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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122 2. Mahāsuñña 공(空)에 대한 긴 경
6. "아난다여, 그러나 여래는 어떤 ●표상도 마음에 작의하지 않기 때문에
안으로 공을 구족하여 머무는 것을 바르게 깨달았다....
8.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마음을 고정시키고 안정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삼매에 들게 한다."
10. ...'내가 안으로 공을 마음에 작의할 때
나의 마음이 공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고 확립하고 확신이 생긴다....
11. ...'이와 같이 내가 경행할 때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12. ..소욕...지족...한거...[재가자들과]교제하지 않음...불굴의 정진...해탈...해탈지견...
'이런 이야기를 나는 하리라.‘…
13. ...출리...악의 없음...해코지 않음...이런 사유를 나는 하리라.'...
15. ...'나에게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탐이 제거되었다.'...
17.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해 '내가 있다.'라는 자만이 나에게 제거되었다.'...
22. "아난다여, 어떤 것이 스승의 재난인가?...
23. "아난다여, 어떤 것이 제자의 재난인가?...
24. " 아난다여, 어떤 것이 청정범행을 닦는 자의 재난인가?...
27. "아난다여, 나는 도기공이 완전히 굽지 않은 도기를 다루는 방식으로 그대들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거듭해서 그대들을 제어하고 그대들에게 말할 것이다.
아난다여, 거듭해서 그대들의 [결점을] 없애도록 할 것이니 근기가 수승한 자는 머물러 있을 것이다."...
(M122)맛지마 니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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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행 경 (Caṅkama-sutta, A5:29)
"비구들이여, 경행에는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여행을 감내할 수 있고, (addhānakkhamo hoti)
정근을 감내할 수 있고, (padhānakkhamo hoti)
병이 적고, (appābādho hoti)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이 잘 소화되고, (asitaṃ pītaṃ khāyitaṃ sāyitaṃ sammā pariṇāmaṃ gacchati)
경행에 몰두하면 삼매에 오래 머물 수 있다.* (caṅkamādhigato samādhi ciraṭṭhitiko hoti)
비구들이여, 경행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 (ime kho, bhikkhave, pañca caṅkame ānisaṃs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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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에 대한 긴 경 Mn122 2. Mahāsuññatasuttaṃ
185.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akkesu viharati kapilavatthusmiṃ nigrodhārāme.
Atha kho bhagavā pubbaṇhasamayaṃ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kapilavatthuṃ piṇḍāya pāvisi.
Kapilavatthusmiṃ piṇḍāya caritvā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paṭikkanto
yena kāḷakhemakassa sakkassa vihāro tenupasaṅkami divāvihārāya.
Tena kho pana samayena kāḷakhemakassa sakkassa vihāre sambahulāni senāsanāni paññattāni honti.
Addasā kho bhagavā kāḷakhemakassa sakkassa vihāre sambahulāni senāsanāni paññattāni.
Disvāna bhagavato etadahosi –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삭까의 까삘라왓투에 있는 니그로다 원림에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시고 깟빌라왓투로 탁발을 가셨다.
깟빌라왓투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낮 동안 홀로 앉기 위해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지은] 승원으로 가셨다.
그 무렵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지은] 승원에는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존께서는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지은] 승원에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이런 생각이 드셨다.
‘‘sambahulāni kho kāḷakhemakassa sakkassa vihāre senāsanāni paññattāni.
Sambahulā nu kho idha bhikkhū viharantī’’ti.
'참으로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지은] 승원에는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구나.
여기에 많은 비구들이 머물고 있는가?'
186. Tena kho pana samayena āyasmā ānando sambahulehi bhikkhūhi saddhiṃ ghaṭāya sakkassa vihāre
cīvarakammaṃ karoti.
Atha kho bhagavā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a ghaṭāya sakkassa vihār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paññatte āsane nisīdi.
Nisajja kho bhagavā āyasmantaṃ ānandaṃ āmantesi –
그 무렵 아난다 존자는 여러 비구들과 함게 삭까 사람 가따가 [지은] 승원에서 가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으심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삭까 사람 가따가 [지은] 승원으로 가셔서 마련해 드린 자리에 앉으셨다.
자리에 앉으셔서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다에게 말씀하셨다.
‘‘sambahulāni kho, ānanda, kāḷakhemakassa sakkassa vihāre senāsanāni paññattāni.
Sambahulā nu kho ettha bhikkhū viharantī’’ti?
‘‘Sambahulāni, bhante, kāḷakhemakassa sakkassa vihāre senāsanāni paññattāni.
Sambahulā bhikkhū ettha viharanti.
Cīvarakārasamayo no, bhante, vattatī’’ti.
"아난다여, 참으로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지은] 승원에는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에 많은 비구들이 머물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참으로 삭까 사람 깔라케마까가 [지은] 승원에는 거처가 많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많은 비구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가사를 만드는 시기입니다."
‘‘Na kho, ānanda, bhikkhu sobhati
saṅgaṇikārāmo saṅgaṇikarato saṅgaṇikārāmataṃ anuyutto gaṇārāmo gaṇarato gaṇasammudito.
3. "아난다여, 참으로 비구가
대중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대중에 사는 것을 즐기고 대중에 사는 즐거움에 몰두하며,
무리를 좋아하고 무리를 즐기고 무리의 즐거움에 몰두하면 그는 빛나지 않는다.
So vatānanda, bhikkhu saṅgaṇikārāmo saṅgaṇikarato saṅgaṇikārāmataṃ anuyutto gaṇārāmo gaṇarato
gaṇasammudito yaṃ taṃ nekkhammasukhaṃ pavivekasukhaṃ upasamasukhaṃ sambodhisukhaṃ
[sambodhasukhaṃ (sī. pī.), sambodhasukhaṃ cittekaggatāsukhaṃ (ka.) upari
araṇavibhaṅgasutte pana sambodhisukhantveva dissati]
tassa sukhassa nikāmalābhī bhavissati akicchalābhī akasiralābh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Yo ca kho so, ānanda, bhikkhu eko gaṇasmā vūpakaṭṭho viharati tassetaṃ bhikkhuno pāṭikaṅkhaṃ
yaṃ taṃ nekkhammasukhaṃ pavivekasukhaṃ upasamasukhaṃ sambodhisukhaṃ
tassa sukhassa nikāmalābhī bhavissati akicchalābhī akasiralābhīti – ṭhānametaṃ vijjati.
아난다여, 참으로 비구가
대중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대중에 사는 것을 즐기고 대중에 사는 즐거움에 몰두하며,
무리를 좋아하고 무리를 즐기고 무리의 즐거움에 몰두하면서,
출리의 즐거움과 떨쳐버림의 즐거움과 고요함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즐거움을
원하는 대로 얻고 힘들이지 않고 얻고 어려움 없이 얻으리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나다여, 그러나 비구가 대중에서 멀리 벗어나 혼자 머물 대
출리의 즐거움과 떨쳐버림의 즐거움과 고요함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즐거움을
원하는 대로 얻고 힘들이지 않고 얻고 어려움 없이 얻으리라는 것은 가능하다."
‘‘So vatānanda, bhikkhu saṅgaṇikārāmo saṅgaṇikarato saṅgaṇikārāmataṃ anuyutto gaṇārāmo gaṇarato
gaṇasammudito sāmāyikaṃ vā kantaṃ cetovimuttiṃ upasampajja viharissati
asāmāyikaṃ vā akuppan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Yo ca kho so, ānanda, bhikkhu eko gaṇasmā vūpakaṭṭho viharati
tassetaṃ bhikkhuno pāṭikaṅkhaṃ sāmāyikaṃ vā kantaṃ cetovimuttiṃ upasampajja viharissati
asāmāyikaṃ vā akuppanti – ṭhānametaṃ vijjati.
4. "아난다여, 참으로 비구가
대중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대중에 사는 것을 즐기고 대중에 사는 즐거움에 몰두하며,
무리를 좋아하고 무리를 즐기고 무리의 즐거움에 몰두하면서 일시적이고 고요한 마음의 해탈이나
일시적이지 않고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아난다여, 그러나 비구가 대중에서 멀리 벗어나 혼자 머물 때 일시적이고 즐거운 마음의 해탈이나
일시적이지 않고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Nāhaṃ, ānanda, ekaṃ rūpampi [ekarūpampi (sī.)] samanupassāmi
yattha rattassa yathābhiratassa rūpassa vipariṇāmaññathābhāvā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5. "아난다여, 형색을 즐기고 그것에 애착을 가질 때, 형색은 변하고 바뀌어가므로
거기에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일어나지 않는
그런 형색은 단 하나도 나는 본 적이 없다."
187. ‘‘Ayaṃ kho panānanda, vihāro tathāgatena abhisambuddho yadidaṃ –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ajjhatt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ituṃ
[viharataṃ (ka. sī.), viharati (syā. kaṃ. ka.)].
