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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 발굴 유적지, 고대에 제사 의례를 올린 제사터로 본다.
앙소 채도 - 여인두상 항아리
옥으로 만든 여인 임신상
앙소문화기의 소조상들
도기에 채색을 하여 그림을 그리고, 문양을 나타내던 앙소문화인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직접 흙으로 빚어서 굽었다. 가장 많이 출토되는 형상은 사람의 머리, 돼지 그리고 양이다. 돼지와 양은 앙소인에게 식량을 제공해주므로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을 것이다. 앙소문화기에는 앙소인만이 아니고 중국의 전 지역에서 소조상을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사람의 머리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유럽의 고대인인 캘트인들은 머리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사람의 머리를 조각으로 많이 남겼다. 앙소문화인들도 그렇게 믿었을까?
나체 여인상은 모계사회의 모신신앙과 관계있다. 인체상을 두고 단순히 미술품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신상이거나, 샤먼으로서 종교 의례와 관계가 깊다고 한다.
만주 요령성의 객좌기 대성자진의 동남쪽에 동취산이 있다. 동취산에서 앙소문화기가 거의 끝나는 시기쯤인 5천 년 전의 유적을 발굴하였다(1984). 고고학자의 시선을 끈 것은 약 20여기에 달하는 소조 인체상이었다. 그 중에 2 건은 임신을 한 여인 나체상의 토로소 이었다. 크기는 겨우 5-6cm 정도로 작았지만 표현 기법은 아주 사실적이었다. 매우 큰 소조상도 발굴하였다. 이 시대에는 이미 인체 소조상을 만드는 기술이 꽤 높은 수준까지 발전해 있었다.
동취산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앙소문화기가 끝이 나고, 하은주 시대로 이어주는 중간 다리의 역할을 하는 문화라고 하였다. 이 유적지는 산등성이를 따라서 아래로 뻗어 내리다가 끝이 날 쯤의 둔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둔덕 위에 자리 잡은 유적지는 돌로서 사각형으로 쌓아 올렸다. 한 눈에 건물지 임을 알아 볼 수 있다. 앞부분에는 작은 돌로 질서정연하게 쌓아서 반듯한 원 모양의 기단을 만들었다. 자갈의 크기는 전체적으로 2.5cm 전후이고, 고른 크기였다. 제사 유적지가 분명하였다. 인체상은 무덤이 아니고 제사 유적지인 제단에서 출토되었다.
산 아래에 질펀하게 펼쳐 있는 들판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제사 의례를 올렸을 것이다. 농사를 시작하는 봄철이나 수확을 거두는 가을에 이곳에 와서 제사를 올렸던 성소이었으리라고 추정 한다. 이 성소는 출토된 여인상으로 보아서 여신 즉 지모신을 모신 성소였다. 출산신인 동시에 농업신을 모신 제사터이었다. 임신을 한 소형 소조상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였던 모계사회의 흔적을 보여준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모계사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대는 8천-6천 년 전의 앙소문화기이다. 수렵-채취 생활에서 농경의 정착 생활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인체 소상에서 거의 실물 크기인 두부 형상까지 다양한 형태의 소조상이 출토되었다. 이 시대에 만든 인체 소조상에는 한,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임신상이 많다. 물이나 술을 담는 용기로 제작하였다고 본다. 특히 주전자 모양을 한 용기는 주전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감숙성에서 발굴한 12.3cm 크기의 여인 두부상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린 모습이다. 마치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를 때의 입 모습이다. 채도에서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도안에서 표현하였던 입의 모습이 연상된다. 두부의 머리카락은 잘 다듬어져 있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여인 소상은 요령성의 홍산문화권에서 발굴한 것들이 유명하다. 1982년 요령성의 객좌현에 있는 여신을 모신 제단에서 발굴한 여인 나체상은 머리와 무릎 아래 부분은 떨어져나가서 마치 토로소 작품 같다. 6천 년 전에 만든 작품이다. 미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인체의 비례, 머리의 형태, 채색 그림의 선과 색감에서도 아주 뛰어나다. 오른 쪽 팔은 떨어져 나갔고 왼쪽 팔은 팔꿈치 부위를 구부려서 손이 복부에 닿도록 하였다. 그러나 발굴한 소조상은 손목 부위부터 망가지고 없다. 왼쪽과 오른쪽 다리는 아래 부분이 서로 겹치도록 하여 책상다리 자세를 취하였다. 보기에도 불편하고, 만들기도 어려운 책상다리 자세를 왜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의례를 치룰 때의 특정의 자세인지도 모른다.
