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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성막의 덮개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규빗, 너비는 네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 그 휘장을 이을 끝 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이어질 다른 끝 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휘장 끝 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휘장 끝 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마주 보게 하고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휘장을 연결하게 한 성막을 이룰지며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각 폭의 길이는 서른규빗, 너비는 네규빗으로 열한 폭의 길이를 같게 하고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휘장을 이을 끝 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이을 끝 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그 막 곧 휘장의 그 나머지 반폭은 성막 뒤에 늘어뜨리고 막 곧 휘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쪽에 한규빗, 저쪽에 한규빗씩 성막 좌우 양쪽에 덮어 늘어뜨리고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출26:1~14).”
가. 성막의 덮개는 네 겹으로 이루어짐
이번에는 성막의 덮개 부분이다. 성막은 48개의 판자를 직사각형으로 사면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를 덮어 만들었다. 이 덮개는 네 겹으로 되어 있다. 네 층의 덮개 가운데 첫째 층은 성막덮개의 가장 속이다. 내면을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다고 했다. 앙장 열 폭을 만들어서 그것을 연결해서 덮개를 만든다는 뜻이다.
이 성막은 일종의 텐트, 즉 장막이다. 그 때 당시에는 광야에서 백성들도 장막에 거하고 하나님도 장막에 거했다. 계속 옮겨 다녀야 해서 이동하는 집을 짓고 살았다. 40년 동안을 돌아다니면서 이 곳 저 곳을 계속 이동하니까 고정된 집을 가질 수 없었고 움직이는 집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가리켜서 계시록 마지막에“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매(계21:3)” 라고 했다. 이 말은 그 때 당시의 형편과 사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사람이 장막에 거할 때 하나님도 장막에 거했고, 사람이 백향목 궁에 거할 때 여호와께서도 백향목 궁에 거했다. 사람이 계신 곳에 하나님도 함께 계셨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 사람도 같이 있었다.
장막 주변 사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막을 치고 진을 쳤다. 한 도시를 이룬 것처럼 되었다. 근원으로 올라가면 이것은 하나님 동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었다. 하나의 장막에 거했다고 할 수 있다. 성막은 동산이 이동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진 모양이고, 동산이 세상에 내려 온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그 다음에 떡 상이 있고 그 다음에 등잔대가 있다. 떡 상과 등잔대가 있는 곳이 성소이고 법궤가 있는 곳이 지성소이다. 그 사이에 포장에 가려져 있는데 이것을 휘장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만 여기를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죄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과 사람은 막혀서 서로 교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안에는 불이 없고 빛이 없어서 캄캄한 곳이다. 성소에만 빛이 있다. 제사장들이 매일 성소 안에서 불을 가는 일과 떡 상을 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판자 48개로 벽을 세웠는데 벽을 안에서 본다면 전부 금 판자일 것이다. 사변을 돌아가면서 되어있다. 그 위에다가 처음에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천을 덮는다. 열 폭을 만들었는데, 다섯 폭씩이다. 한 폭이 4규빗씩인데, 4규빗짜리를 다섯 개를 연해서 하나를 만들었고, 또 다섯 개를 연해서 하나를 만들었다. 이 두 개를 가운데서 고리를 해서 연결해서 열 폭이 된다. 열 폭이 되면 40규빗이다. 이것을 제일먼저 위에 덮었다. 그 곳을 네 겹으로 덮었다. 속의 것이 보아지 않도록 완전히 덮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는 것이다. 열 폭이라고 했는데 열은 다섯을 두 번 더한 숫자이다. 오른손 왼손하면 열이다. 이것은 충만하고 완전한 수를 말한다. 계명도 열 계명이다. 그것은 완전하다는 말이다. 만약 손가락이 하나 모자란다든지 더한다든지 하면 이상하다. 딱 다섯 개씩 있어야 된다.
포장이 다섯 폭으로 된 두 세트이다. 여기서 온전한 사람의 인격을 본다. 우리가 열 계명을 다 지킨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손이 두 개가 완전히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그래서 온전한 한 인격을 표현한다. 법궤나 상이나 등잔대는 바로 이런 온전한 사람 속에 들어있다. 온전한 인격에 덮여져 있다.
한 폭이 4규빗인데 이것이 열 개까 40규빗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포장의 길이는 28규빗이다. 28규빗으로 옆으로 덮고 전체 길이는 40규빗이다. 28규빗이라는 숫자는 4에다 7을 곱한 숫자이다. 4 곱하기 7은 28이다. 그러니까 40규빗 곱하기 28규빗 평방규빗이라 할 수 있는 그런 포장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덮어놨다.
