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5월 5일은 단오날
더위 견디기·풍년 바라며 연 행사들
여인들이 창포물로 머리 감거나 창포 뿌리를 비녀처럼 꽂는 '단오장'
신윤복·김홍도도 그린 생생한 풍속화… 조선 후기 평민·양반 모두 좋아했죠
'단오 세시풍속 체험 행사에서 창포물에 머리 감는 외국인' '단오 때 즐겨 먹는 수리취떡 만들기 체험' '단오 앞두고 전통 민속놀이 한마당 행사 개최'. 단오가 다가오면 이런 뉴스를 자주 들었지요? 올해는 6월 10일이 바로 '단오(端午)'랍니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더운 여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있는 절기예요. 우리 조상은 이날을 큰 명절로 여기며, 한 해 더위를 잘 견디고 모내기를 끝낸 농사가 풍년이 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벌였어요. 단오를 맞아 이번 주에는 1790년 무렵의 조선시대로 역사 여행을 떠날까 해요. 그 당시 단옷날의 풍경을 멋지게 그린 화가가 있었거든요.
◇ 단옷날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화가
"자네, 혜원이 그린 그림 중에 여인들이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그림 봤나?"
"단옷날의 어느 시냇가 풍경을 그린 그림 말이지. 선이 섬세하고 색이 무척 아름답지."
"난 혜원의 그림에 홀딱 반했네."
'혜원(蕙園)'은 화가 신윤복의 호(號)예요. 호는 옛날 사람들이 본명이나 자(字) 이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해 지은 이름이지요. 신윤복은 조선 정조 때의 도화서 화원으로 인물화나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뛰어난 풍속화도 여러 개 남겼어요. 풍속화 중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만남, 조선 여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즐겨 그렸지요. 도화서(圖畵署)는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맡은 관청이에요. 도화서 화원은 도화서에 속해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고요. 지금으로 보면 직업 화가인 셈이지요.
풍속화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 단옷날의 풍습을 살펴볼까요? '단오풍정'이라는 그림에는 빨강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그네를 뛰는 모습, 머리를 감은 여인이 이를 다듬는 모습, 속옷 차림의 여인들이 목욕하는 모습이 담겨 있어요.
우리나라에는 단옷날이 되면 여인들이 창포가 무성한 연못이나 시내에서 머리를 감거나 목욕하는 풍습이 있었어요. 집에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기도 했지요. 그러면 머리카락이 더욱 검어지고 윤기나며 잘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답니다. 이렇게 창포로 머리를 감거나 창포 뿌리를 비녀 삼아 머리에 꽂으며 치장했는데, 이를 '단오장(端午粧)'이라고 불러요.
그네뛰기는 단옷날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였어요. 조선 말기에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라는 책에는 단오에 젊은 남녀가 그네뛰기 놀이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네뛰기가 꼭 여자만의 놀이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여자들이 더 즐겨 했을 거예요. 대신 단옷날에 남자들이 즐겼던 민속놀이가 있어요. 바로 '씨름'이에요.
◇ 단옷날 씨름판 모습 생생하게 담은 화가
"씨름판 옆에 왜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몰렸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구경 가 보세나."
시골의 어느 장터에서 한창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 옆에는 구경꾼들이 쭉 둘러앉아 씨름을 구경하고요. 그런데 그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도 사람이 여러 명 몰려 있네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씨름판 풍경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었어요.
"와! 정말 씨름판과 똑같네! 그림이지만, 씨름판의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씨름꾼은 물론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까지 어떻게 저렇게 생생하게 그려냈을까? 역시 단원은 천재야, 천재!"
씨름판의 풍경을 그린 사람은 김홍도였어요. '단원(檀園)'은 바로 김홍도의 호이지요. 김홍도 역시 조선 후기인 영·정조 때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었어요. 영조와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은 인물이에요. 인물, 산수, 꽃과 새, 동물 등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풍속화를 잘 그렸답니다.
◇ 먼 옛날 조선시대 모습, 풍속화 통해 알 수 있지요
풍속화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조선시대 이전부터 그려졌으나, 조선 후기에 큰 인기를 얻었어요. 이 무렵의 사회적인 변화 때문이지요.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된 평민이 많아졌어요. 이들은 자신의 재력을 자랑하고자 양반처럼 큰 집을 짓고, 방에 멋들어진 그림도 걸고 싶었지요. 하지만 양반들이 좋아하는 산수화는 멋지긴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워 재미가 없었어요. 그런데 신윤복이나 김홍도처럼 실력이 뛰어난 도화서 화원이 그린 풍속화는 멋지기도 하면서 평민도 쉽게 공감하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었던 거예요. 부유한 평민이 풍속화를 사들이다 보니, 풍속화의 인기가 쑥쑥 올라갔습니다.
조선 후기에 발달한 '실학(實學)'이라는 학문도 풍속화의 인기를 높이는 역할을 했어요. 실학은 백성의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한 학문이지요. 실학을 연구한 양반들은 유교적인 이상보다 백성의 생활과 나라의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러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산수화보다 백성의 생활 모습을 표현한 풍속화에 더 관심을 가졌지요. 직접 풍속화를 그리기도 했고요. 우리가 조선시대의 단옷날 풍습을 딱딱한 글이 아니라 이렇게 멋지고 생생한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풍속화 덕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