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는 동명성왕(=추모왕)(B.C.37~19) 이름은, 주몽입니다. 고(高)씨 성을 사용했습니다. 또,졸본에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어딘가에서 들었는데 처음엔 졸본부여라고도 했데요.)
2대는 유리왕(=유리명왕)(B.C.19~18) 주몽의 맏아들로 주몽과는 달리 해씨 성을 사용했고, 이름은 유리입니다. 즉위 3년 수도를 국내성으로 천도했습니다.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고, 두곡동원에 묻혔습니다.
3대는 대무신왕(18~44)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무휼이라고 합니다. BC 36년 비류국의 송양왕의 항복을 받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또,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습니다.
왕의 시호가 대무신왕인 이유는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해서 무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왕의 능은 대수촌원에 있습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시대입니다~ㅎ)
4대는 민중왕(44~48) 원래 모본왕이 왕이 되어야 하는데 그 때 모본왕이 너무 어려서 대무신왕의 아우 민중왕이 대신 즉위한 것입니다. 이름은 색주입니다.
(더 이상은 몰라요~;;)
5대는 모본왕(48~53) 대무신왕의 아들로 이름은 우,애루입니다.(해씨 성의 마지막 왕입니다.) 즉위 2년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는데,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습니다.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하인 두로에게 피살되었다. 능은 모본원에 있습니다.
6대는 태조왕(=국조왕)(53~146) 유리왕의 손자로 왕족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 모본왕이 죽은 후, 태자가 영특하지 못하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왕이 됬는데, 태후가 섭정 했습니다. 이 때부터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왕위를 독점해 왕권이 강화되었습니다.(교과서에 나온거-_-) 또한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종래의 부족국가적 형태에서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165년(신대왕 1)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입니다. 이름은 궁인데, 어렸을 때 이름은 어수라고 합니다.
7대는 차대왕(146~165) 태조왕의 친동생으로 이름은 수성입니다. 태조대왕이 왕위를 물려주어 즉위하니, 그 때 이미 76세였다.
8대는 신대왕(165~179)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으로 이름은 백고 혹은 백구입니다.
9대는 고국천왕 (179~197) 신대왕의 둘째아들이고 이름은 남무입니다. 부족적 전통을 가진 5부족을 동,서, 남, 북, 중의 5부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꿔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10대는 산상왕(197~227)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산상왕이 즉위한것 입니다. 이름은 연우, 일명 위궁이엇습니다.
11대는 동천왕 (227~248) 산상왕의 아들로 동양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우위거인데, 어릴 때는 교체라고 불렸습니다.
12대는 중천왕 (248~270) 중양(中襄)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연불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왕은 외모가 준수하고 지혜가 있었다.
13대는 서천왕 (270~292) 서기 270년, 서천왕이 즉위하니, 서양이라고도 하는 이름은 약로 또는 약우로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14대는 봉상왕(292~300) 서기 292년, 봉상왕이 즉위하였다. 일명 치갈(雉葛)이며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삽矢婁)이며, 서천왕의 태자이다.
15대는 미천왕(300~331) 이름은 을불이고, 어렸을 때.... 맞나? 아무튼 왕이 되기 전에는 왕족이라는 것을 숨기고 누명까지 써서 맞고, 아무튼 고생좀 하고 살았습니다-_-; 신하들이 봉상왕을 폐하고 바닷가(아닐 수도 있음.;;)에 누워있던 을불을 발견하고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업적으로는... 한의 군현을 세웠던 낙랑군을 몰아 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해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16대는 고국원왕 (331~371) 미천왕의 아들로 미천왕 15년 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중국의 서북 전연의 침입과 백제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평양성에서 백제의 근초고왕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습니다. (이때 그러니까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습니다~) 고국원에 묻혀 시호가 고국천왕입니다.
