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세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에녹의 신앙 창5:21-24 히11:5-6 유14-16
2020년 까지만 하여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는 ‘한국 세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낭자들이 LPGA대회에서 정교한 아이언 샷으로 1년에 보통 10승을 합작했다는 것은 대단한 승부이다. 이런 LPGA 시작은 일찌감치 국내 무대를 평정하고 1998년 미국으로 진출한 박세리부터 시작했는데 박세리는 첫해에 5월 메이저 대회였던 LPGA 챔피언십, 7월에는 US여자오픈을 연달아 제패하며 골프를 국내에서 단숨에 ‘인기 스포츠’ 반열에 올려놓으면서 전 세계 골프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태국계 미국인 제니 추아시리폰과 20홀 연장 승부를 벌이며 워터 해저드에 양말을 벗고 들어가 샷을 날리는 모습은 IMF 경제 위기에 시달리던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2016년 7월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은 ‘한국의 아놀드 파머’라는 극찬을 받은 박세리 선수가 18년간 LPGA 투어 생활을 사실상 마무리했다고 소개했다. 박세리는 메이저 5승을 포함해 미국에서 25승을 거둬 한국인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였고, 2007년에는 한국 선수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골프는 ‘박세리 이전’과 ‘박세리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그가 한국 골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 이후의 선수들은 박세리가 골프선수들의 롤모델이 되었다고 할 정도이다. 이어서 박인비는 리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지난해 한 번도 우승하기 힘들다는 메이저대회를 3연속 휩쓸었으며 그는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새로운 ‘골프 여제’로 등극했다. 작년 LPGA 투어 대회 수는 28개로 한국선수의 우승 확률은 무려 36%나 됐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박세리를 롤모델로 계속 선수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신앙도 여기에 비유할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누구하나 그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하지만 그래도 오늘날 우리들이 누구를 나의 신앙의 롤모델로 삼을까 생각하는 중 히브리서11장 믿음의 장에 나오는 에녹을 생각해 봤다. 수많은 믿음 선진들 중에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에녹을 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을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면 당연히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의 삶을 보면서 우리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들이 사는 이 시대야 말로 가장 살기 좋은 시대임에 틀림없다. 예를들면 난방과 취사만 봐도 수천년 동안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지금부터 100년전에는 연탄을 때고 지금은 석유와 가스로 난방 취사를 하니 생활하는 모든 것이 과거보다 훨씬 좋게 되었다. 주택을 봐도 아파트의 편리함은 이루 말로 나열하기도 귀찮을 정도이다. 그리고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것을 봐도 봄에 모내기를 시작하여 가을에는 벼를 추수하는 과정만 봐도 기계가 거의 다 하고 있다. 봄에 볍씨 뿌리는 파종기부터 벼씨가 자라 모심을 때는 이양기로 모를 심고 비료나 퇴비 뿌리는 살포기, 농약 뿌리는 분무기, 곡식거두는 콤바인, 곡식 터는 탈곡기, 턴 곡식을 운반하는 트레일러 등이 농사를 짓는데 활용되고 있다. 알고 보면 농사도 사람손이 가는 것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 기계가 대신하고 있으니 얼마나 살기 좋은 시대인가? 어디 그뿐인가요 집에서도 주부들이 살림할 때 설거지는 초음파세척기, 빨래는 세탁기, 집안청소는 로벗청소기, 밥은 전기밥솥, 요리는 전자레인지가 시간만 맞추면 알아서 척척하는 그야말로 정말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이렇게 편하게 살아온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생활자체가 점점 편리해지니 시간이 많이 남지만 그렇다고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잘 믿느냐 성경을 더 많이 읽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삶이 편해질수록 점점 멀어져 간다는 것도 또한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편해진 것만큼 남는 시간을 취미생활이나 동호회 등 세속적인 일에 치우치다보니 신앙생활은 점점 멀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과거에 비해 이렇게 편하게 사는데 신앙생활은 점점 나태해지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말세에 사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이 바로 이 시대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사탄은 바로 마지막 때 사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편리한 삶을 살도록 환경을 만들어 줘 사람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인데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지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사탄은 현대 문명을 통해서만 신앙을 후퇴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또 사람들의 말이나 생활속에서도 이미 자기들의 이미지를 다 박아 나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사탄 문화에 