Tatra ce, ānanda, tathāgataṃ iminā vihārena viharantaṃ bhavanti [bhagavantaṃ (sī. syā. kaṃ. ka.)]
upasaṅkamitāro bhikkhū bhikkhuniyo upāsakā upāsikāyo rājāno rājamahāmattā titthiyā titthiyasāvakā.
Tatrānanda, tathāgato vivekaninneneva
cittena vivekapoṇena vivekapabbhārena vūpakaṭṭhena nekkhammābhiratena byantībhūtena
sabbaso āsavaṭṭhānīyehi dhammehi aññadatthu uyyojanikapaṭisaṃyuttaṃyeva kathaṃ kattā hoti.
6. "아난다여, 그러나 여래는 어떤 ●표상도 작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안으로(안이비설신의) 공(텅빔)을 구족하여 머무는 것을 바르게 깨달았다.
아난다여, 여래가 이렇게 머물 때에
비구나 비구니나 청신사나 청신녀나 왕이나 대신이나 외도나 외도의 제자들이 찾아오면,
여래는 자신의 마음을 멀리 여읨으로 향하고 멀리 여읨으로 기울이고 멀리 여읨에 기대고
은둔하고 출리를 기뻐하고 번뇌의 원인이 될 모든 법들을 제거한 뒤,
반드시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과 관련된 말을 한다."
Tasmātihānanda, bhikkhu cepi ākaṅkheyya – ‘ajjhatt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eyya’nti,
tenānanda, bhikkhunā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abbaṃ sannisādetabbaṃ ekodi kātabbaṃ samādahātabbaṃ.
188. ‘‘Kathañcānanda, bhikkhu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i sannisādeti ekodiṃ karoti [ekodikaroti (sī. syā. kaṃ. pī.)] samādahati?
7. "아난다여, 그러므로 비구가 만일 안으로 공을 증득하여 머물리라고 원한다면
그는 안으로 마음을 고정시키고 안정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삼매에 들게 해야 한다.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안으로 마음을 고정시키고 안정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삼매에 들게 하는가?"
Idhānanda,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pe…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pe… dutiyaṃ jhānaṃ… tatiyaṃ jhāna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vaṃ kho, ānanda, bhikkhu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i sannisādeti ekodiṃ karoti samādahati.
So ajjhattaṃ suññataṃ manasi karoti.
Tassa ajjhattaṃ suññataṃ manasikaroto suññatāya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8.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을 가라앉혔지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3선(三禪)을 …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마음을 고정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삼매에 들게 한다."
Evaṃ santametaṃ,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ajjhattaṃ suññataṃ kho me manasikaroto ajjhattaṃ suññatāya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9. "그는 안으로 공을 작의한다. 아난다여, 그가 안으로 공을 작의할 때
그의 마음이 공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지 않고 확립하지 못하고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가 안으로 공을 작의할 때
나의 마음이 공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지 않고 확립하지 못하고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라고.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So bahiddhā suññataṃ manasi karoti…pe…
so ajjhattabahiddhā suññataṃ manasi karoti …pe… so āneñjaṃ manasi karoti.
Tassa āneñjaṃ manasikaroto āneñjāya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i.
Evaṃ santametaṃ,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āneñjaṃ kho me manasikaroto āneñjāya cittaṃ na pakkhandati nappasīdati na santiṭṭhati na vimucca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그는 밖으로(색성향미촉법, 명색) 공을 작의한다. … 그는 안팎으로 공을 작의한다. …
그는 흔들림 없음에 작의한다. 그가 흔들림 없음을 작의할 때 그의 마음이
흔들림 없음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지 않고 확립하지 못하고 확신이 생기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가 안으로 흔들림 없음을 작의할 때 나의 마음이
흔들림 없음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지 않고 확립하지 못하고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라고.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Tenānanda, bhikkhunā tasmiṃyeva purimasmiṃ samādhinimitte
ajjhattameva cittaṃ saṇṭhapetabbaṃ sannisādetabbaṃ ekodi kātabbaṃ samādahātabbaṃ.
10. "아난다여, 그러면 그 비구는 이전처럼 그 처음 ●삼매의 표상에
안으로 마음을 고정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고 삼매에 들게 해야 한다.
So ajjhattaṃ suññataṃ manasi karoti.
Tassa ajjhattaṃ suññataṃ manasikaroto
ajjhattaṃ suññat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Evaṃ santametaṃ,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ajjhattaṃ suññataṃ kho me manasikaroto ajjhattaṃ suññat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그는 안으로 공을 작의한다. 아난다여, 그가 안으로 공을 작의할 때
그의 마음이 공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고 확립하고 확신이 생기면
그 비구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가 안으로 공을 작의할 때
나의 마음이 공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고 확립하고 확신이 생긴다.'라고.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So bahiddhā suññataṃ manasi karoti…pe… so ajjhattabahiddhā suññataṃ manasi karoti…pe…
so āneñjaṃ manasi karoti.
Tassa āneñjaṃ manasikaroto āneñj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i.
Evaṃ santametaṃ,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āneñjaṃ kho me manasikaroto āneñj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vimucca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그는 밖으로 공을 작의한다. … 그는 안팎으로 공을 작의한다. …
그는 흔들림 없음에 작의한다. 그가 흔들림 없음을 작의할 때 그의 마음이
흔들림 없음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고 확립하고 확신이 생기면
그 비구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내가 안으로 흔들림 없음을 작의할 때 나의 마음이
흔들림 없음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이 생기고 확립하고 확신이 생긴다.'라고.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189. ‘‘Tassa ce, ānanda,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caṅkamāya cittaṃ namati,
so caṅkamati – ‘evaṃ maṃ caṅkamantaṃ nā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issan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11. "아난다여, 비구가 이렇게 머물 때 만일 그의 마음이 경행으로 기울면
그는 '이와 같이 내가 경행할 때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경행한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난다 경(A8:9) 참조.
'내가 이와 같이 동쪽 방향을 볼 때에 탐욕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이 흐르지 않기를!']
Tassa ce, ānanda,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ṭhānāya cittaṃ namati,
so tiṭṭhati – ‘evaṃ maṃ ṭhitaṃ nā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issan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Tassa ce, ānanda,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nisajjāya cittaṃ namati,
so nisīdati – ‘evaṃ maṃ nisinnaṃ nā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issan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Tassa ce, ānanda,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sayanāya cittaṃ namati,
so sayati – ‘evaṃ maṃ sayantaṃ nā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issant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아난다여, 만일 그 비구가 이렇게 머물 때 만일 그의 마음이 서 있는 것으로 기울면 …
앉는 것으로 기울면 … 눕는 것으로 기울면
그는 '이와 같이 내가 누울 때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눕는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Tassa ce, ānanda,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kathāya [bhassāya (sī.), bhāsāya (syā. kaṃ. pī.)] cittaṃ namati,
so – ‘yāyaṃ kathā hīnā gammā pothujjanikā anariyā anatthasaṃhitā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ti,
seyyathidaṃ – rājakathā corakathā mahāmattakathā senākathā bhayakathā yuddhakathā annakathā
pānakathā vatthakathā sayanakathā mālākathā gandhakathā ñātikathā yānakathā gāmakathā nigamakathā
nagarakathā janapadakathā itthikathā surākathā visikhākathā kumbhaṭṭhānakathā pubbapetakathā
nānattakathā lokakkhāyikā samuddakkhāyikā itibhavābhavakathā iti vā iti –
evarūpiṃ kathaṃ na kathessām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12. "아난다여, 비구가 이렇게 머물 때 만일 그의 마음이 이야기 하는 것으로 기울면
그는 이렇게 결심한다.
'이런 이야기는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며,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왕 이야기, 도둑 이야기, 대신들 이야기, 군대 이야기, 공포에 관한 이야기, 전쟁 이야기,
음식 이야기, 음료수 이야기, 옷 이야기, 침대 이야기, 화환 이야기, 향 이야기, 친척 이야기,
수레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 이야기, 영웅 이야기, 거리 이야기, 우물 이야기, 옛적 유령 이야기, 하찮은 이야기,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는 하지 않으리라.'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Yā ca kho ayaṃ, ānanda, kathā abhisallekhikā cetovinīvaraṇasappāyā
[cetovicāraṇasappāyā (sī. syā. kaṃ.), cetovivaraṇasappāyā (pī.)]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seyyathidaṃ – appicchakathā santuṭṭhikathā pavivekakathā asaṃsaggakathā vīriyārambhakathā sīlakathā
samādhikathā paññākathā vimuttikathā vimuttiñāṇadassanakathā iti – ‘evarūpiṃ kathaṃ kathessām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아난다여,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오염원을 지워 없애고 마음을 활짝 여는 데 도움이 되며
염오로 인도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즉
소욕(小慾)에 대한 이야기, 지족(知足)에 대한 이야기, 한거(閑居)에 대한 이야기,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 불굴의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통찰지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나는 하리라.'라고 결심한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Tassa ce, ānanda, bhikkhuno iminā vihārena viharato vitakkāya cittaṃ namati,
so – ‘ye te vitakkā hīnā gammā pothujjanikā anariyā anatthasaṃhitā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nti,
seyyathidaṃ – kāmavitakko byāpādavitakko vihiṃsāvitakko iti evarūpe vitakke
[evarūpena vitakkena (sī. syā. kaṃ. ka.)] na vitakkessām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13. "아난다여, 비구가 이렇게 머물 때 만일 그의 마음이 ●일으킨 생각으로 기울면 그는
'이런 일으킨 생각는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며,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나니, 그것은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일으킨 생각와 악의와 관련된 일으킨 생각와 해코지와 관련된 일으킨 생각이다.
