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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일 월삭예배
◎ 출애굽기 33장 11절 성도를 친구처럼 대하시는 주님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창조주와 피조물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백성들입니다. 셋째는 아버지와 자녀입니다. 넷째는 신랑과 신부입니다. 다섯째는 주인과 종입니다. 여섯째는 목자와 양입니다. 일곱째는 암탉과 병아리입니다. 여덟째는 친구관계입니다. 이 표현은 극히 드문 표현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표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한 사람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신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셨던 세 부류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대하시며 그들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셨던 첫 번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친구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이사야 41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해서는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라고 하시고 “내가 택한 야곱아”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에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인 야고보서에도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을 보면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친구나 벗이라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앞에서 읽은 야고보서 2장 23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이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고 아브라함을 보시면서 “너는 과연 나의 친구야”하고 기뻐하셨을까요?
이것을 알려면 야고보서 2장 21-24절의 말씀을 모두 읽어보아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향해 “너는 과연 나의 친구야”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셨던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과 함께 일하는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천국갈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도 그가 믿는 다고 하는 말에 대한 행동의 증거는 없습니다. 예배도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위식해서 드리고 헌금도 역시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드립니다. 선행도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드리고 봉사도 하나님 보다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듣다보니 누군가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언제나 자기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더 의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여” “회칠한 무덤이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을 화나게 하는 거짓된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마귀의 자식들” 혹은 “지옥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부류의 믿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갖는 믿음입니다. 이들이 구하는 것은 모두 땅에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십일조도 잘드리고 각종 헌금도 잘드립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예배도 적극적으로 참석합니다. 심지어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과 기도와 간구의 목적은 모두 이 땅에서 잘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가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의 잘됨에 있습니다. 그가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 땅의 것을 얻는데에 달려 있습니다. 이 믿음 역시 바리새인들의 믿음처럼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변화되지 못한 마음은 하나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믿음은 이론적이고 지식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도 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은 지식을 떠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습니다. 경건의 능력도 없습니다. 누가 봐도 세상 사람이지 거듭난 성도가 아닙니다.
그는 성경의 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만 알고 성령이 그의 삶에서 그 진리를 위해 살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모두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계산적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의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모든 구석구석까지 인도하시고 책임지실 것이라고 믿지 못합니다. 그의 믿음은 살아있다고 말하지만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자기 아들을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그가 칼을 빼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죽이려할 때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만류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실제로 자기 아들을 칼로 찔러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막으셨습니다. 다만 그의 믿음만을 받으셨고 거짓없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아브라함은 나의 친구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약속한 모든 것들을 바로 너희의 때에 지키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인물은 모세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친구들의 대화의 특징은 편안하고 다정하며 거짓이 없고 흉허물이 없으며 대화의 깊이가 깊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를 여러분들이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를 일고 살펴보면 이러한 친구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친구들의 대화는 서로 숨기는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숨겨진 것을 다 드러내어 상담을 해줍니다. 자기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깊은 대화까지도 친구와는 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 못할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마음 열고 털어놓기 편안한 사람이 바로 친구입니다. 심지어 남편과 아내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이런 흉허물이 없는 친구를 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특히나 그런 깊은 상담을 듣고 그 문제의 대답을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듣도록 인도해주는 친구는 더욱더 좋은 친구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런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론과 미리암도 모세의 남매로써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대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하여 흡족하셨고 만족하셨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어떤 점이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을까요? 첫째는 거짓없는 진실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서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할 때나 언제나 거짓없는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이 낮춤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했으며 자기 목숨보다도 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하나님을 그렇게 기뻐하시게 만들었던 이유는 온유와 충성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마음이 온유했고 하나님께는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온유하게 대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충성했습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백성들은 모세를 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한 경향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의 권위를 스스로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백성들이 성령을 받아서 자기와 같이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한 번은 모세가 혼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하니까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일할 사람들도 세우시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 70인을 모으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모세가 모이라고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70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모두가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본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모세여 그치소서”. 그는 모세의 지도력에 흠이 갈까봐 염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말합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염려하느냐 아니라 나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성령을 받아 선지자 노릇을 하기를 원하노라”
모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흉허물이 전혀 없는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언제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때에는 언제든지 모세를 찾아가셔서 서로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간은 복된 시간이었고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나왔을 때 모세의 얼굴은 광채가 났습니다.
잠언서에 보면 “사람이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모세의 얼굴은 하나님으로 인해 빛났고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로 인해 빛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로 흉허물 없는 진실한 사귐을 통해 나오는 교제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친구처럼 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는 언제나 온유하고 하나님께는 충성된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친구로 여기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을 보면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제자들을 예수님은 “내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도 제자들을 행하여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여기서 친구의 특징은 친구가 무엇이든지 부탁하면 다 들어준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깊은 친구관계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부인함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두시기도 하시지만 영벌을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사랑을 실천하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또한 친구는 비밀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모르지만 친구는 다릅니다. 친구는 숨겨진 비밀까지도 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아브라함에게 숨길 것이 무엇이냐?”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가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불과 유황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간곡하게 하나님께 여러차례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깊은 중보기도를 드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구로 인정하신 사람, 예수님께서 친구로 인정하신 사람들에게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듯이 여러분들 역시 친구로 여기시면서 어떤 특별한 비밀들을 말씀해주셔서 여러분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길 축복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하셨던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행위가 온전했고 온유하며 충성스러웠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믿음에 대한 반응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림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사람들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또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 친구로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친구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일과 그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이 세대의 죄인들 위에 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입니다. 그런 그가 병들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하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셨습니다(요 11:11). 성경은 나사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떤 특별한 일을 했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마르다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사랑에 반응한 헌신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나사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하시면서 사랑하셨고 그가 죽었을 때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들을 향하신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친구라고 부르셨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하면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물론 이것은 예수님과 세리,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죄인들을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시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 그들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이 두가지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첫 번째 말씀은 야고보서 4장 4절의 말씀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간음하는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억하실 말씀은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인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한 사람을 예수님은 예수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친한 친구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십시오. 믿음으로 성령안에서 행하십시오. 그러면 어느날 예수님과 친구처럼 가까워져서 예수님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이 이번 달부터 시작하여 일평생 계속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