빠져들게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탄의 세력의 범위에서 벗어나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17년에 수많은 관객을 동원한 신과 함께 죄와 벌이란 영화의 줄거리를 보면 지옥은 두려운 곳이 아니라 한번 가볼만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어느 소방수가 화재진압하다 죽어서 지옥에 가서 49일 동안 7번 재판을 받아 다시 환생한다는 것을 주제로 하여 사람들에게 과연 지옥이 이런 곳이라고 영화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다른 것은 잊어버려도 지옥은 영화에서 보았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탄은 실제 지옥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처럼 가짜 지옥을 마음에 심어줘 수많은 영혼들은 이 시간도 꺼지지 않는 불타는 지옥으로 향하도록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영화처럼 그 정도 한가한 곳이 아니라 유황불이 타는 불못으로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불못이며 마귀의 고통을 매순간 받아야하는 정말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너무 끔찍한 감옥이다. 영화에서처럼 선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재판받아 환생하는 곳이 결코 아니다. 사탄이 영화를 통해 지옥을 너무 미화시킨 것이다. 성경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옥이란 말대신 음부니 스올이니 하면서 불타는 지옥을 단지 저승세계로 기록을 한 데가 한국교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개역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도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지옥이란 말 자체를 다른 용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세상의 임금인 사탄마귀가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지 마귀 전략에 대해 좀 살펴볼까요?
1. 지옥으로 초대하는 마귀들의 전략
어느 날 멋진 봉투 속에 들어있는 초대장 하나가 배달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초대장에는 “불행과 근심, 고통이 가득한 삶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초대 글이 적혀있다면 과연 누가 이 무례한 초대에 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상상이 아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탄이 유혹하는 이런 초대에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사탄은 거짓을 통해 사람들에게 허황된 꿈을 갖도록 합니다. 거짓은 사탄의 전유물입니다. 사탄의 입에서 진리가 나올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네가 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그럴듯한 거짓말에서 보듯 사탄은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일이 생길 것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말대로 따르기만 하면 생각지 못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짓말로 유혹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오는 목적은 뺏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정에 들어오면 가족이라도 서로 불신하도록 만들어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벽을 세우고 결국은 이 땅에서 천국 모델인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끊임없는 사탄의 공격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저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것이 현실입니다. 사탄이 우리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무기는 무궁무진한데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들 몇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1) 교만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면서 효과적인 무기가 바로 교만이란 것이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8:12)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 때문에 죄를 범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교만이란 무기로 접근하면 아주 쉽게 넘어진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함으로 큰 복을 받은 유대나라 웃시야 왕이 교만으로 인하여 폐인이 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웃시야 왕은 다윗왕과 솔로몬왕에 비유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던 왕이었으므로 그의 이름이 애굽까지 명성을 떨쳤으니 웃시야가 얼마나 강성한 왕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형통한 복을 받았던 웃시야 왕의 교만 때문에 하루 아침에 몰락한 것을 알고 있는지요? 그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대하26:3).
(대하 26:4-5) 4 그가 자기 아버지 아마샤가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며 5 하나님의 환상들에 관하여 이해하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그가 주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행하여 그가 주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는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덕망있는 왕이었는데 웃시야는 왜 불행한 인생으로 마감해야 했을까?
