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회> 사회자
<법신불전 헌배> 일어서서 대례
[기도]
<입정>
<영주>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기원문>
<심고>
<독경>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법어봉독>:115쪽
대종경(大宗經)
제2 교의품(敎義品) 8
교의품(敎義品)8장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묘한 진리를 깨치려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고자 함이니 만일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쓸 데 없는 일이라, 이제 법신불 일원상을 실생활에 부합시켜 말해 주리라. 첫째는 일원상을 대할 때마다 견성 성불하는 화두(話頭)를 삼을 것이요, 둘째는 일상 생활에 일원상과 같이 원만하게 수행하여 나아가는 표본을 삼을 것이며, 세째는 이 우주 만유 전체가 죄복을 직접 내려주는 사실적 권능이 있는 것을 알아서 진리적으로 믿어 나아가는 대상을 삼을 것이니,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일원상을 대할 때마다 마치 부모의 사진 같이 숭배될 것이니라.]
< 일상수행의 요법 대조> (p54)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성가>
134장: 둥그신 임의 광명
<설법> 창산 김진성 교무
백학명 선사 시와 화답
대종경(大宗經)
제7성리품(性理品) 19장
하루는 학명 선사가 글 한 수를 지어 보내기를 [투천산절정(透天山絶頂)이여 귀해수성파(歸海水成波)로다 불각회신로(不覺回身路)하여 석두의작가(石頭倚作家)로다.]라 한지라, 대종사 화답하여 보내시기를 [절정천진수(絶頂天眞秀)요 대해천진파(大海天眞波)로다 부각회신로(復覺回身路)하니 고로석두가(高露石頭家)로다.]라 하시니라.
(학명 선사)
투천산절정(透天山絶頂) 귀해수성파(歸海水成波) 불각회신로(不覺回身路) 석두의작가(石頭倚作家):하늘을 뚫고 높이 솟은 산봉우리여, 바다에 돌아가면 큰 물결을 이루리로다. 몸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고, 석두암에 의지하여 집을 삼도다”
(대종사)
“절정천진수(絶頂天眞秀) 대해천진파(大海天眞波) 부각회신로(復覺回身路) 고로석두가(高露石頭家)” 해석하면, “절정도 천진 그대로 빼어남이요, 대해도 천진 그대로의 파도로다. 다시 몸 돌아갈 길 깨달으니, 높이 석두가에 드러났도다”이다.
백학명[白鶴鳴, 1867~1929]
주요약력
본명은 낙채(樂彩). 법명은 계종(啓宗). 법호는 학명(鶴鳴). 한국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고승의 한 사람.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장한 선사로, 월명암과 실상사에 주석하며 소태산대종사와 친교가 깊었고, 소태산과 선문답을 자주했다. 1867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 1886년 불갑사에서 출가했으며, 내소사ㆍ월명암ㆍ내장사 주지를 지냈다. 1988년(원기73) 명예대호법으로 추서했다.
생애와 업적
1867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서 부친 중수(重洙)와 모친 한양조의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가 공부하며 자랐으나 15ㆍ6세가 되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자 모필(毛筆) 제조기술을 습득하여 생계를 도왔다. 20세시 부친상을 당하자 초종장례를 지낸 후 편모의 봉양을 아우들에게 맡기고 붓 장사통을 둘러메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순창 구암사에서 당대의 고승 설두(雪竇)화상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백학명은 1886년 불갑사 환송(幻松)장로의 인도로 출가하고 금화(錦華)선사에게 득도했다.
그는 1890년 24세에 구암사를 찾아가서 내전(內典)을 수학하고 설유(雪乳)강백을 계사로 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이후 10여 년 동안 지리산의 영원사ㆍ벽송사와 조계산의 선암사ㆍ송광사 등 이름 있는 선찰과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면서 경ㆍ율ㆍ론 삼장(經律論 三藏)을 널리 통달했다. 1900년 3월 금화의 법통을 이었으니 백파(白坡)의 7대 법손이 되고 설두의 종손이 된다. 학명이라는 법호는 이때 받은 것이다. 그는 주로 구암ㆍ운문의 두 절에서 강회를 열었으나 36세되던 1902년 가을 교편을 던지고 참선하는 곳을 찾아가 십수년간을 정진했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들의 깨친 경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부안 내소사와 변산 월명암의 주지를 맡아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특히 월명암에서는 요사와 선실을 중건 또는 신축하여 일반 선객들이 수행하는데에 불편이 없게 했다. 10년 동안의 수행과정을 마치고 백양선원으로 와서 선실을 증축했다. 백학명은 48세되던 1914년에 중국의 사찰을 두루 살피는 1년간의 행각을 마치고 일본의 임제종 본산이었던 원각사에 들러 관장이던 석종연(釋宗演)과 아사히(朝日)신문사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도의 선문답을 했다.