왼쪽 손이 닿아 있는 복부의 부위에는 아가리가 있다. 술을 담았으리라고 추정하는 항아리(주전자?:)을 여인의 나체상으로 만든 이유도 알 수 없다. 다만 여신을 모신 제단에서 출토된 점으로 보아 모신 신앙과 관계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요령성 서부의 능원형과 건평현의 경계지역인 우하량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여신묘와 적석총을 발굴하였다.(1986년, 文物志, 8월호) 여신묘는 중심이 되는 방의 주위에 곁방이 딸려 있었다. 전실과 후실을 연결하는 건축물도 있었다. 벽에는 홍갈색, 황색, 백색으로 그린 기하학적인 도안으로 장식하였다. 아마도 중국 최초의 벽화라고 추정하는 유물이다.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이 된 여인 두상도 출토하였다. 높이가 22.5cm으로 실재의 인물 크기와 같다. 머리의 위쪽 부분과 왼쪽 귀는 훼손되어서 남아 있지 않았다. 얼굴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상만으로는 여자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주변에 흩어져 있는 인물상의 잔편들이 여성임을 말해 주었다. 얼굴이 주는 전체적인 인상은 신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 있다.
흩어져 있는 인물상 잔편을 모으면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노, 소를 나타내는 인물상도 있었고, 서로 크기가 다른 잔편도 흩어져 있었다. 적어도 5-6명의 인물상이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중심의 되는 방의 가운데에는 사람의 크기보다 세 배나 큰 상이 모서져 있었다. 좌우와 주변에는 존엄한 차례대로 배치하였으리라 판단되었다. 신상들을 배치한 양태는 훗날 묘당에 모신 신상의 방식과 아주 유사하였다. 아마도 사당에 모시는 위패의 배열 방식도 뿌리는 신상의 배치이었을 것이다.
이 외에 저룡(돼지 형상의 용)을 위시하여 큰 날짐승들, 동물 신상, 물신상도 정교하게 만들어서 배치하였다. 제사용 그릇도 발굴하였다. 5-6천 년 전에 이미 제사 의례가 있었음을 강력하게 말해 주는 유적이다.
조소상의 잔편들을 근거하여 여신상을 빚는 방법도 알 수 있었다. 먼저 목재로 대강의 골격을 만들었다. 나무 위에 볏짚으로 산 후에 진흙을 붙여서 형상을 만들었다. 겉 부분은 고운 흙으로 매끄럽게 처리하였다. 그 위에 채색을 하여 신상을 표현하였다. 이 시대에 신상을 만든 제작 과정은 역사시대 이후에, 그리고 지금의 제작 기법과 같다.
흙 속에는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뼛조각도 발견하였다.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종교적 의미란 제물로 사람을 바쳤는지, 아닌 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홍산문화보다 년대가 빠른 약 7천 년 전의 유적지에서도 여신상을 발굴하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이미 여신 숭배 신앙이 퍼져 있었다. 임신한 모습을 아주 구체적으롷 표현하였다. 임신상은 모두 두 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쭈구려서 앉은 자세도 같다. 이런 자세를 모두 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례와 관계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앙소문화 시대에 만든 사람 머리 형상은 대부분이 도기의 아가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소녀 형상이 다수를 차지한다.
1953년에 섬서성의 상현에서 출토한 인체상의 주전자는 여성적인 얼굴로서 매우 아름다웠다. 주전자의 불룩한 부분은 마치 임신한 여인의 복부를 연상시켰다. 목의 뒷 부분에 작은 아가리가 뚫여 있었다. 여인 형상으로 주전자를 만든 이유가 단순히 장식을 위해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원시 종교에서 주술적인 용도로 만들었다. 임신한 여인상은 주술적인 힘을 지녔음을 뜻한다. 여신을 모시는 제사 의례에서 제기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다. 전체적인 모양에서 여인의 형상을 하였음은 원시종교에서 무교적인 의미를 지녔음이 틀림없다.