불행의 씨앗은 그가 강하게 되매 그의 마음이 높아져서 그가 파멸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주 자기 하나님께 범법하고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제단에 분향하려 하였기 때문이다(대하26:16)라고 기록되어 있다.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져서 성전 향단에 들어가 자신이 직접 분향을 하였을 때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는 교만한 행동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으니 제사장 아사랴인데
(대하26:17-19) 17 제사장 아사랴가 주의 제사장들 곧 용맹한 자들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 그들이 웃시야 왕을 막으며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주께 분향하는 일은 왕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거룩히 구분된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에게 속하였으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법하였은 즉 주 하나님으로부터 그 일로 인해 영예를 얻지 못하리이다. 하니라. 19 그 때에 웃시야가 화를 내며 분향하려고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그가 제사장들에게 화를 낼 때에 주의 집에서 분향제단 옆에서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솟으니라.
정말 제사장 아사랴는 웃시야의 교만을 올바르게 지적하였던 훌륭한 제사장이었음에도 웃시야는 교만하여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진노했던 결과 그는 문둥이로 살다가 죽었다.
또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인구조사를 한 것(삼하24:10)도 그의 교만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삼하24:1-15) 1 다시 주의 분노가 이스라엘을 향해 타오르매 그분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움직이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수를 세라, 하고 말하게 하시니라 2 왕이 자기와 함께한 군대 대장 요압에게 이르되 이제 너희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백성을 계수하여 수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이르되 백성이 얼마나 많든지 이제 주 왕의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백 배나 더하사 내 주 왕의 눈이 그것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내 주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였으나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말이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을 이겼으므로 요압과 군대의 대장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수를 세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가니라 ...... 8 이처럼 그들이 온 땅을 두루 다니고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9 요압이 백성의 수의 총계를 왕에게 주었는데 이스라엘안에는 칼을 뺀 용맹한 자 팔십만명이 있었으며 유다 사람은 오십만 명이었더라 10 다윗이 백성의 수를 센 뒤에 그의 마음이 그를 찌르므로 다윗이 주께 아뢰되, 내가 행한 일로 인해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오 주여 이제 간청하옵나니 종의 불법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주의 말씀이 다윗의 선지자로 있던 대언자 갓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 내가 네게 세 가지를 주노니 너는 그것들 중의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라. 13 이에 갓이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고하며 그에게 이르되, 왕의 땅에서 칠 년 동안 왕에게 기근이 임하리이까 ? 아니면 왕께서 왕의 원수들에게 추격을 받고 그들 앞에서 석 달 동안 도망하시려나이까? 아니면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역병이 있으리이까? 이제 나를 보내신 분에게 내가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살피고 알려 주소서, 하매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큰 곤경에 빠졌도다. 주의 긍휼은 크니 이제 우리가 그분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5 이에 주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이스라엘위에 역병을 보내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백성중에서 칠만 명이 죽으니라.
왕은 자기의 장군 요압에게 인구조사를 지시하자 요압은 그 일을 말렸다. 여기에 오늘 우리 질문에 대한 어떤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요압과 군대 대장들은 왕의 뜻을 꺾지 못합니다. 그래서 왕명을 따라 아홉 달 스무날 동안 인구조사를 실시하니 군에 징집할 수 있는 인구가 130만이나 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다윗은 이렇게 인구를 조사하고 난 다음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다윗이 주님께 자기가 이러한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으니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참으로 자기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구조사에 무슨 문제가 연관되어 있기에 하나님도 그 문제를 가지고 다윗을 부추기고, 장군들은 무엇을 벌써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인구조사를 말리고, 그 조사를 끝내놓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은 그 죄를 벌하시려고 대언자 갓을 시켜 다윗에게 받을 벌 세 가지를 제시하면서 그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셔서 다윗은 세 번째 재앙을 택하니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퍼져 백성 가운데서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 왕은 아라우나에게 그의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앙이 그쳤다는 것이 사무엘하 24장 이야기입니다. 인구조사가 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 백성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재앙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생각이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여기 말고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인구조사를 할 때도 목숨 값에 해당하는 속전을 받친 일이 있습니다
(출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그들을 계수하여 그들의 총수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각 자기 혼을 위하여 주께 대속물을 드릴지니 이것은 네가 그들을 계수할 때에 그들 가운데 재앙이 없게 하려 함이라.
