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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축조한 용담호를 지나 멀리 앞에 보이는 산이 진안 마이산
주차장을 지나 마이산 탑사로 오르는 오솔길을 올라가다 언덕을 올라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저수지
마이산의 암,수 마이봉이 보인다.
탑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마련된 탑사 안내도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숫 마이봉. 마이탑사는 좌우로 산이 둘러쳐저 있어 탁 트인 여늬 절보다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탑은 돌탑들이 서있어 이갑용 처사의 염원이랄까? 알지 못할 서기가
느껴지는듯 하다.
탑사를 오르기 직전 왼쪽에 병풍처럼 처있는 산이 앞으로 우르르 무너져 내릴듯 느껴지지만
신비롭게도 이 마사토와도 같은 석벽에 능소화가 필때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억센 태풍에도 지금까지 그대로 꿋꿋이 서있는 돌탑은 쌓은 이의 불심이 느껴진다.
혼자서 어떻게 저러한 돌탑을 쌓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부러 쌓은 조경석처럼 주위의 석산과도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어 낸다.
저수지 뚝 바로 아래에서 오려다 본 마이산
<남도기행 4-진안 마이탑사> 2003. 8. 10
아침을 먹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정리하는 마이산 탑사를 향해 어제 밤에 남원에서 전주로 오는 신설 4차선국도를 다시 거슬러 올라 진안에서 마이산 탑사로 가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법 짧지는 않은 거리였습니다.
이 진안과 마이산 탑사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근처의 무주는 등산을 하기 위해 자주 드나들며 그냥 지나치기만 한 진안이었지요. 그렇지만, 이 진안은 예사롭지 않은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곳만 같기에 나중에 아내와 아들, 딸 가족들과 같이 오려고 아껴두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전라북도 땅에 속했던 금산군이 1963년에 충청남도로 떨어져 나가게 되자 전라북도 사람들은 매우 실망하며 반대를 했다 합니다. 오랜 옛적부터 전라북도의 한 부분을 이루어 왔던 땅을 전주시보다 대전시 쪽에 더 가깝다고 해서 떼어갈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했던 것이었지요.
그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까닭은 물론 오랫동안 한 동아리를 이루어 온 땅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금산인삼을 잃어버리는 아쉬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금산군은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름난 인삼 재배지로서 나라 안에서 나는 인삼의 80퍼센트를 차지했고 또 인삼에서 벌어들인 돈이 적지 않아 전라북도 사람들이 꽤 든든하게 여기고 자랑하던 곳이기도 하였지요.
그러니 그 곳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할 만도 했을것입니다. 물론 요즈음 같으면야 단체행동으로 옮겨 시위를 하고 결사반대도 하며 극력행동으로 이어 졌겠지만, 그때는 정부의 방침이 그렇다면 의례히 그런 줄 알고 순응을 하던 우둔하고 순박한 국민들이었지요.
격세지감이지만, 요즈음은 님비인지 냄비인지 그런 현상은 물론, 자기들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부합되지 않으면 목숨 걸고 반대하고 난동들을 부리지 않습니까? 새만금사업이라든지 핵폐기장 건립반대 라든지, 공교롭게도 전라북도 지방에 커다란 국내적 이슈가 주목을 받고 있긴 합니다만, 환경도 좋은 얘기지만 그 지역주민의 진정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반영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부 과격단체나 사사로운 개인이나 소수단체의 극단적 이기심에 의해 여론의 호도와 아전인수, 지역주민의 진정한 바라는 바가 불순분자나 편파적인 방송보도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쨌던, 전라북도 주민의 세찬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금산군은 충청남도로 떨어져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그 뒤로 금산 인삼은 충청남도의 산물로서 빛을 내었지요.