신석기 초기에는 거의 대부분이 여인 인체상이다. 신석기 후기로 가면 도기에서 남성 인체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모계사회에 변화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신호이다. 청도성 낙도현의 유만 유적지는 후기 신석기 문화인 마가요 문화 유적지이다. 이곳에서 인체상 도기를 발굴하였다., 도기의 입 부위에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인물상으로 표현하였다. 머리 부위는 크게 하고, 팔과 다리는 간략하게 만들었다. 배꼽, 유방, 성기는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성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서 양성이 합체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성결합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특히 마가요 문화 유적지에서는 얼굴 모양이 남자의 특성을 지닌 인체상을 많이 발굴하였다. 이처럼 인체상 도기에서 성 형태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는 것을 두고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말하였다.
지금까지 발굴한 앙소기의 도자기 유물을 통하여 신석기 시대의 사회가 서서히 바뀌고 있음을 엿 보았다. 이제는 강채 마을을 표본으로 삼아 신석기 시대의 중국인 삶을 엿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라는 전설시대부터 시작한다. 삼황과 오제는 남성 부족장이다. 부계사회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중국 역사는 부계사회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앙소문화기는 모계사회라고 함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중국사는 삼황오제의 전설시대보다 훨씬 앞서서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고고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서 중국의 전설이전 사회를 복원해보기로 하자.
고고-인류학에서는 인류의 진화와 사회의 변화를 길고 긴 수렵-채취 사회를 거치고 나서 농경사회로 접어든다고 말한다. 무리를 지어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 수렵과 채취를 하는 사회를 유단(Band) 사회라고 말한다. 25명의 전후가 되는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공동의 조상을 구심점으로 하는 씨족 사회이다. 씨족 집단인 여러 유단 사회가 모여서 친족 집단을 규합하여 만든 사회가 부족 사회이다. 규모가 큰 집단사회를 만든다. 부족원은 일반적으로 2천 명에서 3천 명으로 결집하여 조직하였다. 이들이 모두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서 한 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었다. 1-200명의 소집단이 모여 씨족 마을을 이루고, 여러 씨족 집단이 모여서 부족 집단을 이루었다.
1-200명이 모여서 만든 소집단의 씨족 마을이 앙소마을의 강채 마을이다. 유단사회에서 부족사회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의 마을이 앙소문화기의 강채마을이다. 강채 마을은 농경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수렵과 채취도 하면서 삶을 꾸려갔다. 이 시기의 사회는 모자 관계가 중심축을 이룬다. 유목사회에서는 남자들은 떠돌아 다니므로 아이의 양육은 여자의 몫이었다. 자연히 가족은 어머니-아들의 축으로 형성되고, 어머니가 가족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에서 농경이 최초로 이루어진 지역으로는 양즈강 유역의 벼농사 지역과 황허 유역의 밭농사 지역으로 꼽는다. 가장 잘 알려진 중국의 초기의 농경문화는 앙소문화이다. 반파와 강채 마을은 앙소문화의 대표적인 농경문화를 보여준다. 반파나 강채마을은 비옥한 강의 유역에서 범람하는 평야 지대를 내려다 보는 언덕베기에 형성되었다. 이때 형성된 문화는 중국의 미술문화를 위시하여 찐 음식을 위주로 하는 중국의 음식문화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통의 모체가 되어 있다.
앙소문화는 모계 씨족 공동체가 바탕이다. 앙소문화기에는 남자가 수렵과 어로에 종사하고 여자는 채집과 취사, 불씨의 보존, 직조 및 의복 만들기, 가사와 자녀 양육을 맡았다. 여자들은 오래 동안의 채집 활동을 통하여 식물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곡물 재배에서 지도적 역할을 행사하였다. 여자들이 주도하는 농경 생산이 남자들이 취득하는 수렵의 포획물보다 더 중요해지면서 마을 공동쳊는 여성이 중심의 역할을 하였다. 지도자의 지위도 여성이 누렸다.