통치자의 인구조사는 일찍부터 하나님의 권한을 무엄하게 침해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그 후손들을,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3:16,15:5). 인구조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여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확인해 보려는 행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강권정치를 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 이제는 “자기가 주도하는 전쟁”을 하지 “하나님이 주도하는 전쟁”은 더 이상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교만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만 하면 형통의 복을 받게 되거늘, 교만하여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귀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전형적인 무기가 교만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 교훈을 통하여 깨달아야 될 것은 나도 하나님보다 내 명예나 재물이나 인기를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나타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절망
교만이 사탄의 공격용 무기라면 절망은 방어용 무기이다. 절망은 성도들을 낙심케 함으로써 하는 일을 중단케 만드는 방법인데 이 역시 의외로 많은 사람에게 생각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교만에 안 넘어가는 사람도 이 방법에는 쉽게 넘어간다. 절망은 자포자기나 자살에 이르는 병이다. 최근 들어 빈번하게 발생하는 자살사건들은 바로 사탄의 두 번째 전략무기에 넘어간 증거이다. 지난해 한국인 자살사망자 수가 30만명을 돌파하며 통계 작성 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절망이라는 사탄의 무기를 우습게보면 큰일 난다는 사실이다.
(3) 거짓말
거짓말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탄에 의해 번지기 시작했다. 거짓의 아비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을 빼고선 말할 수 없다. 진리와 거짓은 빛과 어두움이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거짓말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지는 십계명 9번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7)를 보면 알 수 있다.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 불량자 둘을 세워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말하게 해 나봇을 죽게 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왕상21:8-29) 8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던 장로들과 고귀한 자들에게 그 편지를 보내니라 9 그녀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가운데 높이 앉힌 뒤에 10 벨리알(בְּלִיַּ֫עַל, 불량자, 사악한 자)의 아들 두 사람을 그 앞에 앉히고 그를 대적하여 증언하며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게 하고, 그 뒤에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더라. 11 이세벨이 자기들에게 보낸 대로 곧 그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행하여 13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 그의 앞에 앉고, 백성 앞에서 나봇에 대하여 증언을 하여 이르기를,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매,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였다.
이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8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 아합을 만나라. 보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가 거기에 있나니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 하고 또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피도 핥으리라' 하라. 23 또 이세벨에 관하여도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예스르엘 성벽 옆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
위의 말씀데로 나봇과 이세벨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은 거짓말을 한 결과가 어떻게 재앙으로 돌아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거짓을 행한 자들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외식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식이다.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은 천국 가는 길을 막는 마지막 전술이다. 사탄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성경 읽는 것, 교회 가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막을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마지막 무기가 바로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불손한 의도와 속임수인 외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기도를 외식으로 거룩하게 하고 성경을 외식으로 읽게 하고 봉사를 외식으로 하게 한다. 여기서 바리새인 같은 위선자가 나온다. 따라서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외식이 사탄의 전략임을 깨닫고 진리의 말씀으로 대적해서 그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거짓된 초대를 물리치고 승리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탄의 견고한 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우리사회나 문화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가지 예로서 회사 사장이나 간부들의 명패를 디자인한 것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용의 그림이 디자인되어 있다. 크리스천 사장들의 명패에도 용의 그림들이 책상위를 점령하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리고 대통령 휘장으로 사용하는 그림이 바로 봉황인데 이 봉황은 10가지 짐승을 조합한 상상의 새이다. 봉황이란 암놈은 봉 수놈은 황이라고 하며 이렇게 생긴 새를 예부터 상스러운 새라고 하여 임금이나 대통령의 휘장에도 이미 자리잡은 지가 수천년이다. 이 용의 세력들이 대통령의 집무실과 모든 표창장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이제는 그들의 세상권위를 이용하여 사탄의 문화는 온 나라의 각 가정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중이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단을 찬양하는 춤과 노래가 우리들 생활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귀와 입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이미 세상은 사탄의 문화로 채색되고 점령당한지 오래전이다 이러한 사탄문화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경건하게 살았던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에 대하여 알아보자.