본디 삼한시대의 마한 땅이었던 진안군은 백제 때에는 나진아현 또는 월랑현이라고 불렸고 통일신라의 경덕왕 16년에 진안현이라고 고쳐 불려 이웃인 장계 곧 장수군에 딸렸으며,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에 마령현을 아울렀고, 1914년에 금산군에 속했던 용담현을 다시 아울러 진안군이 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곳의 백제 때의 이름이었던 월랑이 오랫동안 이 지방의 별명으로 남아 있어 진안 지방의 여덟가지 경치를 묶어서 월랑팔경이라 불러왔습니다.
월랑팔경에는 1)마이 귀운 2)부귀 낙조 3)고림 모종 4)우정 제월 5)학천 어정 6)우주 세우 7)남루 효각 8)학천 어정 이 있었다 합니다.
그 중에서 첫째로 꼽는 마이 귀운은 마이산에 구름이 드리운 풍경을 가리킨다 하였지요.
마이산은 진안 읍내에서 단양리의 서양골을 거쳐서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봉우리 두개가 말의 귀처럼 쫑긋하게 마주 솟아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고, 처음부터 그런 이름을 지니지는 않았었다고 합니다.
백제 때에는 서다산이라고 불렸고, 고려 때에는 용출산이라고 불렸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서서는 속금산이라고 불리다가 정종 때부터 마이산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봉우리 두개가 서로 내외간이라 믿고 있어 높이가 667미터인 동쪽 봉우리를 숫마이산 또는 숫봉우리라고 부르고 높이가 673미터인 서쪽 봉우리를 암마이산 또는 암봉우리라고 부릅니다.
숫봉우리에는 바위가 두 갈래로 갈라져 그 틈바구니에서 약수가 솟아나오는데, 이 약수터를 화암굴이라고 부르며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 아낙네들이 자주 찾는다고 합니다.
암봉우리의 남쪽 벼랑 바로 아래에는 돌로 쌓은 탑이 백 개쯤 되는데, 마이산의 서기를 머금으며 나라의 국태민안을 빌고 서있듯 합니다.
마이탑사라고 불리는 이 돌탑들은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1860년에 태어난 이 갑룡이라는 이가 스물다섯 살 때부터 아흔여덟 살로 죽을 때까지 혼자 힘으로 세운 것들이라 합니다.
그는 생식을 하고 나막신을 신었으며 겨울에도 얇은 무명옷만을 입고서 바위에 앉아 기도를 함으로써 이 지방에서는 도사로 불리기도 했으며, 그는 중생들을 구원하고 인류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불탑사를 쌓았다고 하는데 아무런 장비도 없이 돌 한 덩이 한 덩이를 묘하게 쌓아올려 강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탑을 만든 그 솜씨는 지금도 풀지못한 신비로운 숙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는 이 갑룡 처사의 둘째아들인 이 기동 씨와 그 아들인 이 왕선 씨가 탑사를 지키며 한겨울에도 탑 안에 찬물을 떠다 놓고 기도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고 있다한다"는 것이 한 20년전 제가 어느 자료에서 읽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아직은 차들이 별로 없어 한산했습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한 20분 정도 산책하듯 올랐습니다. 한산하면서도 산책의 소롯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등산 겸 한참을 땀을 흘려 올라가야겠구나.... 생각했는데, 어느덧 탑사 앞에 닿았습니다.
이 탑사 역시 그 탑의 신비함과 그 탑을 쌓은 사람에 대해서도 무언가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언젠가 꼭 그 돌탑 앞에 서면, 이갑용 처사에 대한 그 정신과 瑞氣를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신비한 돌탑의 모양도 각양각색이어서 그 탑의 모양을 이모저모 자세히 관찰하기도 했고, 그 돌 하나 하나에 이갑용 처사의 강인한 집념과 바램의 혼이 아직도 깃들여 있는 듯 그의 탑을 쌓는 과학적인 기술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관광객이 한 무리 올라오면서 이곳 저곳에서 비디오를 찍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들어보니 중국이나 대만의 관광객과 일본인 관광객도 있었습니다.