1) 첫 번째 덮개인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함
첫 번째 덮개는 세마포로 만들어졌다. 계시록에 보면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8).”하여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실을 표현할 때 세마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세마포 옷을 입는다. 고운 세마포라는 말은 고운 행실이라는 뜻이다. 삼베를 보면 곱고 가는 좋은 삼베일수록 실이 좋다. 안동포는 실이 가늘고 곱게 만들어진 것을 보고 좋은 마포, 좋은 세마포라고 한다.
“꼬아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합당하게 다루어졌다는 뜻이다. 거칠고 무용한 것이 아니다. 삼베는 꼬지 않으면 실이 되지 않는다. 솜을 꼬아야 실이 된다. 꼰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유용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행실이 깨끗할 뿐만이 아니라 유용한 분이다.
마포는 삼나무 껍데기를 떼어서 그것을 삶아서 흐물흐물한 것을 다 벗겨내고 마지막에 남은 섬유소이고 그것이 삼베가 된다. 씻을 대로 다 씻고 두들길 대로 다 두들겨서 없어질 건 다 없어지고 온전히 남을 것만 남은 그 마지막 섬유, 그것이 삼베가 된다. 그러므로 깨끗하다는 뜻이다.
사람도 붙어있는 게 많으면 깨끗하지 못하다. 붙어있는 게 없어지면 사람이 깨끗해진다. 생각이 붙어있던지 소유가 붙어있던지, 많이 붙어있는 그것이 사람한테 문제가 된다. 그것만 싹 벗어지면 깨끗해진다. 사람이 죽을 때 가면 다 깨끗해진다. 왜냐하면 다 벗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져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든지 깨끗해진다. 내가 천년만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든지, 내가 뭔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마포는 없어져야 할 것을 다 제거하고 남는 것만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볼 때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폭을 연결해야 하는데, 연결하기 위해서 청색 고리와 금 갈고리가 있었다. 청색은 하늘색을 이야기한다. 하늘에 속한 색이다. 이것은 맑은 색이고 영원한 색이고 무궁한 색이다. 다섯 폭의 앙장 두 개를 연결해서 하나를 만들었다. 금 갈고리에서 금은 신성한 것이니까 신성한 연합을 상징한다. 금 갈고리로 이것을 서로 연결했다.
예수님의 인격은 하늘에 속한 신성한 성분으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을 보면 그 인생이 신성한 것으로 연결이 안 된다.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면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고 여러 가지 성품들이 있다. 그런데 그 성품과 사건과 여러 가지 것들이 신성하게 연결이 안 되고 제멋대로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인생이 깨끗할 수 없고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면 그의 육신과 그의 생각과 그의 사역과 역사와 그 모든 것이 신성한 것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원한 목적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나고 사시고 죽으신 모든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일들이 다 신성한 목적을 향해서 연결되어 있다.
내 마음대로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하는 삶이 아니다. 그 인생 자체가 어떤 경우에도 항상 하나님을 향해서 연결되어 있다. 이적을 행하더라도 거기 연결되어 있고, 말씀하시더라도 거기 연결되어 있고, 죽으시기까지도 거기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일관성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의 삶을 보면 일관성이 없다. 오늘은 이러고 내일은 저러고, 목적이 없다. 분명한 목적이 없는 게 인생이다. 한 가지 방향을 향해서 연결됐다고 할 수 없고, 무슨 목적으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담의 인생이다. 저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이냐 물어보면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른다. 잘한다고 애쓰긴 애쓰는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나라를 위한다고 쇠고랑 차고 서로 욕하고 그러지만 무엇을 하는지 자기들도 모른다. 이전투구라고 진흙탕 속에서 싸우면 자기 몸에 흙이 묻는지 안 묻는지 그것도 모르고 뒤범벅이 되서 싸운다. 그와 똑 같다. 세상이라는 것은 목표가 없다. 일정한 목표가 없기 때문에 가는 길이 전부 다 뒤죽박죽이 되어서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길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늘에 속한 신성한 성분으로, 신성한 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가는 게 없다.
그리고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들을 수놓았다. 이 그룹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할 때 사용되고 있다. 날개를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영광의 상징이다. 살아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보좌 옆을 보니까 네 생물이 있더라고 했는데, 그 네 생물들은 그룹들이었다(겔1,계4,5참).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피조물이다. 이 피조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분명한 피조물이다. 우리와 같은 인생이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인격이다. 그룹으로 묘사되는 그런 인격이다.