이런 일으킨 생각를 나는 하지 않으리라.'라고 결심한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Ye ca kho ime, ānanda, vitakkā ariyā niyyānikā niyyanti takkarassa sammādukkhakkhayāya,
seyyathidaṃ – nekkhammavitakko abyāpādavitakko avihiṃsāvitakko iti –
‘evarūpe vitakke [evarūpena vitakkena (ka.)] vitakkessāmī’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아난다여, 그러나 그는
'이런 일으킨 생각는 성스럽고, 해탈로 인도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바르게 괴로움의 종결로 인도하나니
●출리와 관련된 일으킨 생각와 악의 없음과 관련된 일으킨 생각와 해코지 않음과 관련된 일으킨 생각이다.
이런 일으킨 생각를 나는 하리라.'라고 결심한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190. ‘‘Pañca kho ime, ānanda, kāmaguṇā.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sotaviññeyyā saddā… ghānaviññeyyā gandhā… jivhāviññeyyā rasā…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
14. "아난다여,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 귀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다.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다.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다.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짝하고 매혹적인,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이 있다.
아난다여, 이들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이다."
ime kho, ānanda, pañca kāmaguṇā yattha bhikkhunā abhikkhaṇaṃ sakaṃ cittaṃ paccavekkhitabbaṃ –
‘atthi nu kho me imesu pañcasu kāmaguṇesu aññatarasmiṃ vā aññatarasmiṃ vā āyatane uppajjati
cetaso samudācāro’ti?
15. "여기 비구는 매순간 '나에게 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
마음속에 흥분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라고 자신의 마음을 반조해야 한다.
Sace, ānanda, bhikkhu paccavekkhamāno evaṃ pajānāti –
‘atthi kho me imesu pañcasu kāmaguṇesu aññatarasmiṃ vā aññatarasmiṃ vā āyatane uppajjati
cetaso samudācāro’ti,
evaṃ santametaṃ [evaṃ santaṃ (aṭṭha.)],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yo kho imesu pañcasu kāmaguṇesu chandarāgo so me nappahīno’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아난다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는 도중에 '나에게 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 마음속에 흥분이 일어난다.'라고 꿰뚫어 알면,
그는 '나에게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탐이 제거되지 않았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Sace panānanda, bhikkhu paccavekkhamāno evaṃ pajānāti –
‘natthi kho me imesu pañcasu kāmaguṇesu aññatarasmiṃ vā aññatarasmiṃ vā āyatane uppajjati
cetaso samudācāro’ti,
evaṃ santametaṃ,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yo kho imesu pañcasu kāmaguṇesu chandarāgo so me pahīno’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아난다여, 만일 비구가 반조하는 도중에 '나에게 이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흥분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꿰뚫어 알면,
그는 '나에게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욕탐이 제거되었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191. ‘‘Pañca kho ime, ānanda, upādānakkhandhā yattha bhikkhunā udayabbayānupassinā vihātabbaṃ –
16. "아난다여,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이 있다.
여기에 대해 비구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머물러야 한다.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iti saññā… iti saṅkhārā…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형성들이다. 이것이 형성들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형성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Tassa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yo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smimāno so pahīyati.
Evaṃ santametaṃ, ānanda, bhikkhu evaṃ pajānāti –
‘yo kh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smimāno so me pahīno’ti.
Itiha tattha sampajāno hoti.
17. "그가 취착의 [대상인]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머물 때
취착의 [대상인]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해 '내가 있다.'라는 자만이 제거된다.
아난다여, 그러면 그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에 대해 '내가 있다.'라는 자만이 나에게 제거되었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처럼 그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Ime kho te, ānanda, dhammā ekantakusalā kusalāyātikā
[dhammā ekantakusalāyatikā (sabbattha) aṭṭhakathāṭīkā oloketabbā] ariyā lokuttarā anavakkantā pāpimatā.
18. "아난다여, 이런 법들은 전적으로 유익함에 기반을 두며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사악한 마라가 근접할 수 없다."
Taṃ kiṃ maññasi, ānanda, kaṃ atthavasaṃ sampassamāno arahati sāvako satthāraṃ anubandhituṃ
api paṇujjamāno’’ti [api panujjamānopīti (ka. sī.), api payujjamānoti (syā. kaṃ. pī.)]?
‘‘Bhagavaṃmūlakā no, bhante, dhammā bhagavaṃnettikā bhagavaṃpaṭisaraṇā.
Sādhu vata, bhante, bhagavantaṃyeva paṭibhātu etassa bhāsitassa attho.
Bhagavato sutvā bhikkhū dhāressantī’’ti.
19.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난다여?
어떤 유익함을 보기에 제자는 설령 스승이 내치더라도 스승을 따라야 하는가?"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길잡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친히 설명해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세존의 말씀을 잘 듣고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192. ‘‘Na kho, ānanda, arahati sāvako satthāraṃ anubandhituṃ,
yadidaṃ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tassa hetu [veyyākaraṇassa hetu (ka.)].
Taṃ kissa hetu? Dīgharattassa [dīgharattaṃ + assāti padacchedo] hi te,
ānanda, dhammā sutā dhātā vacasā paricitā manasānupekkhitā diṭṭhiyā suppaṭividdhā.
Yā ca kho ayaṃ, ānanda, kathā abhisallekhikā cetovinīvaraṇasappāyā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seyyathidaṃ – appicchakathā santuṭṭhikathā pavivekakathā asaṃsaggakathā vīriyārambhakathā
sīlakathā samādhikathā paññākathā vimuttikathā vimuttiñāṇadassanakathā –
evarūpiyā kho, ānanda, kathāya hetu arahati sāvako satthāraṃ anubandhituṃ api paṇujjamāno.
20. "아난다여, 제자는 경이나 응송(應誦)이나 수기(授記) 때문에 스승을 따라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 호지하고 말로 외우고 마음으로 숙고하고 견해로써 잘 꿰뚫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오염원을 지워 없애고 마음을 활짝 여는 데 도움이 되며
염오로 인도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즉
●소욕(小慾)에 대한 이야기, 지족(知足)에 대한 이야기, 한거(閑居)에 대한 이야기,
[재가자들과] 교제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 불굴의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통찰지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지견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난다여, 이러한 이야기를 위해서 제자는 설령 스승이 내치더라도 스승을 따라야 한다."
‘‘Evaṃ sante kho, ānanda, ācariyūpaddavo hoti,
evaṃ sante antevāsūpaddavo hoti, evaṃ sante brahmacārūpaddavo hoti.
21. "아나다여, 이럴 경우 스승의 재난이 있고, 이럴 경우 제자의 재난이 있고,
이럴 경우 청정범행을 닦는 자의 재난이 있다."
193. ‘‘Kathañcānanda, ācariyūpaddavo hoti?
Idhānanda, ekacco satthā vivittaṃ senāsanaṃ bhajati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Tassa tathāvūpakaṭṭhassa viharato anvāvattanti [anvāvaṭṭanti (sī. syā. kaṃ. pī.)]
brāhmaṇagahapatikā negamā ceva jānapadā ca.
So anvāvattantesu brāhmaṇagahapatikesu negamesu ceva jānapadesu ca mucchaṃ nikāmayati
[mucchati kāmayati (sī. pī.) aṭṭhakathāyaṃ pana na tathā dissati], gedhaṃ āpajjati, āvattati bāhullāya.
Ayaṃ vuccatānanda, upaddavo [upadduto (sī. pī.)] ācariyo.
Ācariyūpaddavena avadhiṃsu naṃ pāpakā akusalā dhamm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ponobhavikā (sī. pī.)]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Evaṃ kho, ānanda, ācariyūpaddavo hoti.
22. "아난다여, 어떤 것이 스승의 재난인가?
아난다여, 여기 어떤 스승은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가 이처럼 은둔하여 머물 때에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온다.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오면
그는 미혹에 빠지고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고 탐욕의 노예가 되고 사치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 스승은 스승의 재난에 의해 재난에 빠졌다고 한다.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며, 고민을 가져다주고,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며,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으로 인도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그를 무너뜨린다.
아난다여, 이것이 스승의 재난이다."
194. ‘‘Kathañcānanda, antevāsūpaddavo hoti?
