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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19_영광의 방식 (눅 2:1~14) from YJC DOT OR DOT KR on Vimeo.
설교 요약 -
주후 2010년도 성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위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성탄절은 모든 기독교 절기들 중에서 가장 익숙한 절기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성탄절이 되면 흥청댑니다.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카드를 보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성탄절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난 이야기,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온 이야기,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나신 이야기,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하는 이야기 등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그 어떤 구절보다 성탄절 성경 구절에 익숙합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나오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는 구절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이 읽고 들어 귀에 익숙한 구절은 오늘 본문 14절일 것입니다. 다같이 읽어 보실까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아멘!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읽어보셨습니까? 우리는 대개 별 생각 없이 이 구절을 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조금만 깊이 묵상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지극히 높은 하늘의 일>이요, 하나는 <땅의 일>입니다. 이 구절은 성탄 사건이 하늘에서는 어떠하였고, 땅에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땅에서는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14절 후반부를 보세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 사건은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영도중앙교회 교우님 여러분 위에 이 평화가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반부 말씀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성탄 사건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이 세상이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은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서 이 고통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은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갖 고난을 받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죽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 생살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 아픔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극심한 고통이 되어야 할 이 일이 어떻게 영광일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신비를 깨닫는 길입니다. 오늘 성탄을 맞이하는 이 시간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탄 사건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그 일이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서 최고입니다.
부모님을 보십시오. 부모님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님도 식사를 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여행을 즐기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부모님들도 독서를 하고, 생활을 즐깁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해외 여행을 많이 하셨어요. 난 우리 아버지가 해외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존경하고 효도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난 우리 아버지가 책을 많이 읽으셨기 때문에 효도해요>라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잘 생겨서, 어머니가 옷을 잘 입어서 효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기 때문에, 유명한 분이기 때문에 효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식이 최선을 다해 눈물로 부모님을 모시는 단 하나의 이유는 부모님이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셨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년은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고, 불행히도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어느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할 수 없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친 청년은 한동안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도 청년은 여전히 마음을 닫은 채로 <앞으로 어떻게 한 눈으로 사느냐>며 어머니에게 심한 투정만 부렸습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드디어 붕대를 푸는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풀고 앞을 본 순간 청년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 앞에 역시 붕대로 한쪽 눈을 가린 한 여인이 깊은 정이 담긴 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자신에게 눈 하나를 주신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습니다. 격동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말씀했습니다. <얘야,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못했단다. 그러면 앞을 못 보는 나의 몸뚱이가 장차 네게 짐이 될 것 같아서........> 어머니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습니다. 아들과 어머니는 끌어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사랑입니다. 그 순간부터 아들은 어머니에게 효자가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사랑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후에 부모로서 존경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중에서 최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까지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 당신과 사랑을 동일시하듯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모든 사랑의 행위 중에서 최고의 사랑 표현은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신 성탄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 주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고통 중에 부르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들까지도 버리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성탄 사건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능력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 있는 사람 곁에, 지식이 많은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두려워하고 껄끄러워 합니다. 없는 이들은 있는 이들이 두렵습니다. 배우지 못한 이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왠지 소외되는 듯합니다.
사람들이 다가서고 싶은 사람은 온갖 능력으로 꽉 찬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낮아진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대단한 사람들에게서는 찬바람이 불지만, 사랑과 섬김이 있는 겸손한 사람에게서는 따스한 바람이 불고, 향기가 풍겨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엄청난 존재이십니다. 그 분은 하늘 위의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분으로만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면 우리는 그 분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에게 나타나셨을 때,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가까이 간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가까이 가서 말씀을 받아 자신들에게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기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분이 한없이 낮아지시고, 한없이 사랑이 많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이게 독생자 예수님의 삶입니다.
낮아지고, 겸손하고, 섬기는 삶은 성자의 삶입니다. 우리 앞에는 <성공자가 되는 길>과 <성자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성자가 되는 길은 성공자가 되는 길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공자가 되는 법을 보여주신 게 아니라, 성자가 되는 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사건에서 하나님은 가장 하나님답게 되셨습니다. 성탄 사건은 가장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많이 사랑하십시오. 교회 역사는 돈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한 교인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교회를 섬겼던 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다면 사랑으로 하십시오. 물질을 드린다면 사랑으로 드리십시오. 예배를 드리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모두 사랑의 동기로 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성자의 길을 걸으십시오. 성공한 사람이란 칭찬보다 성자라는 말을 듣기를 소원하십시오. 성자처럼 사랑을 표현할 때 우리도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성탄 사건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얻으려면 특별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난 오늘 밥을 세 끼 먹었다. 난 그 일을 통해 영광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그 상황에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최고의 영광이 됩니다. 에스더는 왕후였습니다. 그 때 유대 민족은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하만은 유대 민족을 말살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를 미워했는데, 그 감정이 점차 악화되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는 모든 유대인을 다 죽일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일의 전말을 잘 모르는 왕은 하만의 청을 수락했고, 아달월 십 삼일에 전국각지에서 모든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이 때 모르드개는 궁중 깊은 곳에 있는 왕후 에스더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립니다. 그 대목을 에스더서 4장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당시 왕에게 유대 백성의 억울함을 말해서 그 생명을 건지게 할 사람은 왕후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평생 가도 왕의 얼굴 조차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에스더뿐이었습니다.
에스더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왕후일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에게 갈 수 없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은 지엄하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에스더는 태도를 바꿉니다. 그녀는 위대한 말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녀는 왕에게 나아갔고, 유대 민족의 목숨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그 때,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전후사정을 잘 모르는 왕에게 유대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바로 그 일을 목숨을 걸고 해 냈습니다. 이것이 에스더에게 최고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기 때문에 흠모하는 게 아닙니다. 부귀영화를 누렸기 때문에 흠모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가 성경에 등장하여 우리에게 감동을 주게 된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사건이 하나님께 영광인 이유도 그렇습니다.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는 이 위대한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권력으로도, 재벌의 재물로도, 석학의 지식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로는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아드님을 보내 죽게 함으로써 구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재벌에게, 석학에게 보내는 것의 천만 배, 억만 배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이시고, 하나님만이 가장 위대하시며,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그 분께만 최고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아울러 우리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깨닫는다면 망설이지 말고 하십시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만 모였는데,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상황이고, 자신의 주머니에만 돈이 있다면, 기꺼이 헌신하십시오. 그런 상황에서는 돈 있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자의 영광은 모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신 외에는 할 수 없음을 알 때 자신의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권력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나서야 한다는 감동이 온다면 헌신적으로 나서십시오. 물질과 재능, 시간과 정성을 드리십시오.
그래서 다른 이들이 <그 때 그 분 밖에는 그 일을 해결할 분이 없었지. 그런데 그 분은 기꺼이 헌신해 주셨고, 문제는 잘 해결되었어, 참 고마운 분이야>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어. 모두 그 사람이 나서주길 기다렸지. 그러나 그 사람은 끝까지 몸을 사리고 나서지 않았어...참 섭섭했어. 그리고 지금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욕이 되고, 그는 비겁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과감히 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에게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성탄절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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