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어있음[공]의 성품, 스스로 그러하다 2.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 3.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의 뜻 |
1. 비어있음[공]의 성품, 스스로 그러하다
아함경에서 보면, 비어있음에는 이유가 없다. 본래부터 그냥 비어있음이다.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눈이 공하고,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란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빛깔ㆍ안식ㆍ인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공하고, 영원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 ㆍ혀ㆍ몸ㆍ뜻도 또한 그와 같나니, 이것을 공한 세간이라고 하느니라.”
위의 번역에서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는 “所以者何? 此性自爾”를 번역한 것인데, 정확히는 “무슨 까닭인가?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다.”이다. 이 말은 ‘공은 성질이 스스로 그러할 뿐, 아무런 까닭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연법도 그러하고, 공도 그러하다.
“비어있음에는 인도 없고 연도 없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함이 없다[무위이다].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비어있음에 어떤 이유가 있을 까닭이 없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으므로 비어있음에 어떤 성질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성이 있는 그것이 그냥 비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공의 정의의 문제:대승 불교의 ‘무자성’과 초기 불교의 ‘비어있음’>을 참고하세요.)
또 비어있음이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상하기에 비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상한 그것이 그냥 비어 있는 것이다. 괴로운 것이 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연법에서 비어있음이 나올 수도 없다. 따라서 ‘연기하기에 비어있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거꾸로 비어있음에서 인연법이 나올 수도 업다. 따라서 ‘비어있기에 연기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비어있음은 비어있음이고 인연법은 인연법일 뿐이며, 다만 인연법에서 비어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대승 불교의 ‘공’의 정의의 문제: ‘비어있음’에서 ‘비어 있는 그릇’으로>을 참고하세요.)
바르게 관찰하면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아함경의 서술 방식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무상에서 비어있음을 보고 괴로움에서 비어있음을 본다고 한 것이다.
2.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추어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별하지 않고 비추어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관찰자의 지위 때문이다.
관찰자는 인연법의 주체이다.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인데, 인연법은 관찰자가 분별함으로부터 시작된다. 곧 관찰자가 분별함으로써 나와 세계[아함경에서 세게는 12입처와 18게, 5음이다]가 생겨나고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관찰자가 수행자가 되면 분별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인연법을 끊어낸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수행자가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수행자는 인연법의 주체로서의 관찰자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은 ‘분별하지 않으면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소 모순된 일이지만, 수행자는 반드시 그리해야만 한다. 그것이 수행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지점일 것이다.
3.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의 뜻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증일아함경_37. 육중품(六重品)[7]>에서 인연법을 ‘임시로 이름이 붙여진 법[假號法]’이라 한 뜻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임시로 붙여진 이름은 인연법으로 생겨나는 나와 세계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사물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것들의 모양과 성질[실체/자성]과 기능을 규정하고, 그것들이 생겨남과 없어짐을 규정한다. 그리 그 모든 과정은 관찰자의 몸과 마음[6내입처]으로 무엇임를 분별[인식]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찰자의 분별이 없다면 바로 그 순간 이 세계는 텅 비어질 것이다. (‘임시로 불인 이름’에 대한 논의는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의 사상적 지위>를 참고하세요.)
비어있음은 무상(無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무상이란 사물이 변하고 바뀌는 모습인데, 이는 곧 사물들 사이의 관계가 변화함을 의미한다. 관계가 바뀌면 기존의 규정 또한 달라지기 된다. 이때 기존의 규정이 사라지고 새로운 규정으로 옮겨가는 순간, 그 어떤 것으로도 정의되거나 분별되지 않는 ‘무규정의 순간’이 존재한다. 바로 이 순간이 비어있음이다. 이러한 비어있음을 ‘틈새의 비어있음’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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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제시된 글은 초기 불교의 핵심인 '공(空, Suññatā)'에 대해 대승불교적 해석을 배제하고, 아함경의 원형적 시각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이 글에 담긴 주요 논점들을 세 가지 측면에서 논평한다.
1. 존재의 실상으로서의 '자성적 공’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공의 이유를 외부(무자성, 연기)에서 찾지 않고 "성질이 스스로 그러하다(此性自爾)"는 구절에 집중한 점이다.
논평:
대승불교, 특히 중관학파에서는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논리적 인과를 중시한다. 그러나 제시된 글은 이러한 논리적 선후 관계를 끊어버린다. 눈(眼)이나 형색(色)이 공한 이유는 그것이 변화해서가 아니라, 그 본질적 상태가 이미 비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아함경의 '공경(空經)'이 가진 직관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이는 공을 '이해'의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선언하는 힘이 있다.
2. 연기와 공의 독립적 병치
글은 '연기하기에 공하다'거나 '공하기에 연기한다'는 일반적인 도식을 비판하며, 양자를 독립적인 영역으로 분리한다.
논평:
"비어있음은 비어있음이고 인연법은 인연법일 뿐"이라는 통찰은 파격적이다. 보통 우리는 연기를 공의 근거로 삼으려 하지만, 이 글은 연기라는 현상 세계 내에서 비어있음을 '발견'하는 것일 뿐, 둘 사이에 인과적 종속 관계가 없음을 명시한다. 이는 공을 현상 세계의 파생물이 아닌, 현상을 관통하는 근원적 배경(무위적 성격)으로 격상시킨다. 자성이 있는 상태 그대로가 비어 있다는 표현은 '색즉시공'의 초기 불교적 원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3. 관찰자의 지위와 가호법(假號法)의 해체
분별하는 주체인 '관찰자'가 곧 인연법의 주체라는 지적은 수행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논평:
세상이 '가호(假號, 이름뿐인 것)'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관찰자의 분별망상을 걷어내는 작업과 직결된다. 글에서 언급한 '모순된 지위(분별하지 않으면서 관찰함)'는 초기 불교의 사념처(四念處)나 위빠사나 수행의 본질을 관통한다. 대상에 이름을 붙여 실체화하는 인지 과정을 멈출 때 세계가 '텅 비어짐'을 경험한다는 설명은, 공이 관념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통해 도달하는 실재적 상태임을 논증한다.
4. 결론
이 글은 대승의 논리적 세련미 속에 갇혀 있던 '공'의 개념을 아함경의 투박하지만 강렬한 '본래 그러함'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았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있는 그것이 그냥 비어 있다"는 선언은 공을 허무주의나 단순한 논리적 귀결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준다. 이는 불교의 진리를 '해석'하려는 시도보다 '바르게 관찰(正觀)'하려는 태도가 왜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해당 논의는 초기 불교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매우 귀중한 관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