이것은 그 수가 얼마인지는 모른다. 그룹을 수놓았다 라고만 되어 있지 몇 개를 수놓았다는 말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 등잔대를 만들 때도 금 한 달란트로 만들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빛은 계산할 수 없다. 등불은 영원히 타고 있으므로 계산할 수 없다.
하나님을 표현할 때 인간 자체는 한계가 있지만 표현되는 영광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30kg 밖에 안 되지만 거기서 표현되는 영광은 무한하다. 우리 인생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제한되어 있는 존재이고, 어느 날엔가는 죽는 제한된 존재인데, 거기서 발해지는 빛은 영원하다.
청색은 하늘에 속한 색이라고 했는데 자색은 왕권을 상징한다. 왕들이 입는 옷이 자색 옷이기 때문에 왕권을 상징하는 말이다. 홍색은 빨간색으로 피를 말하므로 생명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데 타락 때문에 구속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피가 없이는 구속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피가 필요했다. 옛 피가 끝나고 새로운 피가 필요했다.
피는 원래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성경 안에서는 대부분 구속을 상징한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했고 죄를 가리켜 말할 때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사1:18)” 라고 표현했다. 원래는 생명인데 타락으로 인해 그것이 죄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청색 자색 홍색이다. 그 분 안에는 왕권도 있고, 하늘에 속한 신성함이 있고, 생명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수놓았다는 말은 짜여졌다는 말이다. 수놓았으니까 짜여졌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수놓아진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영광으로 짜여져 있다. 분명히 육신인데, 바닥은 분명히 천인데 거기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았으니까 어떤 신성한 것으로 짜여져 있다.
인생을 볼 때는 우리와 똑같다. 예수님도 우리 인생과 똑같은 하나의 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것은 거기에 수가 놓아져 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수가 놓아져 있다. 시편에 보면 왕비가 왕 앞에 나갈 때 입는 옷이 있는데 “그의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시45:13).”라고 했다.
평상복에는 금으로 수놓아져 있지 않은데 왕을 만나러 갈 때는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는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선다는 말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아진 상태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궤와 상과 등잔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세하고 고운 인격에 싸여 있고, 덮여 있고, 품어져 있고, 보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허황하게 어떤 부를 얻으려고 생각하고 어떤 영광을 얻으려고 생각하지만, 그분의 영광은 거룩한 인격 안에 내포되어 있고 신성한 인격으로 덮여져 있으므로 그분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첫 번째 앙장 덮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을 상징한다. 그 사람의 속이다. 우리가 육신을 해부해 놓으면 심장이 있고 허파가 있고 간이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인격을 해부해 보면 그 안에 뭔가 들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해부해 보면 그 안에는 법궤와 떡상과 등잔대가 있고 그 위에는 세마포로 싸여져 있고 그 세마포는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졌다. 뭐가 수놓아져 있느냐 하면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수놓아져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용, 한 인격의 내용, 아름다운 인격의 내용이다.
2) 두 번째는 염소털로 덮음
그 다음에는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층은 염소털이다. 세마포 앙장을 덮고 그 위에 또 한 겹을 덮는데 그것이 염소털이다. 이것은 넓이가 틀리다. 전에는 28규빗이었는데 이것은 길이가 30규빗이니, 2규빗이 더 많다. 그리고 폭은 똑 같이 4규빗씩이지만 열한 폭이다.
세마포 앙장은 열 폭인데 지금은 열한 폭이니까 44규빗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세마포 앙장보다 조금 더 크다. 속의 것 보다 좀 더 크다. 양쪽으로 날개를 덮을 때 1규빗씩 더 덮을 수 있고 앞뒤로 덮을 때도 2규빗씩 더 덮을 수 있다. 더 여유가 있다. 그래서 속에 있는 세마포 앙장을 완전히 덮을 수 있는 크기이다. 완전히 덮어서 보이지 않게 하는 그런 크기이다.
열한 폭이라고 했는데, 11은 5에다 6을 더한 숫자이다. 6이라는 숫자가 성경에는 그렇게 좋지 않은 숫자로 표현되고 있다. 어중간하게 남은 숫자가 되어서 안 좋게 표현된다. 짐승, 사탄의 수를 가리켜 계시록에서는 666이라고 한다(계13:18). 6이라는 숫자는 7도 아니고 5도 아닌 그런 숫자이기 때문에 나쁜 것을 상징하는 그런 숫자가 되었다.