2. 에녹의 믿음
(창5:21-24) 21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11:5-6)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경건한 삶입니다. 경건이란 약1:27에 보면 하나님을 섬길 때 순수하고 더렵지 않은 신앙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중에 있는 아버지 없는 자들과 과부들을 돌아보고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것이니라.
경건하게 살다가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바로 창세기 5장과 믿음의 족보를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에녹이다.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지금 우리 시대와 비교하면 너무 오래전에 365세를 살았고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마치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느껴질 것이다.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지만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 무오한 진리의 말씀임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사실이다. 믿고 안 믿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을 생각하면서 사람은 본래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창2: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니라.
인생은 영생하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는데 마귀 유혹을 받아 죄를 지어 영원한 생명을 상실했습니다. 영원토록 살아갈 피조물로 창조된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인데 영생을 잃고 일천년을 산다 하더라도 실은 짧은 생애입니다. 천사보다 더 잘 만들어 놓은 창조물이 바로 인간인데 천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우리들도 정말로 영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죄값으로 인하여 인간 수명은 노아 홍수 후에 팍팍 줄어들어 모세가 살았던 시대로 내려오면 모세는 120세에 죽었고 대부분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짧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편 90편에 기록하기를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고 한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처럼 짧게 살거나 아담시대처럼 900년 이상을 산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죽은 후에 어디서 다시 사느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가인처럼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불행한 것이고 오늘 나오는 에녹은 당시로 보면 아주 짧은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갔다고 하니 이제까지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과연 에녹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1)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에녹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그의 전 생애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성경은 그의 삶을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전합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모든 인류의 조상 아담부터 시작하여 몇 세에 누구를 낳았고 몇 세까지 향수하다가 몇 살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 930세를 살고서 죽었더라를 시작하여 실은 모든 인류는 사망급행열차를 탄채로 사망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조상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유혹으로 죄를 범한 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무도 사망을 향해 가는 열차를 타고 중간에 내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서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고 하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면서 16절에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서 그리스도라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낳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고 했습니다.
성경은 영생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 죽어가는 인생이 예수 안에 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담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이나 예수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에녹이 생명의 깃발을 흔들면서 사망의 열차를 정지시켰던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가아만 하는 사망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로 직행하였던 최초의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에녹은 믿음의 족보인 히브리서 11장에 아벨 다음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히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곧장 천국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옮겨졌다는 말씀이 5절에만 3번이나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히9:27)고 했지만 에녹은 이 법칙에서 제외되었으며 인생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하였지만 에녹은 이런 고정관념을 한방에 날려버렸습니다. 에녹은 아무도 피할 수 없었던 사망의 길을 피할 수 있있던 비결은 창세기 5장 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에녹처럼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에녹이 받았던 축복을 우리들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를 증거하는 말씀이 아래에 있습니다.
(살전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오실 때 살아남은 자들이 휴거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갔다는 생생한 메시지는 우리들도 이 땅에서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공중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확실한 소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멘.
동행의 뜻은 마치 한 몸을 이룬 커플처럼 항상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에녹은 늘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삶을 살았는데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 했다는 것은 한 순간도 하나님과 떨어진 적이 없는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에녹에겐 하나님과 동행한 시간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그가 이땅에서 살았던 삶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 생각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세상이나 이세상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동행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창5:22에 보면 (에녹이)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에녹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적인 일에는 관심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혼자 산속에 들어가서 수도사처럼 산 것도 아니며 에녹도 자녀를 낳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믿음과 경건을 유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신앙생활하기에 좋았느냐 하면 오히려 가인 계열에서 쏟아내는 죄악의 물결이 온 세상에 관영하였으므로 이미 에녹 시대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기 시작했다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15)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주님이 수만 성도와 함께 오실 때 예언한 이 부분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담의 칠 대 후손인 에녹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곧 오실 것이다. 오셔서 각 사람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악한 일들과 하나님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어 댔던 죄에 대해 그들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에녹의 예언은 당시의 죄악을 심판한다는 말씀도 되지만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정확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할 수 있었는가?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에 대한 비밀을 더듬고 나서야 이 예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므두셀라 라고 지었는데 므두셀라 라는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을 내린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지으면서 '그가 죽으면 심판을 내린다' 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계획을 에녹과 나누셨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처럼 므두셀라는 심판이 있었던 해에 죽었는데 그 때 나이가 969세 였고 므두셀라의 손자 노아의 나이 600세가 되던 때 이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창7:6).