Tasseva kho panānanda, satthu sāvako tassa satthu vivekamanubrūhayamāno vivittaṃ senāsanaṃ bhajati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Tassa tathāvūpakaṭṭhassa viharato anvāvattanti brāhmaṇagahapatikā negamā ceva jānapadā ca.
So anvāvattantesu brāhmaṇagahapatikesu negamesu ceva jānapadesu ca mucchaṃ nikāmayati,
gedhaṃ āpajjati, āvattati bāhullāya.
Ayaṃ vuccatānanda, upaddavo antevāsī.
Antevāsūpaddavena avadhiṃsu naṃ pāpakā akusalā dhamm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Evaṃ kho, ānanda, antevāsūpaddavo hoti.
23."아난다여, 어떤 것이 제자의 재난인가?
아나다여, 여기 스승의 제자는 그 스승의 한거를 본받아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가 이처럼 은둔하여 머물 때에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온다.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오면
그는 미혹에 빠지고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고 탐욕의 노예가 되고 사치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 제자는 제자의 재난에 의해 재난에 빠졌다고 한다.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며, 고민을 가져다주고,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며,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으로 인도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그를 무너뜨린다.
아난다여, 이것이 제자의 재난이다."
195. ‘‘Kathañcānanda, brahmacārūpaddavo hoti?
Idhānanda,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24. "아난다여, 어떤 것이 청정범행을 닦는 자의 재난인가?
아난다여, 여기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나니 그는
아라한[應供]이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이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며, 부처님[佛]이며, 세존(世尊)이다.
So vivittaṃ senāsanaṃ bhajati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Tassa tathāvūpakaṭṭhassa viharato anvāvattanti brāhmaṇagahapatikā negamā ceva jānapadā ca.
So anvāvattantesu brāhmaṇagahapatikesu negamesu ceva jānapadesu ca na mucchaṃ nikāmayati,
na gedhaṃ āpajjati, na āvattati bāhullāya.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가 이처럼 은둔하여 머물 때에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온다.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오더라도
그는 미혹에 빠지거나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거나 탐욕의 노예가 되거나 사치하지 않는다.
Tasseva kho panānanda, satthu sāvako tassa satthu vivekamanubrūhayamāno vivittaṃ senāsanaṃ bhajati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Tassa tathāvūpakaṭṭhassa viharato anvāvattanti brāhmaṇagahapatikā negamā ceva jānapadā ca.
So anvāvattantesu brāhmaṇagahapatikesu negamesu ceva jānapadesu ca mucchaṃ nikāmayati,
gedhaṃ āpajjati, āvattati bāhullāya.
Ayaṃ vuccatānanda, upaddavo brahmacārī.
Brahmacārūpaddavena avadhiṃsu naṃ pāpakā akusalā dhamm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Evaṃ kho, ānanda, brahmacārūpaddavo hoti.
아난다여, 그런데 여기 스승의 제자가 그 스승의 한거를 본받아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가 이처럼 은둔하여 머물 때에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온다.
바라문이나 장자들이 성읍이나 지방에서 그를 찾아오면
그는 미혹에 빠지고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고 탐욕의 노예가 되고 사치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 청정범행을 닦는 자는 청정범행을 닦는 자의 재난에 의해 재난에 빠졌다고 한다.
오염원이고,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며, 고민을 가져다주고,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며,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것으로 인도하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그를 무너뜨린다.
아난다여, 이것이 청정범행을 닦는 자의 재난이다.
‘‘Tatrānanda, yo cevāyaṃ ācariyūpaddavo, yo ca antevāsūpaddavo
ayaṃ tehi brahmacārūpaddavo dukkhavipākataro ceva kaṭukavipākataro ca, api ca vinipātāya saṃvattati.
아난다여, 여기서 청정범행을 닦는 자의 재난은 스승의 재난이나 제자의 재난보다
더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고, 더 쓴 과보를 가져오며, 악처에 떨어지게도 한다."
196. ‘‘Tasmātiha maṃ, ānanda, mittavatāya samudācaratha, mā sapattavatāya.
Taṃ vo bhavissati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25.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애로 나를 대하고 적대감으로 나를 대하지 마라.
그러면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Kathañcānanda, satthāraṃ sāvakā sapattavatāya samudācaranti, no mittavatāya?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제자들이 적대감으로 스승을 대하고 자애로 스승을 대하지 않는가?
Idhānanda, satthā sāvakānaṃ dhammaṃ deseti anukampako hitesī anukampaṃ upādāya –
‘idaṃ vo hitāya, idaṃ vo sukhāyā’ti.
Tassa sāvakā na sussūsanti, na sotaṃ odahanti, na aññā cittaṃ upaṭṭhapenti,
vokkamma ca satthusāsanā vattanti.
Evaṃ kho, ānanda, satthāraṃ sāvakā sapattavatāya samudācaranti, no mittavatāya.
아난다여, 여기 스승은 제자들을 애민히 여기고 이익을 바라며 연민의 정을 일으키어 법을 설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귀를 기우리지 않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승의 교법으로부터 한참 벗어나버린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제자들이 적대감으로 스승을 대하고 자애로 스승을 대하지 않는다."
‘‘Kathañcānanda, satthāraṃ sāvakā mittavatāya samudācaranti, no sapattavatāya?
Idhānanda, satthā sāvakānaṃ dhammaṃ deseti anukampako hitesī anukampaṃ upādāya –
‘idaṃ vo hitāya, idaṃ vo sukhāyā’ti.
Tassa sāvakā sussūsanti, sotaṃ odahanti, aññā cittaṃ upaṭṭhapenti, na ca vokkama satthusāsanā vattanti.
Evaṃ kho, ānanda, satthāraṃ sāvakā mittavatāya samudācaranti, no sapattavatāya.
‘‘Tasmātiha maṃ, ānanda, mittavatāya samudācaratha, mā sapattavatāya.
Taṃ vo bhavissati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26. "아난다여, 그러면 어떻게 제자들이 자애로 스승을 대하고 적대감으로 스승을 대하지 않는가?
아난다여, 여기 스승은 ●제자들을 애민히 여기고 이익을 바라며 연민의 정을 일으키어 법을 설한다.
'이것은 그대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것은 그대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라고.
그러면 그의 제자들은 들으려 하고 귀를 기우리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들은 스승의 교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제자들이 자애로 스승을 대하고 적대감으로 스승을 대하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애로 나를 대하고 적대감으로 나를 대하지 마라.
그러면 그대들은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Na vo ahaṃ, ānanda, tathā parakkamissāmi yathā kumbhakāro āmake āmakamatte.
Niggayha niggayhāhaṃ, ānanda, vakkhāmi;
pavayha pavayha, ānanda, vakkhāmi [pavayha pavayha (sī. pī.),
paggayha paggayha ānanda vakkhāmi (ka.)]. Yo sāro so ṭhassatī’’ti.
27. "아난다여, 나는 도기공이 완전히 굽지 않은 도기(陶器)를 다루는 방식으로 그대들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거듭해서 그대들을 제어하고 그대들에게 말할 것이다.
아난다여, 거듭해서 그대들의 [결점을] 없애도록 할 것이니 근기가 수승한 자는 머물러 있을 것이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o āyasmā ānand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Mahāsuññatasuttaṃ niṭṭhitaṃ dutiyaṃ.
공(空)에 대한 긴 경(M122)이 끝났다.
*본 경은 대림 스님이 번역하신 맛지마 니꺄야 제4권 245쪽.
ㅡㅡ
제13장 공품 Suññata-vagga (M121~130) 공(空)에 대한 짧은 경 Cūḷasuññata Sutta(M121)
♦ 176.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pubbārāme migāramātupāsād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104]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 있는 동쪽 원림[東園林]의 녹자모 강당에 머무셨다.
atha kho āyasmā ānando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
2. 그때 아난다 존자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에서 일어나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ekamidaṃ, bhante, samayaṃ bhagavā sakkesu viharati nagarakaṃ nāma sakyānaṃ nigamo.
tattha me, bhante, bhagavato sammukhā sutaṃ, sammukhā paṭiggahitaṃ —
‘suññatāvihārenāhaṃ, ānanda, etarahi bahulaṃ viharāmī’ti.
kacci metaṃ, bhante, sussutaṃ suggahitaṃ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n”ti?
3. “세존이시여, 한때에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나가라까194)라는 삭까의 성읍에 머무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거기서 저는 '아난다여, 나는 요즈음 자주 공에 들어 머문다.'195)라고
이렇게196) 세존으로부터 직접 들었고 직접 배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그것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작의하고 바르게 기억하는 것입니까?”
194) 나가라까(Nagaraka) 혹은 낭가라까(Naṅgaraka)는 본서 제3권 「법탑 경」(M89) §1에서 보듯이 메다딸룸빠(Medataḷumpa) 근처에 있는 성읍이다. 「법탑 경」 (M89)에 의하면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세존을 친견한 곳이기도 하다. 『상윳따 니까야』 제5권 「절반 경」(S45:2)도 이곳에서 설하셨다.