아시아권에서도 이 진안의 마이탑사가 많이 알려져 있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암 마이봉의 밑둥 탑이 있는 뒷자리에서 바위를 타고 오르며 피어있는 주황색의 화려한 능소화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산을 이루고 있는 바위가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많이 부석부석해 보였습니다. 얼핏 보면 무너져 내릴 듯 암질이 단단해 보이질 않았습니다.
사진을 몇 장을 찍고, 나머지는 목어와 단청의 색과 문양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앞으로 한국적인 문양의 목공예작품을 만들려면, 참고할 수 있는 전통문양의 선과 색의 표현을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법고를 보니 "전라북도에서 제일 큰 법고"라고 써 있더군요. 어쨌던, 제일 크고, 제일 높은 것, 세계 최대, 동양 최대..... 뭐 이런것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이지요......
관람을 끝내고 내려와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왠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고, 마음이 다급해지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진안을 벗어나 가는 길에 금산에서 인삼어죽을 먹자고 하니, 낚시친구 왈 제가 운전하느라 피곤할 터이니 장어구이를 먹자고 하더군요. 금산에서 유명한 것은 인삼어죽인데........, 아무튼 강변을 따라 가다보면 어죽이든 장어구이든 먹을 것이 있겠지...하고 가다보니 먹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금산 시내로 들어갔지만 역시 찾지를 못하고, 추부를 거쳐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시절, 대전 근교 대덕으로 과학기술처 산하 정부출연 연구소와 과학기술계 연구소를 통폐합 이전시켜 대덕연구단지로 육성하겠다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시골 구석에다 몰아 넣겠다는 발상이었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소였던 제가 다니던 연구소도 강제 이전되어 그 곳에서 약 2년을 근무하며, 연구소의 독신료(기숙사)와 대전 시내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 곳이지요.
그러한 연유로 낯설지만은 아닌 곳이지만, 조달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고 둔산동 신도시가 개발되므로 인해, 대전도 이제는 차도 많이 밀리고 복잡한 대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어디 호젓하게 적당한 먹을 곳을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국도로 올라오면서, 신탄진을 지난 곳 어디 국도변 휴계소에 차를 세우고 점심 요기를 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국도변 허름한 휴게소였지만, 두부요리가 맛이 괜찮았습니다.
월드컵 때문이었나? 아무튼 대전에서 천안까지 국도가 4차선으로 완전히 연결이 되었더군요. 몇 년 전만 해도 천안 공원묘원 근처에서 4차선이 2차선으로 좁아졌었는데.....
천안에서 서울 가는 경부고속도로 들어서니, 그렇게 차는 밀리지 않았습니다. 판교에서 외곽순환 고속도로로 구리를 거쳐 무사히 낚시친구의 아파트에 당도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의 여행이었지만 주마간산 격으로 휙 지나치는 여행으로는 진정한 여행의 묘미를 느끼기는 너무 아쉬워 다음에는 아무 부담없이, 마음가는대로 가는 여행이라 해도, 목적지에 대한 많은 정보와 사전지식을 습득해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야 좀 더 흥미롭고 뜻있는 여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흘 전, 남도로의 여행을 떠나는 아침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오늘은 날이 활짝 개었습니다.
서울 한구석 침침한 유리창 안에
당신도 모르는 그 누구도 모르는
내 마음 혼자 비에 젖어 있습니다
서울 한구석 잊어 버리고 사는 그 한구석에서
당신도 모르는 그 누구도 모르는
내 마음 혼자 묻혀 있습니다
-쓸쓸한 적막에 인생은 그저 사랑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
서울 한구석 침침한 유리창 안에
당신도 모르는 그 누구도 모르는
내 마음 혼자 빗속에 묻혀 흘러내립니다
조병화님의 <마음.1>이라는 시 였습니다.