에녹은 세상의 첫 번째 심판을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예언을 하였으며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 졌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에녹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위에서 증거했다.
에녹의 예언이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를 통하여 죄악된 세상을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에 있을 매우 중요한 사건 바로 성도들의 휴거를 예녹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에녹을 데려 가셨으며 에녹을 통하여 마지막 심판을 예언하시고 그 마지막 불심판 전에도 에녹처럼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입증하신 것이다. 홍수심판 전 에녹의 들림은 마지막 불심판 전 성도의 들림에 대한 본보기인 것이다. 성경의 매우 작은 부분에서 몇 번 거론되었던 에녹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진리의 비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우리들로써는 성도의 휴거의 본이 되는 에녹의 삶에 대하여 매우 심도 있게 접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히브리서에 나왔듯이 그는 창세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매 순간 순간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할 때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신 비밀입니다. 이것 또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비밀이었고, 이것 또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동행할 수 있는 성공의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누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고 어떻게 평생동안 흔들림 없이 동행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에녹이 경험했던 몇 가지 이유를 추정하면 동행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기를 작정하였다면 주일이 일주일 중 가장 소중한 하루가 되어야 하고 교회 오는 것이 재미가 있어야 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주일이 자주 돌아오나 일은 쌓여만 가는데 하면서 불평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적인 분이시라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한데만 마음을 드려야지 예배 중에 휴대전화 오는 것을 기다린다든지 문자를 보낸다든지 하는 것은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주일 하루만이라도 휴대전화에서 해방된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이 흐트러지면 온전히 마음을 드리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간단한 것만이라도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왜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가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이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는 믿고 구원받았으면 정죄의 심판, 멸망의 심판은 면제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도 상급 심판이 있습니다.
(고후5:10)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언어, 생각, 낱낱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날 부끄러움 없이 주님앞에 서기를 준비한다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준비하십시오. 에녹처럼 순종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는 내가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히11:5)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에녹처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대표적인 인물 두 명을 골라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의 믿음이 인정받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바치기로 결심을 하는 순간 그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창22:12). 즉 순종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왕입니다(행13:22). 하나님께서 다윗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다윗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다 이루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며 마태복음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이 세상에 나오기 전 노아보다도 약 1000전에 살았던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경건하려면 늘 때를 가리지 않고 무시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친밀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선 안됩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53:1)고 했습니다. 여기 어리석다는 말은 양심이 메말라 죽어서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즉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딤전4:2). 이런 사람들은 감정이 메말라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무감각한 사람입니다(마11:17).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을 믿으면서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에녹같은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을 믿으면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00만명을 이끌고 출애굽을 하여 나가는 모세를 향해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했으며, 가나안 정복길에 들어선 여호수아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고 했으며, 민족의 위기 앞에 선 이사야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함께 한다는 것은 ‘동행’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싫어하고 사탄의 달콤한 말에 속아서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곁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끝없이 인간에게 손을 내미셨으며 다시 인간과 함께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동행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임마뉴엘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마지막 승천하실 때 세상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이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고 약속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끝나는 그 날 까지 결단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사는 믿음이다. 인간이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때가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가정과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지만 큰 목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에녹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만 에녹처럼 하늘나라로 들려 올려져서 영원한 기쁨과 상급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