195) 이 말씀은 본서 「탁발음식의 청정 경」 (M151) §2에서 사리뿟따 존자의 말로도 나타나고 있다. '공에 들어 머묾'은 suññatā-vihār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에 들어 머묾(suññatāvihāra)'이란 공한 과의 증득으로 머묾(suññata-phala-samāpatti-vihāra)을 뜻한다.”(MA.iv.154)
“이것은 공을 수관(隨觀)하여(suññata-anupassanā-vasena) 얻은 아라한과의 증득을 말한다.” (MAȚ.ii.437)
본경의 가르침은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마을이라는 인식을 물리치고'(§4)부터 시작해서 7단계로 점진적으로 '청정한 공의 경지(parisuddhā suññatā, 본경 §§4~12의 모든 문맥에 이 표현이 나타남)'를 규명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13에서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parisuddha param-ānuttara suññata)' 즉 '공을 통한 과의 증득(suññata-phala-samāpatti, MA.iv.154)'에 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에 들어 머묾'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긴 경」 (M43) §§36~37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아라한과의 마음의 해탈 – MA.ii.354)이야말로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합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열반의 공한 측면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본경 §13의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은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과 일종의 동의어라고 보여진다.
196) “'이렇게(ekam idaṃ)'라는 것은 아난다 장로가 세존의 시중을 들고난 뒤 낮 동안의 명상할 곳(divā-ṭṭhāna)으로 가서 시간을 정하고는(kāIa-paricchedaṃ katvā) 열반을 대상(nibbān-ārammaṇa)으로 공(空)한 과의 증득(suññatā-phala-samāpatti)에 들었다가 예정한 시간이 다 되어 명상에서 깨어났다. 그때 의도적 행위들[行]은 공한 것이라고 확립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공에 대한 법문 (suññatā-kathā)이 듣고 싶어졌다. 그때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곧바로 세존께 달려가서 공에 대한 법문을 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차라리 내가 나가라까 근처에 머물 때 세존께서 내게 설하신 법문을 상기시켜드리리라. 이와 같이 세존께서 내게 공에 대한 법문을 설하셨다고 세존으로 하여금 기억하시게 하면서 '이렇게'라고 말했다.”(MA.iv.149~150)
“taggha te etaṃ, ānanda, sussutaṃ suggahitaṃ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pubbepāhaṃ , ānanda, etarahipi suññatāvihārena bahulaṃ viharāmi.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하다. 그대는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작의하고 바르게 기억하고 있다.
아난다여, 나는 전에도197) 그랬듯이 요즈음도 자주 공에 들어 머문다.”
197) “'전에도(pubbe pi)'라는 것은 처음 정각을 이루셨던 나가라까(Nagaraka) 근처에 머무시던 때를 말한다. (MA.iv.150)
seyyathāpi, ānanda, ayaṃ migāramātupāsādo suñño hatthigavassavaḷavena,
suñño jātarūparajatena, suñño itthipurisasannipātena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bhikkhusaṅghaṃ paṭicca ekattaṃ;
4. “아난다여, 마치198) 이 녹자모 강당이 코끼리, 소, 말, 노새 들이 공하고 금이나 은도 공하고
남자와 여자의 모임도 공하지만199) 오직 이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듯이200)
198) “세존께서 '전에도 그랬듯이 요즘도 자주 공에 들어 머문다(pubbe cāhaṃ etarahi ca suññatāvihārena bahulaṃ viharāmi).'고 말씀하신 뒤 잠깐 생각에 잠기셨다. '아난다가 공에 대한 법문을 듣기를 원하는구나. 어떤 이는 들을 줄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듣고 이해하지만 설하지는 못하는데, 아난다는 듣고 이해하고 설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난다에게 공에 대한 법문을 설하리라.'고 생각하시면서 비유를 들어 법을 설하셨다.” (MA.iv.150)
199) “'코끼리, 소, 말, 노새들이 공하고(sunño hatthi-gava-assa-vaḷavena)'라고 하셨다. 물론 녹자모 강당에 나무로 만들었거나 흙으로 만들었거나 그림으로 그린(kaṭṭha-rūpa-potthaka-rūpa-citta-rūpa) 말 등도 있고, 좌석이나 쇼파 등에 보석이 박혀 있기도 하고, 법을 듣거나 질문을 하기 위해 오가는 여자나 남자도 있으므로 공한 것은 아니지만, 감각기능이 있고(indriya-baddhāna) 알음알이를 가진(saviññāṇaka) 즉 살아 움직이는 말 등이라든가 원하는 순간(icchit-icchita-kkhaṇa)에 향유할 수 있는 보석이라든가 그곳에 정착해서(nibaddha-vāsa) 사는 여자나 남자가 없는 것을 두고 공하다고 하셨다.”(MA.iv.150~151)
200) '오직 이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듯이'는 bhikkhusaṃghaṃ paṭicca ekattaṃ을 옮긴 것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비구 승가를 조건으로 하는 하나됨'이라는 뜻이지만 '하나의 공하지 않음이 있다(ekaṃ asuññataṃ atthi).'라는 아래에 인용한 주석서의 설명을 따라 이렇게 옮겼다.
“비구들은 비록 탁발을 가더라도 녹자모 강당에 가져오는 음식을 받기 위해 남아있는 비구들도 있고 또 아픈 사람과 병환을 간호하는 비구들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항상 비구들이 있기 때문에 오직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됨(ekatta)'이란 하나인 상태(eka-bhāva) 즉 하나의 공하지 않음이 있다(ekaṃ asuññataṃ atthi)는 뜻이다. 즉 하나의 공하지 않은 상태가 있다(eko asuñña-bhāvo atthi)고 말씀하신 것이다.”(MA.iv.151)
evameva kho,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gāmasaññaṃ, amanasikaritvā manussasaññaṃ,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그와 같이 비구도 마을이라는 인식201)을 작의하지 않고202)
사람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203)
201) “마을이라는 인식(gāma-saññā)'은 마을이라는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pavattana-vasena) 생겼거나 혹은 오염원을 통해서(kilesa-vasena) 생긴 마을이라는 인식을 말하고, '사람이라는 인식(manussa-saññā)'도 같은 방법으로 생긴 인식을 말한다.” (MA.iv.151)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pavattana-vasena) 생긴 인식이란 집, 정착, 길, 광장, 네거리 등으로 인해 마을(gāma)이라고 세상에 일어난 것을 통해서(lok-uppatti-vasena) 생긴 인식을 말한다. 오염원을 통해서(kilesa-vasena) 생긴 인식이란 지지하거나 싫어함으로써(anunaya-paṭigha-vasena) 생긴 인식을 말한다.”(MAȚ.ii.322)
202) “'작의하지 않고(amanasikaritvā)'란 마음에 두지 않고(citte akatvā), 전향하지 않고(anāvajjitvā), 반조하지 않고(apaccavekkhitvā)라는 말이다. (MA.iv.151)
203)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araññ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라고 하셨다. 이것은 숲이고, 이것은 나무이고, 이것은 바위이고, 이것은 검푸른 빛이고, 이것은 수풀더미라고 오직 하나의 숲을 반연한 숲이라는 인식(arañña-saññā)'을 작의한다는 뜻이 다.”(MA.iv.151)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나무 등을 조건으로 숲이라는 인식이 있고, 거기에 바위나 수풀더미 등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거기에 비록 구분이 있지만 그것을 취하지 않고 오직 숲 하나만을 조건한(ekaṃ araññaṃyeva paṭicca) 숲이라는 인식을 작의한다.” (MAȚ.ii.322)
tassa araññ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그의 마음은 숲이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M1.에서 [
♦ 6. “ekattaṃ ekattato sañjānāti; ekattaṃ ekattato saññatvā
ekattaṃ maññati, ekattasmiṃ maññati, ekattato maññati, ekattaṃ meti maññati,
ekattaṃ abhinandati. taṃ kissa hetu? ‘a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23. “그는 동일한 것66)을 동일한 것이라 인식한다.