좋은 여행이었지만, 왠지 마음 한 쪽이 허전한 여행이었습니다.
3년여 전 명퇴를 하던 해부터, 아내와 가족과는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아내는 생활의 전선에서, 이 자신은 이것도 저것도 분명한 것이 아닌 미명에서 흐릿한 생활의 궤적만을 그려왔었기에, 그전 같으면 그저 주말이면 훌쩍 아내와 때로는 아이들과 함께 발 가는 대로, 그리도 여행을 자주하며 가는 길의 여정을 즐기며 살았었는데....
혼자서 하는 여행, 아니 낚시친구와 하는 여행이었지만, 왠지 한 편으로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즐겁지만은 않은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나름대로 준비를 치밀하게 하고, 시골에서의 전원생활을 하겠다며 명퇴를 하고 서울을 버리고 춘천, 홍천 등 시골로 무모하게 내려왔던 만용이, 질서와 정리되었던 생활을 망가트리며, 그간 가지고 있던 정신적,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버리도록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 비틀어 아직도 지속적으로 마음의 압박을 주는 그런 시간에서 나 자신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어쨌던, 손에서 나만의 일을 놓은지가 3년여.......
1-2 년은 여러가지 안 좋은 일들도 많이 겪으면서 그렁저렁 잘 모르며 지내왔는데, 시간이 3년여를 지나면서 부터는 왠지 사회에서 격리되고 탈리 되어만 가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실없이 늙어만 간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운 마음만이 자리를 차지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공예디자인을 배우는 일에 도전을 했습니다만, 마음은 착잡.... 그 안에서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도 작금의 현세에 처음 겪는 이 황량한 불경기 속에서 내내 혼자서 일을 하고 있을 아내와 아직도 상실감을 다 떨쳐 버리지 못할 나의 아들, 딸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음 또한 여행같은 여행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경기가 좋다면 이 마음도 조금은 덜 불편할텐데, 김대중이의 대북퍼주기, 노무현 정권의 철따구니 없는 짓거리, 이런 것들이 점점 이 나라의 젊은이는 물론 이렇게 늙어가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없고 점점 어둠과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만 가고 있습니다.
개혁과 혁신을 가장한 허접스러기 작자들과 무리들이 무어라 궤변을 늘어 놓는다 해도 박정희 대통령만큼의 위인이 있다면 나 좀 가르쳐 주십시오.
모두 다 잘 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지요. 그를 욕하는 정치하는 놈들, 역대 대통령이란 자들, 그 자들이 그 시대에 정권을 잡았으면 아마 이 나라는 그때에 벌써 김일성이의 수하에 들어가 빨간나라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으리라는 것은 웬만한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동의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산다는 것이 정말 싫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 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낙엽> 이었습니다.
어느덧 저는 내일이 개학입니다.
긴듯 하던 시간이 벌써 다 소멸하고 이제는 오늘이 여름방학의 끝날 입니다.
가족들과는 지난 금요일부터 3일간 휴가를 주로 동락재에서, 하루는 삼봉약수, 구룡령, 양양 낙산 앞바다, 한계령, 필례약수, 내린천으로 돌아 왔습니다.
휴가란 곧 휴식과 재충전이어야 겠지요.
내년엔 아주 편한 마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길 바랍니다.
실은 이번 여름에 갈 계획이었는데, 딸이 시간이 맞지 않아 실행을 못했습니다.
동락재의 밤은 이제 가을의 곁으로 가까이 그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새벽엔 한기를 느낍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화니님께 진안 마이산 가는 길에 꼭 들르고 싶었는데, 제 한 몸이 아니어서 폐가 될 일이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화니님과 그외 저의 여행길의 안내를 자청했던 우리 카페의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기회에 꼭 뵙고 싶군요. 홍천에도 한번 초대 하게 되길 바랍니다.
첫댓글 茶軒님의 바램이 이뤄지시길 바랍니다. 동락재에 저도 가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