혈연을 매개로 조직하는 씨족사회는 모계사회이다. 어머니의 혈통을 따라서 모인 사회이다. 씨족의 우두머리라고 하더라도 직접 생산활동에 참여하여 노동을 하였다. 부계사회에서 나타나는 우두머리의 특권이 아직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공동체를 잘 이끌어가지 못 할 때는 마을 주민은 언제든지 지도자를 바꿀 수 있었다. 마을을 운영하거나 주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어떤 법률적인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풍습과 관습에 의존하였다. 여성의 생산 수단은 존중되었고, 농경 기법의 승계도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이어졌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원시 모계 씨족사회는 평등사회였다.
강채마을은 가마터, 가축우리 우물을 마을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부락민 사이에도 귀천이 없었다. 강채 마을은 토굴식, 반 토굴식, 지상식의 가옥을 축조하여 생활하였다. 농기구는 목재와 석재를 사용하였다. 농작물은 조와 기장이 주 작물이었다. 가축은 ,돼지와 개였다. 앙소문화기의 주민은 강변에 살면서 그물을 만들어서 고기를 잡았다.
중국 미술사를 이야기 하면서 앙소문화인이 만든 채도부터 다루었다. 앞선 구석기 문화에 비하여 앙소문화인의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도기 제작을 담당하는 전문 직업인이 이미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수공업이 나타나면서 기술자 집단이 형성되고 방직과 직조의 기술자도 나타났다.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직업의 분화가 나타났다.
묘지 안의 사망자 숫자와 가옥의 숫자로 계산해 본 강채 마을의 대강의 인구는 약 100명 전후로 추산하였다. 주변에는 이 정도 규모를 보이는 마을 공동체가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이들은 각각 자기네의 공동 묘지도 가지고 있었다. 다섯 개의 씨족 마을이 모여서 더 큰 부족 공동체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앙소 문화기의 묘지를 통해서도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씨족 구성원은 공동 작업을 통하여 씨족의 친밀도를 높여 갔을 것이다. 생산 수단이 열악하였으므로 매일 매일 고된 노동으로 생활은 고달팠을 것이다. 평균 수명도 20세 전후에 불과 하였다. 이들이 죽으면 씨족 공동 묘지에 매장하였다. 상례는 대체로 평등하였다. 묘지를 거주지에 인접하여 만들었다. 합장 묘가 많았다. 지하에 묻혀 있는 공동묘지를 보면 지상의 혈연관계를 그대로 재현하였다.
시신을 안치한 방향이나 자세 등을 보면 일정한 규범이 있었다. 반파의 경우는 시신을 서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이 찾아가는 곳이 서쪽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정한다. 대다수의 묘지는 일인 묘이거나, 동성간의 합장묘이다. 남, 녀를 합장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남, 녀의 대우 가정(부부 중심의 가정)이 아직까지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묘지의 부장품을 보면 여성의 묘지에 다소 간에 더 풍부하였다. 노인의 무덤을 좀 더 정성을 들여서 만든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무덤의 형식으로 보아서 여성이 조금 더 우대를 받은 듯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등한 사회이었음을 보여 준다.
강채 마을은 주변에 해자를 만들어서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초기에는 해자가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 들짐승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해자의 깊이가 점점 깊어져 갔다. 마침내는 성루까지 만들었다. 성루를 만든 것은 사람의 침입을 방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앙소문화가 끝나가는 시점이 되면 마을과 마을, 부족과 부족 사이에 전쟁이랄 수 있는 심한 다툼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마을을 외부의 침입에서 방어하기 위해서는 여성 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하다. 여성이 지도자의 지위를 누리는 모계사회의 조직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았다. 성루가 나타나는 시기인 앙소문화 말기는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는 시점이라고 추정한다.
중국에서 최초로 성루가 나타나는 시기와 곳은 6천 년 전의 호남성 예현의 성두산이다. 작은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7만 6천 평방비터이다.) 성지 안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종교 행사가 베풀어졌음을 말한다. 고대 사회에서 종교 행사는 미술의 직접적인 창출 행위였다.