동일한 것을 동일한 것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동일한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동일한 것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동일한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동일한 것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66) “이와 같이 '본 것' 등의 네 가지로 존재 더미를 분류하는 것(sakkāya-bheda)을 보이신 뒤 이제 증득을 얻은 것(samāpannaka-vāra)과 증득을 얻지 못한 것(asamāpannaka-vāra)의 두 가지를 보이시기 위해서 여기서는 '동일한 것(ekatta)'을 설하시고 아래서는 '다른 것(nānatta)'을 말씀하신다. '동일한 것'이란 증득을 얻은 것을 나타내고 '다른 것'이란 증득을 얻지 못한 것을 나타낸다.” (MA.i.37)
한편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증득을 얻은 것(samāpannaka-vāra)은 색계선과 무색계선(rūpāvacara-arūpāvacara-jhāna)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그것은 동일한 대상에 동일한 상태(ekākāra)로 일어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과보의 禪(vipāka-jjhāna)이 일어난 것도 또한 이 증득을 얻은 것에 포함된다고 알아야 한다. 증득을 얻지 못했다는 것(asamāpannaka-vāra)은 욕계의 법(kāmāvacara-dhamma)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본삼매라는 색계선과 무색계선을 증득하기 직전의 단계이며 아직 욕계의 상태에 속하는] 근접삼매(upacāra-jjhāna)를 통해서도 마음은 아직 바르게 동일한 상태가 된 것이 아니다.” (MAȚ.i.87)
♦ “nānattaṃ nānattato sañjānāti; nānattaṃ nānattato saññatvā
nānattaṃ maññati, nānattasmiṃ maññati, nānattato maññati, nānattaṃ meti maññati,
nānattaṃ abhinandati. taṃ kissa hetu? ‘apariññātaṃ tassā’ti vadāmi.
24. “그는 다른 것을 다른 것이라 인식한다.
다른 것을 다른 것이라 인식하고서는 [자신을] 다른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다른 것에서 생각하고, [자신을] 다른 것으로부터 생각하고,
다른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것을 기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는 그것을 철저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한다.” ]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gām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manuss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마을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사람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204)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204)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te idha nasanti).'라고 하셨다.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생긴 번잡함(pavatta-darathā)이건 오염원을 통해서 생긴 번잡함(kilesa-darathā)이건, 마을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일어날 수 있는 번잡함은 여기 숲이라는 인식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일어날 수 있는 번잡함도 여기 숲이라는 인식에는 없다는 말씀이다.”(MA.iv.151)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결과를 통해서 생긴 번잡함(pavatta-darathā)이란 적절한 편안함(passaddhi)이 없음으로 인해 거친 법이 일어나기 쉬운 것(oḷārika-dhamma-ppavatti-siddhā)을 말하고, 오염원을 통해 생긴 번잡함(kilesa-darathā)이란 지지함과 싫어함을 통해서 생긴 것(anunaya-paṭigha-sambhavā)을 말한다.”(MAȚ.ii.322)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gām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manuss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 인식은 마을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숲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105]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77.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manussasaññaṃ,
amanasikaritvā araññasaññaṃ, pathavī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pathavī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5.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205)
숲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
그의 마음은 땅이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205) “'사람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amanasikartvā manussa saññaṃ)'라고 하셨다. 여기 수행자는 마을이라는 인식(gāma-saññā)을 취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라는 인식으로 마을이라는 인식을 물리치고(nivattetvā), 숲이라는 인식(arañña-saññā)으로 사람이라는 인식을, 땅이라는 인식(pathavī-saññā)으로 숲이라는 인식을, 공무변처라는 인식으로 땅이라는 인식을, …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으로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위빳사나로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도로써 위빳사나를 물리치고 점차적으로(anupubbena) ●구경의 공의 경지(accanta-suññata)를 보이기 위해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숲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땅이라는 인식(pathavī-saññā)을 작의하는가? 숲이라는 인식으로 특별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visesa-anadhigamanato), 마치 어떤 사람이 비옥한 땅을 보고 '여기 벼 모내기를 하면 벼가 잘 자라서 풍성하게 수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백 번이고 땅을 쳐다보아도 벼 등을 거둘 수 없겠지만 만약 그 땅에 그루터기 등 장애물을 제거하고 논을 갈아 씨를 뿌리면 수확할 수 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숲이고, 이것은 나무이고, 이것은 산이고, 이것은 바위이고, 이것은 검푸른 빛이라고 백 번씩이나 숲이라는 인식을 작의하더라도 근접삼매(upacāra)나 본삼매(samādhi)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땅이라는 인식으로는 항상 지녀야 할(dhuva-sevana) 명상주제인 [즉 평소 항시 지녀야 할 명상 주제(pārihāniya-kammaṭṭhāna, MAȚ.ii, 322)라는 뜻이다.] 땅의 까시나(pathavī-kasiṇa)를 익혀 준비(parikamma)를 지어 禪(jhānāni)을 얻고, 禪을 토대로 한(jhāna-padaṭṭhāna) 위빳사나를 증장시켜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숲이라는 인식을 버리고 땅이라는 인식을 작의한다.”(MA.iv.152~153)
seyyathāpi, ānanda, āsabhacammaṃ saṅkusatena suvihataṃ vigatavalikaṃ;
evameva kho, ānanda, bhikkhu yaṃ imissā pathaviyā ukkūlavikkūlaṃ
nadīviduggaṃ khāṇukaṇṭakaṭṭhānaṃ pabbatavisamaṃ
taṃ sabbaṃ amanasikaritvā pathavī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pathavī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아난다여, 마치 소가죽을 백 개의 막대기로 완전하게 펴면 주름이 없듯이
그와 같이 비구는 땅이 솟아오른 곳과 움푹 꺼진 곳, 강들과 골짜기, 그루터기와 가시덤불,
산과 울퉁불퉁한 곳 등 그 어떤 것도 작의하지 않고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을206) 작의한다.
그의 마음은 땅이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206)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을(paṭhavīsaññaṃ paṭicca ekattaṃ)'이라고 하셨다.[일반적인 땅이 아닌(na pakati-pathavi) - MAȚ.ii.323)] 오직 까시나인 땅(kasiṇa-pathaviyaṃ yeva)을 조건으로 생긴 하나의 인식을 작의하는 것이다.”(MA.iv.153)
* pathavī-kasiṇa : (주름이 없듯 겹쳐지지 않은 =) 두 겹이 아닌<advayaṃ> 땅의 까시나,
pathavīkasiṇameko sañjānāti uddhaṃ adho tiriyaṃ advayaṃ appamāṇaṃ;
2. “어떤 자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둘이 아니며55) 제한이 없는56) 땅의 까시나를 인식한다.
55) “'둘이 아니라는 것(advaya)'은 땅의 까시나 등 [여러 까시나] 가운데서 하나가 다른 상태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물에 들어간 사람에게 사방이 모두 물뿐이요 다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오직 땅의 까시나만 있을 뿐이지 다른 까시나가 섞이지 못한다. 이것은 다른 까시나에도 다 적용된다.” (AA.v.20)
56) “'제한이 없음(appamāṇa)'이란 그 까시나를 확장함에 제한이 없음(pharaṇa-appamāṇa)을 말한다. 마음으로 그것을 확장할 때 전체적으로(sakalaṃ) 하지 '이것은 처음이고 이것은 중간이다.'라고 한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Ibid)
덧붙여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으로 확장한다(cetasā pharanta)는 것은 닦은 마음(bhāvanācitta)으로 대상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닦은 마음은 까시나가 제한적(paritta)이건 광대(vipula)하건 전체적으로(sakala) 마음에 잡도리하지, 일부분(ekadesa)만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AAȚ.iii.321)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manuss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pathavī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사람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숲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땅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manuss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araññ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pathavī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 인식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숲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땅 이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78.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araññasaññaṃ,
amanasikaritvā pathavīsaññaṃ,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6.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숲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땅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공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207)
그의 마음은 공무변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207)『청정도론』에 의하면 그는 네 가지 禪을 얻기 위해서 땅의 까시나(paṭhavī-kasiṇa)를 사용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제4선에서 이 땅의 까시나를 원하는 곳까지 확장한 뒤에 이 땅의 까시나를 제거하고 이를 통해서 공무변처를 증득한다고 한다.(『청정도론』 X.5~7을 참조할 것.)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araññ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pathavī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숲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땅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106] 여기에는 없다.
공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araññ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pathavī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 인식은 숲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땅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공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79.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pathavīsaññaṃ,
amanasikaritv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7.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땅이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식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
그의 마음은 식무변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pathavī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땅이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식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pathavī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 인식은 땅이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식무변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80.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amanasikaritv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ākiñcaññāyatan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8.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무소유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
그의 마음은 무소유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공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107]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소유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 인식은 공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무소유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81.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amanasikaritv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āya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9.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 하나만을 작의한다.
그의 마음은 비상 비비상처라는 인식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식무변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의 번잡함만이 있다.'라고,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ākiñcaññ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ekattan’ti.
그는 '이 인식은 식무변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 하나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82.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amanasikaritv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animittaṃ cetosamādhi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animitte cetosamādhimhi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10.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208) 하나만을 작의한다.
