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제주도로 피난 간
꾀죄죄한 국방색 옷의 서울 아이
빨간 벽돌 수녀원 마당에서 축구를 한다
수녀원에서 내 준 구제품 미제 빨간 고무공
골대는 신발을 모아 만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정신없이 놀고 나서
잘 가라며 서로 헤어진다
골대였던 내 운동화를 찾았다
없다
반대편 골 위치로 가 보아도
없다
머리가 아찔했다
어떻게 집에 간담?
어머니에게는 뭐라고 변명하고?
아니 당장 내일 어떻게 학교에 가나?
반장이 결석을 해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음 날 무엇을 신고 학교에 갔는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지만
틀림없이 다 떨어지고 구멍 나
버리려던 까만 고무신이었을 거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 이 나이
좀처럼 신발 벗지 않는 미국에 살면서도
가끔
학교나 단체 모임 후
신발이 없어진 꿈을 꾼다
안타까워 이리저리 찾다가 깬다
신발 잃어버리는 꿈의 해몽은 무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나?
신발을 도둑맞았다는 것은
믿고 있던 기본이 무너진 듯한 느낌
잠재의식적으로, 산다는 게 아무래도 불안한 가보다.
첫댓글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 참 황당할 것 같습니다.
어릴 적의 기억이 그리 오래도 박혀있나 봅니다.
요즘에야 참 우습게 취급당하지만 없으면 당장 아쉬운 신발입니다.
신발을 몇 켤레 가지고 살던 때가 아니니 더 귀중하였지요. 당장 맨발로 걸어 집에 갔을 거고.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황당했던 기억은 생생하네요.
제주도 피난살이를 하셨군요.
그때만해도 고무신이 큰 재산이었지요. 닳을까 봐 벗어들고 다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신발을 잃었으니 적지 않은 사건이지요.
나는 교실을 찾지 못해 허둥대는 꿈을 자주 꿉니다.
"국민학교" 6학년 1학기까지 제주읍의 남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2학기에 부산으로 나와 종로 국민학교 분교에 다녔습니다.
몇 년 전 제주 방문 시 그 초등학교를 찾아가 한 오후를 운동장 구석에 앉아 그 피난민 아이를 쳐다보며 지냈습니다.
저도 필리핀에서 한글로 시를 쓰며 열대야를 지나갔습니다만, 선생님의 시편을
읽을 적마다 선생님의 詩情과 詩語에 감탄을 합니다.
좋은 글, 옮겨 갑니다
동산 시인님의 시편 따라 살던 이야기를 써 보았습니다.
저의 시정과 시어는 부끄러운 수준인데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동산 시인님같이 깊은 사유가 섞인 사는 일상의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호월 선생님께서는 과학분야의 학문을 하셨으니 무궁무진한 시를 쓰실 수 있으시지요,
저는 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 시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과학 이외에도 몇백 개의 씨들이 떨어져 있지만, 그 중 몇이 조건이 맞아 싹을 틔울 수 있을른지요?
99% 말라 죽어 바람에 날려가 잊혀지고 없어지겠지요.
詩化가 어렵지 않으면 과학자나 전문가들은 다 시인이 되게요? ㅎㅎ.
제가 보기엔 두 분 다 이미 훌륭한 시적 시력을 가지신 분들입니다
두 분이 겸손이 더욱 더 커 보입니다
두 분 시적 상상력을 따라 가기가 힘이 들 뿐입니다!
동산 님은 아니지만, 저를 포함시키는 것은 과찬이고 오해입니다.
시력도 짧고 아직 시의 참맛을 모르며, 생각나는 대로 한마디 지껄이는 것 뿐인데요.
ㅎㅎㅎ, 저의 시적 가시 거리를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다음날부터
제 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호월님께서는 자연적으로 몸으로 시를 쓰시니
그 못다한 말들이 모두 여백으로 남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상상하게 하는 힘이야말로 호월님 시가 가지신 매력입니다
ㅎㅎㅎ
제가 어눌한 것이 매력이 되나요? ㅎㅎㅎ. 편한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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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고무 공에 맨발이지요. 수도원에 어디 벽돌이 있어야지요?
LA나 New York, 요즘은 Atlanta. 그 외에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집에 온돌 설치한 한인도 있겠지요. 찜질방에는 온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사는 Windermere, Florida에는 한국 식품점과 식당은 여럿 있지만 한인 타운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