해외에서 돌아와 다시 내소사와 월명암의 주지로 있으면서 월명선원을 중창했다. 이때 석두암(石頭庵)에 머물던 소태산과 선문답을 하게 된다. 백학명이 글 한 수를 지어 보내기를 “하늘을 뚫는 듯한 산의 절정이여 바다에 돌아가 물결을 이룰지어다. 몸을 돌이킬 길을 알지 못하여 석두암이라는 집에 의지하고 있도다(透天山絶頂 歸海水成波 不覺回身路 石頭倚作家)”라 했다. 이에 대해 소태산은 화답하여 보내시를 “절정도 천진 그대로 빼어난 것이요 큰 바다도 천진 그대로 물결인 것이다. 다시 몸 돌이킬 길을 알고 있으니 석두암의 집이 높이 드러나 있다(絶頂天眞秀 大海天眞波 復覺回身路 高露石頭家)”(《대종경》 성리품19)라 했다.
문답의 핵심은 백학명이 소태산을 보니 큰 경륜과 포부를 가지고 중생제도를 할 사람이 오두막집에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소태산은 나는 이미 석두암집에서 중생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백학명은 1929년 57세시에 내장사 주지로 부임하여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기치를 내걸고 내장사 중창 불사를 일으킨다. 이때 소태산의 새 회상 창립에 대해 듣고 말하기를 “내가 이미 선생(대종사)의 경영하신 바를 잘 아는지라 내가 내장사로 가게 된 원인이 선생의 취지에 동감한 바 있어 그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불법연구회’의 장소를 그곳에다 정하고 고내장(古內藏)에 선원급 강원을 설립하여 모든 학인과 선원을 양성하고 그 학인과 선원으로 하여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주작야선(晝作夜禪)ㆍ영육쌍전(靈肉雙全)을 장려하여 호수를 막아 수전(水田)을 만들면 근 백 여 두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산에는 감나무, 밤나무 몇 만주를 심어서 그 수입으로 후일 인재 양성의 기금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대종사 그 말씀을 들으시고 현재 이론으로는 그럴 듯하나 내장사로 말하면 개인 소유가 아니라 공유물이니 어찌 1, 2인의 생각으로 단정하리요마는 될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이 주선하여 주는 것이 미래 불교계에서 서광이 될 것이라 했다”(《불법연구회창건사》 본회의 창립). 백학명의 생각과는 달리 승려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소태산이 변산에서 내려와 서울에 왕래하면서 백학명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이에 대한 백학명의 답서는 다음과 같다.
“깊은 산 속 오래된 절에 홀로 누워 신음하다가 생각 밖에 전해온 혜서(惠書)로 학명을 병상에서 불러일으키니 이 기쁨을 어찌하리오. 일차 상경하심에 필히 얻은 바 적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부러움을 어찌하리오. 산문을 두드려 보이심은 그 말씀도 의례적인 말씀이라 듣는 사람 또한 의례적인 말씀으로 알 것이나 그러나 어찌 한 형상과 뼈가 다르듯이 수승한 일이 될 것이라 여기십니다. 자못 희유(稀有)한 심월(心月)로 비추는데 결례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을축년 십월 백학명”(원불교역사박물관 소장). 1929년 3월 27일 백학명은 효상좌인 고벽(古碧)을 불러 짚세기 네 죽과 당목 한 필을 사오게 하고 하오 2시에 권속을 모이게 한 뒤 《원각경》 보안장을 송경케 하고 미소를 머금으며 입적했다.
백학명은 〈신년가〉ㆍ〈원적가〉ㆍ〈해탈곡〉ㆍ〈왕생가〉ㆍ〈참선곡〉ㆍ〈망월가〉 등 《백농집》을 남겼다. 백학명에게 추서한 명예대호법 법훈 서훈공적은 다음과 같다. “학명선사가 변산 월명암 주지로 있을 당시 정산종사를 상좌로 받아 주어 과거 불교의 제도와 방편을 알게 했으며 실상사의 한만허 주지와 상의하여 석두암 터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대종사께 세상 구원사업을 제의하기도 하는 등 대종사의 변산 제법시 많은 후원을 했다. 대종사께서 새 회상 터전을 물색할 때 승려들의 반대로 좌절되기는 했으나 내장사 일부를 사용할 것을 제의하는 등 과거 불교의 승려직분으로 새 회상 창립을 후원하고 격려한 호법 공덕이 높았다.” 1988년(원기73) 9월 제124회 수위단회에서는 백학명의 호법공덕을 추모하면서 명예대호법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성가>
138장: 나 없으매
<공고>
<생활결의 구호>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성가>
102장 : 저희들이 이 불사로(回向의 노래)
<폐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대력을 얻어 제생의세 [濟生醫世] 합시다."
①. ②. ③.④. ⑤. ⑥.⑦.⑧.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