황허 지역에는 정주의 서산에 있는 서산성에 약 5천 년 전에 성루를 축성하였다. 축성의 기법은 판축법을 최초로 사용한 선진 기법이었다. 이후로 수 천 년 동안 판축법은 축성법의 기본이 되었다.
5천 년 전이라면 중국 역사가 고대 국가인 하은주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부족의 군장사회가 국가로 진입하기 직전이다. 중국의 역사는 삼황오제라는 전설적인 부족장부터 다룬다. 신화시대에서 전설시대로 접어든다고도 말한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 이전의 신화나 전설은 용산문화를 뿌리로 한다고 말한다. 삼황오제 이전의 신화시대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 앙소문화기 이다. 그렇다면 역사이전의, 전설이전의 중국사를 신화를 통해서 구성해 보자.
중국의 신화에는 최초로 사람을 만든 여와라는 여신에 관한 신화가 있다. 여와 신화에 의하면 여와 이전에 이미 이 세상은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 사람은 살지 않았을 뿐이다. 황량하고 쓸쓸한 광야를 지나던 여와는 이 세상에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으로 사람의 형사을 만들었다. 여와가 만들어 낸 남자와 여자는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즐거운 듯이 깔깔거리기도 하고, 작난질을 하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 소리는 여와의 쓸쓸한 기분을 쓸어내어 버렸다. 사람을 수없이 만들었으나 이제는 지치게 되었다. 이에 여와는 남자와 여자가 자기네들의 힘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혼인제도란 것도 만들었다.
이것이 여와의 인류 창조 설화이다. 이것은 여신이 창조와 생산, 그리고 풍요를 담당하였던 모계사회의 모습을 흔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이다. 남성 우월주의가 중국 사회를 지배하자 여신인 여와는 푸대접을 받는다. 최고 신의 자리에서 추방을 당하고 복희라는 최고 신의 배우자로 만족해야만 하였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여신의 지위가 약해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여와는 중국인 사고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살아남아서 중국 미술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원시 사회일수록 종교 의례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다. 도기로 만든 여인 소조상을 이야기 하면서 여신 신앙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배경이 되는 사회를 짚어 보았다.
이제는 여신상을 통해서 고대 중국인의 종교 의례를 더듬어 보자. 홍산문화 시대에는 이미 대우혼(부주 중심의 가정 제도) 제도가 정착하였으나, 이때까지도 여신의 지위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신화에서 여신이 권능이 누리는 시대로는 홍산문화 시기로 본다. 이후로 점차 남신의 지위는 올라가고, 여신의 지위는 미끄러진다. 여신의 지위가 아무리 추락하더라도 남신이 도저히 떠맡을 수 없는 권능도 있다. 남신이 생육의 기능을 떠 맡을 수 없으므로 이후에도 생육신으로서, 농경신으로서의 지위는 지켰다. 여와가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는 여인 소조상이 많이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다. 더욱이 임신상은 고대인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농업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요령성의 동취산에서 발굴한 홍산문화의 제사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여기서 도제의 소조 여인상을 출토하였다. 이곳이 제단이므로 지모신상이다. 지모신상이 출토된 곳에서 사람의 뼈도 함께 묻혀 있었다. 무덤이 아닌 곳에서 인골을 발굴하였다는 것은 제사 의례와 관련지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돼지와 사슴의 뼈도 발굴하였다. 일반적으로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는 제물을 땅에 묻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서 돼지와 양과 더불어 인신공회도 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앙소문화기의 무덤에서는 인신공회의 흔적을 아직까지 찾지 못 하였다. 제사 의례에도 어떤 변화가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대략 4-5천 년 전에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가 나타난다. 부계사회의 문화라고 보는 대문구 문화, 용산 문화, 제가 문화의 유적에는 머리가 없는 시신이 발굴됨으로 인신공회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홍산문화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부계사회가 되면서 제사의례에 인신공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첫댓글 홍산문화는 만주 요령성에 발달한 문화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관계가 가장 깊은 문화라고 본다. 홍산문화에 여신신앙이 왕성하였음을 발굴 유물로 알 수 있다. 아마도 우리의 영동 할매, 삼신 할매 또는 무속의 여러 신들의 뿌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