17대는 소수림왕 (371~384) 고국원왕의 아들로 이름은 구부입니다.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을 정비하였고, 태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불교를 수용하여 백성의 사상을 통일시켰습니다. 그렇게해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18대는 고국양왕(384~392) 소수림왕의 아우로 이름은 이련입니다. 군사 4만으로 요동을 공격했고, 이듬해 백제를 정벌해 국토를 넓히는데 힘썼습니다. 또, 불교를 널리 펴서 문화를 발전시켰고,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는 등 국가체제 확립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19대는 광개토대왕(=호태왕,광개토태왕) (392~413) 고국양왕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입니다. 11살 때(아님, 13살 때) 태자로 책봉되고 18살 때 즉위하였습니다. 즉위하자 광개토왕은 백성들이 오래도록 즐겁게 산다는 뜻의 영락을 연호로 정했습니다. 이것이 고구려의 첫 연호라고 합니다 . 392년 백제의 석현성과 관미성을 빼앗고, 395년 수곡성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물리치고, 비려를 무찔렀습니다. 396년에는 위례성을 쳐,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400년에는 신라를 도와서 왜를 물리쳤습니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복하였습니다.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고, 39세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20대는 장수왕 (413~491) 광개토왕의 아들로 이름은 거련이라고 하고 연호는 건흥이라고 합니다. 도읍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했고,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 한강 이남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아산만에서 소백 산맥을 넘어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1대는 문자명왕 (492~519) 서기 492년, 문자명왕이 즉위하니, 일명 명치호제(明治好帝)으로 이름은 나운(羅雲), 장수왕의 손자이다. 부친은 고추대가(古雛大加)의 벼슬을 한 조다(助多)이다. 부친이 일찍 죽어 궁중에서 키우고 대손으로 정해졌다. 연호를 명치(明治)라 하였다
22대는 안장왕 (519~531)서기 519년, 이름은 흥안(興安)이며 문자명왕의 장자이다
23대는 안원왕 (531~545) 이름은 보영. 신해년(531)에 즉위. 치세는 14년간.
24대는 양원왕 (545~559) 안원왕의 맏아들.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양강왕(陽崗王)이라고도 한다. 533년(안원왕 3) 태자로 책봉되고, 안원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동위(東魏)·북제(北齊)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하고, 47년 백암성(白巖城)·신성(新城:撫順) 등을 중수하였으며, 50년 북제로부터 고구려 왕에 봉해졌다. 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었다.
25대는 평원왕 (559~590)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양원왕(陽原王)의 태자로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陳)·수(隋)·북제(北齊)·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하였다. 일찍이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大城山城)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長安城: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평원왕 28)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26대는 영양왕(590~618) 고구려 제26대 왕(재위 590∼618). 이름 원(元)·대원(大元). 평원왕의 태자.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즉위 후 수(隋)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靺鞨)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공(先攻),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섰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시키고, 600년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00권을 재편수,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하고 군사 8,000을 포로로 잡았다. 612년 수나라 양제(煬帝)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水陸軍)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시켜 살수(薩水)에서 적을 섬멸하고 그 뒤에도 계속 침공군을 무찔러 수나라 멸망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27대는 영류왕 (618~642) 고구려의 제27대 왕(재위 618∼642). 이름 건무(建武)·건성(建成). 영양왕의 이복동생. 즉위하자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漢人)을 송환하고 고구려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에 조공(朝貢)하고 당나라 고조(高祖)로부터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遼東郡公)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631년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역사(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28대는 보장왕 고구려의 마지막 제28대 왕(재위 642∼668). 이름 장(藏). 영류왕의 아우·태양왕의 아들.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643년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道敎)를 구하여,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하였다. 661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병사한 뒤에 내분으로 국정이 어지럽자, 668년 나·당(羅唐)연합군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당시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男生)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협력한 때이므로, 둘째 아들 남건(男建)이 막리지(莫離支)로서 나·당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망하였고, 그는 당나라로 압송되었다. 뒤에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으며, 677년(문무왕 17) 요동주도독 조선왕(朝鮮王)에 봉해졌다. 그 지역의 말갈족과 손을 잡고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681년(신문왕 1) 공주(州:쓰촨성 峽)에 유배되었다. 뒤에 당나라 고종은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