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운동신경이 둔하다.어느것 하나 제대로 못한다.그런데 그중에서 그런대로 한것은 테니스였다.1973년에 감사원에 들어갔을 때 100명이 합격하여 인사발령을 받은 사람은 88명이었다.그때 가장 인기있는 운동이 테니스였다. 골프는 워낙 비용이 많이 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엄두에도 못두었다.그런데도 사람들은 테니스가 고급운동이라 웬만한 수입을 가지고는 못친다고 약간의 질투성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사람의 섕각은 참이상한가 보다.월수입에 비하면 분명히 비쌌는데도 워낙 재미있다 보니 테니스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았나 보다.
나는 입사동기들중 가장 나이어린 측이었는데 49년내지 50년생들이 10여명되었다.가장 나이 많은 이가 38세였고,평균이 32세였다.우리는 소속과는 관계없이 주로 그들과 어울러 테니스를 쳤다.
또,우리들 입사동기들은 독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원에서 감사원 입구 바로 아래쪽에 '삼청료'라는
독신자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많은 동기들이 새벽에 일어나 감사원 후정에 있는 테니스코트를 이용하기가 참좋았다.1973년 가을부터인가 치기 시작했다.당시 세계적인 스타는 지미 코너스였다.그가 즐겨 사용하는 라켓이 헤드 마스터였다.그래서 그것으로 치면 마치 지미 코너스처럼 잘 칠수 있는 양 착각했다.
우리의 월급이 30,000원도 안되었는데 그 라켓의 값은 자그마치 42,000원정도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비쌌다.그때 국산 한일라켓은 8,000원에서부터 12,000정도였는데 처음에는 제일 싼 것으로 샀지만 이내 헤드 마스터로 바꾸고 싶은 욕심으로 변했다.
그래서 거의 매일 누가 헤드 마스터를 얼마에 샀다.외국 출장다녀오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샀다.누가 언제 나기니까 그이에게 부탁해서 사야겠다 이런 유의 대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나도 처음에는 한일 라켓을 청계천 5가에 가서 8,000원에 샀는데 곧 헤드마스턴를 42.000원에 바꾸었다.또 공은 국산 낫소가 외국산 던럽에 비해 훨힌 쌌지만 누가 던럽을 가져오면 몇번만 쳐보자고 빌러 치곤했다.확실히 던럽은 보드랍고 감촉이 좋았다.
목요일.금요일쯤 되면 우리중 제일 부지런한 이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테니스 일정을 잡느라 바빴다.
그래서 우리들 7-8명은 어김없이 여의도 18면,갈현종12면,벽제 18면 등지로 나가 테니스를 즐겼다.당시 공한지세 때문에 공휴지를 가지고 있는 땅 소유주들은 앞다투어 테니스코트를 만들었다.
당시 나는 불광동 산동네에서 방한칸에 세살고 있었는데 연시네 빈터에 12면의 테니스코트가 생겨 자주 그곳을 이용했다.
1974년 내가 방위 근무를 마치고 5국 2과 철도청 담당으로 발령났다.거기에는 입사동기 7명이 있었다.우리는 근무시간에는 머리 터질 정도로 일했지만 퇴근후에는 죽이 맞아 철도청 테니스 코트로 가서 치기도했다.우리가 철도청 담당이었으로 서울지방철도청,오류동역사옆 코트,또 송추역사 부근 테니스코트등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우리가 가면 그들은 치다가 양보하가나 어떤 곳은 미리 준비해 주었다.여기서도 힘의 논리가 어김없이 통했다.우리들은 은연중 감사원의 파워를 즐겼다.마치 양보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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