열한 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세마포로 되어 있는 그 분 자신은 결함이 없는 완전한 열 폭이지만 그 위에 덮고 있는 것은 열한 폭이다. 그것은 죄를 짊어지고 있는 분의 모습이다. 속 내용은 완전하게 깨끗하고 완전하게 정결한 분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8:3)”으로 왔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왔다.
왜냐하면 우리를 대표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하는 위치에 섰을 때는 우리와 똑같은 자리에 섰다. 우리와 똑같은 자리에 섰을 때는 죄를 짊어지고 있는 그 모습이다. 열한 폭으로 되어 있는 그 앙장과 같은 그런 모습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사신 모습을 보고 속에 있는 세마포를 보지 못했다. 밖에 있는 염소털만 보았다. 그래서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 아니냐. 죄인이 되어서 누구 눈을 뜨게 한다 말이냐’ 라고 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때에도 ‘죄를 졌기 때문에 저렇게 죽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분 자신의 속은 세마포인데 겉에 나타난 것은 염소털이었다. 염소는 신약 성경에서는 사악한 것으로 묘사된다. 염소와 양을 구별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염소는 안 좋은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염소털로 완전히 덮어서 속의 것은 보이지 않게 했다. 이것은 우리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44규빗이다. 40규빗에 4규빗이 더해졌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시련과 고난, 시험을 의미한다. 40일 기도, 40일 금식, 40년의 광야생활, 40이라는 숫자가 전부 고난을 상징한다. 44규빗이니까 이것은 시험에다 심판을 더했다는 뜻이다.
첫 번째 세마포 앙장은 금 갈고리로 연결시켰는데, 두 번째 염소 털 양장은 놋 갈고리로 꼽아놓게 되어 있다.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금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지만 놋은 심판을 상징한다.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데 바깥에 우리를 대신하는 자리에서는 심판 받으신 분이시다.
종교의 심판도 받고 세상의 심판도 받고 백성들의 심판도 받고 심지어는 하나님에게까지 심판을 받는 모습이 예수의 모습이다. 이 모습 속에서 우리의 죄가 도말되므로 완전한 심판의 덮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대신하는 완전한 자리와 완전한 심판을 받는 덮개, 완전한 심판과 완전한 시험을 거친 모습이다.
3) 세 번째는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덮음
세 번째로 수양의 가죽으로 그 위를 또 덮었다.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이기 때문에 이것은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이다. 붉은 색이 우리의 구속을 상징한다. 피는 원래 생명이지만 우리 목숨을 대신해야 되기 때문에 구속을 상징한다. 이것이 결국 죽임당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첫째 층은 완전한 사람 예수이고, 둘째 층은 우리를 대신하는 분으로서의 예수이고, 셋째 층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예수, 이렇게 세 겹으로 되어 있다.
4) 네 번째는 해달의 가죽으로 덮음
마지막으로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다. 해달의 가죽은 물개의 한 종류다. 허파를 가지고 있는 동물이면서도 바다 속에서 자유하는 동물, 그것이 해달이다. 바다는 세상과 죄악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과 죄악에서 자유하는, 세상과 죄악을 정복하는 생명이다. 해달의 가죽으로 마지막 덮개를 덮었다. 그래서 비가 오고 눈이 오더라도 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는다. 바다를 방어하는 외벽을 쌓도록 만들어졌다. 볼모양은 없지만 그렇게 만들어졌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그 모습이 볼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해달의 가죽 같은 모습이다. 그렇지만 세상을 이긴 물개의 모습이다.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해달의 가죽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원수의 공격을 막아내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분의 운명을 따르고 그 분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런 분의 운명 안에 포함된 것을 의미한다. 속으로 들어갈수록 아름답다. 겉은 아주 볼모양이 없고 또 죄로 덮여있고 심판으로 덮여 있는데 속으로 들어가면 세마포가 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순금이 들어 있다. 속으로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겉으로 볼 땐 해달의 가죽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아름다운 분이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신성으로 충만한 그런 분이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아담의 타락 이후에 그 어디서도 완전한 인격을 보지 못하고 다 멸망받기 합당한 그런 인격 밖에는 볼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한 인격을 만나고, 신성한 인격을 만나고, 아름다운 인격을 만나고, 하나님이 구별하시는 한 인격을 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더구나 이 영원한 인격에 우리를 포함시키셔서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을 발견케 하고 그 안에서 우리를 찾고 그 안에서 우리를 누리도록 축복하여 주신 은총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로 발견되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자로 아름다운 제물이 될 수 있는 자로 발견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발견 안에 살게 되기를 원하고 이 발견을 귀중하게 여기고 이 발견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