그의 마음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208)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animitta ceto-samādhi)'란 위빳사나와 함께한 마음의 삼매(vipassanā-citta-samādhi)를 말한다. 그는 영원하다는 표상 등이 없기 때문에(nicca-nimittādi-virahita) 표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MA.iv.153)
한편 니까야에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는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 경」(D16) §2.25와 『상윳따 니까야』제4권 「표상 없음 경」(S40:9) §3과 『앙굿따라 니까야』 「띳사 경」 (A7:53) §9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표상 없음 경」 (S40:9)은 이 경이 포함된 『상윳따 니까야』 「목갈라나 상윳따」 (S40)에서 S40:1부터 S40:8까지의 앞의 여덟 개 경에는 각각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4선과 4처가 배대되고 이 경 즉 S40:9에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는 본경처럼 비상비비상처 다음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 본서 제2권 「교리문답의 긴 경」 (M43) §34이하와 『상윳따 니까야』 제4권「고닷따 경」(S41:7/iv.297) §3에는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ā cetovimutti)이 나타나고 있으며, 「공한 삼매 경」 (S43:4) §3에는 ●'표상 없는 삼매[無相三昧, animitta samādhi]'가 무위(형성없음)에 이르는 길(asaṅkhata-gāmi magga)로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imameva kāyaṃ paṭicca saḷāyatanikaṃ jīvitapaccayā’ti.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만큼의 번잡함이 있으니 [108]
바로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209) ●이 몸을210) 의지하는
여섯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211) 번잡함이다.'라고,
209)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jīvita-paccayā)'라고 하셨다. 명근(命根, jīvitindriya)이 살아있는 한 그 명근 때문에 생기는 번잡함 정도만이 있다고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MA.iv.153)
210) “여기서 '이 몸(imam eva kāyaṃ)'이란 위빳사나의 토대(vatthu)를 보이신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것(catu-mahā-bhūtika)을 말한다.”(MA.iv.153)
211)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은 saḷāyatanikaṃ을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눈의 감각장소 등 - MAȚ.ii.323]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saḷāyatana-paṭisaṃyutta) 것을 말한다.”(MA.iv.154)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ākiñcaññ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imameva kāyaṃ paṭicca saḷāyatanikaṃ jīvitapaccayā’ti.
그는 '이 인식은 무소유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인식은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이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 것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83. “puna caparaṃ,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ṃ,
amanasikaritv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ṃ,
animittaṃ cetosamādhiṃ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ṃ.
tassa animitte cetosamādhimhi cittaṃ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11. “아난다여, 더 나아가 비구는 무소유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비상비비상처라는 인식을 작의하지 않고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작의한다.212)
그의 마음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확립하고 확신을 가진다.
212) “더 나아가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 하나만을 작의한다(animittaṃ cetosamādhiṃ paṭicca manasikaroti ekattaṃ).'는 것은 위빳사나를 한 법들을 다시 위빳사나를 하는 것(vipassānaya paṭivinassana)을 보이신 것이다.” (MA.iv.154)
so evaṃ pajānāti — ‘ayampi kho animitto cetosamādhi abhisaṅkhato abhisañcetayito’.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이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yaṃ kho pana kiñci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tadaniccaṃ nirodhadhamman’ti pajānāti.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되기 마련인 것이다.'라고 213)
213) 이 문장은 본서 제2권 「앗타까나가라 경」 (M52) §4이하에도 “그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그는 여기에 확고하여 번뇌의 소멸을 얻습니다.[阿羅漢]”라고 나타난다.
tassa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그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 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 했다는 지혜가 생긴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so evaṃ pajānāti — ‘ye assu darathā kāmāsav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bhavāsav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avijjāsavaṃ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imameva kāyaṃ paṭicca saḷāyatanikaṃ jīvitapaccayā’ti.
12.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214)
존재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를 조건하여 생긴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만큼의 번잡함이 있으니 바로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215) 의지하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 번잡함이다.'라고,
214)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 때문에 생기는 어떤 번잡함도 여기에는 없다.(ye assu darathā kāmāsavaṃ paṭicca tedha nasanti).'는 것은 자신이 체득한 성스러운 도와 성스러운 과에는 그런 번잡함이 없다는 뜻이다.” (MA.iv.154)
215) “'이 몸을(imameva kāyaṃ)'이라고 하신 것은 취착의 자취가 남아있는[有餘] 번잡함을 보이기 위해(upādisesa-daratha-dassan-attha) 말씀하신 것이다.”(MA.iv.154)
한편 복주서는 “여기서 취착의 자취가 남아있는 번잡함이란 오염원으로서의 재생의 근거(kiles-upadhi)는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다섯 가지 무더기로서의 재생의 근거(khandhopadhi)는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번잡함이 존재의 근거로 인한 번잡함이다.”(MAȚ.ii.323)라고 설명하고 있다.
취착의 자취가 남아있음[有餘, upādi-sesa]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상윳따 니까야』 제5권 「해골 경」(S46:57) §4의 주해를 참조하고 재생의 근거(upadhi)에 대한 설명은 『상윳따 니까야』제1권 「기뻐함 경」(S1:12)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so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kāmāsaven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bhavāsavenā’ti pajānāti,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avijjāsavenā’ti pajānāti,
‘atthi cevidaṃ asuññataṃ yadidaṃ — imameva kāyaṃ paṭicca saḷāyatanikaṃ jīvitapaccayā’ti.
그는 '이 인식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 이 인식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
이 인식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그는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 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 것만큼은 공하지 않다.'라고 꿰뚫어 안다.
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
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paramānuttarā suññatāvakkanti bhavati.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서도 그에게 진실하고 [109]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 184. “yepi hi keci, ānanda, atītamaddhānaṃ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iṃsu,
sabbe te imaṃyeva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iṃsu.
yepi hi keci, ānanda, anāgatamaddhānaṃ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issanti,
sabbe te imaṃyeva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issanti.
yepi hi keci, ānanda, etarah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anti,
sabbe te imaṃyeva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anti.
13. “아난다여, 어떤 사문이건 바라문이건 과거세에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216)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자들은 모두 이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을 구족하여 머물렀다.
아난다여, 어떤 사문이건 바라문이건 미래세에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을 구족하여
머물게 될 자들은 모두 이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아난다여, 어떤 사문이건 바라문이건 현세에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을 구족하여
머무는 자들은 모두 이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을 구족하여 머문다.
216) “여기서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parisuddha paramānuttara suññata)'이란 '공을 통한 과의 증득(suññata-phala-samāpatti)'을 말한다.”(MA.iv.154)
“공으로 해탈한 자(suññata-vimokkha)의 과이고 또한 공을 관찰하여(suññata-anupassana) 증득에 들었기 때문에 공을 통한 과의 증득이라 부른다. 이것은 아라한과의 증득(arahatta-phala-samāpatti)을 말한다.” (MAȚ.ii.323)
tasmātiha, ānanda, ‘parisuddhaṃ paramānuttaraṃ suññataṃ upasampajja viharissāmā’ti —
evañhi vo , ānanda, sikkhitabban”ti.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지극히 청정한 구경의 위없는 공을 구족하여 머물리라.'고
이와 같이 그대들은 공부지어야 한다.”
♦ idamavoca bhagavā. attamano āyasmā ānand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 cūḷasuññatasuttaṃ niṭṭhitaṃ paṭhamaṃ. 공(空)에 대한 짧은 경(M121)이 끝났다.
붓다명상mindsati
2022.06.09 댓글
// '오직 이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듯이'는 bhikkhusaṃghaṃ paṭicca ekattaṃ을 옮긴 것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비구 승가를 조건으로 하는 하나됨'이라는 뜻이지만 '하나의 공하지 않음이 있다(ekaṃ asuññataṃ atthi).'라는 아래에 인용한 주석서의 설명을 따라 이렇게 옮겼다.
“비구들은 비록 탁발을 가더라도 녹자모 강당에 가져오는 음식을 받기 위해 남아있는 비구들도 있고 또 아픈 사람과 병환을 간호하는 비구들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항상 비구들이 있기 때문에 오직 비구 승가 하나만이 공하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됨(ekatta)'이란 하나인 상태(eka-bhāva) 즉 하나의 공하지 않음이 있다(ekaṃ asuññataṃ atthi)는 뜻이다. 즉 하나의 공하지 않은 상태가 있다(eko asuñña-bhāvo atthi)고 말씀하신 것이다.”(MA.iv.151)
. . .
이처럼 참으로 그는 거기에 없는 것은 공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그에게 진실하고 전도됨이 없고 청정한 공의 경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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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자 경 (Assutavā-sutta, S12:61)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도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벗어나려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는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은 활기찰 때도 있고 의기소침할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고 내려놓을 때도**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범부도 여기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에 대해서 염오할 수 없고 탐욕이 빛바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움켜쥐고 내 것으로 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여기에 대해서 염오할 수 없고 탐욕이 빛바랠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차라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을 자아라고 할지언정 마음을 자아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근본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은 일 년도 머물고 2년도 머물고 3년도 머물고 4년도 머물고 5년도 머물고 10년도 머물고 20년도 머물고 30년도 머물고 40년도 머물고 50년도 머물고 100년도 머물고 그 이상도 머문다.§§§ 그러나 마음이라고도 마노라고도 알음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숲에서 돌아다니면서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놓아버리고 다른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마음이라고도 마노라고도 알음알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낮이건 밤이건 생길 때 다르고 소멸할 때 다르다.”
