 다 신을 화나게 했으니, 자신은 당연히 ‘지옥으로 가리라’ 믿었다면, 그는 지옥으로 가겠군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천벌의 불길 속에 던져질 테고요. 무슨 수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 대화를 진행하면서 몇 번이나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우리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현실이라도 창조할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니 지옥불과 천벌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게 되는 거죠.
‘궁극의 현실’에서는 ‘존재’ 자체를 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묘사하는 식의 지옥 체험을 포함해서, 너희가 선택하는 모든 하위 현실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네 지적은 정확하다. 나는 이 대화를 통틀어 어디에서도 너희가 지옥을 체험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희가 체험하는 대부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너희는 그것들을 체험한다.
(중략)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다만 그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걸 알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지옥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지옥을 체험한다면, 이 지옥은 뭐가 다른 겁니까?
너희 스스로 창조한 현실에 남아 있는 한,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런 현실을 영원히 창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소위 ‘나노세컨드’(10억분의 1초― 옮긴이)라 부르는 극히 짧은 순간밖에는 그것을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자신의 상상이라는 은밀한 영역에서조차 슬픔이나 고통의 자리를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평생 동안 그런 자리가 있고, 제가 저지른 어떤 짓 때문에 그런 자리에 던져져도 마땅하다고 믿어왔다면 무엇이 영원히 그런 곳을 창조하는 저 자신을 막아줄 수 있습니까?
네 앎과 이해가. 이승에서 너희의 다음 번 순간이 너희가 지난번 순간에 얻은 새로운 이해들에서 창조되듯이, 소위 저승에서도 너희는 앞서 알고 이해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순간을 창조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거기서 금방 알고 이해하게 될 한 가지는, 너희는 언제나 자신이 체험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후에는 결과들이 즉각 나타나기 때문이니, 너희라도 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런 생각이 창조해내는 체험 사이의 연결 관계를 놓칠 리 없을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건 자신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행복한데,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무서운지, 또 왜 어떤 사람들의 체험은 의미심장한데, 다른 사람들의 체험은 실상 무의미한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죽고 난 직후의 순간들에 벌어지는 상황을 놓고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하는 지도요.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한 임사(臨死)체험을 하고 돌아와 두 번 다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겁에 질려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사악한 어둠의 세력들을 만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면서요.
영혼은 마음의 가장 강력한 제안에 반응하고 그것을 재창조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빚어낸다. 어떤 영혼들은 그런 체험 속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것을 아주 현실처럼 만든다. 심지어 몸을 가진 동안의 체험들 -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지만, - 에 머무를 때조차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반면에 재빨리 자신을 적응시켜 그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새로운 생각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당장에 새로운 체험들로 옮아가는 영혼들도 있다.
- 신과 나눈 이야기 3권 114 -122 쪽 |
첫댓글 고맙습니다
어떤 영혼들은 그런 체험 속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그것을 아주 현실처럼 만든다.
심지어 몸을 가진 동안의 체험들 - 똑같이 비현실적이고 일시적이지만, - 에
머무를 때조차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