“비구들이여, 이 경우에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연기를 잘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行]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알음알이가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老死]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憂悲苦惱]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알음알이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 “‘배우지 못한(assutava)’이란 무더기(蘊), 요소(界), 감각장소(處), 조건(緣)의 형태, 마음챙김의 확립 등에 대한 파악(uggaha)과 질문(paripucchā)과 판별(vinicchaya)이 없는 것이다.
‘범부(puthu-jjana)’라고 하였다. 많고(puthu) 다양한 오염원(kilesa) 등을 산출하는(janana) 등의 형태에 의해서 범부라 불린다. 그리고 성스러운 법을 등지고(parammukha) 저열한 법에 빠진(nīca-dhamma-samācāra),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puthūnaṁ janānaṁ) 포함되기 때문에(anto-gadhattā pi) 범부라고 불린다.
혹은[범(凡)으로 옮긴] puthu란 분리된 것(visuṁ)을 뜻한다. 계행과 배움 등의 공덕을 갖춘(sīla-sutādi-guṇa-yutta) 성자(ariya)들로부터 분리된(visaṁsaṭṭha) 사람(jana)이라고 해서 범부(puthujjana)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두 가지로 설명이 된다.” (SA.ii.97-98)
주석서에서 범부를 이러한 두 가지 어원으로 설명하는 것은 빠알리어 puthu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베다에 나타나는 pṛthu(많은,광대한)로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pṛthak(분리된,구분된)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불교 산스끄리뜨에는 pṛthag-jana로 나타나는데 이는 후자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주석가들은 위의 주석서의 인용에서 보듯이 전자를 더 중시하고 있다.
** “‘활기참(ācaya)’이란 향상(vuḍḍhi)을, ‘의기소침함(apacaya)’이란 퇴보(parihāni)를, ‘받음(ādāna)’이란 태어남(nibbatti)을, ‘내려놓음(nikkhepana)’이란 부서짐(bheda)을 말한다.” (SA.ii.98)
***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이라고도’는 cittaṁ iti pi mano iti pi viññānaṁ iti pi 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마음[心]이라고도 마노[意]라고도 알음알이[識]가 동의어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삐야닷시 스님, 『마음 과연 무엇인가』 참조) 그래서 『청정도론』은 “마음과 마노와 알음알이[心·意·識]는 뜻에서 하나이다.”(Vis.XIV.82)라고 설명하고 있다.
『디가니까야』「범망경」(D1 §2.13)에는 yañ ca kho idaṁ vuccati cittan ti vā mano ti vā viññāṇan ti vā(마음[心]이라 하고 마노[意]라 하고 알음알이[識]라 부르는)로도 나타난다. 주석서는 이 셋은 “모두 마노의 감각장소[意處, manāyatana]의 이름이다.” (SA.ii.98)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셋은 같은 의미를 나타내지만 니까야에서는 각각 다른 문맥에서 나타난다. 보디 스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 먼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는 눈·귀·코·혀·몸·마노의 여섯 감각기능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쓰이고 있으며, 아울러 한 생과 다음 생을 통해서 개인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의식의 잠재적인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② 마노[意, mano]는 몸(kāya)과 말(vaci)과 더불어 의도적 행위를 하는 세 번째 문으로 나타나며(의행, 의업),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內入處, ajjhattika āyatana] 혹은 감각기능[根, indriya] 가운데 마지막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마노의 감각장소는 다른 다섯 감각장소가 받아들인 대상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역할도 하지만, 정신적인 현상(dhamma)들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지는 특수한 감각장소 혹은 감각기능이다.
③ 마음[心, citta]은 개인적인 경험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생각이나 의도나 감정의 주관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마음은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도, 훈련되어야 하는 것으로도, 해탈해야 하는 것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마음에 대한 여러 관찰은 특히 『앙굿따라니까야』「하나의 모음」(A1)의 제1장부터 제6장까지의 수십 개의 짧은 경들에서 주제로 나타난다. 거기에는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A1:5:8)라거나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A1:5:9)는 등이 포함되어 있다.
§ “’이것은 내 것이다(etaṁ mama).’라는 것은 갈애에 의한 거머쥠(taṅhā-gāha)이다. 이렇게 해서 108가지 갈애의 생각(taṅhā-vicarita)이 포함된다. (「분석 경」 S12:2 §8 주해, 「갈애 경」 A4:199/ii.212-213 참조)
‘이것은 나다(esohamasmi).’라는 것은 자만에 의한 거머쥠(māna-gāha)이다. 이렇게 해서 9가지 자만이 포함된다. (「사밋디 경」 S1:20 §11 주해 참조)
‘이것은 나의 자아다(eso me attā).’라는 것은 견해의 의한 거머쥠(diṭṭhi-gāha)이다. 이렇게 해서 62가지 견해가 포함된다. (「범망경」 D1/i.12-38 참조)” (SA.ii.98)
§§ “’움켜쥔(ajjhosita)’이란 갈애(taṇhā) 때문에 집어삼키어(gilitvā pariniṭṭhapetvā) 받아들인(gahita) 것이다. ‘내 것으로 삼고(mamāyita)’란 갈애 때문에 이것은 내 것(mama idaṁ)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집착한(parāmaṭṭha)’이란 견해(diṭṭhi) 때문에 집착하여(parāmasitvā) 받아들인 것이다.” (SA.ii.98)
§§§ “[문]: 세존께서는 왜 이것을 말씀하셨는가? 삶의 첫 번째 단계에 생긴 몸은 삶의 중간 단계까지 지속하지 못하고 중간 단계에 생긴 몸은 … 삶의 마지막 단계까지 지속하지 못하지 않는가? 마치 달구어진 철판에 던져진 참깨처럼 형성된 것들은 매 지점이나 매 단계나 매 구간마다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답]: 그렇다. 그러나 몸은 연속적인 차례에 있어서(paveṇi-vasena) 긴 시간 동안 지속된다. 그것은 마치 등불이 밤새 연속적으로 연결되어서(paveṇi-sambandha-vasena) 타는 것과 같다. 물론 등불의 불꽃은 연료가 다하면 다음의 심지로 건너가지 않고 거기서 꺼지지만.” (SA.ii.99)
# “원숭이(makkaṭa)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밀림의 숲은 대상이라는 숲(ārammaṇa-vana)이다. 그 숲에서 돌아다니는 원숭이처럼 마음은 대상이라는 숲을 통해서 생겨난다(ārammaṇa-vane uppajjanaka-cittaṁ).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잡는 것(sākhā-gahaṇa)처럼 [마음의] 대상을 취한다. 마치 숲에서 돌아다니는 원숭이가 이런저런 가지를 놓아버리고 이런저런 다른 가지를 거머쥐는 것처럼, 이 마음도 대상이라는 숲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때는 형색이라는 대상을 거머쥐고 일어나고, 어떤 때는 소리 등의 다른 대상을 어떤 때는 과거의 대상을, 어떤 때는 미래의 대상을, 어떤 때는 현재의 대상을, 어떤 때는 안의 대상을, 어떤 때는 밖의 대상을 거머쥐고 일어난다. 마치 숲에서 돌아다니는 원숭이가 가지를 잡지 않고 맨땅에 내려와서 앉아있을 수가 없으며 어쨌든 잎사귀가 달린 하나의 가지(ekā paṇṇasākhā)를 잡고 앉는 것처럼, 그와 같이 대상이라는 숲에서 돌아다니는 마음도 의지할 대상을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쨌든 하나의 대상을 거머쥐고 생겨난다고 알아야 한다.” (SA.ii.100)
여기서 유념할 점은 이 원숭이의 비유는 본경에서도 주석서에서도 제어되지 않은 마음이 원숭이처럼 쉬지 못하고 촐랑대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마음은 매 순간 항상 다른 대상과 더불어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주석서들은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ārammaṇaṁ cinteti ti cittaṁ - DhsA.63 등)으로 마음을 정의하고 있다.
## 주석서에 의하면 본경을 설한 순서는 이러하다.
세존께서는 이 비구들이 물질(rūpa)에 대해서 지나치게 붙들려 있었을 때에는(adhimatta-gāha-kāla) 먼저 이들이 물질을 거머쥐는 것을 버리고 정신(arūpa)에 확고하도록(patiṭṭhāpita) 가르치셨다. 그런 뒤에 다시 정신을 거머쥐는 것을 버리고 물질에 확고하도록 하셨다. 그런 뒤에 여기서 세존께서는 이제 비구들이 물질과 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nīharaṇatthāya) 이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SA.ii.101)
###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랜다(nibbindaṁ virajjati).’는 것은 도(magga)를,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virāgā vimuccati).’는 것은 과(phala)를,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는 등은 반조(paccavekkaṇā)를 설하신 것이다.” (SA.ii.101)
- 초기불전연구원 번역, 주해
